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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죽음 그리고 준비

New York

2025.08.1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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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나는 직장에서 분주하게 일했다. 사회봉사 활동도 많이 했었다. 늙어지리라는 생각 없이 살았었다. 그런데 늙어지고 말았다. 나이가 90에 가까워지니, 눈앞에 죽음이 아련하게 서 있는 게 보이는 것 같다.  
 
유튜브에서 동물들의 삶에 대한 영상을 가끔 본다. 사자나 호랑이는, 먹이를 잡아서 먼저 죽여 놓은 후 뜯어 먹는다. 그런데 독수리 같은 맹금류는 다르다. 이네들은 먹이를 죽일 줄을 모른다. 그냥 살아있는 먹이를 뜯어 먹는다. 그러니, 먹이는, 살아 있는 채, 뜯겨 먹히니, 얼마나 아파하면서 죽어가겠는가! 아프리카 들개나 하이에나도 마찬가지다. 먹이를 죽여 놓은 후 뜯어먹지 않는다. 먹이가 살아 있는 채, 여럿이 함께 뜯어먹는다. 그러니, 먹이의 죽음은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예수도 살아 있는 채, 몸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었다. 예수의 죽음은 정말로 처절하게 아픈 죽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심하게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서 혹은 칼로 난자하게 찔리어서 죽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쟁터에서 폭탄의 파편이나 총알에 맞아, 피를 많이 흘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런 죽음은 결코 좋은 죽음이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은 늙어서, 병이 들어서, 집에서나 병원에서 편안하게 죽는다. 복 받은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게 장수하고 편안하게 죽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사고(事故)로, 혹은 병이 들어서, 일찍 불운하게 죽는가? 이 문제를 놓고 수없이 오랜 세월 동안 생각해보았다.
 
이 세상은 연기(緣起)로 운영되고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짐으로 저것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연기는 인과응보이다. 이 세상은 인과응보에 의해 운행(運行)되고 있다. 사람이 못된 짓을 했으면, 그 과보가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서, 안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기어코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과보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나타나게끔 돼 있다. 내일도 다음 세상이고 그리고 저승도 다음 세상이다. 몹시 나쁜 짓을 저질렀으면, 죽은 후,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방등경』에 보면, 태자가 부처에게 “무슨 인연으로 보살은 장수하고 무병하며 이별이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부처는 대답하셨다. “보살은 자비심으로 살생하지 않았으므로 장수함을 얻고, 흉기로 사람을 상하게 아니했음으로 병이 없으며, 다른 사람의 싸우는 것을 보면 권하여 화합하게 하였으므로 이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아끼지 않았으므로 재물을 잃거나 도둑맞지 않고, 남의 재산을 탐내거나 시기하지 않았으므로 장자(부자)의 집에 나며, 살생하거나 교만이 없었으므로 존귀한 집에 태어나는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은, ‘잘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저승에서 잘 살 준비를 미리 해놓으라는’ 말이다. 저승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부처는 말했다.  
 
젊었을 때, 뭣 모르고 못된 짓을 저질렀으면, 지금 참회한다. 남을 해치려는 나쁜 마음을 버린다. 그 대신 남을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주면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게 바로 ‘죽음의 준비’인 것이다.

조성내 /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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