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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커틀릿, 돈카츠 그리고 돈까스

‘돈까스’의 뿌리는 유럽의 ‘포크 커틀릿(pork cutlet)’에 있다. 19세기 말, 서양 요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이 영국식 커틀릿을 일본식으로 변형하면서 ‘돈카츠(とんかつ)’가 탄생했다.     이후 한국전쟁 직후 미군문화와 일본식 경양식이 섞이며 ‘돈까스’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우스터소스에 사과맛을 더한 달콤한 소스를 부어먹거나 찍어먹는 부먹·찍먹 논쟁은 그때부터 이어졌다. 여기에 카레를 곁들이면 카레돈까스, 새우나 소고기를 넣으면 새우까스, 비프까스로 변주된다.   한국에서 돈까스는 한때 ‘경양식집의 상징’이었다. 샹들리에가 달린 고급 식당에서 크림스프와 함께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먹던 음식, 말하자면 서구식 근대화의 상징이자 청춘의 추억이었다. 하지만 절반쯤 먹다 보면 느끼함이 몰려와 김치가 생각나는 것도 어김없었다.   LA 한인타운에서도 이 향수는 고스란히 이어졌다. 올림픽과 크렌셔의 ‘두발로’, 윌셔길 ‘안전지대’, ‘카페 모네’ 등은 80~90년대 한국식 경양식집을 모방한 카페들이었다. 90년대 3가와 버몬트길의 일본인 경양식집 ‘알프스’는 그 계보의 원조격이다. 이후 상호를 ‘아이팝(Eyepop·Popeye의 철자를 거꾸로 한)’으로 바꾸며 명맥을 이었다.   이 시기 한인 카페문화의 기본 메뉴는 단연 돈까스였다. 옥스포드 카페, 난다랑, 나무하나, 인터크루 등 젊은층이 모이던 모든 레스토랑의 메뉴판에는 돈까스가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주방의 실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돈까스 소스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느냐”였다. 주방장은 소스 비법을 감추고, 헬퍼들은 배워보겠다고 들이대던 시절이었다.   돈까스는 대체로 돼지고기 등심을 손질해 힘줄을 제거하고 연육망치로 두드려 얇게 편 뒤, 빵가루를 입혀 얼렸다가 튀겨내는 방식이었다. 접시를 가득 덮는 크기, 성인 남자 얼굴보다 큰 돈까스가 당시 유행의 상징이었다.   이후 코리아타운플라자 푸드코트의 ‘왕돈까스’의 등장은 게임체인저였다. 케첩 베이스의 붉은 브라운 소스에 시큼달콤한 맛을 더해 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었다. 접시를 가득 메운 왕돈까스는 보는 재미와 먹는 즐거움을 동시에 줬다.   한인타운 돈까스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인 인물은 ‘꿀돼지’의 단 김 사장이다. 그는 윌셔와 알렉산드리아, 현재 ‘담솥’ 자리에 정통 일본식 돈까스 전문점 ‘와코’를 열었다. 얼리지 않은 프리미엄 등심을 두껍게 썰고, 최소한의 망치질 후 바로 튀겨내는 ‘겉바속촉’의 기술은 한인타운 돈까스의 새 장을 열었다. 손님이 직접 미니 절구에 통깨를 갈면 서버가 소스를 부어주는 퍼포먼스까지 더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 영향으로 옆집 카레 전문점은 문을 닫을 정도였다. 이후 와코는 아로마센터 푸드코트 입점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올림픽길 3호점 오픈으로 다시 부활했다.   벌몬트와 7가 ‘고바우 쇼핑센터’ 내에는 ‘명동돈까스’라는 이름으로 친척이 운영하는 분점이 생겼다가 몇 년 후 샤부미로 전업했다. 일본 하우스푸드가 운영하던 ‘카레하우스’가 마당몰에 문을 열었고, 이후 코코이치반이 6가 시티몰 코너에 들어서 타운 유일의 카레돈까스 전문점으로 자리 잡았다. 카레가 주 메뉴지만, 손님 대부분은 카레돈까스를 찾는다.   가주마켓 3층 푸드코트의 ‘브라운돈까스’는 라면과 돈까스 세트로 인기를 끌었지만, 푸드코트 폐점과 함께 사라졌다. 이후 시티센터로 옮겼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엔 올림픽과 하버드 코너에 문을 연 ‘라성 돈까스’가 매운 돈까스로 인기를 모았다. 일본식 정통 튀김 기술에 한국식 케첩소스를 입혀 두 세계의 장점을 절묘하게 섞어낸 맛이었다.   현재 한인타운의 돈까스 지형도를 그려보면, 일본식 정통 와코, 한국식 왕돈까스, 한·일 퓨전형 라성돈까스, 그리고 카레돈까스의 코코이치반 등 네 갈래로 나뉜다.   돈까스 역시 타운의 다이내믹한 맛을 상징한다. 한국인의 근대적 미식 경험, 일본식 경양식 문화의 변용, 그리고 LA 한인사회의 추억이 한데 녹아 있다. 고급 경양식에서 출발해 지금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일상식으로 자리 잡은 돈까스 한 접시는, 이민 1세대에겐 향수이자 2세대에게는 세대를 잇는 문화의 맛이라 할 수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커틀릿 돈카츠 카레돈까스 새우 한인타운 돈까스 돈까스 소스

2025.11.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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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타운을 휩쓴 간장게장 르네상스

간장게장은 신선한 게를 간장 양념에 담가 숙성시킨 한국의 전통적인 젓갈 요리이다. 그 유래는 고려 시대 문헌인 14세기의 농서 ‘농상집요(農桑輯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과 양반가에서 즐겨 먹던 고급 음식이었다. 특히 서해안 지역에서 발달해 게를 오래 보관하기 위한 저장 음식의 역할도 했다.     이 전통의 ‘밥도둑’이 몇 년 전부터 한인타운에서 ‘K-푸드의 품격’을 상징하는 메뉴가 되고 있다.     얼마 전 중국인 손님이 저녁을 쏘겠다며 한인타운 간장게장 집으로 오란다. 웨스턴길의 ‘하선생’이다. 원래 설렁탕 맛집으로 알려진 곳인데, 웬걸? 이제는 옆 가게까지 터 두 배로 넓어진 매장에서 늦은 시간에도 영업한다. 손님들 대부분이 간장게장을 먹고 있다. 간장 새우도 인기 메뉴다. 손님 절반 이상이 중국인이라더니, 실제로 금가루까지 뿌려져 반짝이는 간장게장이 상에 오른다. 경이적인 현상이다.   중국인들이 한인타운으로 간장게장을 먹으러 나오기 시작한 시점은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필자가 자주 가던 버몬트 길의 ‘K Town Crab House’에 블랙핑크 리사가 다녀간 후, SNS를 통해 중국인들에게 유명해지면서다. 리사가 다녀간 사진이 올라오자마자 순식간에 중국 관광객 성지로 떠올랐다. 예전엔 여유롭게 들렀던 가게가 이젠 바쁜 시간엔 피해야 할 정도로 북적인다. 특히 대형 성게 위에 각종 알을 듬뿍 올린 ‘성게 알밥’은 단연 내 최애 메뉴다.   최근 LA의 간장게장 집은 파인 다이닝 수준까지 고급화되고 있다. 올림픽과 하버드길의 하이트 광장 옆 ‘게방식당’은 한국 미쉐린 가이드에 3년 연속 이름을 올린 곳이다. 예약은 필수다. 메인 코스, 디저트까지의 코스가 짜임새 있게 준비되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가부키’ 사장님 아드님이 경영을 맡고 있다. 가부키 사장님이 운영하는 다른 한식당 ‘가빈’에서도 같은 간장게장 맛을 볼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오스카 상을 받은 날 뒤풀이를 ‘소반 식당’에서 했다. 이 식당의 가장 유명한 메뉴가 간장게장이라는 일화는 간장게장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타운에는 간장게장의 깊이와 다양성을 보여주는 전문점들이 곳곳에서 꾸준히 성업 중이다. 3가와 호바트의 ‘짜몽’ 옆에 위치한 ‘알찬 꽃게’는 간장게장 전문 식당으로, 많은 손님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8가길 ‘온달’은 꽃게탕과 게찜으로 유명하지만 간장게장도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온달은 한인타운 간장게장 업체 중 최장수를 자랑한다.   전문점은 아니지만, ‘올림픽 칼국수’의 매운 양념 게장 맛은 거의 독보적이다. 매장에서는 칼국수를 시켜 먹느라 바빠, 대부분 투고해서 양념 게장을 집에서 즐기는 경우가 많다.   더불어 ‘북창동 순두부’의 양념 게장도 완전 수준급이다. 여러 지점이 있어 LA는 물론 뉴욕, 텍사스 등 어디서든 급하게 양념 게장이 먹고 싶을 때 모든 지점에서 동일한 맛을 볼 수 있다.   비록 정식 메뉴는 아니지만, ‘남원골 추어탕집’에서는 전라도식 맛깔스런 밑반찬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사장님 덕분에 가끔 양념 게장이 밑반찬으로 나오곤 한다. 넉넉한 인심 덕에 반찬 양이 푸짐하다.   투고를 하겠다면 맛과 양, 가격까지 착한 ‘보릿고개’의 간장게장도 훌륭한 선택이다. 보통 보릿고개 매장에서는 비빔밥을 비벼 먹느라 바빠 간장게장은 주로 포장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버몬트 길의 ‘튀는 활어’에서는 파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두당 39.99달러에 간장게장과 양념게장을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 비싼 간장게장으로 하루 날 잡고 배를 불리고 싶다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하다.   ‘한국의 맛’을 대표하는 간장게장은 이제 한인타운에서 한국의 정(情)과 손맛을 전하는 문화의 통역사 역할을 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간장게장 르네상스 한인타운 간장게장 간장게장 전문 양념 게장도

2025.11.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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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타운 새벽을 지킨 소울푸드, Pho

월남국수 혹은 쌀국수라고 불리는 ‘Pho(포)’의 기원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북부 하노이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의 쇠고기 스튜 ‘포토푀(Pot-au-feu)’가 베트남식으로 현지화된 것이다. 쌀국수 면 위에 소뼈와 향신료로 우려낸 맑은 국물, 그리고 숙주, 실란트로(고수), 라임이 어우러진 이 한 그릇은 식민의 흔적을 품은 음식이면서도, 전쟁 이후 세계로 흩어진 베트남 디아스포라가 각국에 남긴 ‘기억의 음식’이기도 하다.   그 소울 푸드는 한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LA 한인타운 최초의 월남국수집은 6가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세븐일레븐 쇼핑몰 내 90년대 후반 문을 연 전설적인 ‘Pho LA’였다.   24시간 영업으로, 새벽 2시 술집들이 문을 닫는 시간 손님들이 해장을 위해 몰려들던 곳이었다. 쓰린 속을 달래던 그 한 그릇의 국물은 타운의 또 다른 밤 문화를 만들었다.   고수(실란트로)의 강한 향과 라임의 신맛은 처음 접하는 한인들에게 낯설었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 없는 중독성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가정의 필수품이 된 스리라차 소스를 타운에 본격적으로 알린 곳도 바로 포 LA였다. 이때 월남국수의 매력에 빠진 수많은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 유행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LA의 저렴하고 서민적인 스타일과 달리 한국에서는 월남쌈을 곁들인 고급 요리로 변형된 점은 흥미롭다.   이후 4가와 웨스턴에 ‘Pho Western’이 문을 열며 타운 1등 자리를 꿰찼다. 지금의 ‘Cali Pho nia’ 자리다. 영업을 마친 웨이터들과 단골들이 모여 새벽까지 불야성을 이루던 곳으로, 타운 사람들에게는 ‘새벽 국물집’으로 각인됐다.   1999년에는 드디어 진짜 베트남인 주인이 운영하는 ‘Pho 2000’이 1가와 웨스턴, HK마켓 맞은편에 문을 열었다. 대표 메뉴는 진한 옥스테일(소꼬리) 포. 한국인들이 흉내낼 수 없는 정통 베트남식 국물맛으로 타운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후 버몬트, 올림픽, 코리아타운플라자 푸드코트 등으로 확장하며 월남국수의 대중화를 완성했다. 지금도 웨스턴점과 코타플 지점은 같은 상호로, 같은 레시피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한때 그보다 더 진한 국물의 ‘Pho 4000’도 등장했다. 4가 웨스턴 코너의 작은 식당이었지만, 깊은 국물 맛에 타인종 손님들까지 줄을 섰다. 타운이 지금처럼 다인종화되기 전, 이 음식은 LA의 새벽 공기를 타고 주류의 입맛도 매혹시켰다.   시간이 흘러도 ‘새벽의 월남국수’는 여전히 타운의 문화적 상징이다. 8가 옥스포드의 ‘Thank U Pho’, 6가의 ‘Pho 24’, 버몬트의 ‘Good Pho U’, 그리고 3가의 ‘Pho Legend’까지 이제 한인타운 곳곳에서 국적을 넘나드는 향신료와 국물이 섞인다.   특히 Pho Legend의 ‘분차(Bun Cha)’는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 방문 중 먹으며 화제가 된 메뉴로, 불향 입은 돼지고기와 국물 없는 쌀국수를 느억맘 소스에 버무려 먹는 별미다.   9가와 웨스턴의 ‘K-Town Pho’에서는 월남 샌드위치인 ‘반미’를 투고할 수 있어, 점심 한 끼의 일상식으로 자리잡았다.   타운의 월남국수 지도를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웨스턴 길을 따라 2가에는 Pho 2000, 4가의 Cali Pho nia, 7가의 Pho Gyu, 9가의 K Town Pho가 있다. 또 버몬트길을 따라 3가의 Pho Legend, 7가의 Good Pho U가 유명하다. 8가와 옥스포드 Thank U Pho, 6가와 켄모어의 Pho 24, 코타플 푸드코트내 Pho 2000 역시 강자다.   이 월남국수집들은 이국적이지만 한인의 식탁에서 서로의 문화를 포용한다. 그리고 국경을 넘어선 이민자들만의 향기가 배어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소울푸드 타운 한인타운 곳곳 la 한인타운 코리아타운플라자 푸드코트

2025.10.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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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한인타운 ‘닭큐멘터리’

한국인에게 ‘통닭’은 아련한 추억이다. 아버지의 퇴근길, 월급날 손에 들려 있던 노란 종이봉투의 온기,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소한 전기구이 통닭.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위로이자 가족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의 통닭은 이제 ‘K-치킨’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을 누비고 있다. 그 중심에는 LA한인타운에서 주춧돌 역할을 한 터줏대감 치킨집들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 3가와 웨스턴 근처 DJ노래방 옆에 ‘페리카나 치킨’이 문을 열었다. 한국 브랜드로서는 미국 첫 진출이었다. 하지만 매장이 있던 쇼핑센터가 찰스 킴 초등학교 부지로 편입되면서 아쉽게 문을 닫아야 했다. 페리카나는 수년 전 오렌지카운티 소스몰과 LA 마당몰에 다시 돌아왔다. 두 번째 미주 시장 도전은 성공적이다.   한국식 치킨집이 드물던 시절, 한국 본사의 조리법과 인력을 직접 공수해 라크레센타와 한인타운 3가에 문을 연 ‘치킨데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원조다. 비록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두 지점 모두 여전히 성업하며 LA 한인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4가와 웨스턴 코너에는 영화감독 출신 사장이 주방부터 서빙, 청소까지 ‘1인 경영’을 고집하는 ‘꼴통치킨’이 10여 년째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한 6가와 다운타운 올림픽에 지점을 둔 ‘꼬끼오’는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과도 같다. 과거 웨스턴 길에 있던 매장이 화재로 소실되는 아픔을 겪은 뒤 북쪽으로 이전했다가 다시 6가로 돌아오는 등 역경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7년, 진출 당시 한국 업계 1위였던 ‘교촌치킨’은 6가에 본사 직영 플래그십 스토어를 열며 미주 시장 공략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최근 이 매장은 옆 월남국수집을 인수하고 7개월간의 확장 공사를 거쳐 지난 9월 재오픈했다. 하지만 18년이라는 진출기간에 비해 LA 3곳, 하와이 1곳 등 더딘 확장세를 보이며 미주 시장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있다.   오히려 교촌의 ‘카피캣’ 브랜드로 알려졌던 ‘본촌치킨’의 행보는 흥미롭다. 한국에는 매장이 없지만 미국 시장을 집중 공략해 현재 미 전역에 130여 개의 프랜차이즈를 운영하는 거대 브랜드로 성장했다.   교촌과 비슷한 시기 7가와 버몬트 고바우 식당 쇼핑센터에 1호점을 냈던 ‘BBQ치킨’은 초반에는 확장세가 미미했다. 그러나 2019년부터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어 현재 미주에만 200여 개의 매장을 확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K-치킨 프랜차이즈로 우뚝 섰다.   BBQ의 성공에 자극받은 한국 시장의 새로운 강자 ‘BHC치킨’도 미주 진출을 선언했다. 3가와 페어팩스 파머스 마켓에 1호점을, 채프먼 플라자에 플래그십 개념의 2호점을 직영으로 오픈하며 본격적인 프랜차이즈 가맹점 모집에 시동을 걸었다.   BBQ 1호점 자리에 새로 들어선 ‘77켄터키 치킨’은 라크레센터에 2호점까지 오픈했지만,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며 성장세가 둔화됐다.   8가 옥스포드 쇼핑센터와 가주마켓 내에서 ‘투존치킨’도 꾸준히 선전 중이며, ‘할머니 가래떡 떡볶이’라는 서브 브랜드로 젊은층 입맛도 잡고 있다.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치맥’ 전문점의 명맥도 이어지고 있다. 웨스턴 길의 ‘타운호프 땡스치킨’, 올림픽 길의 터줏대감 ‘하이트광장’과 ‘황태자’ 등은 여전히 저녁 시간 많은 이들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한국마켓내 치킨 코너의 닭다리도 타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테디셀러다.   LA 한인타운의 치킨집들은 아버지의 노란 봉투가 품었던 따뜻한 추억을 자양분 삼아, 이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K-푸드의 위상을 높이는 역사를 써가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la한인타운 한국식 치킨집 터줏대감 치킨집들이 페리카나 치킨

2025.10.19.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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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스벅 퇴장, 한인 커피의 전성기

한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로 주저 없이 맥도날드 커피를 꼽던 시절이 있었다. 혀가 데일듯한 뜨거움이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마치 뚝배기에 담겨 펄펄 끓는 국밥처럼, 뜨거워야 제맛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스타벅스와 커피빈이 태동하기 전, 데니스(Denny’s)나 아이홉(IHOP) 같은 식당들조차 파머스 브라더스에서 납품받은 원두를 드립 머신으로 내려 제공하던 때였다.   한인타운 초창기 ‘커피숍’이라 하면, 사실상 경양식 카페에 가까웠다. ‘두발로’, ‘안전지대’ 같은 곳이 대표적이었다. 젊은이들이  선도 보고 데이트를 즐기던 장소였다. 메뉴는 돈가스, 오므라이스, 그리고 다방식 커피가 전부였다.   1980~90년대에 들어서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옥스포드 카페, 난다랑, 인터크루, 나무하나 같은 카페들이 속속 문을 열면서 젊은 오렌지족들의 아지트가 됐다.     그무렵 주류 사회에 스타벅스가 에스프레소 기반 커피를 유행시키면서 거대한 변화가 시작됐다. 커피 한 잔이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원두의 원산지와 플레이버가 중요해졌다. 그로서리 마켓 전면에는 소비자가 직접 원두를 갈아갈 수 있는 그라인더가 비치됐다.   한인타운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만 달러가 넘는 고가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갖춘 전문점들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웨스턴 5가에 문을 연 ‘미스터 커피’는 그 신호탄이었다. 쌉쌀하면서도 크리미한 카푸치노 한 잔에 타운은 매료됐다. 곧이어 6가와 켄모어의 ‘몬테칼로’, 윌셔와 알렉산드리아의 ‘카페 홈’이 가세하며 한인타운에도 본격적인 에스프레소 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 웨스턴 길의 미국 식당 ‘파이퍼스(Piper’s)’를 한인 사업가가 인수해 24시간 운영하는 커피숍으로 탈바꿈시킨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자정 넘어 커피와 함께 라면, 김치볶음밥을 주문할 수 있는 ‘한국식 커피숍’의 등장은 한인들에게 새로운 해방구이자 행복을 선사했다.   이후 한인타운의 커피문화는 다양성과 감성으로 확장됐다. ‘발코니’, ‘맥’, ‘감’, ‘로프트’, ‘헤이리’, ‘노블’, ‘카페 센트’, ‘지베르니’, ‘노란집’ 등은 넓은 공간과 독창적 인테리어, 테라스 문화를 앞세워 새로운 카페 트렌드를 이끌었다.   한편 미국 주류시장에서는 스타벅스와 커피빈을 넘어 피츠, 인텔리젠시아, 블루보틀 등 ‘스페셜티 커피’의 거인들이 경쟁에 나섰다. 한국 브랜드인 할리스커피, 탐앤탐스, 카페베네도 한때 미주 진출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레드오션의 높은 파고를 넘지 못하고 대부분 사라졌다. 그 잔상은 윌셔길의 ‘어바웃타임’, 윌셔와 윌턴의 ‘목우’ 등에 남았다.반면,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같은 베이커리 브랜드와 대만계 ‘85°C’는 베이커리를 중심으로 커피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했으며, LA 토종 브랜드인 ‘아만딘’의 선전도 괄목할 만했다.   최근의 흐름은 ‘기계’에서 ‘사람’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커피머신보다 ‘바리스타’가 주목받는다. 알케미스트, 도큐먼트, RnY 커피 스튜디오, 샤프 스페셜티 커피 등은 커피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매니아층의 성지를 이루고 있다.   또한, 건물주가 직접 운영하며 넓은 공간과 주차 편의성을 확보한 새로운 모델도 등장했다. 삼호관광 사옥의 ‘엠코 카페(MCO Cafe)’, M플라자의 ‘M Cafe’, 구 대성옥 자리에 들어선 ‘메모리 룩 카페(Memory Look Cafe)’ 등이 대표적이다.   최근 스타벅스가 미 전역에서 900여 개 매장의 폐쇄를 예고하며 한인타운 내 주요 매장들도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빈자리를 한인 바리스타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강자들이 채우고 있다. ‘스테레오스코프(Stereoscope)’, ‘마루 커피(Maru Coffee)’ 등은 이미 주류 시장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타운 내에서도 ‘다모(Damo)’, ‘록(Rok)’, ‘스태거(Stagger)’ 등은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커피 한 잔은 시대의 온도이며, 공동체의 풍경이다. 다방커피에서 시작된 LA 한인타운의 커피숍은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의 바리스타들이 이끄는 스페셜티 커피 문화로 이어지며, 한인 사회의 새로운 연대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전성기 퇴장 한국식 커피숍 한인타운 초창기 스페셜티 커피

2025.10.12.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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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쌍화차에서 마차까지, 성공의 DNA

차(茶) 한 잔에 담소를 나누고 정을 쌓아온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그런면에서 1980년대 초반 문을 연 8가 옥스포드 센터의 ‘여왕봉 다방’은 한국의 다방 문화를 그리워하던 한인들에게 어쩌면 필연과도 같은 존재였다. 계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와 달달한 ‘다방 커피’ 한 잔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위로와 향수 그 자체였다. 전복죽으로 유명했던 ‘산’ 식당과 숯불집을 성공시킨 박부생 사장의 손에서 탄생한 이 공간은 한인 커뮤니티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윌셔길의 한방 찻집 ‘화선지’는 다방과는 결이 다른 멋을 선사했다. 한국 전통 인테리어 속에서 진하게 달인 쌍화차에 꿀을 타고 잣과 대추를 띄워 마시는 여유, 여름날 곶감호두말이와 곁들이는 시원한 수정과는 이민 생활의 작은 쉼표가 되어주었다. 올림픽길의 ‘다루’, 가주마켓 3층의 ‘카페 예’ 등도 떡볶이와 팥빙수, 붕어빵 같은 추억의 메뉴를 한방차와 함께 선보이며 한인들의 발길을 붙들었지만, 이제는 모두 기억 속에만 남게 됐다.   전통 찻집의 시대가 저물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대만에서 건너온 ‘보바티(Boba Tea)’였다. 1990년대 초 ‘난다랑’ 쇼핑센터에 문을 연 ‘롤리컵’을 필두로, 물담배(후카)를 곁들인 ‘보바베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한인타운 음료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이는 한인 2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비층이 형성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인들의 도전 정신은 빛을 발했다. ‘I Love Boba’는 한인타운 곳곳에 지점을 내며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시험했고, 7가와 버몬트의 ‘보바로카(Boba Loca)’는 보바티 사업의 성공을 발판으로 글로벌 프로즌 요거트 브랜드 ‘요거트랜드(Yogurtland)’를 탄생시키는 신화를 썼다. 필립 장 대표의 작품이었다. 전 세계 350개 지점을 거느린 요거트랜드 성공의 단초가 바로 보바티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보바로카’가 떠난 자리에 들어선 ‘잇츠 보바타임(It’s Boba Time)’ 역시 100여 개에 달하는 가맹점을 거느린 기업으로 성장하며, 이 자리가 ‘성공의 명당’임을 입증했다.   최근 한인타운에는 프룻티와 흑당 버블티를 앞세운 중국계 보바숍들의 2차 공습이 거세다. ‘이팡(Yi Fang)’, ‘선라이트 티(Sunright Tea)’, ‘타이거 슈가(Tiger Sugar)’등이 연이어 문을 열었고, 특히 ‘3 Catea’는 타운 내 1등 보바숍으로 자리매김하며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마차(Matcha)’의 시대가 도래했다. 8가에 문을 연 ‘다모’와 ‘스테거’, 버몬트의 ‘온이스케이프 카페’ 등 타운의 최신 핫플레이스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마차를 가장 인기 있는 메뉴로 내세우고 있다.     특히 올림픽길 라성순부두 코너에 자리한 ‘Rok’에는 매일 수십 명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곧 샌게이브리얼밸리와 풀러턴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다방의 쌍화차에서 보바티를 거쳐 오늘의 마차에 이르기까지, 한인타운의 인기 음료는 시대의 흐름과 세대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왔다. 하지만 그 형태가 어떻게 변하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고국의 맛을 그리워하던 1세대부터,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고 소비하는 2, 3세대에 이르기까지 한인타운의 차 음료 열풍은 유행을 넘어, 이민 사회의 변화하는 정체성과 끈질긴 생명력, 그리고 무엇이든 성공 신화로 만들어내는 한인 특유의 ‘DNA’가 담겨있는 문화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도 한인타운은 여전히 ‘차’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쌍화차 마차 한인타운 음료 요거트랜드 성공 한인타운 곳곳

2025.10.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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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지역별 ‘고깃집 강자’를 찾아서

LA 한인타운을 넘어 외곽 도시에도 각 동네를 대표하는 로컬 K-BBQ 맛집이 반드시 존재한다. 필자의 소셜미디어 팔로워들에게 대표적인 K-BBQ 지역 강자들을 소개해달라 부탁했다. 반응이 뜨거웠다. 이번 칼럼에서는 충성 고객들이 선정한 지역별 인기 고깃집들을 소개한다.   베벌리힐스에는 ‘겐와’가 꼽혔다. 야키니쿠를 연상시키는 이름과 달리 정통 한식으로 입소문을 탔다. 미라클마일 1호점의 성공에 이어 라시에나가 길에 2호점을 열며 영역을 확장했다.     버뱅크에서는 중국인 오너가 운영하는 ‘한스 K-BBQ’가 타운센터 몰 내에서 성업 중인데, 한식당 사장의 컨설팅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밸리 지역에서는 1996년부터 29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본셔길의 ‘식도락’이 독보적인 강자로 꼽힌다. 밸리 주민들의 특성상 ‘동네 2등’이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굳건히 명성을 지키고 있다.   LA 북쪽 옥스나드의 ‘젠 바비큐’는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샌호세는 ‘10부쳐스’가 최고라는 평을 받는다. 정갈한 밑반찬과 최고급 와규를 내세워 ‘인생 고기집’이라는 극찬까지 얻어냈다.   알함브라에서는 ‘젠 바비큐’가 오랫동안 1위 자리를 지켰으나, 길 건너편 ‘추풍령’이 새로운 주인을 맞으며 판도를 뒤집었다. 샌게이브리얼 밸리 길에서는 ‘박대감’이 인수한 ‘TK92’가, 로즈미드 길에서는 ‘우국’이, 아케디아에서는 ‘백정’이 사이좋게 시장을 나눠 가진 모양새다. 특히 샌게이브리얼 밸리 중국인 타운은 LA 한인타운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커 여러 식당이 공존하며 성장하고 있다.   시티오브인더스트리의 ‘떨스티 카우(Thirsty Cow)’는 가든그로브에도 지점을 내며 최상급 고기로 승부수를 띄웠다. 이 지역 주민들은 마치 ‘인앤아웃’에 대한 충성도와 맞먹을 정도로 ‘떨스티 카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롤랜드하이츠에서는 ‘쳐비 캐틀(Chubby Cattle)’이라는 중국인 소유의 K-BBQ 식당이 ‘쳐비 그룹’의 노하우를 살려 찰진 운영을 선보이고 있다.   토런스에서는 ‘92 K-BBQ’가 대박을 터트렸다. 특히 ‘예술적인’ 뷔페 라인 덕분에 주변 식당들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할 정도다.   부에나파크의 ‘강남 스테이션’은 LA에서 성공을 거둔 뒤 부에나파크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며, 밤 12시 이후에도 손님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어바인에서는 ‘백정’이 규모 면에서 1위를 차지하지만, 돼지고기는 ‘솥뚜껑구이 꿀돼지’가 강자다. 가든그로브에서는 전통의 ‘모란각’이 건재하며, 최근 부에나파크에 2호점을 냈는데 고기보다 냉면이 더 유명하다.   코스타메사의 ‘안진’은 일본식 야키니쿠로 인기가 높다. 개인적으로는 파운틴밸리의 ‘츄루하시’가 호르몬 구이와 돌솥밥으로 기억에 남는다. 야키니쿠를 한식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일본 서적에도 ‘한국 요리’라 표기하고 야키니쿠라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미국 최대의 K-BBQ 식당은 64개의 지점을 갖춘 ‘규카쿠’라고 할 수 있다. 샌디에이고는 ‘356 K-BBQ’가, 라스베이거스는 관광객들에게 ‘김치 바비큐’가, 현지인들에게는 ‘호박 식당’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하와이는 전통의 강자 ‘서라벌’이 문을 닫은 후 ‘온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하와이 알라모아나 쇼핑몰 내 ‘젠 바비큐’도 성업 중이다. 하와이 섬 특유의 ‘텃세’ 때문에 외지인 식당이 자리 잡기 어렵지만, 쇼핑몰 안은 예외인 듯하다.   이처럼 각 지역의 K-BBQ 강자들은 저마다 방식으로 고유한 식문화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고깃집은 이제 미국에서 한식당이 아니라 ‘로컬 푸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지역별 고깃집 지역별 인기 지역 강자들 한식당 사장

2025.09.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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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부모 닮은 한인 손맛, 미슐랭의 별로

미국 서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K-BBQ가 한식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면, 이제는 최고급 미식의 상징인 '파인 다이닝' 영역에서 한식의 위상이 급부상했다. 세계적인 미식 가이드 미슐랭의 별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식 파인 다이닝의 성장은 미식의 수도 뉴욕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뉴욕에서만 3스타 '정식(Jungsik)'을 필두로, 2스타에 '아토믹스(Atomix)'와 '고테(COTE)', 1스타에 '꼬치(Kochi)', '녹수(Noksu)', '마리(Mari)','메주(Meju)', '봄(Bom)', '오이지 미(Oiji Mi)', '주아(Jua)', '주옥(Joo Ok)'등 총 11곳이 미슐랭 스타를 획득했다.     특히 '고테'는 마이애미에서도 1스타를 받아, 두 개 도시에서 미슐랭 스타를 보유한 유일한 한식 레스토랑 그룹으로 기록됐다.   이러한 흐름은 서부로도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의 '쌀(Ssal)'과 '산호원(San Ho Won)'이 각각 1스타를 받았고, 한국 3스타 '모수'의 안성재 셰프를 배출한 코리 리 셰프의 '베누(Benu)' 역시 3스타의 영예를 안았다.     LA에서는 피코 길에 위치한 '키(Ki)'가 유일한 미슐랭 스타 한식당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기용 셰프는 이전 수년간 6가 길에서 한식 오마카세 전문점 '킨(Kinn)'의 파트너 셰프로 활약한 바 있다.   미슐랭 스타 외에도 주목할 곳은 많다. LA 다운타운의 '바루(Baroo)'는 '2024 LA 타임스 올해의 레스토랑'으로 선정되며 독창적인 테이스팅 메뉴와 막걸리, 사케 페어링으로 현지 미식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미국 주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는 뉴욕 '모모푸쿠(Momofuku)' 식당 그룹의 오너 셰프 데이비드 장이 다운타운에 문 연 퓨전한식 '메이저도모(Majordomo)'도 꼭 한번 시식해볼만한 식당이다.   또한, 세계적인 셰프 아키라 백은 라스베이거스 일식당 옐로테일에 이어 베벌리센터에 한식 바비큐 파인 다이닝 'AB 스테이크하우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부모의 대를 이어 미국 파인 다이닝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인 2세들의 약진도 돋보였다.   한국에서 미슐랭 식당으로 유명한 간장게장 전문점 '게방식당'이 지난 3월 한인타운 올림픽길에 문을 열어 화제가 된 바 있다. 유명 일식 레스토랑 체인 가부키를 운영하는 카이젠 다이닝 그룹의 데이비드 이 회장 아들이자 모던 일식 퓨전 레스토랑 히비 창업자인 솔로몬 이 대표가 경영하고 있다.   또 '박대감' 사장의 딸인 엘리자베스 홍 셰프는 미슐랭 스타 이탈리안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모짜(Osteria Mozza)'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컬리너리 디렉터로 활약 중이다. '고바우' 사장의 아들인 브라이언 백 셰프도 뉴욕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멜로즈 힐스에 새로운 레스토랑 'Bar 109'를 열었다. 이는 본격적인 파인 다이닝 'Corridor 109'의 전초전으로, 한식과 일식에 기반한 해산물 요리와 칵테일 페어링을 선보여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직 미슐랭의 별을 받진 못했지만 미슐랭 가이드가 그 맛을 인정하고 추천한 한식당들도 많다. 용수산, 박대감, 단비, 쿼터스, 정육점, 조선갈비, 다래옥, Liu's Cafe 등이 '스타'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한식의 파인 다이닝 진출은 단순히 메뉴의 고급화를 넘어, 한식 고유의 철학과 섬세한 맛이 세계 최고 수준의 미식 문화로 당당히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1세대가 땀으로 닦아놓은 길 위에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2세 셰프들의 창의적인 도전은 한식의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이들의 활약이 계속될 때, 한식의 세계화는 더 깊고 풍성한 차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미슐랭 부모 미슐랭 스타 가이드 미슐랭 한식 레스토랑

2025.09.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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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펄떡이는 활어, 야생의 미식

일식집 가서 초고추장을 찾으면 스시맨들한테 회 먹을 줄 모른다며 핀잔을 듣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난 한국식 횟집에서 팔팔 뛰는 활어 건져 회를 떠주면 초고추장 찍어 생마늘과 상추에 얹어 쌈 싸먹는 것을 선호한다. 회뿐인가. 접시에서 꿈틀거리는 산낙지며 싱싱한 해삼, 멍게, 개불에 한치를 얇게 썰어 국수처럼 시원하게 말아먹는 물회도 입맛을 자극한다.   여기서 끝이라면 한국식 횟집이 아니다. 샐러드, 콘치즈, 계란찜, 튀김, 구이 등 이른바 ‘찌끼다시’로 통하는 곁가지 음식이다. 찌끼다시는 일본어로 곁들이찬을 뜻하는 ‘쓰키다시(突き出し)’를 말한다. 회를 먹고 난 뒤 마지막에는 매운탕과 누룽지로 마무리하는 한국식 횟집은 한국인들의 입맛에 특화된 독특한 식문화다.   일본식 스시와 사시미가 사후경직을 지나 조직이 부드러워지는 숙성 과정을 거쳐 깊은 맛을 추구하는 ‘정적인 미식’이라면, 한국식 활어회는 펄떡이는 활어의 쫄깃쫄깃한 식감을 즐기는 ‘야생적인 미식’이라고 할 수 있다.   LA한인타운 횟집은 1987년 올림픽길에 문을 연 ‘인천횟집’과 2년 뒤 웨스턴 길에 개업한 ‘송도횟집’이 양분하며 활어 문화의 본격 서막을 열었다.   이후 올림픽 길에 ‘마산 아구찜’이 식당을 확장해 대형 수족관까지 들여놓으면서 활어집 붐이 일어났다. 필자도 2005년 대형 횟집을 개업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중 봤던 마포의 한 건물 지하 대형 회센터를 본떠 만든 ‘노량진 회센터’다. 현재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윌셔와 버몬트 인근 부지 전 신라부페 자리에 파트너들과 함께 운영했다. 자랑거리는 초대형 수족관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설치해준 업체에 의하면 남가주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다.   이후 횟집의 계보는 웨스턴 길의 ‘자갈치시장’, 6가 길 현재 바다이야기 자리의 ‘청해진’, 그리고 4가와 웨스턴에 오픈했던 ‘T=활어’로 이어졌다. 올림픽길에 있던 독도스시도 한때 성업했는데 개발업자에게 건물이 넘어가며 문을 닫았다.   거의 비슷한 시기, 웨스턴길에 ‘와싸다’와 ‘활어광장’이, 피코길에 ‘제주활어’가 문을 열었고 8가와 후버길에 테이크아웃 위주의 ‘LA활어’가 생겨나 간편하게 활어회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한국식 횟집이 활어의 신선함과 푸짐한 쓰키다시로 차별화했다면, 한인타운의 ‘고급 일식집’은 귀한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사랑받았다.   한인타운 초기의 고급 일식점들은 한식당 한쪽 구석에 일식 코너를 꾸미는 식으로 시작됐다. 동일장이 그 원조였고 동일장 셰프가 독립해서 차린 강남회관이 그랬다.   벌몬트길의 ‘쇼군’도 동일장 출신 또 다른 셰프가 개업했다. 쇼군과 윌셔와 그래머시의 ‘붕호’는 다다미방이 있는 대표적인 고급 일식집이었다.   부동산을 업으로 하다 보니 큰 계약을 마무리하면 셀러와 바이어를 모시고 종종 이런 곳을 찾는다. 다다미 방에 들어가 등받이 있는 좌식 의자에 앉아 큰상을 받는다. 메뉴는 1인당 100여달러하는 사시미 스페셜을 시키고, 술은 오니고로시나 쿠보타 등 준마이 다이긴조급 사케를 큰 병으로 시켜야 제대로 접대받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와 유행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횟집들이 명멸을 거듭하는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일식집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1990년대 초반 ‘송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어원’과 1995년 윌셔와 윌튼 인근에 개업한 ‘아라도’가 있다. 30년 넘게 장수하고 있는 이 업소들은 한국식 일식점의 자존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펄떡거리는 광어회 한점에 초고추장 찍어 마늘까지 올린 쌈 생각이 간절하다. 오늘은 어떤 횟집을 가볼까나.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활어 야생 한국식 활어회 한국식 횟집 la한인타운 횟집

2025.09.1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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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한인타운, 스시 격전지로

LA 한인타운 베벌리길의 ‘노시 스시(Noshi Sushi)’는 한인 스시 애호가들에게 아련한 추억의 공간이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인 할아버지 노시 셰프가 쥐여주던 스시는 두툼하고 정이 넘쳤다. 특히 그의 시그니처였던, 밥이 보이지 않을 만큼 푸짐하게 올려주던 우니(성게알)는 맛의 정점이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뒤 계산하려다 “현금만 받는다”는 말에 당황했던 기억마저 이제는 그리운 풍경이다. 노시 할아버지가 은퇴하며 직원들에게 가게를 넘긴 후, 그 장인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발길은 눈에 띄게 줄었다.   노시 스시와 함께 한 시대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던 곳은 베벌리와 버질 인근의 ‘시부초(Shibucho)’였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던 이곳은 메뉴판조차 없던, LA 최초의 오마카세 전문점 중 하나였다. 스시 바에 앉으면 그날 가장 좋은 생선으로 셰프가 내어주는 니기리를 묵묵히 받아먹어야 했다.     메뉴에 불평이라도 하면 쫓겨난다는 소문이 돌 정도의 뚝심과 자부심은, 역설적으로 LA타임스가 수차례 최고의 일식당으로 선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인들에게 ‘정통 스시’의 기준을 제시했던 이 전설의 식당 역시 팬데믹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노시 스시와 시부초로 대표되는 초창기 일본인 장인들의 일식집은 한인 커뮤니티에 단순한 ‘맛집’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일본 장인의 깐깐한 고집과 정성스레 다룬 생선 한 점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작은 사치였다. 이들 가게의 존재는 한인타운이 타문화를 존중하고 수준 높은 미식을 향유할 줄 아는 커뮤니티임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두 거장의 퇴장과 함께 한인타운의 일식 지형도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솔에어 건물에 야심 차게 문을 열었던 회전초밥집 ‘카시라(Kashira)’는 ‘쿠라 스시(Kura Sushi)’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뒤, 한인이 운영하는 무제한 스시 식당으로 변모했다. 이는 푸짐함과 가성비를 선호하는 한인 시장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다.   이후 한인타운 일식은 세분화, 전문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올림픽길의 ‘야마스시 마켓플레이스(Yama Sushi Marketplace)’는 바쁜 현대인을 겨냥한 ‘그랩앤고(Grab-and-Go)’ 스타일의 롤과 스시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6가 채프먼 플라자의 ‘카주노리(KazuNori)’는 유명 셰프 노자와의 명성을 등에 업고 ‘핸드롤’이라는 단일 메뉴에 집중, 미니멀한 공간에서 최고의 맛을 경험하게 하는 전략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최근 6가와 웨스턴 코너에 문을 연 ‘노리카야(Norikaya)’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셰프 없이 획일화된 맛을 내던 기존 핸드롤 바의 한계를 넘어, 속을 풍성하게 채운 ‘오픈 핸드롤’과 다채로운 타파스 스타일의 이자카야 메뉴를 결합했다. 이는 스시를 가볍게 즐기면서도 제대로 된 요리와 주류를 곁들이고 싶은 새로운 소비층의 욕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최근 한인타운 일식 트렌드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단연 ‘고급화’다. “한인타운에서는 무조건 싸야 한다”는 오랜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그 선두주자는 웨스턴 길의 ‘하토 스시(Hato Sushi)’다. 유명 일식집 출신 셰프가 제대로 숙성시킨 고급 생선으로 선보이는 니기리 스시는, 저녁에는 예약 없이는 맛보기 힘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끌며 한인타운에도 프리미엄 스시 시장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이러한 흐름에 방점을 찍은 것은 외부 유명 브랜드들의 한인타운 입성이다. 윌셔길에는 노부(Nobu) 출신 셰프가 가이세키 스타일의 정통 오마카세 전문점 ‘우마야(Umaya)’를 열었고, 베벌리힐스의 터줏대감이던 오마카세 명가 ‘마스모토(Masumoto)’가 7가와 웨스턴으로 이전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는 한인타운이 LA의 핵심 미식 상권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일본 최대 스시 체인 중 하나인 ‘스시 잔마이(Sushi Zanmai)’가 미국 1호점의 위치로 채프먼 플라자를 선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LA 한인타운 일식점의 연대기는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과 진화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 일본 장인의 솜씨에 의존하며 ‘정통의 맛’을 소비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한인 자본과 기획력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캐주얼 롤집부터 무제한 스시, 전문화된 핸드롤 바, 그리고 최고급 오마카세에 이르기까지, 이제 한인타운은 스시라는 장르 안에서 거의 모든 스펙트럼을 갖춘 역동적인 ‘격전지’가 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한인타운 격전지 이후 한인타운 la 한인타운 한인 스시

2025.09.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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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나무하나’를 기억하시나요

LA한인타운내 카페의 역사를 떠올리면 마치 턴테이블 위 LP판에서 흘러나오던 ‘지직’하는 추억의 소음이 들리는 듯하다. “흔들리는 사람들 한밤의 재즈 카페, 하지만 내 노래는 누굴 위한 걸까…” 그 시절, 어두운 조명 아래 흘러나오던 음악이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밤은 젊었고, 우리는 불안했지만 자유로웠다.   1980년대 말 타운 카페의 대표 주자는 전설의 ‘옥스포드 카페’다. 현재 솔에어 콘도 뒤편 메트로 버스 정류장이된 건물에서 성업하며 X세대들의 아지트로 불렸다.   비슷한 시기 한인타운의 카페들은 커뮤니티의 필요에 응답하며 저마다 색깔을 찾아갔다. 6가와 세라노 쇼핑센터의 ‘난다랑’이나 웨스턴 길의 ‘제임스딘’은 당시 서울의 유행을 그대로 옮겨온 공간들은 고국에 대한 향수와 선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물론 무단으로 이름을 빌린 짝퉁 카페였지만 그땐 그랬다. 한국에서 잘나가던 업소 이름을 가져다 쓰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한국의 최신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는 만족감은 이민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카페는 한인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며 그 용도를 확장했다. 크렌셔 길의 ‘두발로’는 넓은 주차장을 갖춘 단독 건물에서 커피와 경양식을 팔던 소박한 공간으로 시작했다. 풋풋한 소개팅과 첫 데이트의 명소였던 이곳은 주류 라이선스를 얻은 뒤 룸살롱과 나이트클럽으로 바뀌면서 문전성시를 이뤘다. 현재는 ‘EK 갤러리’라는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두발로와 유사하게 경양식집으로 출발했던 윌셔 길의 ‘안전지대’는 주부들의 계모임 장소로 인기를 끌다가 야외 활어집으로, 현재는 ‘명동교자’로 완전히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90년대 한인타운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은 카페의 질적 도약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길의 ‘강서회관’ 사장이 개업했던 ‘카페 모네’는 한국 호텔 주방장을 초빙해 선보인 정통 경양식으로 격조 높은 미식 공간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켰다.     비슷한 시기 필자도 카페를 운영했다. 윌셔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할리우드의 전설이 깃든 ‘오리지널 브라운 더비’ 자리에 ‘카페 나무하나’를 개업했다. 클라크 게이블 등 전설적인 무비스타들이 찾았던 곳이다. 또 이 자리에서는 전 필리핀 대통령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필리핀 레스토랑 ‘비아 마리’를 운영하기도 했다.   둥근 돔 형태의 건물은 마치 중절모를 연상케 했고, 내부 한가운데 진짜 나무 한 그루를 세워 ‘나무하나’라는 이름에 걸맞은 공간을 연출했다. 한쪽에서 속삭인 말이 반대편 테이블에서 들릴 정도로 신기한 구조였다.   얼마 후 길 건너 채프먼 플라자에 있던 필리핀 식당을 유학생 출신 지인이 인수해, 일본에서 유명한 ‘인터크루’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었다. 당시엔 교포들이 ‘나무하나’를, 유학생들이 ‘인터크루’를 찾으며 손님층이 자연스레 나뉘기도 했다.   그 뒤를 이어 6가 세븐일레븐 건물(현 카페 블루)에는 서정적인 이름의 ‘마로니에’가, 멜로즈 길 언덕에는 ‘몽마르뜨’가 문을 열었다. 윌셔 라마다 호텔 자리에는 ‘모아모아’, 라브리아 길에는 중장년층을 위한 ‘카페 라브리아’, 베벌리와 버질에는 프라이빗한 다이닝룸을 갖춘 ‘카페 코코’ 등이 속속 등장하며 한인타운에 카페 전성시대를 열었다.   옥스포드길의 ‘카페 콘체르토’는 일식 체인 ‘옌’ 사장이 시작했으며, 이후 6가 재개발로 ‘카페 하우스’를 정리한 사장이 인수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 옆 ‘카페 메트로’로 시작했던 공간은 한국 톱모델 출신 재일교포 사장이 ‘앙주’라는 이름으로 운영한 뒤, 현재의 ‘치킨수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최근 주택을 개조한 ‘카페 더반’이나 ‘카페 지베르니’의 등장은 또 다른 변화를 시사했다. 화려함보다는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이 공간들은, 이제 한인 커뮤니티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을 넘어 자신들의 진정한 ‘쉼터’를 필요로 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나무 기억 옥스포드 카페 타운 카페 카페 모네

2025.08.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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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 일식 뷔페 성공 신화의 비밀

LA 한인들에게 ‘에도코(Edoko)’,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토다이(Todai)’, ‘마키노(Makino)’는 단순한 일식당 이름 그 이상이다. ‘비싼 음식’의 대명사였던 일식을 저렴하고 푸짐하게 즐길 수 있게 해준 추억의 공간이자, 한인 이민 사회의 외식 트렌드를 상징하는 고유명사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모두 일본인 형제가 시작해 한인의 자본과 만나 거대하게 성장한 뒤, 창업주는 거액을 손에 쥐고 떠났다는 공통점이다. 일식 뷔페의 40년 흥망성쇠는 LA 한인 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외식 문화의 변천사를 담고 있다.   기념비적인 시작은 1981년, 토루 마키노가 버뱅크에 문을 연 에도코였다. ‘일식=고급 요리’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일식 뷔페’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에도코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토루 마키노는 여러 지점을 열며 사세를 확장하다 대부분을 중국계 및 한인 사업가에게 매각했다.   그리고 1985년, 그는 샌타모니카에 한 단계 진화한 ‘라이트하우스’를 열어 또 한 번의 성공 신화를 썼다. 그후 일본어로 ‘등대’라는 같은 의미의 ‘토다이’를 설립해 본격적인 체인 사업에 뛰어든다.   토다이의 확장기부터 한인 자본이 본격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했다. 주로 한인 투자자들이 공사비 등 초기 자본을 대부분 부담하고, 마키노 형제(동생 가쿠 마키노 합류)는 융자를 통해 51%의 경영권 지분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몇 년 후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르면, 이들은 나머지 지분을 파트너에게 넘겨 막대한 차익을 실현했다.   이 성공 방정식은 1998년, 한인 투자 그룹이 토다이를 전격 인수하며 정점을 찍는다. 토다이는 샌호세, 하와이는 물론 홍콩과 서울에까지 진출하며 글로벌 브랜드로 거듭났고, 라이트하우스 역시 결국 한인의 손에 인수되어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이후 형제 중 가쿠 마키노가 독립하여 ‘마키노’라는 브랜드로 샌디에이고, 라스베이거스 등지에 새로운 뷔페를 열었지만, 현재는 라스베이거스 지점의 일부 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영에서 손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롭게도 현재 라스베이거스 마키노의 경영 파트너 역시 LA 출신 한인이다.   영원할 것 같던 대형 일식 뷔페의 시대는 외식 트렌드의 변화와 과당 경쟁의 벽에 부딪혔다. 토다이를 인수한 일부 한인 투자자들은 ‘오나미(Onami)’로 상호를 변경해 쇼핑몰 중심으로 활로를 모색했고, 한인타운 내에서는 ‘신라’, ‘비원’처럼 한식을 접목한 뷔페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상권 중복과 비효율, 소비자 취향 변화로 대부분의 업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재는 글렌데일의 ‘베가스 시푸드 뷔페’처럼 중국계 자본에 의해 더욱 대형화된 일부 뷔페와 웨스턴 길의 ‘킹 뷔페’, 롱비치의 ‘홋카이도 시푸드 뷔페’ 등 소수의 저가형 뷔페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뷔페의 빈자리는 ‘무제한 스시(All You Can Eat Sushi)’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한인타운 최초의 무제한 스시집은 윌셔길 머큐리 콘도 1층의 ‘이포 스시(Ippo Sushi)’였으나, 극심한 경쟁 속에 문을 닫았다. 초창기 무제한 스시집들이 손님의 배를 빨리 채우기 위해 밥 양을 늘린 ‘주먹밥 스시’를 내놓았던 반면, 최근에는 새로운 강자들이 판도를 바꾸고 있다.   4가와 웨스턴의 ‘히어피시(Here Fishy)’와 여기서 독립한 파트너가 윌셔 솔레어 콘도 1층에 문을 연 ‘히어피시피시(Here Fishy Fishy)’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파인 다이닝 수준의 스시 퀄리티를 선보이며 ‘양보다 질’을 추구,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을 사로잡으며 양대 산맥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무제한 스시를 즐기는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수백 달러를 호가하는 ‘오마카세’가 유행하는 가운데, 현명한 소비자들은 무제한 스시집에서 ‘가성비 오마카세’를 즐기는 신공을 발휘한다. 주문 횟수 제한이 있는 고급 생선 메뉴를 먼저 집중적으로 시켜 오마카세처럼 즐긴 뒤, 롤, 튀김, 우동 등으로 허기를 채우는 방식이다.   나아가 ‘무제한 바비큐’와 ‘무제한 스시’를 결합한 ‘AYCE 스시 & 바비큐’ 콘셉트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오렌지카운티에서는 ‘사케 투 미 스시(Sake 2 Me Sushi)’가 무제한 스시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부에나파크와 브레아에서 돌풍을 일으킨 ‘엑스피시 이자카야(X-Fish Izakaya)’는 ‘강남스테이션’ 사장이, 라스베이거스에서 4개의 ‘야마 스시(Yama Sushi)’를 성공시킨 이는 ‘김치 바비큐’ 사장이다. 이처럼 일식 뷔페에서 시작된 한인들의 ‘스시 드림’은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자들에 의해 그 명맥과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푸짐함으로 상징되던 1세대 일식 뷔페는 ‘가성비’의 무제한 스시로, 이제는 ‘가심비’와 스마트한 소비가 결합된 3세대 트렌드로 진화하고 있다. 이 또한 LA 한인 외식 문화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일식 뷔페 일식 뷔페 성공 신화 일식당 이름

2025.08.1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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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살랑살랑 만나는 행복한 맛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 너머로 정담을 나누고, 각자의 취향대로 익힌 고기와 채소를 건져 먹는 풍경. ‘샤부샤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식 경험을 상징한다. 샤부샤부(しゃぶしゃぶ)는 일본어다. 의태어로 살짝살짝, 찰랑찰랑을 의미한다. 얇게 썬 고기를 살랑살랑 가볍게 흔들어 먹는 소리가 음식의 이름이 됐다. 이 일본 요리는 LA 한인 사회에서도 외식 문화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그 역사의 중심에는 리틀도쿄의 터줏대감, ‘샤부샤부 하우스’가 있었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인 노주인이 지키던 이곳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었다. 예약은 사치였고, 몇 안 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오픈런’과 기나긴 기다림은 최고의 고기를 맛보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고기 한 점에 대한 주인의 자부심은 고객들의 자존심을 기꺼이 내려놓게 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연로한 주인이 가게 문을 닫았을 때, 많은 이들이 그 맛을 그리워 했다. 그리고 1년여의 공백 끝에, 옆집에서 한국식 핫도그로 명성을 떨친 ‘투핸즈’의 한인 사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한인타운에서 ‘이씨화로’를 성공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전설적인 공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으며 성업 중이다.   샤부샤부 하우스의 기다림에 지친 이들의 대안이었던 곳은 혼다 플라자의 ‘카가야(Kagaya)’, 현재의 ‘텐쇼(Tensho) 샤부샤부’다. 이곳 역시 긴 줄을 감수해야 하는 명소지만, 프리미엄급 고기를 질 좋은 사케나 와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세련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친절한 서비스와 식사 후 제공되는 일품 아이스크림은 이곳을 다시 찾게 하는 이유다.   한인타운 샤부샤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웨스턴 길의 ‘웨스턴 샤부샤부’를 빼놓을 수 없다. 한인타운 1호점 격인 이곳은 훗날 ‘복가’, ‘무봉리’로 주인이 바뀌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 ‘샤부샤부 하우스’를 벤치마킹해 야심 차게 문을 열었던 ‘칸 샤부샤부’ 역시 원조의 폐업과 비슷한 시기에 문을 닫으며 그 운명을 같이했다.   다양한 시도도 있었다. 명동돈까스 사장이 버몬트와 7가에 잠시 선보였던 ‘샤부미’, 한국 브랜드로 윌셔와 웨스턴에 문을 열었으나 건물 재개발로 사라진 ‘샤부향’ 등은 한인타운 샤부샤부 시장의 부침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인들의 입맛에 맞춰 독창적인 메뉴를 탄생시킨 사례도 있다. ‘서울회관’ 1대 사장이 개발한 ‘칭기즈칸’이 바로 그것이다. 맹물이나 단순한 다시 국물을 쓰는 일본식과 달리, 깊은 맛의 육수를 사용하고 프리미엄 등심을 육각으로 정형해 얇게 썰어내는 방식은 샤부샤부의 한국적 재해석이라 할 만했다. 80년대 한국에서 초빙된 주방장이었던 1대 사장의 손맛은 이제 건물을 인수한 2대 사장에게로 이어져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중국식 샤부샤부인 ‘훠궈(Hot Pot)’의 열풍도 빼놓을 수 없다. 사천식 매운 육수를 비롯한 다채로운 육수를 선택할 수 있는 ‘하이디라오(Haidilao)’는 이제 딘타이펑과 함께 미국 주류사회에 가장 널리 알려진 중식 브랜드가 되었다. 수타면 장인이 춤을 추듯 면을 뽑아내는 퍼포먼스는 식사의 즐거움을 더한다.   그리고 2010년대 이후 한인타운의 샤부샤부 지형도를 완전히 바꾼 게임체인저, ‘샤부야(Shabuya)’가 등장했다. 윌셔와 윌튼의 옛 노래방 자리에 1호점을 연 ‘샤부야’는 ‘무제한 샤부샤부’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건물 재개발로 올림픽 길로 이전한 후에도 그 인기는 식을 줄 모르며, 라미라다, 파운틴밸리, 라스베이거스, 하와이에 이르기까지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샤부야’의 성공은 옛 별대포 자리에 문을 열었다가 윌셔 길로 이전한 ‘본샤부(Bon Shabu)’의 등장으로 이어졌고, 두 식당은 한인타운 무제한 샤부샤부의 ‘2강 체제’를 구축했다. 이 열기는 부에나파크, 세리토스 등지로 확산하며 각 지역 상권의 강자들을 탄생시켰다.   리틀도쿄 장인의 뚝심에서 시작해 한국식 칭기즈칸의 탄생, 중국식 훠궈의 가세, 그리고 무제한 샤부샤부의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LA의 샤부샤부 지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해왔다.     이 역사는 단순히 ‘음식 트렌드’라고만 한정하기 어렵다. 일본 장인의 가게를 한인 청년 사업가가 계승하고,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메뉴가 수십 년간 사랑받으며, 한인 브랜드가 주류 시장으로 뻗어나가는 이 모든 과정은 한인 커뮤니티의 역동성과 적응력, 그리고 성공의 연대기를 담고 있다.   오늘 저녁, 가족 혹은 가까운 이들과 함께 보글거리는 육수 앞에 둘러앉아 보는 것은 어떨까. 얇은 고기 한 점을 살랑살랑 흔들어 입에 넣는 순간, 깨닫는다. 함께라서 행복하다는 진리를.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행복 한인타운 샤부샤부 웨스턴 샤부샤부 샤부샤부 하우스

2025.08.10.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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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한인 마켓 50년사, 그 위대한 여정

한인 마켓의 발전사는 LA 한인 사회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민 1세들에게는 고향의 맛을 찾을 수 있는 위안의 공간이었고, 새로운 이민자들에게는 정착에 필요한 정보와 일자리를 얻는 교류의 장이었다.   초기 한인타운의 상권은 올림픽 길을 따라 형성됐다. 현재 서독안경점 자리에 1969년 문을 연 ‘올림픽 식품점’이 그 중심이었으며, 그 주위로 한식당, 중식당, 떡집, 선물센터 등이 속속 들어서며 한인타운의 태동을 알렸다.   올림픽 마켓을 중심으로 한인 업소들이 자연스럽게 군락을 이룬 것이 상권 형성의 1세대였다면, 8가와 아이롤로 길(현재 99센트 스토어 및 히스패닉 쇼핑센터 위치)에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2세대 상권이 조성됐다. 1980년대 초반 이곳에 프리미엄을 표방한 ‘동서마켓’과 2층 규모의 동서 쇼핑센터가 들어서며 한인타운 상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시간이 흘러 한인타운의 중심 상권이 8가를 넘어 웨스턴 길로 이동하면서, 동서마켓의 주축들은 1988년 3월 웨스턴 길에 신축된 코리아타운 플라자로 이전했다. 이들이 건물주 직영체제로 운영한 마켓이 바로 ‘플라자마켓’의 전신이다.   당시 버몬트 길과 6가 인근에 자리했던 ‘칼스마켓’은 올림픽 마켓, 동서마켓과 함께 ‘빅3’ 구도를 형성했다. 훗날 칼스마켓 경영진은 홀세일 비즈니스를 거쳐 70여 개의 매장을 거느린 히스패닉계 유통 강자 ‘수피리어 마켓’의 오너로 성장했다.   그 무렵 ‘웨스턴 마켓’이 웨스턴 본점과 함께 올림픽 마켓 건너편에 올림픽 분점을 개점하며 경쟁에 가세했다. 오렌지카운티의 ‘도레미 마켓’ 역시 3가와 웨스턴 길에 진출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 웨스턴 마켓의 고 김 회장과 오 회장이 웨스턴 길의 폐업한 본스(Vons) 마켓 건물을 인수해 ‘HK한국수퍼마켓’을 열면서, 한인 마켓의 ‘수퍼마켓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코리아타운 플라자몰이 문을 연 1988년, 하기환 회장과 김진수 회장은 올림픽 길의 알파베타(Alpha Beta) 마켓 리스권을 확보해 ‘한남체인’을 열었고, 고 이만성 사장은 웨스턴 길의 메이페어(Mayfair) 마켓 건물을 인수해 ‘가주마켓’을 개점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올림픽 마켓은 HK한국마켓 건너편에 2호점을 열었으나, 경쟁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폐업했다.     가주마켓은 베벌리 길, 가든그로브, 세리토스 등으로 지점을 확장했으나, 이만성 사장 사후 웨스턴 본점만을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반면 한남체인은 토런스, 부에나파크, 다이아몬드바를 넘어 동부 뉴저지까지 진출하며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     HK한국마켓은 투자그룹과 합작하여 갤러리아 올림픽점, 버몬트점, 밸리점을 잇달아 개점하며 멀티 지점 체제를 구축했다. HK한국마켓의 파트너 중 한 명은 독립하여 ‘그린랜드마켓’을 설립, 현재 밸리와 라스베이거스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샌디에이고에서 시작된 ‘시온마켓’은 2009년 시티센터에서 개점한 뒤 버몬트 길로, 다시 8가 아씨마켓 자리에 신축된 건물로 두 차례 이전하며 입지를 다졌다. 시온마켓은 하와이안가든점을 폐점하는 대신, 부에나파크, 어바인, 조지아, 텍사스 등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후발주자였던 ‘프레시아’는 가든그로브와 토런스에 매장을 열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업했고, 토런스 지점은 한남체인이 인수하여 운영 중이다. 리틀도쿄 갤러리아몰에는 건물주가 직접 운영하는 동명의 ‘리틀도쿄 갤러리아 한국마켓’이 성업 중이다.   동부의 대형 식품회사 리브라더스의 ‘아씨마켓’이 1998년 8가에 진출, 저렴한 자사 제품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으나 건물 재개발 후 매장 확보에 실패하며 2015년 서부 소매 시장에서 철수했다.   반면, 동부의 또 다른 강자 ‘H마트’는 서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후 텍사스 등 미 전역으로 지점을 확장했다. 현재 미주 94개, 캐나다와 영국까지 총 112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54개 매장을 보유한 중국계 ‘99랜치마켓’을 규모 면에서 크게 앞질러 세계적인 아시안 마켓으로 성장했다.     한인 마켓은 LA 한인들의 삶과 함께 호흡해온 역사적 공간이다. 작은 식품점에서 시작해 미 전역과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형 유통 체인으로 성장한 그 발자취는, 낯선 땅에 뿌리내려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적 성장을 이뤄낸 한인 이민 사회의 위대한 여정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한인 마켓 한인 마켓 웨스턴 마켓 올림픽 마켓

2025.08.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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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 순대, ‘아바이’서 ‘무봉리’까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시린 속을 데우던 음식. 가난했지만 잔칫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들던 음식. 순대는 고려 시대, 돼지고기가 귀해 멧돼지를 잡아 내장에 채소와 피를 채워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한민족의 지혜와 생존력이 응축된 음식이다.     LA한인타운의 순댓국 지형도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이민 사회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한 편의 역사서와 같다.   LA 순대 역사의 서막을 연 두 기둥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버몬트 길 현재 ‘간빠이’ 자리에 있던 ‘함경도 아바이순대’는 타협 없는 원류의 맛을 고집했다. 진한 돼지 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야말로 ‘날것’에 가까운 이북식 순대는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의 순댓국 한 그릇은 실향의 아픔과 잃어버린 고향의 맛을 일깨우는 강력한 매개체였다.   반면, 6가와 알렉산드리아 플라자에 둥지를 튼 ‘서울순대’는 대중화와 사업화의 길을 택했다. 잡내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맛으로 폭넓은 고객층을 사로잡았고, 일찌감치 웨스턴 길과 세리토스에 지점을 내며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결국 자체 공장을 설립해 LA의 거의 모든 한인 마켓과 분식점, 주점에 순대를 공급하는 거대 공급망을 구축했다. 오늘날 우리가 어디서든 쉽게 맛보는 순대는 ‘서울순대’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탄생한 셈이다. 이들은 현재 코리아타운 플라자 푸드코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세대가 터를 닦은 자리에 2세대 주자들이 등장하며 LA 순댓집은 본격적인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특히 한인타운의 애호가들은 웨스턴 길의 ‘한국순대’파와 8가와 후버의 ‘8가순대’파로 나뉘어 자존심 대결을 벌이곤 했다.   필자는 ‘골수 한국순대파’였다. 자유로운 영혼의 사장님은 가게 문을 열고 싶을 때만 열었다. 그 앞을 지나다 문이 열려있으면, 그날은 무조건 순댓국을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그 예측 불가능함마저도 묘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의 파고는 비켜가지 못했다. 테이크아웃으로 겨우 버티던 가게는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8가순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주방을 지키는 사모님과 홀을 책임지는 사장님 단둘이 운영하던 한국순대와 달리, 8가순대는 탄탄한 시스템과 규모를 갖췄다.     물론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함흥냉면가(家)의 큰아들이 지금의 ‘착한설렁탕’ 자리에 야심 차게 열었던 ‘웨스턴순대’는 ‘5.99달러’라는 파격적인 저가 경쟁으로 시장을 뒤흔들었다. 한때 가디나까지 지점을 확장했지만, 출혈 경쟁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폐업의 길을 걸었다.     한편 8가와 아드모어의 ‘돈돈이순대’는 비교적 후발주자임에도 벌써 9년의 업력을 쌓으며 꾸준함의 미학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순대는 전문점의 경계를 넘어섰다. ‘장터보쌈’, ‘장충족발’ 같은 보쌈·족발집에서 내놓는 순대 한 접시의 수준이 웬만한 전문점 못지않다. 3개 지점을 거느린 ‘진솔국밥’은 순댓국을 시키면 순대를 따로내어주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이러한 진화의 정점에는 ‘무봉리순대’가 있다. 올림픽 길에서 화려하게 시작해 웨스턴 길 시대를 거친 무봉리는 이제 식당을 접었다. 대신, 거대한 센트럴 키친에서 남가주, 라스베이거스, 댈러스, 하와이 등 총 18개 지점에 순대를 공급하는 식품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는 순댓국이라는 메뉴가 한인타운을 넘어 미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미주 현지 K-푸드 산업화의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함경도 골짜기의 투박한 순대에서 시작해 미주 전역으로 뻗어 나가는 거대 유통망에 이르기까지, LA 순댓국 역시 우리 이민사나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낯선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기록과 성공의 신화, 그리고 쓸쓸한 퇴장의 뒷모습이 모두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에는 모든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순대 골수 한국순대파 함경도 아바이순대 이북식 순대

2025.07.27.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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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 떡볶이 전쟁 40년사

두 평 남짓한 가게 앞, 낡은 화로 위에서는 붉은 양념이 보글거렸다. 떡과 어묵이 뭉근하게 익어가는 쟁반 주위로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빼곡히 둘러쌌다. 손가락만 한 미니 포크로 떡볶이 열 개에 백 원 하던 시절. 주인아저씨는 매의 눈으로 아이들이 먹는 떡 개수를 셌지만, 종종 아이들의 꾀에 넘어갔다. “아저씨, 저 이제 일곱 개 먹었어요.” 열 개를 훌쩍 넘긴 녀석의 말에도 그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깃꼬깃한 100원짜리 한 장 들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이들은 손님이자 자식 같았으리라.   장사는 역시 ‘목’이 전부였다. 보성중학교와 혜화동 로터리 중간, 혜화여고 길 건너편에 자리한 그 가게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저씨가 떡볶이 팔아 건물을 샀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옆집 라면 한 그릇이 100원, 학교 앞 짜장면이 150원이던 시절, 주머니에 50원만 있어도 떡 다섯 알은 너끈히 먹을 수 있었다. 25원짜리 버스 회수권으로 떡볶이를 사 먹고 친구와 30분을 걸어 집에 가던 날들도 부지기수였다. 먹고 돌아서면 허기지던 그 시절, 유독 그 떡볶이가 위로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이민 후 수년간 애타게 그리워 했던 떡볶이를 LA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의 웨스턴 길 ‘포2000’ 자리에 1980년대초 문을 연 ‘까르르’는 혁신이었다. 떡볶이는 물론, 소시지와 단무지가 들어간 한국식 김밥, 통얼음을 아날로그 제빙기로 갈아 만든 팥빙수까지. 한식당은 있었어도 ‘분식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했던 시절, ‘까르르’는 LA 한인 사회에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전까지 70~80년대 LA 고등학생들의 약속 장소는 LACC 앞 값싼 불고기 덮밥집인 ‘요시노야’나 3가와 버몬트 인근 일본인이 운영하던 돈가스집 ‘알프스’ 정도가 고작이었다. ‘까르르’는 순식간에 젊은이들의 ‘행아웃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독주하던 ‘까르르’가 초심을 잃고 점차 한식집화 되어갈 무렵, 동서사우나 옆에 ‘코끼리 분식’이 등장했다. 떡볶이 외에도 냉면, 만두, 죽까지 메뉴를 확장하고 24시간 영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곧이어 버몬트와 올림픽 길에 ‘호돌이분식’과 ‘낙원집’이 가세하며 LA 코리아타운은 본격적인 ‘심야 분식 전쟁’에 돌입했다.   이후 6가, 지금의 ‘해장촌’ 자리에 문을 연 ‘그린하우스’는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떡볶이와 김밥을 기본으로 돈가스, 캘리포니아롤, 우동 등 다채로운 메뉴를 선보였고, LA 최초로 테이블에 불판을 설치한 즉석 떡볶이까지 내놓으며 분식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그린하우스’의 대항마로 7가와 버몬트(현 77켄터키 자리)에 ‘해뜰날’이 생겨났고, 올림픽 길에는 손만두 전문점 ‘시누랑 올케랑’, 베벌리 길에는 ‘먹을래 싸갈래’가 문을 열었다. 3가와 웨스턴 ‘신당동 떡볶이’, 코리아타운 플라자 푸드코트의 ‘아우림’까지. LA 자생 분식점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최근에는 한국의 대형 떡볶이 프랜차이즈들이 속속 LA 원정에 나서고 있다. 마당몰과 부에나파크 소스몰에 입점했던 ‘스쿨푸드’는 전통 김밥 대신 스팸, 멸치, 불고기 등을 활용한 모던 롤로 인기를 끌었다. 6가 길은 떡볶이 격전지가 되었다. 카탈리나 교차로에 ‘조폭떡볶이’가, 노먼디 길에 ‘엽기떡볶이’가, 그리고 후발주자로 세라노 길에 ‘죠스떡볶이’까지 한국의 떡볶이 3대장이 차례로 깃발을 꽂았다.   8가 옥스포드와 가주마켓 내 ‘투존치킨’이 세컨드 브랜드로 선보인 ‘할매가래떡볶이’처럼 굵은 가래떡을 내세운 프리미엄 떡볶이도 사랑받고 있다.   혜화동 구멍가게의 백 원짜리 떡볶이에서 시작된 기억은 LA 코리아타운의 화려한 프랜차이즈까지 이어졌다. 떡볶이 한 그릇에는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시절의 추억과, 이역만리에서 고향의 맛을 재현해낸 이민자들의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월은 흘렀고 입맛도 변했지만, 떡볶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소울푸드로 남아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떡볶이 전쟁 신당동 떡볶이 즉석 떡볶이 한국식 김밥

2025.07.2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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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 김밥, 세대교체와 새로운 도전

한인 이민자들에게 김밥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소풍 날의 설렘이고, 낯선 땅에서 쉼 없이 일하던 부모님이 없는 식탁에 자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따뜻한 위로였다. 김밥 한 줄에는 고된 이민 생활의 애환과 그리움, 그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꽉 들어차 있다. LA 한인타운의 김밥 역사는 이민 사회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타운을 대표하는 김밥집 ‘가주김밥’의 계보는 한인사회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한다. 가주마켓 앞 우동집에서 시작된 이 김밥집은 마켓 재개발로 윌셔 길로 이전했고, 그 건물마저 지하철 공사 부지로 수용되면서 4가와 웨스턴에 ‘더김밥’이라는 새 이름으로 정착했다. 현재 ‘더김밥’은 한국마켓 내 ‘울엄마 김밥’도 함께 운영 중이다.   한편, 재개장한 가주마켓 안에는 새로운 주인이 ‘가주김밥’의 간판을 다시 내걸었고, 9가 로데오 갤러리아에도 ‘가주김밥 로데오점’이 문을 열었다. 이렇게 ‘가주김밥’ 두 곳과 ‘더김밥’, ‘울엄마 김밥’은 한 뿌리에서 나와 각자의 터전에서 같은 레시피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우동과 잔치국수가 유독 깊은 맛을 내는 것은 그 시작이 우동집이었던 역사에 기인한다.   타운 김밥업계의 또 다른 강자인 버몬트길의 ‘김밥천국’은 한국의 동명 프랜차이즈와 무관하게 이곳 이민 사회에서 자생한 독자적인 식당이다. 오히려 미국 내 상표권을 확보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쌓았다. 작은 분식점으로 시작해 옆 가게 ‘강셰프’가 문을 닫자 그 자리를 인수해 확장하는 모습은, 치열한 한인타운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성장해 온 이민자들의 비즈니스 감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올림픽 갤러리아 마켓의 ‘바로김밥’은 한 장인의 화려한 경력을 응축한 곳이다. 그 시작은 전설적인 올림픽 한남체인 내 ‘열차우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생소했던 누드김밥과 각종 일식 롤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때 처음 맛본 소프트셸 크랩 ‘스파이더롤’의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다.   ‘열차우동’ 매각 후, 사장님은 ‘캘리포니아 롤’ 체인 사업을 성공시키고 ‘옌스시’를 독자 경영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카페 콘체르토’ 등 외식 사업으로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가장 큰 특기인 ‘롤’과 ‘김밥’으로 돌아와 ‘바로김밥’을 열었다. 전통 한국 김밥부터 화려한 일식 롤, 퓨전 유부초밥, 그리고 감동적인 가격의 회덮밥까지. 그의 손끝에서 김밥은 하나의 요리로 승화한다. 최근 부에나팍에 새 지점을 연 것은 그의 내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한다.   초기 마켓 김밥은 ‘복떡방’, ‘지화자’ 같은 떡집들이 떡을 납품하며 함께 판매하던 형태였다. 하지만 위생 규정상 상온 진열이 어렵고, 냉장 시 밥이 굳어 맛을 유지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 이는 개인이 마켓 내 부스를 임대해 직접 운영하는 현재의 효율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마켓 납품 없이 직판만으로 명성을 떨친 전설도 있었다. 버몬트 길의 ‘산수당’은 비싼 가격에도 ‘명품 김밥’으로 불리며 사랑받았으나, ‘지화자’에 인수된 뒤 올림픽 지점으로 이전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최근 트레이더 조의 냉동김밥이 공전의 히트를 치자, 너도나도 김밥집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미 포화상태인 한인타운 내에서의 경쟁은 무모해 보인다. 오히려 전문화된 메뉴로 주류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지혜가 필요할 때다. 트레이더 조나 홀푸드마켓 바로 옆에서 진짜 ‘프리미엄 김밥’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흐름 속에서 8가 ‘유부킹’, 피코 ‘킹밥’을 시작한 젊은 사장님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스팸 무수비를 특화해 틈새시장을 개척한 6가 ‘스파무 오키니와 오니기리’ 사장님과,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탐구하며 장인의 자리를 지키는 ‘바로김밥’ 사장님께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상이라도 드리고 싶다.     김밥 한 줄에 담긴 이들의 땀과 열정이 있기에, 우리 이민 사회의 맛과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세대교체 김밥 타운 김밥업계 김밥 역사 명품 김밥

2025.07.13.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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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식 냉면'에 도전한 평양냉면

바야흐로 냉면의 계절, LA한인타운에 ‘평양냉면 대전’이 펼쳐지고 있다. 8가 옛 마포갈매기 자리에 문을 연 ‘서관면옥’과 웨스턴길 옛 옴부그릴 터에 자리 잡은 ‘가빈’. 이 두 신흥 강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통 평양냉면을 전면에 내세우며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 미식가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들 냉면의 특징은 한마디로 ‘슴슴함’이다. 맑은 고기 육수에 으레 섞던 시원한 동치미 국물의 맛보다, 순도 높은 메밀국수를 삶아낸 면수(麵水)의 구수함이 지배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뽀얀 사골 국물의 설렁탕을 기존 LA 냉면의 표준이라 할 때, 이들 평양냉면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맑은 고기 육수 베이스의 곰탕 국물에 가깝다. 익숙한 새콤달콤함 대신, 육향과 메밀향의 미묘한 조화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사실 LA에 평양냉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역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가 현 육대장 자리에 있었던 ‘강서면옥’은 전설로 회자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찾아 청와대에 육수를 납품했을 정도라는 서울 본가의 명성과 비법을 그대로 옮겨왔다. 당시 서울 본가의 ‘어머니’는 유학생 아들에게만 육수 비법을 전수했고, 그 탓에 며느리의 친정이 운영하던 올림픽가의 ‘세종회관’조차 감히 평양냉면 메뉴를 내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아들이 한국으로 역이민을 떠나며 식당은 팔렸으되 조리법은 전수되지 않았고, LA 한인들은 그 깊은 맛을 추억 속에 묻어야 했다.   이렇듯 명맥이 끊겼던 정통 평양냉면의 귀환은 기존 LA 냉면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고구마 전분을 섞어 가늘고 질긴 함흥냉면과 달리, 순메밀을 고집하는 평양냉면은 면발이 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끊어져 가위질이 필요 없다. 이북 실향민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첫 번째 먹어봤던 냉면은 함흥냉면이었던듯 하다. “아무리 질겨도 면은 잘라먹는 게 아니다”고 하셔서 먹다 숨이 막힐 뻔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주 많이 잘라 달라고 한다.   지난 40년간 LA의 냉면 시장은 사실상 ‘LA식 냉면’이라 부를 만한 독자적인 형태로 진화해왔다. 1980년대, 8가 버드나무 식당 자리에 자체 사옥과 넓은 주차장까지 갖췄던 ‘함흥면옥’의 위용이나, 웨스턴 길에서 갈비와 함께 평양식 냉면을 선보이며 LA 한식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우래옥’이 그 서막을 열었다.     우래옥의 전통은 ‘조선갈비’로 이어졌고, 수원갈비, 박대감, 강남회관 등 수많은 갈빗집들이 저마다의 스타일로 냉면을 내놓으며 ‘고기 후 냉면’이라는 공식을 완성했다. 이들의 냉면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새콤달콤한 육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LA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개성 강한 도전자들은 명멸했다. 90년대 초 3가에 문을 열어 하루 800그릇을 팔았다는 전설의 함흥냉면 전문점 ‘원산면옥’, 탈북 가수 김용 씨가 윌셔길에 창업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평양냉면 전문점 ‘모란각’이 대표적이다.     특히 모란각은 오렌지카운티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정통 평양냉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부에나파크 ‘아리수’와 더불어 물냉면을 시키면 비빔냉면을, 비빔냉면을 시키면 물냉면을 맛보기로 내어주는 ‘짬짜면’식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 외에도 냉동면을 독특하게 풀어내 24시간 분식 냉면 시대를 열었던 ‘코끼리분식’, 수십 년째 여름이면 주차 대란을 일으키는 칡냉면의 강자 ‘유천냉면’까지, LA의 냉면 지형도는 실로 다채롭다. 여기에 부산 피난민들이 메밀 대신 밀가루로 만들어 먹던 ‘부산밀면(항아리칼국수)’과 깨와 김가루를 듬뿍 얹은 ‘춘천막국수(춘천닭갈비)’까지 가세하니, 가히 ‘면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이러한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서관면옥’과 ‘가빈’이 들고나온 ‘슴슴한’ 평양냉면은 단순한 신메뉴가 아니다. 이는 40년간 굳어진 ‘LA식 냉면’의 관성과 미각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과연 원조의 맛은 어떠했는가, 우리의 입맛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음식의 맛은 시대와 함께 변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듯 원형에 가까운 맛의 등장이 우리의 미각을 단련시키고 외식 문화의 지평을 넓힌다. 평양냉면의 귀환이 불러온 이 신선한 경쟁이 LA 한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평양냉면 냉면 정통 평양냉면 평양냉면 메뉴 평양냉면 대전

2025.07.0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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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불판 혁명’ 선도한 이씨 형제들

1980~90년대만 해도 미국의 식당 내부 구조는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었다. 조리는 주방에서만 가능했다는 뜻이다. 손님이 테이블에서 생고기를 굽는다는 개념은 생소함을 넘어 불법 영업으로 간주됐다.   당시 LA 시건물안전국은 고기를 테이블 위에서 구우려면, 테이블마다 스프링클러와 자동 소화 시스템을 갖춘 주방 수준의 후드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대부분이 포기했지만, 이를 정면 돌파한 식당이 있었다. 버몬트길 현재 ‘국대고집’ 자리에 1983년에 개업한 ‘해운대 왕갈비’다.   과도하다고 할 만큼 완벽한 시설을 갖춘 이 식당은, 결과적으로 한식 테이블 바비큐 문화를 정착시킨 1세대 식당으로 기록된다. 이 식당에서 시작해 한인타운의 요식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이들이 이인천씨 형제들이다.   해운대 왕갈비가 대박을 거둔 이후 한동안 한인타운 요식업계는 이씨 형제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그 나머지로 분류될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라스베이거스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이들이 타운에 남긴 역사는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씨 형제의 식당 계보를 정리하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먼저 해운대 왕갈비를 시작한 사람은 큰 누나다. 큰형은 ‘황태자’, ‘신라부페’, ‘수라원’, 할리우드의 ‘란제리’ 클럽, 라스베이거스의 ‘김치바비큐’를 열었다. 둘째는 원산면옥, 진주곰탕, 미스터 순두부, 콜로라도의 ‘서울바비큐’, 라스베이거스의 ‘진주설렁탕’을 개업했다. 셋째가 이인천 사장인데 LA에서 ‘주막74’를 비롯해 클럽 ‘6th Ave’, 클럽 ‘360’, ‘노량진 회센터’를 운영했고 라스베이거스로 이주해서는 ‘진생바비큐’, ‘대장금’, ‘김치바비큐’에 이어 ‘야마 스시’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넷째는 ‘알배네’와 ‘미아리 칼국수’를 개업했다.   이씨 형제들의 사촌도 요식업계의 큰손이다. 바로 북창동순두부 창업자 고 이희숙씨의 남편 이태로씨다.     이씨 형제의 사돈의 팔촌이자 동네 친구도 LA서 식당을 열었다. 양지설렁탕과 양지감자탕의 이기영 사장이다.   이제는 2세들까지 가세해서 북창동 순두부의 경우 고 이희숙 사장의 세 아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큰형의 수라원은 딸이, 셋째의 딸도 라스베이거스 김치바비큐와 야마 스시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씨 형제들이 불을 지핀 테이블 쿠킹 문화는 이제 미국 전역은 물론 다양한 민족 요리에서도 일반화됐다. 양꼬치, 야키니쿠, 데판야끼, 샤부샤부, 핫팟 등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다.   불판의 기술적인 진화는 경이롭다. ‘타입1 시스템’은 기름과 연기를 걸러내는 고성능 후드를 뜻한다. ‘타입2 시스템’은 수증기를 위주로 배출하고 ‘다운 드래프트 시스템’은 연기를 테이블 아래로 흡수하는 장치다. 코끼리코처럼 천장에서 내렸다 올렸다 하는 자바라 스타일 후드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후드없이 자동 소화 시스템도 생략되고 간단한 필터시스템만 갖춘 전기 인덕션 스타일이 일반화 될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한식당의 불판에서 시작된 도전 정신은 이제 외식 산업의 경계를 넘어섰다. 노래방, K-뷰티, K-팝까지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모두가 어렵다고 고개를 저은 규제를 뚫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한인 1세대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한인타운의 풍성한 식문화는 이들이 흘린 땀과 도전의 결과물이다. 이씨 형제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로 길이 남기를 바란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혁명 선도 라스베이거스 김치바비큐 클럽 라스베이거스 이씨 형제들

2025.06.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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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 청춘들의 아지트 연대기

LA 한인타운의 밤은 수많은 이름들로 반짝였다 스러져 갔다.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을 품은 채, 그 시절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어주었던 공간들. 뜨거운 청춘의 광장이었던 그곳들의 풍경을 더듬어본다.   1981년, 7가와 후버 길 근처의 작은 술집 ‘여울’. 전직 통기타 가수가 운영하던 이곳은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들이 통기타 선율에 기대 시름을 내려놓고, 때로는 시계나 운전면허증을 맡긴 채 청춘을 마시던 낭만의 해방구였다. 주인의 셈법은 장사에 서툴렀을지언정, 그곳에 모인 이들의 마음만은 늘 풍요로웠다.   비슷한 시기, 라브레아 길의 ‘로즈가든’은 또 다른 설렘의 상징이었다. 가수 이장희 씨가 운영하던 이곳은 세련된 분위기와 예쁜 웨이트리스, 그리고 혹시나 마주칠지 모를 연예인에 대한 기대로 늘 북적였다. 훗날 라디오코리아와 신문사를 창간하며 언론인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그의 사업가적 면모가 처음 빛을 발한 곳이다.   3가길 ‘숲속의 빈터’는 한인타운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원래 유명 밴드마스터 이광수 씨의 술집 ‘별장’이었던 공간을 인수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DJ 박스를 갖춘 음악 카페로 탈바꿈시켰다. 신청곡 쪽지가 오가고 최신 음악이 흐르던 그곳은 현재 ‘올리브’ 가라오케 바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한인타운 ‘치맥’ 문화의 원조를 꼽으라면 단연 ‘황태자’다. 버몬트길에서 시작해 7가와 카탈리나로 이전하기까지, 바삭한 통닭과 시원한 맥주는 이민자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주인은 바뀌었어도 그 맛과 명성은 여전하다.   황태자 바로 옆, 지금은 22층 트윈 아파트가 솟아오른 자리엔 황태자 사장의 동생이 운영하던 ‘주막74’가 있었다. 현재 라스베이거스에서 ‘김치 바비큐’와 ‘야마스시’로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자신의 황금기였던 1974년을 기리며 주막의 이름을 지었다. 그의 바람처럼, 수많은 젊음이 그곳에서 자신만의 황금기를 보냈다.   그 시절의 맛과 인연은 꼬리를 물었다. 황태자 주방장 출신 사장님이 아들과 함께 7가 중앙일보 길 건너에 문을 연 맥주집 ‘OB베어’는 팬데믹 중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중앙일보 기자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다.   타운 술집에도 ‘규모의 시대’가 열렸다. 의외의 장소인 알바라도 길 히스패닉 타운의 ‘상류사회’는 멜로즈 ‘뱀부’ 중국집의 푸짐한 안주를 앞세워 대박을 터뜨렸고, 윌셔와 알렉산드리아 교차점 건물 2층에는 6000스퀘어피트 규모의 ‘베어스 케이브’가 등장했다. 파이버글라스를 수입해 동굴처럼 꾸민 파격적인 인테리어와 2000cc 맥주 타워는 매일 밤 200~300명의 손님을 끌어모았다. 이는 한인타운의 밤이 단순한 음주를 넘어 거대한 ‘산업’으로 변모하던 시기의 상징적 사건이었지만, 잦은 사건·사고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윌셔 길 아이매그닌 건물 3층에는 볼링 레인과 바(S바), 이자카야(아랑), 노래방(팜트리)이 결합된 복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들어서며 또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   지하철 공사는 한인타운의 지형도를 바꿨다. ‘영동설렁탕’ 사장님이 OB베어의 대항마로 열었던 ‘하이트광장’과 그 옆 ‘하네다’ 일식집은 건물이 수용되며 터를 옮겨야 했다. 하네다는 웨스턴에 맥주 중심의 ‘비어가든’으로 재탄생했고, 하이트광장 역시 올림픽길로 이전했다. 한 시대의 랜드마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공간이 그 자리를 채우는 변화의 서막이었다.   이 무렵, 채프맨 플라자의 커피숍 ‘감’은 페리아 나이트클럽 파트너들과 손잡고 대형 이자카야로 변신하며 성공 신화를 썼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타운의 트렌드를 이끌었지만, 팬데믹의 여파를 넘지 못하고 지금은 문을 닫았다. 넓은 패티오가 매력적이었던 윌셔 길 ‘스타카페’ 역시 파트너 간의 갈등으로 폐업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는 그곳들. 그곳은 단지 술과 음식을 팔던 가게가 아니었다. 고된 이민 사회를 함께 건너던 우리들의 거실이었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던 광장이었다. 불빛은 꺼졌지만, 그곳에 새겨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는 여전히 타운의 밤을 수놓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아지트 연대기 la 한인타운 황태자 사장 황태자 주방장

2025.06.22.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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