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한인타운내 카페의 역사를 떠올리면 마치 턴테이블 위 LP판에서 흘러나오던 ‘지직’하는 추억의 소음이 들리는 듯하다. “흔들리는 사람들 한밤의 재즈 카페, 하지만 내 노래는 누굴 위한 걸까…” 그 시절, 어두운 조명 아래 흘러나오던 음악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밤은 젊었고, 우리는 불안했지만 자유로웠다.
1980년대 말 타운 카페의 대표 주자는 전설의 ‘옥스포드 카페’다. 현재 솔에어 콘도 뒤편 메트로 버스 정류장이된 건물에서 성업하며 X세대들의 아지트로 불렸다.
비슷한 시기 한인타운의 카페들은 커뮤니티의 필요에 응답하며 저마다 색깔을 찾아갔다. 6가와 세라노 쇼핑센터의 ‘난다랑’이나 웨스턴 길의 ‘제임스딘’은 당시 서울의 유행을 그대로 옮겨온 공간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와 선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무단으로 이름을 빌린 짝퉁 카페였지만 그땐 그랬다. 한국에서 잘나가던 업소 이름을 가져다 쓰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한국의 최신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는 만족감은 이민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페는 한인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며 그 용도를 확장했다. 크렌셔 길의 ‘두발로’는 넓은 주차장을 갖춘 단독 건물에서 커피와 경양식을 팔던 소박한 공간으로 시작했다. 풋풋한 소개팅과 첫 데이트의 명소였던 이곳은 주류 라이선스를 얻은 뒤 룸살롱과 나이트클럽으로 바뀌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현재는 ‘EK 갤러리’라는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두발로와 유사하게 경양식집으로 출발했던 윌셔 길의 ‘안전지대’는 주부들의 계모임 장소로 인기를 끌다가 야외 활어집으로, 현재는 ‘명동교자’로 완전히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90년대 한인타운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은 카페의 질적 도약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길의 ‘강서회관’ 사장이 개업했던 ‘카페 모네’는 한국 호텔 주방장을 초빙해 선보인 정통 경양식으로 격조 높은 미식 공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켰다.
비슷한 시기 필자도 카페를 운영했다. 윌셔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할리우드의 전설이 깃든 ‘오리지널 브라운 더비’ 자리에 ‘카페 나무하나’를 개업했다. 클라크 게이블 등 전설적인 무비스타들이 찾았던 곳이다. 또 이 자리에서는 전 필리핀 대통령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필리핀 레스토랑 ‘비아 마리’를 운영하기도 했다.
둥근 돔 형태의 건물은 마치 중절모를 연상케 했고, 내부 한가운데 진짜 나무 한 그루를 세워 ‘나무하나’라는 이름에 걸맞은 공간을 연출했다. 한쪽에서 속삭인 말이 반대편 테이블에서 들릴 정도로 신기한 구조였다.
얼마 후 길 건너 채프먼 플라자에 있던 필리핀 식당을 유학생 출신 지인이 인수해, 일본에서 유명한 ‘인터크루’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었다. 당시엔 교포들이 ‘나무하나’를, 유학생들이 ‘인터크루’를 찾으며 손님층이 자연스레 나뉘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6가 세븐일레븐 건물(현 카페 블루)에는 서정적인 이름의 ‘마로니에’가, 멜로즈 길 언덕에는 ‘몽마르뜨’가 문을 열었다. 윌셔 라마다 호텔 자리에는 ‘모아모아’, 라브리아 길에는 중장년층을 위한 ‘카페 라브리아’, 베벌리와 버질에는 프라이빗한 다이닝룸을 갖춘 ‘카페 코코’ 등이 속속 등장하며 한인타운에 카페 전성시대를 열었다.
옥스포드길의 ‘카페 콘체르토’는 일식 체인 ‘옌’ 사장이 시작했으며, 이후 6가 재개발로 ‘카페 하우스’를 정리한 사장이 인수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 옆 ‘카페 메트로’로 시작했던 공간은 한국 톱모델 출신 재일교포 사장이 ‘앙주’라는 이름으로 운영한 뒤, 현재의 ‘치킨수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최근 주택을 개조한 ‘카페 더반’이나 ‘카페 지베르니’의 등장은 또 다른 변화를 시사했다. 화려함보다는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이 공간들은, 이제 한인 커뮤니티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을 넘어 자신들의 진정한 ‘쉼터’를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