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하면 나는 언제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먼저 떠오른다. 내 두 딸이 어렸을 때, 우리 집엔 늘 디즈니 공주들이 함께 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주던 시절이었다.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때, ‘신데렐라’와 ‘인어공주’, ‘백설공주’ 같은 명작들은 우리 거실을 작은 극장으로 만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보던 그 시절, 아이들은 주문을 외우며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살라카둘라 멘치카둘라 디디부 바디부!”는 가장 좋아했던 마법의 주문이었다. 영상이 끝나면 거실은 곧 무대로 바뀌었다. 두 딸은 드레스를 입고 엄마, 아빠 앞에서 작은 발레 공연을 펼쳤다. 동작 하나하나에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었고, 마치 커튼 콜까지 준비된 사랑의 무대 같았다. 나는 매일 밤 작은 극장을 만들어주는 연출자이자 관객이었고, 무엇보다 발레 선생님이었다. 그 기억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진다. 발레 수업 시간에도 나는 그 주문을 꺼내 쓴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공주로 변신하고, 나는 그 환상 위에 발레 동작을 살며시 얹는다. 뿌리에 롤로베, 파세, 아라베스크… 그 순간, 발레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마법이 된다. 지난 주말,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발사모)’ 회원들과 함께 할리우드의 돌비 시어터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 여유로운 거리와 어우러져, 우리는 LA 발레단이 선보이는 ‘신데렐라’ 공연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신데렐라는 2년 전 사반 극장에서 보았던 같은 작품이었지만, 무대는 낯익으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 장면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음악 때문인 것 같았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 까기 인형’처럼 선율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데렐라의 음악은 나에게 아무런 잔향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 후반부, 마법이 풀리기 직전의 장면에서 익숙한 리듬이 들려왔다. ‘어? 이 음악… 어디서 들었더라?’ 순간 떠오른 이름, 프로코피예프. 맞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특히 로미오와 티볼트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던 ‘Montagues and Capulets’의 무겁고 위압적인 리듬. 클라이맥스 긴장감은 그 음악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묵직한 금관의 울림, 반복되는 리듬, 절정으로 치닫는 구성. 서로 다른 이야기를 운명이라는 공통 주제로 엮어내는 음악적 언어였다.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용수들의 표정이었다. 맨 앞자리에서 본 얼굴 하나하나는 마치 대사를 말하듯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다음엔 무조건 앞자리!” 무용은 동작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전해질 때, 진짜 예술이 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사바사바 아이사바… 얼마나 울었을까” 딸들을 재우며 자장가처럼 불러주던 ‘신데렐라’ 노래였다. 공연이 끝난 뒤 딸이 말했다. “엄마, 그 신데렐라 노래가 생각나.”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예술은 잊고 지낸 감정을 다시 불러오는 힘이다. 오늘 본 신데렐라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처음 만나는 감정처럼 새로웠다. 같은 작품도 다른 시간에 보면, 다른 내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공연장을 나와 거리를 걷는 길, 마음 한구석에 유리구두 한 짝이 조용히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구두 하나, 기억 하나. 나는 오늘도 예술을 믿는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유리구두 기억 신데렐라 노래 유리구두 하나 발레 공연
2025.06.24. 18:35
어김없이 올해에도 4월이 되면 1960년 그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65년 전 4월 19일의 충격과 벅찬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게 다가온다. 정오를 향해 치닫던 그날 오전, 서울 사대 물리과 2학년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품고 데모대의 선두에 섰다. 마지막 철조망과 허리 높이의 시멘트 토관 앞에서, 굳건히 경무대를 지키던 권력과 마주한 그들의 눈빛은 결연하기만 했다. 순간, “빠방” 하는 섬뜩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채 피어나지도 못한 젊음, 졸업을 앞둔 국어과 4학년 학생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4.19 희생자 1호라는 비극적인 이름표가 그의 젊음에 새겨졌다. 연이어 체육과 4학년 학생마저 목숨을 잃었고, 가정과 여학생들을 포함한 수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6.25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 대한민국은 또다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혼란에 휩싸였다. 무고한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총격은 ‘피의 화요일’로 기록되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순간 중 하나로 남았다. 특히, 서울 문리대 수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 학생의 이야기는 깊은 슬픔과 함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집안의 귀한 외아들이었음에도, 그는 초등학교 6학년 어린 학생에게 수혈 기회를 양보하고 스러져 갔다. 그의 헌신은 당시 4.19 정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수많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뒤로하고, 4.19 희생자들은 서울 북방 우이동의 묘역에 영면해 있다. 당시 2학년으로 사대 신문 주간을 맡았던 나는 부정선거에 항거하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6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절 우리가 공유했던 뜨거운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은 아직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 글을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가 같은 이상을 향해 나아갔던, 순수하고 뜨거웠던 시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80대 중반의 노인이 된 4.19의 주역들은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와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이끈 현대화의 주역이 되었다.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묘하다. 그해 여름,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은 농촌 계몽 운동을 계획했다. 당시 사대 학생회장은 법대에서 사회학과로 전과한 최영상 군이 맡았고, 사대는 전라남북도를 담당했다. 전주에 본부를 둔 학생회 소속이었던 나는 물리과 3학년 동기들(임장규-전 문교부 장학관, 유경근-전 서울시립대 교수, 이창무-캐나다 이민)과 함께 귀한 영사기를 마련했다. 공보부와 미국 USIS에서 어렵게 빌린 뉴스 필름을 들고, 우리는 전주를 시작으로 이리, 익산, 정읍, 장성, 담양, 순창, 남원, 장수, 장계를 순회하며 밤마다 마을 사람들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지방은 전기와 전화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곳은 경찰서뿐이었고, 우리는 경찰서의 경비 전화를 빌려 사용해야 했다. 3일장, 5일장이 끝나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 8시에 시작하는 영화를 기다렸다. 버스도 흔치 않아, 영화가 끝나면 칠흑 같은 밤길을 몇십 리씩 걸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영사기 불빛에 비춰보면 아이들과 남자들뿐 아니라, 이웃 동네 아낙들까지 모두 나와 영화를 보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던 농촌 사람들에게 영화는 귀한 볼거리였고, 우리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담양을 지나던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서울대 마크가 선명한 검은 교련복을 입은 우리 학생들을 불러 세운 한 분이 계셨다. 6.25 전쟁 때 개성에서 피난 와 담양에 정착해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가게에 들어서자 그분은 시원한 냉수를 건네주셨다. 잠시 후, 그분은 신문지에 싼 두 개의 뭉치를 우리 앞에 내놓으셨다. 당시 돈으로 20만 원, 지금 시세로 따지면 작은 가게 하나를 열 수 있는 거금이었다. 학생들의 농촌 계몽 활동에 써달라는 따뜻한 격려였다. 학생들 등록금이 몇 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큰돈이었다. 시골에서는 더욱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분의 후한 인심에 감탄했지만, 우리는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계몽 운동을 한다면서 돈을 받고 다닌다는 오해가 생길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은 완강하게 돈을 받으라고 권하셨고, 우리는 오랜 실랑이 끝에 결국 돈을 받지 않고 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의 순수한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그해, 학생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우리가 기차역에 도착하기만 하면, 지방 면장은 물론 군수와 경찰서장까지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평생 다시없을 특별한 경험이었고, 젊음과 열정으로 가득했던 아름다운 시절의 한 페이지였다. 65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뜨거웠던 함성과 잊을 수 없는 풍경들이 여전히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듯하다. 주영세 / 은퇴목사열린광장 기억 단과대학 학생회장들 4학년 학생 사대 물리과
2025.04.20. 19:00
제106주년 삼일절 기념식이 주달라스영사출장소(소장 도광헌), 달라스 한인회(회장 김성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 달라스 협의회(회장 오원성) 주최고 지난 1일(토) 오전 11시 달라스 한인문화센터 아트홀에서 개최됐다. 주요 단체장들과 동포 등 기념식 참석자들은 독립선언서 영상을 시청했고 기념사가 이어졌다. 도광헌 소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의 기념사를 요약, 대독했고 김성한 회장과 오원성 회장의 기념사가 이어졌다. 김성한 회장은 “오늘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외쳤던 뜨거운 함성을 되새기며 이 자리에 모였다”며 “삼일절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자유와 독립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 날”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역사를 기억하고 배우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지키고 미래를 개척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성한 회장은 또 “이곳 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단순히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정신을 실천해야 할 것”이라며 “한국과 미국 양국 간 가교 역할을 하며 더욱 발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차세대에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전수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야 말로 삼일절을 기리는 진정한 길일 것”이라고 피력했다. 오원성 회장은 “1919년 3월 1일, 3.1 만세운동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 이억만리 이국 땅까지 이어졌다”며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가족들의 희생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고 기념사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숭고한 3.1 독립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간다면, 머지않아 모든 국민이 주인인 통일 대한민국, 원 코리아(One Korea)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이웃에는 목숨 걸고 자유를 찾아온 탈북민들이 있다”며 “민주평통 달라스 협의회는 북한이탈주민들을 위한 멘토링사업을 이어가면서, 이들의 인권개선과 안정적인 삶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성한 회장은 이날 독립유공자 후손인 월남참전전우회 달라스지회 이관용 전회장에게 감사패를 수여했다. 김성한 회장은 “독림운동 유공자분들의 헌신을 이어받은 후손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고 했다. 이관용 전 회장이 출타 중인 관계로 김충래 현 월남참전전우회 달라스지회장이 감사패를 대신 수령했다. 삼일절 기념식 주제 영상이 상영된 후 월남참전전우회 달라스지회 회원들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이 이어졌고, 삼일절 노래 제창으로 기념식이 마무리됐다. 이날 점심식사는 북텍사스 한국여성회(회장 이송영)가 제공했다. 〈토니 채 기자〉 역사 기억 월남참전전우회 달라스지회장 회장 김성한 김성한 회장
2025.03.07. 7:40
슬레이트 지붕 아래 선풍기는 힘겹게 돌아가고, 벽 대신 드리운 천막 사이로 퍼렇고 뻘건 빛이 일렁인다. 흙바닥이 드러난 낡은 비닐 장판 위, 숨조차 죽이며 요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반짝이는 눈동자들. 흩어진 조각같은 이 기억이 후일 한 청년이 하나님의 마음을 엿보았던 순간이 되었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도,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적시게도, 부끄러움으로 몸을 떨게도 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말했듯, 기억은 진실의 조각을 다시 모아 하나의 몸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 아니라 해체이다. 진실을 자르고 흩어버리는 것이다. 기억은 오늘의 눈과 손으로 진실을 맞추는 일이다. 오늘의 마음이 정직하지 않다면, 우리가 복원하는 과거 또한 정직할 수 없다. 거짓은 진실을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의 조각을 은밀히 잘라낼 뿐이다. 나 자신을 아무리 멋지게 꾸미고 스스로를 괜찮다고 말해도, 여전히 자신이 만든 가면을 벗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한 과거가 없다면, 사랑하고 배우며 용서받는 오늘 또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오늘을 잘 살라 하지만, 거짓도 욕망도, 양심의 찔림도 시간이 지나면 잘라내려 한다. 그러나 개인도 사회도 거짓과 욕심 앞에 정직할 때, 비로소 사랑과 용서가 싹튼다. 과거의 거짓과 욕망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오늘의 거짓과 욕망이 진실을 절단하는 일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지만, 잘린 진실은 몸을 나누고 서로를 대적하게 만든다. “나 같은 죄인”을 외면한 채 “잘되는 나”를 꿈꾸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정하는 이에게 예수님은 의원이시다. 잘하려는 열정이 욕심으로 변할 때, 하나님을 위한다며 세상의 칭찬과 명성을 구하고 싶어질 때,, 내 인생을 원하는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질 때, 천막 속 반짝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숨죽였던 눈동자들을 떠올린다. 기억을 조각내고 흩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지만, 다시 맞추어 본다. 그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 힘과 뜻대로만 살아버린 줄 알았던 시간 속에 주님의 마음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도 “나를 기억하라” 말씀하시며, 자신을 떡과 포도주로 내어놓으신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기억 욕망도 양심 슬레이트 지붕 비닐 장판
2025.02.10. 17:35
골프가 정신력에 의해 좌우되는 게임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스윙이 몸동작에 의해서만 지배받는 운동이라면 같은 사람이 한 장소에서 하나의 클럽으로 볼을 계속 친다 해도 구질은 일정해야 한다. 그러나 클럽 길이와 장소에 따라 스윙이 바뀌고 구질이 매번 달라지는 것 역시 정신적 측면이 골프의 배경에 깔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심리 상태는 그린 위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짧은 퍼팅을 실수한 후 연습으로 쳐보면 십중팔구 홀(컵)에 들어간다. ‘기미(gimmie)’를 기대하던 불안한 거리의 퍼팅을 ‘OK’를 받지 못하면 그 퍼팅은 실패할 확률이 높고, 이는 퍼팅과 심리적인 요인과의 연관성을 입증한다. 테니스와 농구, 배구 등 다른 운동은 반사 동작에 의해 순간적인 대응으로 게임이 이뤄지지만 골프는 죽은 듯이 놓여 있는 볼을 자신의 몸을 움직여 쳐 나간다. 볼을 치는 것은 몸동작에 의해 진행되지만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머리(뇌)를 쓸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정신이 스윙이라는 육체적 동작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어 골프를 ‘멘탈게임’이라고 하는 이유 중에 하나다. 스윙 중에 골퍼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테이크백(take back)부분이다. 티샷이나 어프로치, 특히 퍼팅에서 흔들림 없는 백스윙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실질적으로 퍼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손의 위치와 테이크백이며 이것을 퍼팅의 심장이라고 말한다. 테이크백을 정확하게 하려면 우선 양손이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부드러운 퍼팅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퍼팅뿐만 아니라 일반 스윙에도 통용되는 것으로 숙지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퍼터의 샤프트(shaft)가 지나치게 왼쪽 무릎이나 오른쪽 무릎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몸의 중앙, 즉 볼 뒤에 타면이 놓여 있는 상태에서 수직을 이루도록 양손의 위치를 확고히 해야 한다. 개인의 습관에 따라 볼의 위치가 몸의 중앙이던 왼발 쪽에 위치하든 상관없이 퍼터의 샤프트는 언제나 수직을 이룬 상태에서 볼을 치는 힘은, 백스윙과 같은 템포(tempo)로 볼에 오버스핀(over spin), 즉 자전력이 생겨 구를 수 있도록 볼 위치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볼의 위치는 자전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왼발 뒤꿈치 선상이 적합하다. 퍼터의 타면이 상승 궤도로 진입하는 순간 타면이 볼의 2/3 상단에 접촉돼야 한다. 주의할 것은 손목에 의한 조작으로 퍼터의 상승궤도를 유도하면 볼에 구름이나 거리를 맞출 수 없어 퍼팅에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연습이란 반복을 거듭하여 뇌가 근육에 전달, 생성된 흐름을 이어가야 흔들림 없는 스윙루틴(swing routine)을 찾아 수행능력을 키울 수 있다. ▶www.ThePar.com에서 본 칼럼과 동영상, 박윤숙과 동아리 골프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박윤숙 / Stanton University 학장골프칼럼 스윙루틴 기억 심리 상태 일반 스윙 왼발 뒤꿈치
2025.01.23. 20:07
지난겨울 모로코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당나귀가 짐을 나르는 좁은 골목 안의 작은 가게들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들로 붐볐다. 멜랑꼴리하고 구슬픈 노랫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하루에 다섯번 간격으로 들리는 이 노래는 기도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장사하던 사람들은 물건 파는 것도 잠시 중단한 채,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머리가 닿도록 깊은 절을 올렸다. 나는 단순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항상 부러워했다. 남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는 그들에게서 가슴 뜨거워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왔다. “신앙이란 자기 자신의 유한하고 불확실한 지식을 초월하려는 정신의 개방이다.”라고 한 에디트 슈타인의 말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갖기 이전에, 무엇을 갖느냐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여유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은퇴하고 난 뒤의 나의 생활도 더 바빠지고 있다. 우리는 삶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책 ‘월든’에서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 인생을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런 곳에 살더라도 마치 궁전에 사는 것처럼 만족한 마음과 유쾌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차분히 인생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성조 아브라함, 야곱, 요셉, 이집트 탈출, 바빌론 유배에서 예루살렘의 귀환, 로마제국의 기독교 탄압, 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요한 8, 24-25) 수녀님의 지도, 그리고 필요한 것을 미리미리 알아 챙겨주는 이해심 많고 에너지 넘치는 길잡이님의 사랑과 함께 12명의 자매님이 하느님 앞에서 가슴 졸이고, 망설이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때로는 수줍어하면서 지냈던 그 많은 시간은 밤하늘의 샛별처럼 빛나는 순간들로 남아있을 것이다. 10월도 중반에 들어선 가을의 끝이다. 온통 붉게 물들어가는 숲속을 걸으며 3년 전 가을, 백주 간 성경 통독을 위해 퀸즈의 베이사이드 성당으로 찾아갔던 그 첫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너도 떠나고 싶으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도 들려온다. 주님 제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모두 하느님 자연주의 철학자 가을 백주
2024.11.05. 17:24
벼르고 벼르던 숙제를 드디어 했다. 10월 첫 주에 독도와 울릉도 땅을 밟은 것이다. 특히 독도는 동해 지역 기후가 자비로워야만 방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지난 7월에도 방문 계획을 세웠다 파도가 높고 험해 포기한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배가 독도 해변에 정박하고 방문객들이 땅에 첫발을 디딜 때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는 안내자의 방송이 들렸다.배에서 내리기 직전 모든 승객에게 조그마한 태극기를 나눠줬다. 태극기 휘날리며 독도 섬 길을 걷는 방문객 행렬은 장관이었다. 얄팍한 나의 상식에 독도는 동해안에 있는 작은 섬 이름처럼 고독한 섬 지금도 일본이 자기 영토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섬 정도였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독도에 대해 더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도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부터 궁금했다. '독(獨)'은 '홀로 독'이라는 한자에서 온 것으로 '홀로' '외롭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독도는 혼자 있는 섬이 아니라 91개의 암초 바위가 함께하므로 홀로 있는 섬은 아니다. 2019년 동북아역사재단의 '영토ㆍ해양 연구저널'에 소개된 정연식 서울여대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독도란 우리말 '독섬'을 한자로 표기한 것에서 유래가 됐다. 정 교수는 고지도에 '독도'로 표기된 섬은 세 가지가 있다고 소개했다. 독 모양의 옹도(瓮島)와 육지나 큰 섬에서 떨어져 나간 '동' 섬 한자로는 '독(獨)' 섬이지만 '돌섬'을 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독'이란 말은 돌을 의미하는 알타이어의 방언이라고 한다. 독도는 세 번째 해석이 맞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독도를 섬(island)으로 규정하지만 국제해양법에 따르면 독도는 암초(rock) 즉 바위로 구별된다. 섬이란 사람이 살면서 경제활동을 하는 곳이다. 2019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독도의 거주자 등록 인구는 3555명이지만 실 거주자는 59명뿐이다. 주민이 14명 독도경비대원 약 40명 등대 관리원 3명 울릉군청 직원 2명 등이다.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강제로 점령하고 있던 영토들을 반환해야 했다. 미국도 그들이 관리하던 일본 영토를 일본에 돌려주었지만 일본은 아직도 주변 국가들과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쿠릴열도는 러시아와 센카쿠 섬은 중국 및 타이완과 분쟁 중이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독도 영유권을 억지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독도에 일본인이 거주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세종실록 지리지' '성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역사책에는 모두 독도가 우리 영토로 기록되어 있다. 1900년대 이후 기록을 봐도 조선시대 울릉도는 강원도에 속했었고 1914년부터는 경상북도에 포함됐다. 그리고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이 선포한 칙령 41호에는 독도가 울릉도 담당 지역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매년 10월25일을 '독도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대학 김소영 교수에 의하면 일본은 매년 3월 교과서 검정 시행을 하고 이때 일본의 독도 영유권을 한국이 침해하였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한국의 항의에도 매년 가르치는 셈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독도 관련 교육이 약화되는 듯하다. 2022년에 개정된 역사 교과서에는 한국사가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현대사 부문은 '한국사 2'에서 다뤄지는데 독도 관련 내용은 거의 끄트머리에 있고 분량도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학기 중에 교과서를 완전히 마치지 못하거나 선생님이 신경을 쓰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독도에 대한 차세대 교육이 미흡할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 때문인지 독도 방문 때 받았던 조그만 태극기가 더욱 소중해 보인다. 류 모니카, M.D./ 종양방사선학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오픈 업 차세대도 기억 독도 영유권 독도 해변 모두 독도
2024.10.29. 20:14
일주일 내내 숨 가쁘게 지내다 매주 목요일 저녁이면 흩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컴퓨터 앞에 오롯이 앉는다. 성경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모험이며 성취라고 한다. 나의 초기의 믿음 생활은 두려움이 대부분이었다. 가톨릭 교리의 죄에 대한 심각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들을 찾으시고 용서하시는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어둠 속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을 우리가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부르면 부를수록 멀어져만 갔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찬양하거나 감사를 드리지 않고 허망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인간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로마 1,22-23)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난 방탕한 아들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장면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20) 시력이 나쁜 늙은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본다.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성스러운 이 광경은 내 안에 들어있는 경직된 그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작은아들이 되어 2000년 전의 그 날의 그 장소로 되돌아가 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아버지께서 받아주실까?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등등 수많은 번민과 후회로 아버지 앞에 나아갔다. 그러나 그가 미리 걱정했던 그런 일들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깊은 사랑을 체험한 아들은 엉엉 울었을 것이다. 태초부터 있었고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의 사랑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고독과 분노와 외로움이 무한한 감사가 되게 하였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헨리 뉴우앤은 그의 저서 ‘탕자의 귀향’에서 말하고 있다. 아무리 흉악한 몹쓸 짓을 했더라고 당신에게로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하느님은 나보다 먼저 나를 사랑해 주신 분이시다. 만일 우리 생에서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 나의 잘못을 되돌릴 수 없는 삶, 용서받을 수 없는 삶, 고칠 수 없는 삶, 손실을 회복할 수 없는 삶, 쉽게 대답을 할 수 없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완전히 패배한 삶,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돌이킬 수 없는 수치심으로 사는 삶일 것이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향은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춘희 / 시인삶의 뜨락에서 기억 사랑 이야기 성경 말씀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2024.10.28. 21:32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희미해진 기억을 정확히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나는 사진을 찍듯이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메모한다. 예전처럼 수첩에 쓰는 것이 아니라 아이폰 메모장, 스피커 폰에 대고 중얼중얼 기록해 놓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 편리한 대로 기억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한인 작가가 많지 않았다. 특별한 날엔 돌아가며 집에 초대해서 교분하고 전시회도 함께했다. 나이, 학교, 선후배 따지지 않고 모여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만남이 안개 걷힌 듯 사라졌다. 한분 한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옛 시절을 떠올리며 메모장을 들여다본다. 오랜만에 나는 그 당시 어울렸던 작가들과 AHL 재단에서 그룹전을 하고 있다. ‘AHL 재단은 2024년 9월 20일부터 10월 26일까지 아카이브 전시회인 Visionary Catalysts: Wolhee Choe and the Empowerment of Korean Identity를 발표하게 되어 기쁩니다. 현수정 큐레이터가 진행하는 이 전시회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변혁기에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들의 진화하는 문화적 정체성과 예술적 업적을 탐구합니다. 이 전시회는 영문학, 번역, 문화 옹호 분야의 선구자였던 최월희(1937.8.20 ~2013.5.27)의 아카이브에 초점을 맞춥니다. 참여 화가는 최성호, 조숙진, 정은모, 김향안, 김정향, 김미경, 김명희, 김포, 김차섭, 김환기, 김웅, 김원숙, 김영길, 이상남, 이수임, 임충섭, 민병옥, 백남준, 한용진.’ 최월희 선생님은 내가 존경했던 분이고 참여하는 북클럽에서 강의하셨다. 2013년,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을 때 나의 메모장에는 ‘삼삼오오 몰려다니던 짙은 감청색 교복 속에 상기된 살구 같은 얼굴은 아니지만, 분을 뽀얗게 바른 친구들은 매달 두 번째 수요일 북클럽이 끝나고 나서도 리버사이드 공원에 앉아 강의를 복습한다. 선생님은 에디스 와튼(Edith Wharton)의 순수시대(The age of innocence) 강의에서 사람이 사는 모습에는 4단계가 있다고 하셨다. ’1단계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돈에 연연하는 삶, 2단계는 정신적인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삶, 3단계는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이끌어주는 삶, 4단계는 우리 나이에 딴 동네 취급하는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더 나은 삶을 재창조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까지 몰랐던 세상에 눈을 돌리면서 미묘한 느낌과 기쁨을 느낀다. 또 다른 신세계를 볼 수 있는 다음 달 북클럽을 기다리며 마음이 설렌다. 우리는 훌륭한 스승을 옆에 둔 운 좋은 사람들이다.’라고 메모장에 쓰여 있다. 오프닝에서 누군가가 하는 소리를 들었다. ‘보기 드문 좋은 전시회다.’ 아무래도 오래 작업한 분들의 작품이라서 자연스러운 붓 터치와 색감이 주는 깊은 맛과 오래 숙성된 깊은 향을 내뿜는 따뜻한 전시회가 아닐까?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왜곡 기억 메모장 스피커 수요일 북클럽 최월희 선생님
2024.10.17. 18:03
한·영어 사용...26일 오로라 풍경화 수업 "어때요, 참 쉽죠?" 1983년부터 11년간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 '페인팅의 즐거움'을 통해 밥 로스가 슥슥 몇 번의 붓질로 유화를 쉽게 완성하던 장면을 기억하는 시청자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EBS가 1994년부터 '그림을 그립시다'로 수입해 틀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풍경화 그리기에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밥 로스 정신을 이은 한인이 있다. 6년 전 처음 붓을 잡은 뒤 밥 로스 미술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스와니 아트센터, 아트포라이프(뷰포드) 등에서 지난해부터 시민 대상 미술 교육을 펼치고 있는 재 몬태나씨다. 그는 "밑그림 없이 유화를 마르기 전에 덧칠해 나가는 ‘웻 온 웻'(wet-on-wet) 기법으로 3시간 안에 그림을 완성하는 게 밥 로스 미술의 특징"이라며 "90퍼센트 이상의 수강생이 미술 초보이지만, 나 역시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에 그들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쉽게 가르치고 있다"고 밝혔다. 2004년 조지아로 이주한 몬태나씨가 미술 강사의 삶을 선택한 계기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실직 후 유튜브로 처음 접한 밥 로스 영상이었다. 그는 "붓을 미끄러뜨리고, 마찰시켜 30분만에 빠르게 작품을 완성하는 그의 간편한 미술관에 매료됐다"며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어 밥로스 교육협회에 등록해 일주일 동안 매일 꼬박 8시간을 공부했다"고 전했다. 20일 스와니 시청 인근 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수업에는 8명의 주민이 참석했다. 부부나 친구 여러명이 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 와 그림그리기에 열중하는 진지한 예술가들이다. 툭툭 물감을 찍어내는 강사의 빠른 진행을 곧잘 따라하다가도 여기저기서 "어떻게 한거야?"라는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어려운 부분은 애교를 부리며 선생님에게 맡겨버리는 15세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지미 버넷 스와니 시장은 "지미, 제발 그만하세요(Don't go crazy)"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붓질을 선보였다. 그는 몬태나씨가 처음 수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10회 이상 수강한 단골이다. 8090세대가 노스탤지어를 느끼며 특별한 기념일을 맞아 이곳을 찾기도 하고 소중한 가족을 위해 유화를 직접 그려 선물하려는 이들도 있다. "네 자녀를 기르는 아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자 3회 분의 강의료를 내준 남편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몬태나씨는 전했다. 다만 매번 강의 요강에 "한국어와 영어 이중언어로 강의를 진행한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아직 수업을 등록한 한인은 없었다고. 한 달 두 번꼴로 열리는 그의 밥 로스 강의는 비정기적이다. 본인 소유 스튜디오가 아닌 지역 아트센터를 빌려 사용하기 때문이다. 오는 26일 오로라 풍경화 그리기가 예정돼 있으며 8~9월 각 두 번의 강의가 열린다. 자세한 내용과 예약은 스와니 아트센터 홈페이지(suwaneeartscenter.org/classes)를 참고하면 된다. 그는 "4명 이상 교회, 또는 가족 모임의 경우 방문 강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장채원 기자 [email protected]로스 기억 밥로스 미술지도사자격증 밥로스 교육협회 로스 강의
2024.07.23. 15:09
‘인생 맛의 기억(미다스북스·사진)’은 프랑스에서 삼성 SDS 1호 지역 전문가로 활동하고, 90여 개국을 여행한 조광제 작가가 미국에서 배경, 인종, 환경, 직업, 나이가 다른 200명의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됐다. 작가는 “인생의 마지막 식사로 무엇을 먹겠는가”라는 질문에 따른 답변을 정리해 56개 음식을 선정한 후, 간단한 코멘트를 엮어 책으로 펴냈다. 이 책의 매력은 질문과 답변이 미국에서 진행됐다는 것이다. 작가는 “200여 개의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은 세계 각국의 음식 문화를 접하는데 최고의 장소”라며 “이 책을 통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유럽, 라틴 등 흥미로운 음식의 이야기를 누릴 수 있다”고 밝혔다. 조광제 작가는 아주대학교에서 전자계산학 학사, 경영대학원 MBA 석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삼성물산 경영정보팀에 입사, 1999년 프랑스 지역 전문가, 1989~200년 삼성SDS 미국 주재원을 역임했다. 2003년 한글과컴퓨터 영업총괄 상무이사, 비영리 단체 리눅스파운데이션 한국 대표로 선임됐다. 저서로 ‘행복한 목요일’, ‘리눅스와 오픈소스의 비즈니스와 경제학’이 있다. 이은영 기자인생 기억 인터뷰 인생 출간 인생 기억 출간
2024.07.14. 19:13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말이 있다. 아케디아 거주 이준호(81) 할아버지와 이명자(75) 할머니 부부는 반세기 인생을 함께하며 눈매와 표정까지 닮았다. 남편 이준호 할아버지의 오른쪽 팔을 지긋이 잡은 이명자 할머니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담겼다. 이씨 노부부는 1980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가 한창인 날 어린 외아들을 데리고 미국에 도착했다. 40년 넘는 이민생활의 애환을 이 할머니는 고스란히 기억한다. 하지만 백발이 된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이명자 할머니는 “남편은 고려대를 졸업해 서울 휘문고에서 10년 동안 교사를 한 책벌레였다”며 “그런 남편이 아들 결혼식 날 뇌졸중이 왔다. 그러다 2년 전부터 치매로 고생 중인데 더 늦기 전에 가족사진을 남기고 싶어 중앙일보 스튜디오 촬영장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번 가족사진은 이씨 노부부 가족에게 참 특별하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찍은 가족사진은 3명뿐이었지만, 지금은 며느리와 손주 3명까지 나름 대가족이 됐다. 이 할머니는 “남편이 아프다…살아있을 때 추억을 남기고 싶다”며 “아들과 며느리, 손자녀와 처음으로 다같이 가족사진을 남긴다. 아들 내외에게 ‘다른 집 갈 때마다 가족사진이 부럽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LA 이민와서 식당 서빙부터 바느질 공장, 액세서리 장사, 티셔츠 가게 운영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녀는 삶의 굴곡마다 곁을 지켜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삼남매의 아버지가 된 아들 쟈니 이(48)씨는 활짝 웃었다. 아들 이씨는 “우리 가족의 첫 완전체 가족사진”이라며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한 추억과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며느리 이씨는 가족사진을 위해 희망을 상징하는 하늘색 의상을 준비했다. 가족의 안녕과 시아버지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중앙일보 가족사진 촬영행사는 남가주 사진작가협회(회장 김상동)가 촬영과 보정을 맡고, 캘코보험(대표 진철희)이 후원했다. 관련기사 [창간기념 무료 가족사진] “중앙일보서 5년마다 추억 남겨요”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창간기념 무료 가족사진 남편 기억 할아버지 할머니 완전체 가족사진 남편 이준호
2024.07.02. 20:51
5월 가정의 달 두 번째 일요일은 ‘마더스데이’, 즉 엄마의 날이다. 한인들 입장에서는 미국에 이민 오기 전에 ‘어버이의 날’을 기념하다가 미국 생활 2~3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마더스데이를 달력에 마크하게 된다. 일단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고, 업계의 마케팅이 그렇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축하를 하고 받기 전에 유래를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마더스데이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마더스데이(Mother’s Day)'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신들의 어머니인 레아에게 바쳐진 ’봄의 축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더스데이는 20세기 초 필라델피아의 애나 자비스라는 여성의 노력으로 국가적 기념일이 됐다고 하는데, 가사 노동과 경제활동도 함께 해야 하는 어머니들을 위한 날이다. 애나는 자신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기리는 날로 삼고 있는 것에 착안해 '마더스데이' 제정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다고 한다. 이후 1911년부터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5월 둘째 일요일을 마더스 데이로 기념하기 시작했고, 1914년부터 지금의 마더스데이가 미국인들에게 중요한 날로 자리 잡았다. 연방 하원은 마더스데이를 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상원에서는 “마더스 데이를 만들면 아버지의 날, 장모의 날, 장인의 날, 삼촌의 날 등도 만들어야 할 게 아니냐”는 이유로 부결되었다. 자비스는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써 보내는 여론 투쟁을 전개했으며,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결국 상원도 마더스 데이를 통과시키게 된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어머니의 날에 팔리는 꽃다발만 1000만 개, 축하카드가 1억5000만장에 이르렀고, 어머니의 날은 미국 가정의 3분의 1이 그 날 외식을 하는 바람에 1년 중 레스토랑에 가장 손님이 많이 몰리는 날이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작 마더스데이를 만든 자비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 외롭고 가난하게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는 1955년 8월 30일 국무회의에서 5월 8일이 '어머니날'로 제정되었다. 한국에서는 전쟁으로 고아와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성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아이들을 기르고 먹여 살리는 일을 여성들이 도맡아야 했고 한국의 '어머니날'은 그런 어머니의 책임과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었다. 추후 1973년에 대한민국의 어머니 날은 '어버이날'로 제정되었다. 한국의 경우 매년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기념하고, 영국은 사순절의 네 번째 일요일을 '어머니의 일요일(Mothering Sunday)'로 지내는 등 나라마다 날짜는 조금씩 다르지만 자녀와 가족들에게 큰 사랑을 주는 어머니에게 감사를 전하는 뜻은 같다. 그렇다면 마음의 표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전통적으로 마더스데이에 엄마에게 가장 많이 하는 선물은 바로 꽃. 마더스데이의 공식적인 꽃은 하얀색 카네이션이다. 하지만 요즘은 하얀색 꽃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할 때 쓰는 꽃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대신 분홍색 카네이션은 변하지 않는 엄마의 사랑과 엄마에 대한 감사를 나타낸다고 하며 빨간 카네이션은 엄마에 대한 존경을 나타낼 때 쓰인다. 마더스 데이는 세금 보고 직후에 이뤄지는 가장 큰 쇼핑 시기로 꼽힌다. 올해처럼 경기가 좋지 않은 경우 업계는 각종 할인과 혜택을 얹어 매출을 늘리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가정이 100~200달러를 선물에 소비하고 있으며 외식 업계도 반짝 호황을 누리는 시기다. ━ 자녀·손주들의 깜짝 공연도 큰 선물 마데스데이 특별한 가족모임 행복 담긴 사진·동영상 보기 어머니 마다 연령대가 다르고 취향과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딱 잘라 한가지로 만들기 어렵다. 선물과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대가족이 집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선물을 개봉하면서 박수를 치기도 하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데 여성 심리와 상담을 전문가들은 어머니에게 자존감과 정신적 위로를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을 것이라고 권한다.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몇가지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사진이나 동영상 함께 보며 추억 찾기 엄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시기 별로 골라서 슬라이드쇼를 만들어보자. 가능하면 사진에 날짜와 장소를 적어서 함께 기억하면 좋다. 어떤 가족들은 사진을 TV로 보며 사진 찍은 시기와 장소를 맞추는 게임을 해서 선물을 주는 시간을 보낸다. 추억이 담겨있다보니 함께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고, 중요한 가정사가 담겨있다면 묵직한 느낌도 줄 수 있다. 어머니들은 갱년기가 지나거나 노년에 접어들면 허전하기도 하고 지난 시간이 후회스러운 느낌도 들기 마련이다. 이런 허전함에 어머니가 일궈온 가족의 모습을 사진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은 적잖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슬라이드 쇼가 마무리 될 때 감사인사와 사랑을 듬뿍담은 선물을 선사하면 좋은 ▶추억의 외식 장소 찾아가기 크게 번거롭지 않다면 부모님이 데이트를 한 곳이나 결혼식 장소, 자녀들과 첫 외식을 한 식당을 찾아가보는 것도 좋다. 특히 연세가 많아 옛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 어머니(또는 할머니)에게는 예전 젊은 시간에 머물러 있는 장소들을 찾아가 보면 좋다. 오전 또는 오후 1~2시간 거리의 장소(식당, 몰, 교회, 경기장, 축제장 등)를 방문하고, 사진도 찍고, 잠시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걸으면서 예전에 느꼈던 감정, 감동을 되살린다면 어머니의 기억력 회복은 물론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엔돌핀이 솟는데도 도움이 된다. ▶자녀 또는 손주들이 깜짝 공연 잘자란 자녀들과 손주들을 보는 것은 어머니들의 가장 큰 기쁨이자 자랑이다. 이번 마더스데이에는 간단한 공연을 준비해보면 어떨까. 아이들의 학예회 수준이어도 상관없다. 온 가족이 어머니를 위해 3~4분짜리 노래, 춤, 분장쇼를 할 수 있다면 SNS에서 가장 많은 라이크(like)가 나오지 않을까.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참가하면 좋고 어머니의 추억이 담겨있는 노래이거나 춤이면 좋다. 다만 가족들이 사전에 모여 연습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는 점은 감안해야겠다. 어머니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도 추억이 될 것이다. 최인성 기자어머니 기억 마더스 데이 엄마 가족 기억력 회복
2024.04.30. 18:00
몇 년 전 9월 말 나는 세 가지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9월 마지막 주와 첫 주는, 문인회 회원들과 문인회 회원 몇 명의 출판기념회가 대전에서 있을 예정이었고 그 후에는 문학기행 계획이 잡혀 있었다. 세 번째 주에는 시카고간호협회 회원들과 베트남과 캄보디아 여행이 잡혀 있었으며, 10월 마지막 주에는 재외간호사 대회에 참석해야 하는 계획이 짜여 있었다. 그런데 문인회 회원들과 함께하는 동안 나에게 사고가 났다. 한국 나간 지 닷새 되던 날 춘천까지 가서 호텔계단에서 넘어져 오른팔이 부러지는 일이 생겼다. 바로 병원에 갔으나 X-Ray를 찍어 보더니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길로 서울에 있는 조카에게 전화해 조카 아들이 그 밤에 춘천까지 와서 나를 픽업해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문인회 모든 계획에서 도중하차를 해야 했다. 이 탓에 조카 집에서 거의 한 달을 잘 쉬고 10월 마지막 주 제외 한인 간호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시작 전날, 우리 일행이 묶기로 되어 있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내 모습은 말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질 않은가. 나는 그래도 운 좋게 좋은 후배를 룸메이트로 만나 안심이 됐다. 다음 날 오전 중 대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등록하는 순서가 있었고, 인사동 뒷골목에 있는 큰 한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눈에 익은 거리, 인사동 맛집 ‘여자만’이란 남도 한정식집이 있고, 그 부근에 천상병 시인의 부인 문승옥 여사가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그분이 별세 후 지금은 조카가 운영하는 ‘귀천’이란 전통 찻집이 있질 않은가. 이 찻집은 한국의 숱한 시인 묵객들의 명소라고 들었다. 그날 밤 우리는 그 찻집에 들러 천상병 시인을 기리며 차 한 잔씩을 마시면서 이야기꽃을 피었었다. ‘귀천’의 내용은 이렇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모두 국립 현대 미술관을 관람하고는 창경궁을 탐방하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창경궁 궁궐 전각들을 두루 다니며 둘러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창경원이라 불렀고 초등학교 때 소풍을 왔던 생각이 난다. 봄이면 이곳은 벚꽃이 유난히 아름답게 만발하여 많은 사람이 벚꽃놀이라는 말과 함께 구경을 왔던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닌가. 세월의 진한 아쉬움과 감동을 하고 돌아섰다. 마지막 날에는 DMZ 및 임진각 견학이 있었다. 이곳들을 가기 위해 북쪽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고속도로변에 보이는 산들의 가을 풍경은 너무나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옛날과 다른 모습은 시골에도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서울 변두리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DMZ에 도착하여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본 이북 역시 조용한 가을이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도 작은 할아버지 댁이 임진강변에서 친구와 함께 와 끝이 보이지 않는 참외밭 원두막에서 놀던 때가 생각나는데 몇십 년 만에 오니 모든 것이 많이 달라져 보였고 삭막하기만 했다. 임진강 가까이는 철조망이 있어 들어갈 수도 없었다. 아직도 분단된 우리나라는 언제 다시 저 임진강을 자유롭게 건너가 우리의 형제들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풍성하게 준비된 저녁 식사와 각 지역에서 준비해 온 장기자랑 등으로 즐겁게 지냈다. 11월 초인데도 날씨도 푸근했고 청명한 가을 날씨가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우리 일행을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멀리 해외에 나가 살면서도 그리운 내 조국을 생각하며 하루빨리 통일되고, 우리 형제들이 서로 대화하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허정자 / 수필가문예 마당 기억 여행 문인회 회원들 캄보디아 여행 대학병원 응급실
2024.04.04. 17:33
치매는 암보다 무서운 병으로 불리며,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주는 병이다. 우리나라는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치매 환자 또한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치매 환자는 2023년 기준 65세 노인인구의 10.3%로 추계되고 있다. 65세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환자라는 이야기다. 치매는 병의 근간을 없애는 약이 아직 개발되지 않아 중증화를 막는 것이 유일한 치료다. 이 때문에 평소 생활습관을 개선해 치매를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뇌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나아가 뇌세포를 재생하여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질환의 치료 효과를 내는 천연 물질 '프테로신(Pterosin)'은 한국인이 즐겨 먹는 고사리에 들어있다. 하지만 프테로신을 추출하기 위해 고사리의 독성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유효성분이 파괴되는 것이 문제다. 이처럼 까다로운 프테로신의 추출 방법을 대한민국의 의학자가 찾아냈다. '지에이치팜(대표 박길홍, 고려대 의대 교수)'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과의 산학공동연구를 통해 프테로신을 주성분으로 한 액상차 '미라클 실버(70ml X 30포)'와 '미라클 모닝(70ml X 30포)'을 출시했다. 두 제품은 한국에서 치매 개선 효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3년 만에 매출이 100배나 성장했다. 지에이치팜이 개발한 미라클 실버와 미라클 모닝의 주요 성분은 지리산에 서식하는 고사리 뿌리줄기 추출물로, 프테로신 A, B, C, D, N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지에이치팜은 프테로신을 고사리 종근에서 안전하게 추출하는 원천기술을 개발해 한국은 물론 미국, 유럽, 중국 등에서 특허 등록과 출원에 성공했다. 지에이치팜 대표이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신약개발을 연구해온 박길홍 교수는 "프테로신은 치매를 유발하며 신경세포를 파괴하는 β 아밀로이드 생성 효소 및 인지기능을 저하하는 아세틸콜린 분해 효소 2종의 활성을 모두 동시에 억제해 모든 치매에 영향을 미친다"라며 "뇌의 인지기능 관련 단백질을 생산하는 중추적인 전사인자(CREB)를 크게 활성화한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미주 한인 최대 온라인 쇼핑몰 '핫딜'은 신년을 기념하여 미라클 모닝과 미라클 실버의 2+1(바이 투 겟 원 프리)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다. ▶상품 구매하기:hotdeal.koreadaily.com ▶문의:(213)368-2611핫딜 치매 기억
2024.01.03. 17:55
가을 아침입니다 새떼들의 아침 여는 이야기가 요란합니다 이쪽저쪽 빌딩 꼭대기에 나란히 앉아 주고받다가 급기야 하늘을 날며 노래합니다 밝고 따뜻한 태양을 사랑하는 날갯짓으로 함께 노래를 불러도 될까요 낙엽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서로 다독이다가 떨다가 땅 위를 구르다 조용히 가라앉는 모습 길가에 수북이 쌓여 어디론가 가는 꿈을 꾸나 봅니다 나무의 고독은 자기 잎새의 춤사위가 없어 생긴 고독입니다 태양은 수퍼문 아래서 빨갛고 노란 열매와 사랑에 빠지지만 헐벗은 나목을 보는 것은 가슴이 아리다 합니다 온 세상이 11월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햇빛의 꿈은 무엇일까요 햇빛 마당과 내방의 재삼 지대에 관해 그림자에게 물어보렵니다 사무치는 가을 저녁에는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꽃 엽서를 기다립니다 오래된 일들이 재생되는 봄 저녁 모든 생물이 살아나는 척 살아나는 지독한 봄날의 꿈 꽝! 하고 몸 도장이라도 찍어놓을까요 정숙자 / 시인·아스토리아글마당 기억 가을 저녁 햇빛 마당과 이쪽저쪽 빌딩
2023.12.01. 17:54
9·11 테러 22주년을 맞아 뉴욕 곳곳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11일 오전 9·11 메모리얼 박물관에서 열린 추모 행사에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캐시 호컬 뉴욕주지사와 에릭 아담스 뉴욕 시장 등이 참석했다. 추모 행사에서 유족들은 한 시간 동안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고 추모사를 낭독했다. 두 개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졌던 순간과 비행기가 추락했을 당시를 기억하는 6번의 묵념 시간도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앞에서 열린 낭독회에는 빌 드블라지오 전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 전 시장, 필 머피 뉴저지주지사 등도 참석해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뉴욕 일원에서는 뉴욕시 소방 박물관, 항만청, 스태튼아일랜드, 브루클린에서 촛불 행사와 걷기 추모 행사 등 다양한 형태의 추모식이 거행됐다. 로라 카바나 시 소방국장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그날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며, “상실감보다는, 희생자들의 삶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번주 뉴욕시 소방국(FDNY)은 9·11 당시 구조 및 복구 작업 중 질병에 노출돼 사망한 소방관과 구급대원, 민간 직원 43명의 이름을 추모벽에 추가하기도 했다. 한편 조 바이든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 참석 후 귀국길에 들른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엘멘도르프-리처드슨(Elmendorf-Richardson) 합동 군기지에서 9·11테러 22주년 기념 연설을 하며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윤지혜 기자기억 해리스 추모 행사 이번주 뉴욕시 촛불 행사
2023.09.11. 21:21
대개 날수를 이를 땐 ‘며칠’, 그달의 몇째 되는 날을 가리킬 때는 ‘몇 일’로 사용하는 게 바르다고 생각한다. 아예 ‘몇 일’로만 적는 이도 많지만 ‘몇 일’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며칠이나 지났죠”든 “몇 년 몇 월 며칠”이든 모두 ‘며칠’이 바른 표기법이다. 몇 년 몇 월 몇 시에 이끌려 ‘몇 일’이라고 해선 안 된다. 일정 기간이든, 구체적인 날짜든 항상 ‘며칠’로 써야 한다. 맞춤법에선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려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혀 적되, 어원이 불분명한 것은 원형을 밝혀 적지 않는다”고 규정돼 있다. ‘며칠’을 ‘몇’과 ‘일(日)’의 합성어가 아닌 어원이 분명치 않은 말로 보고 소리 나는 대로 적은 형태를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근거는 ‘몇 월’의 발음과 비교해 보면 드러난다. ‘몇’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오면 끝소리인 ‘ㅊ’이 이어져 ‘몇+을[며츨]’과 같이 발음되나 명사가 오면 ‘몇 월[며둴]’처럼 ‘ㅊ’이 대표음인 ‘ㄷ’으로 소리 난다. 마찬가지로 ‘며칠’이 [며딜]로 발음된다면 ‘몇’과 ‘일’이 합쳐진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며칠]로 소리 난다는 점에서 어원이 분명치 않다고 보고 ‘며칠’로 쓰는 것이다.우리말 바루기 기억
2023.08.08. 20:15
일반적으로 처방되는 약물이 기억을 방해할 수 있다. 미국은퇴자협회는 기사를 통해 기억력을 앗아가는 몇가지 약물을 소개했다. 1.항불안제(벤조디아제핀) 다양한 불안 장애, 초조, 발작, 섬망 및 근육 경련을 치료하는 데 사용된다. 시판되는 약품은 Alprazolam(Xanax), chlordiazepoxide(Librium), clonazepam(Klonopin), diazepam(Valium), flurazepam, lorazepam(Ativan), midazolam, quazepam(Doral), temazepam(Restoril), triazolam(Halcion)이다. 단기 기억에서 장기로 옮기는 것과 관련된 뇌 활동을 약화시킨다. 시니어에게 적게 단기간만 처방돼야 한다. 시니어들은 젊은 사람보다 약물을 몸에서 제거하는 데 오래 걸리므로 축적으로 인해 기억 상실 뿐만 아니라 정신 착란, 낙상, 골절 위험이 더 높아진다. 중독성도 있다. 2.항경련제 신경통, 양극성 장애, 기분 장애, 조증에 처방된다. 시판되는 약품은 Acetazolamide(Diamox), carbamazepine(Tegretol), gabapentin(Neurontin), lamotrigine(Lamictal), levetiracetam(Keppra), oxcarbazepine(Trileptal), pregabalin(Lyrica), rufinamide(Banzel), topiramate(Topamax), valproic acid( Depakote), zonisamide(Zonegran)이다. 중추신경계(CNS) 내의 신호 흐름을 약화시켜 발작을 제한하는데 기억 상실을 유발할 수 있다. 진정 효과가 있을 수 있으며 단순한 진정 작용과 실제 인지 저하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3.삼환계 항우울제(Tricyclic antidepressants) 요즘에는 덜 처방되지만 여전히 우울증, 불안 장애, 강박 장애 및 신경 관련 통증에 사용된다. 시판되는 약품은 Amitriptyline, clomipramine(Anafranil), desipramine(Norpramin), doxepin(Silenor), imipramine(Tofranil), nortriptyline(Pamelor), protriptyline(Vivactil), trimipramine(Surmontil) 이다. 뇌에서 세로토닌, 노르에피네프린 및 기타 화학 메신저의 작용을 차단해 기억 상실을 유발할 수 있다. Fluoxetine(Prozac), sertraline(Zoloft), 기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와 같은 최신 항우울제는 인지 기능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4.마약성 진통제(오피오이드) 수술이나 부상으로 인한 중등도에서 중증의 통증을 완화하는 데 사용되며 만성 통증을 치료하는 데도 사용한다. 시판되는 약품은 펜타닐(Fentanyl), 하이드로코돈(hydrocodone, Vicodin), 하이드로모르폰(hydromorphone, Dilaudid, Exalgo), 모르핀(morphine), 옥시코돈(Oxycontin)이다. 중추 신경계 내에서 통증 신호의 흐름을 막고 통증에 대한 반응을 둔화시킨다. 인지의 여러 측면에도 관여하는 화학적 메신저에 의해 매개되므로 특히 장기간 복용일 경우 장단기 기억을 방해할 수 있다. 최근 시니어의 오피오이드 사용과 치매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5.수면 보조제(비벤조디아제핀 진정제-수면제) 불면증 및 기타 수면 문제를 치료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경미한 불안도 처방한다. 시판되는 약품은 Eszopiclone(Lunesta), zaleplon(Sonata) 및 zolpidem(Ambien)이다. 벤조디아제핀과 분자적으로 다르지만 동일한 뇌 경로와 화학적 메신저에 작용하여 유사한 부작용과 중독 및 금단 문제를 일으킨다. 또한 기억상실증을 유발할 수 있으며 때때로 깨어났을 때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 채 요리하거나 운전하는 것과 같은 위험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불면증과 불안에 대한 대체 약물 및 비약물 치료법이 있으므로 의사와 상담해볼 필요가 있다. 멜라토닌은 건강한 수면 패턴을 재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고 불면증에 대한 인지 행동 요법(CBT-I)은 수면 장애에 대한 1차 치료법이 될 수 있다. 6.요실금제(항콜린제) 과민성 방광의 증상을 완화하고 급작스러운 요실금, 강한 배뇨 욕구로 제때 화장실에 갈 수 없는 경우를 줄이는 데 사용된다. 시판되는 약품은 다리페나신(Enablex), 옥시부티닌(Ditropan XL), 솔리페나신(Vesicare), 톨테로딘(Detrol) 및 트로스피움 (Sanctura)이고 또 다른 옥시부티닌 제품인 Oxytrol for Women은 일반의약품(OTC)으로 판매된다. 신체의 화학적 메신저인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차단한다. 방광에서 항콜린제는 소변 흐름을 조절하는 근육의 비자발적 수축을 예방하며 뇌에서는 기억 및 학습 활동을 억제한다. 단기간 이상 복용하거나 다른 항콜린제와 병용할 경우 기억력 상실의 위험이 높다. 대안으로는 첫째, 제대로 진단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요실금 증상이 방광 감염, 약물(혈압약, 이뇨제 또는 근육 이완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둘째, 카페인 및 알코올 음료를 줄이고 자기 전에 술을 덜 마시고 배뇨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골반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 등 생활 습관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근육 이완을 돕기 위해 보톡스 주사로 과민성 방광을 치료할 수 있다. 7.항히스타민제(1세대) 앨러지 증상이나 감기 증상을 완화하거나 예방하는 데 사용된다. 일부 항히스타민제는 멀미, 메스꺼움, 구토 및 현기증을 예방하고 불안이나 불면증을 치료하는 데에도 사용된다. 시판되는 약품으로는 Brompheniramine(Dimetane), chlorpheniramine(Chlor-Trimeton), clemastine(Tavist), diphenhydramine(Benadryl), hydroxyzine(Vistaril)이다. 처방약 및 OTC 상관없이 신체 화학적 메신저인 아세틸콜린의 작용을 억제한다. 뇌에서는 기억 및 학습 센터의 활동을 억제한다. 대안으로 loratadine(Claritin) 및 cetirizine(Zyrtec)과 같은 신세대 항히스타민제는 시니어 환자가 더 잘 견딜 수 있게 되며 기억력과 인지력에 동일한 위험을 주지 않는다. 주의할 만한 다른 약물 ▶코르티코 스테로이드=류마티스 관절염, 루푸스 및 기타 상태를 치료하는 데 사용되는 이 항염증제는 고용량 환자의 혼란과 기억 상실,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가슴 통증(heartburn) 약물=일부 최근 연구에서 치매와 위식도 역류 질환(GERD), 속쓰림 등 소화성 궤양을 치료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약물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했다. 시판되는 약품은 Omeprazole (Prilosec), Esomeprazole (Nexium), Lansoprazole (Prevacid), Rabeprazole (AcipHex), Pantoprazole (Protonix) 등이다. 짧은 시간 동안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OTC는 한번에 2주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 ▶복용 약물 숫자=약물의 숫자도 기억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시니어의 기억력 저하와 섬망 위험 증가와 관련이 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시니어의 42%가 5가지 이상의 처방약을 복용하고 있다. 의사에게 모든 알약이 여전히 필요한지 또는 복용을 중단할 수 있는 알약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다. 복용을 중단할 경우 반드시 의사의 감독 아래여야 한다. 장병희 기자기억 상실 장단기 기억 기억 상실 몇가지 약물
2023.06.20. 21:10
숱한 피눈물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한강 물이 보이는 강변 둑에 서 있는 학도의용군 충혼비는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1950년 6월25일, 그날 이후 서울 시내의 남녀 중학교(6년제)는 거의 휴교 상태가 됐다. 모든 수업은 중단됐고 상급학년 학생들은 목총을 들고 ‘학교사수’라는 구호 아래 군사훈련을 받는 학도호국단 조직이 발동했다. 대한민국 건국 채 2년이 되기 전 북한의 김일성 일당이 남한을 공산화하려고 일으킨 전쟁에 맞서 학생들도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일조했다. 반공에서 멸공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제창한 국가 지도자는 1949년 4월22일 남녀 중등학교와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결성, 예비역 장교들을 배치 매주 1시간씩 교련이란 과목으로 기초 군사교육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예비역인 장교들은 곧바로 현역으로 복귀하여 전투부대에 배치됐다. 또한 학도병 지원자들은 실전훈련도 받지 못한 채 전투부대원으로 군에 배속되었다. 평소 학교에서 익힌 제식훈련과 집총훈련이 학도병들이 받은 군사 훈련의 전부였다. 살펴보면 학도병들은 전쟁 발발 후 1951년 4월까지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소탕·치안유지·간호활동·선무공작 등에 참가해 군과 경찰 업무를 도왔다. 전쟁 발발 직후인 6월26일과 27일 이틀 동안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 앞에서 누구라도 최악의 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6월28일 서울에는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밀어닥치기 시작했고, 각 학교에는 붉은 완장을 찬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의 총알받이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우선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했지만 끊어진 한강 다리 때문에 인민군을 피해 남쪽으로 움직인다는 건 너무 위험하고 어려웠다. 필자도 서울 탈출 기회를 놓쳐 고생하다 7월5일에야 구사일생으로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해 도보로 남행을 서둘렀으나 당시 인민군의 선두는 이미 대전을 지나고 있었다. 필자는 할 수 없이 야간에 수원을 지나 오산 동쪽 용안이라는 곳 인근의 깊은 산으로 피신했다. 산중에는 이미 피란 온 20여명의 학생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산속에 숨어 미군의 폭격, 서해상의 함포사격 등 고막을 찢는 소리를 들으면서 국군의 진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학도의용대’란 명칭으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이 반격에 성공하면서 도망치는 인민군 패잔병을 생포하고 주민을 대피시키는 등의 역할을 했었다. 그러다 낙동강에서 북진하는 국군에 합류 군복과 소총 한 자루, 수류탄 몇 개를 받고 전투에 참여했다. 학도병으로 국군에 편입된 것이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도 못한 채 계급장이나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 전사자와 실종자, 부상자가 속출했으며 포로로 잡혔다 처형되는 일도 있었다. 마침내 9월15일 아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수도 서울을 3개월 만에 수복하는 환희와 감격도 누렸다. 국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을 하고 있을 즈음 문교부 장관은 전세가 호전되었으니 학도병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면 현역병으로 현지 입대도 가능했다. 이렇게 생존한 학도병 대부분이 귀가하거나 학교로 돌아갔다. 학도병이란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한 병사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도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며 헌신했다. 6·25 한국전쟁 73주년을 맞아 이들의 공헌과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학도병들은 6·25 전사의 영웅이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회장기고 학도병 기억 학도병 지원자들 인민군 패잔병 남녀 중등학교
2023.06.20.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