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마켓의 발전사는 LA 한인 사회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민 1세들에게는 고향의 맛을 찾을 수 있는 위안의 공간이었고, 새로운 이민자들에게는 정착에 필요한 정보와 일자리를 얻는 교류의 장이었다. 초기 한인타운의 상권은 올림픽 길을 따라 형성됐다. 현재 서독안경점 자리에 1969년 문을 연 ‘올림픽 식품점’이 그 중심이었으며, 그 주위로 한식당, 중식당, 떡집, 선물센터 등이 속속 들어서며 한인타운의 태동을 알렸다. 올림픽 마켓을 중심으로 한인 업소들이 자연스럽게 군락을 이룬 것이 상권 형성의 1세대였다면, 8가와 아이롤로 길(현재 99센트 스토어 및 히스패닉 쇼핑센터 위치)에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2세대 상권이 조성됐다. 1980년대 초반 이곳에 프리미엄을 표방한 ‘동서마켓’과 2층 규모의 동서 쇼핑센터가 들어서며 한인타운 상권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시간이 흘러 한인타운의 중심 상권이 8가를 넘어 웨스턴 길로 이동하면서, 동서마켓의 주축들은 1988년 3월 웨스턴 길에 신축된 코리아타운 플라자로 이전했다. 이들이 건물주 직영체제로 운영한 마켓이 바로 ‘플라자마켓’의 전신이다. 당시 버몬트 길과 6가 인근에 자리했던 ‘칼스마켓’은 올림픽 마켓, 동서마켓과 함께 ‘빅3’ 구도를 형성했다. 훗날 칼스마켓 경영진은 홀세일 비즈니스를 거쳐 70여 개의 매장을 거느린 히스패닉계 유통 강자 ‘수피리어 마켓’의 오너로 성장했다. 그 무렵 ‘웨스턴 마켓’이 웨스턴 본점과 함께 올림픽 마켓 건너편에 올림픽 분점을 개점하며 경쟁에 가세했다. 오렌지카운티의 ‘도레미 마켓’ 역시 3가와 웨스턴 길에 진출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이후 웨스턴 마켓의 고 김 회장과 오 회장이 웨스턴 길의 폐업한 본스(Vons) 마켓 건물을 인수해 ‘HK한국수퍼마켓’을 열면서, 한인 마켓의 ‘수퍼마켓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코리아타운 플라자몰이 문을 연 1988년, 하기환 회장과 김진수 회장은 올림픽 길의 알파베타(Alpha Beta) 마켓 리스권을 확보해 ‘한남체인’을 열었고, 고 이만성 사장은 웨스턴 길의 메이페어(Mayfair) 마켓 건물을 인수해 ‘가주마켓’을 개점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올림픽 마켓은 HK한국마켓 건너편에 2호점을 열었으나, 경쟁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폐업했다. 가주마켓은 베벌리 길, 가든그로브, 세리토스 등으로 지점을 확장했으나, 이만성 사장 사후 웨스턴 본점만을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반면 한남체인은 토런스, 부에나파크, 다이아몬드바를 넘어 동부 뉴저지까지 진출하며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 HK한국마켓은 투자그룹과 합작하여 갤러리아 올림픽점, 버몬트점, 밸리점을 잇달아 개점하며 멀티 지점 체제를 구축했다. HK한국마켓의 파트너 중 한 명은 독립하여 ‘그린랜드마켓’을 설립, 현재 밸리와 라스베이거스에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샌디에이고에서 시작된 ‘시온마켓’은 2009년 시티센터에서 개점한 뒤 버몬트 길로, 다시 8가 아씨마켓 자리에 신축된 건물로 두 차례 이전하며 입지를 다졌다. 시온마켓은 하와이안가든점을 폐점하는 대신, 부에나파크, 어바인, 조지아, 텍사스 등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후발주자였던 ‘프레시아’는 가든그로브와 토런스에 매장을 열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업했고, 토런스 지점은 한남체인이 인수하여 운영 중이다. 리틀도쿄 갤러리아몰에는 건물주가 직접 운영하는 동명의 ‘리틀도쿄 갤러리아 한국마켓’이 성업 중이다. 동부의 대형 식품회사 리브라더스의 ‘아씨마켓’이 1998년 8가에 진출, 저렴한 자사 제품을 앞세워 돌풍을 일으켰으나 건물 재개발 후 매장 확보에 실패하며 2015년 서부 소매 시장에서 철수했다. 반면, 동부의 또 다른 강자 ‘H마트’는 서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후 텍사스 등 미 전역으로 지점을 확장했다. 현재 미주 94개, 캐나다와 영국까지 총 112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54개 매장을 보유한 중국계 ‘99랜치마켓’을 규모 면에서 크게 앞질러 세계적인 아시안 마켓으로 성장했다. 한인 마켓은 LA 한인들의 삶과 함께 호흡해온 역사적 공간이다. 작은 식품점에서 시작해 미 전역과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형 유통 체인으로 성장한 그 발자취는, 낯선 땅에 뿌리내려 공동체를 형성하고 경제적 성장을 이뤄낸 한인 이민 사회의 위대한 여정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한인 마켓 한인 마켓 웨스턴 마켓 올림픽 마켓
2025.08.03. 19:00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시린 속을 데우던 음식. 가난했지만 잔칫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만들던 음식. 순대는 고려 시대, 돼지고기가 귀해 멧돼지를 잡아 내장에 채소와 피를 채워 먹던 것에서 유래했다. 한민족의 지혜와 생존력이 응축된 음식이다. LA한인타운의 순댓국 지형도는 지난 수십 년간 우리 이민 사회가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한 편의 역사서와 같다. LA 순대 역사의 서막을 연 두 기둥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버몬트 길 현재 ‘간빠이’ 자리에 있던 ‘함경도 아바이순대’는 타협 없는 원류의 맛을 고집했다. 진한 돼지 피 냄새가 코를 찌르는, 그야말로 ‘날것’에 가까운 이북식 순대는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의 순댓국 한 그릇은 실향의 아픔과 잃어버린 고향의 맛을 일깨우는 강력한 매개체였다. 반면, 6가와 알렉산드리아 플라자에 둥지를 튼 ‘서울순대’는 대중화와 사업화의 길을 택했다. 잡내 없이 깔끔하고 담백한 맛으로 폭넓은 고객층을 사로잡았고, 일찌감치 웨스턴 길과 세리토스에 지점을 내며 프랜차이즈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결국 자체 공장을 설립해 LA의 거의 모든 한인 마켓과 분식점, 주점에 순대를 공급하는 거대 공급망을 구축했다. 오늘날 우리가 어디서든 쉽게 맛보는 순대는 ‘서울순대’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탄생한 셈이다. 이들은 현재 코리아타운 플라자 푸드코트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세대가 터를 닦은 자리에 2세대 주자들이 등장하며 LA 순댓집은 본격적인 춘추전국시대를 맞는다. 특히 한인타운의 애호가들은 웨스턴 길의 ‘한국순대’파와 8가와 후버의 ‘8가순대’파로 나뉘어 자존심 대결을 벌이곤 했다. 필자는 ‘골수 한국순대파’였다. 자유로운 영혼의 사장님은 가게 문을 열고 싶을 때만 열었다. 그 앞을 지나다 문이 열려있으면, 그날은 무조건 순댓국을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그 예측 불가능함마저도 묘한 매력이었다. 하지만 팬데믹의 파고는 비켜가지 못했다. 테이크아웃으로 겨우 버티던 가게는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얼마 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8가순대는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주방을 지키는 사모님과 홀을 책임지는 사장님 단둘이 운영하던 한국순대와 달리, 8가순대는 탄탄한 시스템과 규모를 갖췄다. 물론 모든 도전이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함흥냉면가(家)의 큰아들이 지금의 ‘착한설렁탕’ 자리에 야심 차게 열었던 ‘웨스턴순대’는 ‘5.99달러’라는 파격적인 저가 경쟁으로 시장을 뒤흔들었다. 한때 가디나까지 지점을 확장했지만, 출혈 경쟁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폐업의 길을 걸었다. 한편 8가와 아드모어의 ‘돈돈이순대’는 비교적 후발주자임에도 벌써 9년의 업력을 쌓으며 꾸준함의 미학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순대는 전문점의 경계를 넘어섰다. ‘장터보쌈’, ‘장충족발’ 같은 보쌈·족발집에서 내놓는 순대 한 접시의 수준이 웬만한 전문점 못지않다. 3개 지점을 거느린 ‘진솔국밥’은 순댓국을 시키면 순대를 따로내어주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이러한 진화의 정점에는 ‘무봉리순대’가 있다. 올림픽 길에서 화려하게 시작해 웨스턴 길 시대를 거친 무봉리는 이제 식당을 접었다. 대신, 거대한 센트럴 키친에서 남가주, 라스베이거스, 댈러스, 하와이 등 총 18개 지점에 순대를 공급하는 식품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는 순댓국이라는 메뉴가 한인타운을 넘어 미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미주 현지 K-푸드 산업화의 성공적인 모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함경도 골짜기의 투박한 순대에서 시작해 미주 전역으로 뻗어 나가는 거대 유통망에 이르기까지, LA 순댓국 역시 우리 이민사나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낯선 땅에 뿌리내리기 위한 치열한 생존의 기록과 성공의 신화, 그리고 쓸쓸한 퇴장의 뒷모습이 모두 담겨 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에는 모든 이민자들의 땀과 눈물이 녹아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순대 골수 한국순대파 함경도 아바이순대 이북식 순대
2025.07.27. 18:39
두 평 남짓한 가게 앞, 낡은 화로 위에서는 붉은 양념이 보글거렸다. 떡과 어묵이 뭉근하게 익어가는 쟁반 주위로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빼곡히 둘러쌌다. 손가락만 한 미니 포크로 떡볶이 열 개에 백 원 하던 시절. 주인아저씨는 매의 눈으로 아이들이 먹는 떡 개수를 셌지만, 종종 아이들의 꾀에 넘어갔다. “아저씨, 저 이제 일곱 개 먹었어요.” 열 개를 훌쩍 넘긴 녀석의 말에도 그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깃꼬깃한 100원짜리 한 장 들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이들은 손님이자 자식 같았으리라. 장사는 역시 ‘목’이 전부였다. 보성중학교와 혜화동 로터리 중간, 혜화여고 길 건너편에 자리한 그 가게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아저씨가 떡볶이 팔아 건물을 샀다”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옆집 라면 한 그릇이 100원, 학교 앞 짜장면이 150원이던 시절, 주머니에 50원만 있어도 떡 다섯 알은 너끈히 먹을 수 있었다. 25원짜리 버스 회수권으로 떡볶이를 사 먹고 친구와 30분을 걸어 집에 가던 날들도 부지기수였다. 먹고 돌아서면 허기지던 그 시절, 유독 그 떡볶이가 위로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 이민 후 수년간 애타게 그리워 했던 떡볶이를 LA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의 웨스턴 길 ‘포2000’ 자리에 1980년대초 문을 연 ‘까르르’는 혁신이었다. 떡볶이는 물론, 소시지와 단무지가 들어간 한국식 김밥, 통얼음을 아날로그 제빙기로 갈아 만든 팥빙수까지. 한식당은 있었어도 ‘분식점’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했던 시절, ‘까르르’는 LA 한인 사회에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그전까지 70~80년대 LA 고등학생들의 약속 장소는 LACC 앞 값싼 불고기 덮밥집인 ‘요시노야’나 3가와 버몬트 인근 일본인이 운영하던 돈가스집 ‘알프스’ 정도가 고작이었다. ‘까르르’는 순식간에 젊은이들의 ‘행아웃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독주하던 ‘까르르’가 초심을 잃고 점차 한식집화 되어갈 무렵, 동서사우나 옆에 ‘코끼리 분식’이 등장했다. 떡볶이 외에도 냉면, 만두, 죽까지 메뉴를 확장하고 24시간 영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곧이어 버몬트와 올림픽 길에 ‘호돌이분식’과 ‘낙원집’이 가세하며 LA 코리아타운은 본격적인 ‘심야 분식 전쟁’에 돌입했다. 이후 6가, 지금의 ‘해장촌’ 자리에 문을 연 ‘그린하우스’는 당대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떡볶이와 김밥을 기본으로 돈가스, 캘리포니아롤, 우동 등 다채로운 메뉴를 선보였고, LA 최초로 테이블에 불판을 설치한 즉석 떡볶이까지 내놓으며 분식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그린하우스’의 대항마로 7가와 버몬트(현 77켄터키 자리)에 ‘해뜰날’이 생겨났고, 올림픽 길에는 손만두 전문점 ‘시누랑 올케랑’, 베벌리 길에는 ‘먹을래 싸갈래’가 문을 열었다. 3가와 웨스턴 ‘신당동 떡볶이’, 코리아타운 플라자 푸드코트의 ‘아우림’까지. LA 자생 분식점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최근에는 한국의 대형 떡볶이 프랜차이즈들이 속속 LA 원정에 나서고 있다. 마당몰과 부에나파크 소스몰에 입점했던 ‘스쿨푸드’는 전통 김밥 대신 스팸, 멸치, 불고기 등을 활용한 모던 롤로 인기를 끌었다. 6가 길은 떡볶이 격전지가 되었다. 카탈리나 교차로에 ‘조폭떡볶이’가, 노먼디 길에 ‘엽기떡볶이’가, 그리고 후발주자로 세라노 길에 ‘죠스떡볶이’까지 한국의 떡볶이 3대장이 차례로 깃발을 꽂았다. 8가 옥스포드와 가주마켓 내 ‘투존치킨’이 세컨드 브랜드로 선보인 ‘할매가래떡볶이’처럼 굵은 가래떡을 내세운 프리미엄 떡볶이도 사랑받고 있다. 혜화동 구멍가게의 백 원짜리 떡볶이에서 시작된 기억은 LA 코리아타운의 화려한 프랜차이즈까지 이어졌다. 떡볶이 한 그릇에는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시절의 추억과, 이역만리에서 고향의 맛을 재현해낸 이민자들의 치열한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월은 흘렀고 입맛도 변했지만, 떡볶이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소울푸드로 남아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떡볶이 전쟁 신당동 떡볶이 즉석 떡볶이 한국식 김밥
2025.07.20. 19:00
한인 이민자들에게 김밥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다.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소풍 날의 설렘이고, 낯선 땅에서 쉼 없이 일하던 부모님이 없는 식탁에 자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따뜻한 위로였다. 김밥 한 줄에는 고된 이민 생활의 애환과 그리움, 그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이 꽉 들어차 있다. LA 한인타운의 김밥 역사는 이민 사회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다. 타운을 대표하는 김밥집 ‘가주김밥’의 계보는 한인사회의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한다. 가주마켓 앞 우동집에서 시작된 이 김밥집은 마켓 재개발로 윌셔 길로 이전했고, 그 건물마저 지하철 공사 부지로 수용되면서 4가와 웨스턴에 ‘더김밥’이라는 새 이름으로 정착했다. 현재 ‘더김밥’은 한국마켓 내 ‘울엄마 김밥’도 함께 운영 중이다. 한편, 재개장한 가주마켓 안에는 새로운 주인이 ‘가주김밥’의 간판을 다시 내걸었고, 9가 로데오 갤러리아에도 ‘가주김밥 로데오점’이 문을 열었다. 이렇게 ‘가주김밥’ 두 곳과 ‘더김밥’, ‘울엄마 김밥’은 한 뿌리에서 나와 각자의 터전에서 같은 레시피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우동과 잔치국수가 유독 깊은 맛을 내는 것은 그 시작이 우동집이었던 역사에 기인한다. 타운 김밥업계의 또 다른 강자인 버몬트길의 ‘김밥천국’은 한국의 동명 프랜차이즈와 무관하게 이곳 이민 사회에서 자생한 독자적인 식당이다. 오히려 미국 내 상표권을 확보하며 자신만의 역사를 쌓았다. 작은 분식점으로 시작해 옆 가게 ‘강셰프’가 문을 닫자 그 자리를 인수해 확장하는 모습은, 치열한 한인타운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성장해 온 이민자들의 비즈니스 감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올림픽 갤러리아 마켓의 ‘바로김밥’은 한 장인의 화려한 경력을 응축한 곳이다. 그 시작은 전설적인 올림픽 한남체인 내 ‘열차우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생소했던 누드김밥과 각종 일식 롤을 선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때 처음 맛본 소프트셸 크랩 ‘스파이더롤’의 감동은 여전히 생생하다. ‘열차우동’ 매각 후, 사장님은 ‘캘리포니아 롤’ 체인 사업을 성공시키고 ‘옌스시’를 독자 경영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카페 콘체르토’ 등 외식 사업으로 잠시 외도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가장 큰 특기인 ‘롤’과 ‘김밥’으로 돌아와 ‘바로김밥’을 열었다. 전통 한국 김밥부터 화려한 일식 롤, 퓨전 유부초밥, 그리고 감동적인 가격의 회덮밥까지. 그의 손끝에서 김밥은 하나의 요리로 승화한다. 최근 부에나팍에 새 지점을 연 것은 그의 내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증명한다. 초기 마켓 김밥은 ‘복떡방’, ‘지화자’ 같은 떡집들이 떡을 납품하며 함께 판매하던 형태였다. 하지만 위생 규정상 상온 진열이 어렵고, 냉장 시 밥이 굳어 맛을 유지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 이는 개인이 마켓 내 부스를 임대해 직접 운영하는 현재의 효율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마켓 납품 없이 직판만으로 명성을 떨친 전설도 있었다. 버몬트 길의 ‘산수당’은 비싼 가격에도 ‘명품 김밥’으로 불리며 사랑받았으나, ‘지화자’에 인수된 뒤 올림픽 지점으로 이전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최근 트레이더 조의 냉동김밥이 공전의 히트를 치자, 너도나도 김밥집 창업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이미 포화상태인 한인타운 내에서의 경쟁은 무모해 보인다. 오히려 전문화된 메뉴로 주류 시장의 문을 두드리는 지혜가 필요할 때다. 트레이더 조나 홀푸드마켓 바로 옆에서 진짜 ‘프리미엄 김밥’으로 승부수를 띄우는 상상을 해본다. 이런 흐름 속에서 8가 ‘유부킹’, 피코 ‘킹밥’을 시작한 젊은 사장님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스팸 무수비를 특화해 틈새시장을 개척한 6가 ‘스파무 오키니와 오니기리’ 사장님과,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탐구하며 장인의 자리를 지키는 ‘바로김밥’ 사장님께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상이라도 드리고 싶다. 김밥 한 줄에 담긴 이들의 땀과 열정이 있기에, 우리 이민 사회의 맛과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세대교체 김밥 타운 김밥업계 김밥 역사 명품 김밥
2025.07.13. 18:48
바야흐로 냉면의 계절, LA한인타운에 ‘평양냉면 대전’이 펼쳐지고 있다. 8가 옛 마포갈매기 자리에 문을 연 ‘서관면옥’과 웨스턴길 옛 옴부그릴 터에 자리 잡은 ‘가빈’. 이 두 신흥 강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정통 평양냉면을 전면에 내세우며 치열한 경쟁 구도를 형성, 미식가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이들 냉면의 특징은 한마디로 ‘슴슴함’이다. 맑은 고기 육수에 으레 섞던 시원한 동치미 국물의 맛보다, 순도 높은 메밀국수를 삶아낸 면수(麵水)의 구수함이 지배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뽀얀 사골 국물의 설렁탕을 기존 LA 냉면의 표준이라 할 때, 이들 평양냉면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맑은 고기 육수 베이스의 곰탕 국물에 가깝다. 익숙한 새콤달콤함 대신, 육향과 메밀향의 미묘한 조화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사실 LA에 평양냉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역사는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가 현 육대장 자리에 있었던 ‘강서면옥’은 전설로 회자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즐겨 찾아 청와대에 육수를 납품했을 정도라는 서울 본가의 명성과 비법을 그대로 옮겨왔다. 당시 서울 본가의 ‘어머니’는 유학생 아들에게만 육수 비법을 전수했고, 그 탓에 며느리의 친정이 운영하던 올림픽가의 ‘세종회관’조차 감히 평양냉면 메뉴를 내지 못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아들이 한국으로 역이민을 떠나며 식당은 팔렸으되 조리법은 전수되지 않았고, LA 한인들은 그 깊은 맛을 추억 속에 묻어야 했다. 이렇듯 명맥이 끊겼던 정통 평양냉면의 귀환은 기존 LA 냉면 시장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고구마 전분을 섞어 가늘고 질긴 함흥냉면과 달리, 순메밀을 고집하는 평양냉면은 면발이 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끊어져 가위질이 필요 없다. 이북 실향민 출신인 아버지를 따라 첫 번째 먹어봤던 냉면은 함흥냉면이었던듯 하다. “아무리 질겨도 면은 잘라먹는 게 아니다”고 하셔서 먹다 숨이 막힐 뻔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자존심을 버리고 아주 많이 잘라 달라고 한다. 지난 40년간 LA의 냉면 시장은 사실상 ‘LA식 냉면’이라 부를 만한 독자적인 형태로 진화해왔다. 1980년대, 8가 버드나무 식당 자리에 자체 사옥과 넓은 주차장까지 갖췄던 ‘함흥면옥’의 위용이나, 웨스턴 길에서 갈비와 함께 평양식 냉면을 선보이며 LA 한식의 대명사로 군림했던 ‘우래옥’이 그 서막을 열었다. 우래옥의 전통은 ‘조선갈비’로 이어졌고, 수원갈비, 박대감, 강남회관 등 수많은 갈빗집들이 저마다의 스타일로 냉면을 내놓으며 ‘고기 후 냉면’이라는 공식을 완성했다. 이들의 냉면은 조금씩 달라도 결국 새콤달콤한 육수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LA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물론 그 사이에도 개성 강한 도전자들은 명멸했다. 90년대 초 3가에 문을 열어 하루 800그릇을 팔았다는 전설의 함흥냉면 전문점 ‘원산면옥’, 탈북 가수 김용 씨가 윌셔길에 창업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평양냉면 전문점 ‘모란각’이 대표적이다. 특히 모란각은 오렌지카운티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정통 평양냉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부에나파크 ‘아리수’와 더불어 물냉면을 시키면 비빔냉면을, 비빔냉면을 시키면 물냉면을 맛보기로 내어주는 ‘짬짜면’식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 외에도 냉동면을 독특하게 풀어내 24시간 분식 냉면 시대를 열었던 ‘코끼리분식’, 수십 년째 여름이면 주차 대란을 일으키는 칡냉면의 강자 ‘유천냉면’까지, LA의 냉면 지형도는 실로 다채롭다. 여기에 부산 피난민들이 메밀 대신 밀가루로 만들어 먹던 ‘부산밀면(항아리칼국수)’과 깨와 김가루를 듬뿍 얹은 ‘춘천막국수(춘천닭갈비)’까지 가세하니, 가히 ‘면의 춘추전국시대’라 할 만하다. 이러한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서관면옥’과 ‘가빈’이 들고나온 ‘슴슴한’ 평양냉면은 단순한 신메뉴가 아니다. 이는 40년간 굳어진 ‘LA식 냉면’의 관성과 미각에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과연 원조의 맛은 어떠했는가, 우리의 입맛은 어떻게 변해왔는가. 음식의 맛은 시대와 함께 변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듯 원형에 가까운 맛의 등장이 우리의 미각을 단련시키고 외식 문화의 지평을 넓힌다. 평양냉면의 귀환이 불러온 이 신선한 경쟁이 LA 한식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평양냉면 냉면 정통 평양냉면 평양냉면 메뉴 평양냉면 대전
2025.07.06. 19:00
1980~90년대만 해도 미국의 식당 내부 구조는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었다. 조리는 주방에서만 가능했다는 뜻이다. 손님이 테이블에서 생고기를 굽는다는 개념은 생소함을 넘어 불법 영업으로 간주됐다. 당시 LA 시건물안전국은 고기를 테이블 위에서 구우려면, 테이블마다 스프링클러와 자동 소화 시스템을 갖춘 주방 수준의 후드 시설을 설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대부분이 포기했지만, 이를 정면 돌파한 식당이 있었다. 버몬트길 현재 ‘국대고집’ 자리에 1983년에 개업한 ‘해운대 왕갈비’다. 과도하다고 할 만큼 완벽한 시설을 갖춘 이 식당은, 결과적으로 한식 테이블 바비큐 문화를 정착시킨 1세대 식당으로 기록된다. 이 식당에서 시작해 한인타운의 요식업계에 큰 획을 그은 이들이 이인천씨 형제들이다. 해운대 왕갈비가 대박을 거둔 이후 한동안 한인타운 요식업계는 이씨 형제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그 나머지로 분류될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라스베이거스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이들이 타운에 남긴 역사는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이씨 형제의 식당 계보를 정리하면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먼저 해운대 왕갈비를 시작한 사람은 큰 누나다. 큰형은 ‘황태자’, ‘신라부페’, ‘수라원’, 할리우드의 ‘란제리’ 클럽, 라스베이거스의 ‘김치바비큐’를 열었다. 둘째는 원산면옥, 진주곰탕, 미스터 순두부, 콜로라도의 ‘서울바비큐’, 라스베이거스의 ‘진주설렁탕’을 개업했다. 셋째가 이인천 사장인데 LA에서 ‘주막74’를 비롯해 클럽 ‘6th Ave’, 클럽 ‘360’, ‘노량진 회센터’를 운영했고 라스베이거스로 이주해서는 ‘진생바비큐’, ‘대장금’, ‘김치바비큐’에 이어 ‘야마 스시’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넷째는 ‘알배네’와 ‘미아리 칼국수’를 개업했다. 이씨 형제들의 사촌도 요식업계의 큰손이다. 바로 북창동순두부 창업자 고 이희숙씨의 남편 이태로씨다. 이씨 형제의 사돈의 팔촌이자 동네 친구도 LA서 식당을 열었다. 양지설렁탕과 양지감자탕의 이기영 사장이다. 이제는 2세들까지 가세해서 북창동 순두부의 경우 고 이희숙 사장의 세 아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큰형의 수라원은 딸이, 셋째의 딸도 라스베이거스 김치바비큐와 야마 스시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씨 형제들이 불을 지핀 테이블 쿠킹 문화는 이제 미국 전역은 물론 다양한 민족 요리에서도 일반화됐다. 양꼬치, 야키니쿠, 데판야끼, 샤부샤부, 핫팟 등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하고 있다. 불판의 기술적인 진화는 경이롭다. ‘타입1 시스템’은 기름과 연기를 걸러내는 고성능 후드를 뜻한다. ‘타입2 시스템’은 수증기를 위주로 배출하고 ‘다운 드래프트 시스템’은 연기를 테이블 아래로 흡수하는 장치다. 코끼리코처럼 천장에서 내렸다 올렸다 하는 자바라 스타일 후드도 최근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는 후드없이 자동 소화 시스템도 생략되고 간단한 필터시스템만 갖춘 전기 인덕션 스타일이 일반화 될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한식당의 불판에서 시작된 도전 정신은 이제 외식 산업의 경계를 넘어섰다. 노래방, K-뷰티, K-팝까지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모두가 어렵다고 고개를 저은 규제를 뚫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한인 1세대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한인타운의 풍성한 식문화는 이들이 흘린 땀과 도전의 결과물이다. 이씨 형제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도 한인 이민사의 한 페이지로 길이 남기를 바란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혁명 선도 라스베이거스 김치바비큐 클럽 라스베이거스 이씨 형제들
2025.06.29. 16:25
LA 한인타운의 밤은 수많은 이름들로 반짝였다 스러져 갔다.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을 품은 채, 그 시절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어주었던 공간들. 뜨거운 청춘의 광장이었던 그곳들의 풍경을 더듬어본다. 1981년, 7가와 후버 길 근처의 작은 술집 ‘여울’. 전직 통기타 가수가 운영하던 이곳은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들이 통기타 선율에 기대 시름을 내려놓고, 때로는 시계나 운전면허증을 맡긴 채 청춘을 마시던 낭만의 해방구였다. 주인의 셈법은 장사에 서툴렀을지언정, 그곳에 모인 이들의 마음만은 늘 풍요로웠다. 비슷한 시기, 라브레아 길의 ‘로즈가든’은 또 다른 설렘의 상징이었다. 가수 이장희 씨가 운영하던 이곳은 세련된 분위기와 예쁜 웨이트리스, 그리고 혹시나 마주칠지 모를 연예인에 대한 기대로 늘 북적였다. 훗날 라디오코리아와 신문사를 창간하며 언론인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그의 사업가적 면모가 처음 빛을 발한 곳이다. 3가길 ‘숲속의 빈터’는 한인타운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원래 유명 밴드마스터 이광수 씨의 술집 ‘별장’이었던 공간을 인수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DJ 박스를 갖춘 음악 카페로 탈바꿈시켰다. 신청곡 쪽지가 오가고 최신 음악이 흐르던 그곳은 현재 ‘올리브’ 가라오케 바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한인타운 ‘치맥’ 문화의 원조를 꼽으라면 단연 ‘황태자’다. 버몬트길에서 시작해 7가와 카탈리나로 이전하기까지, 바삭한 통닭과 시원한 맥주는 이민자들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최고의 조합이었다. 주인은 바뀌었어도 그 맛과 명성은 여전하다. 황태자 바로 옆, 지금은 22층 트윈 아파트가 솟아오른 자리엔 황태자 사장의 동생이 운영하던 ‘주막74’가 있었다. 현재 라스베이거스에서 ‘김치 바비큐’와 ‘야마스시’로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그는, 자신의 황금기였던 1974년을 기리며 주막의 이름을 지었다. 그의 바람처럼, 수많은 젊음이 그곳에서 자신만의 황금기를 보냈다. 그 시절의 맛과 인연은 꼬리를 물었다. 황태자 주방장 출신 사장님이 아들과 함께 7가 중앙일보 길 건너에 문을 연 맥주집 ‘OB베어’는 팬데믹 중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3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며 중앙일보 기자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다. 타운 술집에도 ‘규모의 시대’가 열렸다. 의외의 장소인 알바라도 길 히스패닉 타운의 ‘상류사회’는 멜로즈 ‘뱀부’ 중국집의 푸짐한 안주를 앞세워 대박을 터뜨렸고, 윌셔와 알렉산드리아 교차점 건물 2층에는 6000스퀘어피트 규모의 ‘베어스 케이브’가 등장했다. 파이버글라스를 수입해 동굴처럼 꾸민 파격적인 인테리어와 2000cc 맥주 타워는 매일 밤 200~300명의 손님을 끌어모았다. 이는 한인타운의 밤이 단순한 음주를 넘어 거대한 ‘산업’으로 변모하던 시기의 상징적 사건이었지만, 잦은 사건·사고로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윌셔 길 아이매그닌 건물 3층에는 볼링 레인과 바(S바), 이자카야(아랑), 노래방(팜트리)이 결합된 복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들어서며 또 하나의 명소가 되었다. 지하철 공사는 한인타운의 지형도를 바꿨다. ‘영동설렁탕’ 사장님이 OB베어의 대항마로 열었던 ‘하이트광장’과 그 옆 ‘하네다’ 일식집은 건물이 수용되며 터를 옮겨야 했다. 하네다는 웨스턴에 맥주 중심의 ‘비어가든’으로 재탄생했고, 하이트광장 역시 올림픽길로 이전했다. 한 시대의 랜드마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공간이 그 자리를 채우는 변화의 서막이었다. 이 무렵, 채프맨 플라자의 커피숍 ‘감’은 페리아 나이트클럽 파트너들과 손잡고 대형 이자카야로 변신하며 성공 신화를 썼다. 세련된 인테리어로 타운의 트렌드를 이끌었지만, 팬데믹의 여파를 넘지 못하고 지금은 문을 닫았다. 넓은 패티오가 매력적이었던 윌셔 길 ‘스타카페’ 역시 파트너 간의 갈등으로 폐업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아련해지는 그곳들. 그곳은 단지 술과 음식을 팔던 가게가 아니었다. 고된 이민 사회를 함께 건너던 우리들의 거실이었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던 광장이었다. 불빛은 꺼졌지만, 그곳에 새겨진 그때 그 시절 이야기는 여전히 타운의 밤을 수놓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아지트 연대기 la 한인타운 황태자 사장 황태자 주방장
2025.06.22. 19:02
LA는 한식 맛집이 유난히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엔 현지인들이 줄 서서 먹는 진짜 미국식 로컬 맛집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이민자 도시라는 특성 덕분에 다양한 음식 문화가 섞인 LA에는, 특정 세대와 지역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맛집들이 여전히 성업 중이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안드레스(Andre’s)’다. LA 토박이라면 한 번쯤은 먹어봤을 법한 이곳은, 한인들에게 떡볶이처럼 편안한 ‘콤포트 푸드’다. 넉넉한 양과 부담 없는 가격, 변함없는 맛 덕분에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모두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조각 피자, 스파게티, 시저 샐러드, 갈릭 브레드 등 기본 메뉴도 충실하다. 1962년부터 파머스마켓 맞은편, 홀푸드 옆에서 영업하던 이곳은 최근 재개발로 인해 윌셔로 이전했으며, 새 주소는 한인들에게 익숙한 옛 ‘익스프레스 나이트클럽’ 자리다. 7가와 알바라도 근처 ‘랭거스 델리(Langer’s Deli)’의 대표 메뉴 ‘넘버 19’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는 LA 고유명사처럼 통한다. 유대계 전통에서 유래한 음식이지만, 이곳은 고기를 찌는 방식으로 부드러움을 더해 차별화했다. 녹듯이 부드러운 파스트라미에 오이 피클을 곁들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재개발 얘기도 있었지만 현재는 변동 없이 운영 중이다. 한밤중 출출할 때 찾게 되는 명소도 있다. 24시간 운영되는 ‘오리지널 타미스(Original Tommy’s)’는 매콤한 칠리버거로 유명하다. 대표 메뉴는 더블 칠리 치즈버거 세트로, 프렌치프라이와 콜라까지 합치면 1600칼로리에 달하는 ‘헤비급’ 조합이다. 노란 고추 한입과 칠리버거의 조화는 마니아들이 극찬하는 맛이다. 로티서리 치킨을 좋아한다면 멜로즈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치킨 카페(California Chicken Cafe)’를 추천한다. 8피스 다크미트 스페셜을 주문하면 넓적다리와 닭다리 4조각에 샐러드와 스팀드 라이스가 함께 나온다. 여기에 무제한 제공되는 토마토 살사와 과카몰리를 듬뿍 얹어 먹는 게 ‘정석’이다. 곁들여 나오는 피타 브레드는 지중해 감성을 더한다. 라치몬트에 있는 ‘와인 앤 치즈 샵(Wine & Cheese Shop)’의 ‘넘버 5’ 샌드위치는 바삭한 바게트에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비네거, 프로슈토, 모차렐라, 아르굴라가 어우러진 완성도 높은 메뉴다. LA 최고의 샌드위치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가 있다. ‘필리페(Philippe the Original)’의 프렌치 딥 샌드위치는 실수에서 탄생한 전설적인 메뉴다. 로스트비프 샌드위치가 국물에 빠진 걸 맛본 손님이 반해 입소문을 탄 케이스. 다만 요즘은 맛집이라기보다는 관광 명소에 가까워졌다는 평가도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핑크스 핫도그(Pink’s Hot Dogs)’도 언급할 수 있다. 라브레아 거리의 명물로, 마돈나가 새벽 리무진을 타고 와 핫도그를 사 먹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세계 각국 스타일의 핫도그를 맛볼 수 있는 재미난 공간이다. 피자를 좋아한다면 ‘피자리아 모짜(Pizzeria Mozza)’를 빼놓을 수 없다. 모차렐라 치즈 애호가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이곳은 마르게리타 피자부터 각종 시즈널 메뉴까지 정갈하고 정성스러운 맛을 자랑한다. 다이닝은 평일 오후 5시, 주말 낮 12시부터 가능하며 투고는 매일 낮 12시부터 제공된다. 한인들 사이에서 ‘후버 타코’로 불리는 ‘엘 타우리노 타코(El Taurino Taco)’는 올림픽과 후버 근처에 있다. ‘킹 타코’의 사촌 격으로, 비슷한 스타일의 핫소스를 사용하는 게 특징이다. 처음 방문한다면 소고기(카르네 아사다)와 돼지고기(알 파스토) 타코에 핫소스를 듬뿍 뿌려 먹어보자. 음료로는 멕시코식 식혜 같은 ‘오르차타(Horchata)’가 잘 어울린다. 해산물이 당긴다면 레돈도비치 피어로 향하자. 많은 이들이 바다 위 ‘한국 횟집’을 찾지만, 입구 쪽에 위치한 ‘해변 횟집’도 괜찮은 선택이다. 던지니스 크랩 한 마리와 마닐라 조개탕, 생새우까지 곁들이면 푸짐한 한상이 완성된다. 새우 머리는 튀겨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게 팁이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인앤아웃(In-N-Out)’이다. 오래 캘리포니아에 살다 보면 ‘인앤아웃’에 대한 애정은 자연스레 생긴다. 맥도널드는 ‘정크푸드’, 쓰리가이스나 쉑쉑은 ‘침입자’처럼 느껴질 정도로 인앤아웃에 대한 로컬의 자부심은 강하다. 개인적으로는 패티 한 장짜리 치즈버거에 구운 양파, 추가 채소와 토마토를 요청하는 게 최애 조합이다. 프렌치프라이는 ‘애니멀 스타일’로, 혹은 번을 빼고 양배추로 싸 먹는 ‘프로틴 스타일’도 인기다. 이 메뉴들은 정식 메뉴판엔 없지만, 현지인들 사이에선 일종의 ‘비밀 코드’처럼 공유된다. 소개한 맛집들은 대체로 관광객보다 LA 현지인들이 꾸준히 찾는 곳이다. 줄 서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기다릴 가치가 있는 진짜 로컬의 맛이 여기에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맛집 로컬 맛집들 한식 맛집 대표 메뉴
2025.06.15. 12:23
이번 칼럼은 번외편이다. LA한인타운의 맛 대신 ‘흥’을 다뤄볼까 한다. 뜨거웠던 그 시절, LA 나이트클럽의 역사를 시간여행 하듯 함께 따라가 본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된 그곳들의 이야기다. 미국서 학교에 다닌 60대 한인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전설의 클럽은 1980년대 마리나 델 레이 바닷가에 위치한 ‘캡틴스 월프’다. 주말이면 한인을 비롯해 동양계 대학생들의 열정이 폭발하는 클럽이었다. 당시만 해도 각 대학 학생회에서 교내 식당을 빌려 하우스파티를 여는 곳이 고작이었던 터라 한인 젊은이들이 춤추고 놀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디스코 열풍이 지나고 춤에 목말라 있던 시대였기에, 그 열기는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했다. 비슷한 시기 타운 클럽을 이끌던 업소는 베벌리길의 ‘투모로우’였다. 밴드와 라이브 공연이 중심이었던 이 클럽은 ‘백바지’, ‘백구두’의 젊은 오빠들이 즐겨 찾았다. 현재는 윌셔길에 있던 ‘익스프레스 나이트클럽’이 이곳으로 이전해 ‘엑스프레스 가라오케’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80년대 후반, 6가와 맨해튼 인근 지금의 ‘대도식당’ 자리에 유학생 선배들이 ‘탱고’라는 클럽을 열었고, 한참 후에 한국의 유명 무기상이 된 따님을 두신 사장님이 인수하여 ‘플라밍고’로 이름을 바꾼다. 이 따님은 2대 사장으로, 뉴욕에서 건너온 디자이너와 함께 파격적인 인테리어로 클럽을 대성공시킨다. 이 디자이너가 후에 전설적인 요구르트샾 ‘핑크베리’를 만든 고(故) 영 리씨다. 1990년대 타운은 바야흐로 나이트클럽 전성기를 맞았다. 선셋길에 한인 유흥업계를 대표하는 새로운 클럽 ‘아마존’의 등장이 그 시초를 알렸다. 이전까지의 한인 클럽들은 밴드와 가수가 있는 포맷이었지만, 아마존은 한국의 이태원 트렌드를 따라 DJ 중심의 클럽 문화를 도입하며 한인 DJ 나이트의 출발점이 됐다. 이후 한 투자가들이 윌셔길의 ‘록앤로빈’이라는 일본계 클럽을 인수해 플라밍고를 디자인한 영 리를 고용해서 ‘스팍스’라는 초대형 클럽으로 재탄생시킨다. 이후 이 클럽은 ‘벨벳룸’, ‘페리아’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한인타운 최고의 클럽 자리를 이어갔다. 영 리가 디자인한 또 다른 클럽으로는 웨스턴길에 ‘르 프리베’가 있었다. 시연부페 자리로 2층 단독건물에 넓은 주차장까지 갖추고 이층에는 일층 댄스홀을 내려다볼 수 있는 VIP룸까지 갖춘 타운 최대의 시설이었다. 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여피스’는 윌셔 선상에 있던 작고 어두웠던 흑인 클럽을 인수 후 대형 나이트로 확장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테리어가 바뀔 때마다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참 동안 ‘카낙’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다가 건물 주와의 문제로 지금은 문을 닫았다. ‘사가’는 여피스의 성공을 따라 윌셔와 옥스퍼드 길 코너에 오픈했다. 이후 ‘밸파레’라는 이름으로 리뉴얼되며 2층 천장 높은 공간과 입구의 기도(도어맨), ‘물갈이’ 시스템으로 최고의 클럽으로 등극했다. 2000년대 초반 선셋과 바인이 만나는 타워 20층에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한인이 운영하는 ‘클럽 360’이 있었다. 이곳은 미국 유명 연예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명소로, ‘클럽 란저리’를 포함해 LA 클럽계를 장악했던 이씨 형제가 운영했던 곳이다. 이들은 지금도 성업중인 타운 레스토랑 ‘황태자’를 일군 이들이다. 당시 타운 클럽 문화는 주류 신문에까지 등장했다. LA타임스는 2002년 7월25일자에 타운 클럽들을 소개하면서 웨이터가 여성손님을 끌어서 남성손님의 테이블에 앉히는 ‘부킹(Booking)’문화에 대해서 보도했다. 웨스턴길의 ‘카페 모네’는 카페에서 클럽으로 변신하며 ‘콤마 나이트클럽’이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젠 브루어리’로 전환된다. 한편, 알바라도 인근 파크 뷰 호텔 안에 잠깐 등장한 ‘XOXO’는 짧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남겼다. 업계를 평정하자, 기존 클럽 업주들이 단합해 시의원과 로비를 벌여 결국 문을 닫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시의원은 이후 다른 비위로 구속됐다. 이 클럽은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영화 바디가드 속 아카데미 시상식장 촬영지로도 유명한 장소였다. 요즘 한인타운내 가장 핫하다는 ‘마마라이언’은 6가와 웨스턴 코너에 위치해 있다. 이름은 80년대 같은 자리에 있던 전설적인 클럽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과거 ‘식스애비뉴’, ‘줄리아나’, 그리고 ‘지직스’라는 이름으로 여러 클럽들이 영업했는데, 특히 지직스에서는 영화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한인 웨이트리스를 만나 결혼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탄생하기도 했다. 현재 타운에서 유일하게 공연형 클럽 분위기를 유지하는 ‘테라코타’는, 원래는 윌턴 시어터 뒤풀이 장소로 유명했던 ‘클럽 아틀라스’였다.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한인 운영의 레스토랑 ‘오퍼스’로 재오픈했고, 지금은 주말 중심의 베뉴형 클럽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운타운의 히스패닉 베뉴인 ‘마얀스’ 옆에 생긴 한인 운영 클럽 ‘벨라스코’는 한때 최고의 공연장이었으며, 클럽 ‘익스체인지 LA’와 함께 동양인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팬데믹 직전, 글로벌 공연 기업 ‘라이브 네이션’이 인수하며 위기를 피해갔지만, 정작 라이브 네이션은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고 사우디 국부펀드의 구제 없이는 파산 직전까지 갔던 아이러니를 남겼다. 1990년대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퇴했던 타운의 클럽 문화가 30여 년 만에 조금씩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문 닫혀 있던 클럽 자리에 대한 문의가 여기저기서 오고 있다. 타운의 ‘흥’은 부활할 수 있을까.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전성시대 이야기 익스프레스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 전성기 한인 클럽들
2025.06.08. 17:42
1978년 LA한인타운 6가 길에는 ‘야시’라는 술집이 희미한 네온을 깜빡였다. 이곳은 훗날 라디오코리아의 유명 DJ가 운영하던 음악 카페로 바뀌었다가, 1997년 LA 소주방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단성사’로 전설의 서막을 올렸다. LA 최초의 실내 포장마차인 단성사의 등장은 단순한 술집 하나가 생긴 것을 넘어, 한국의 정취와 위안을 선사하는 문화적 구심점이 탄생했음을 의미했다. 단성사의 실내 포장마차 콘셉트는 웨스트할리우드의 회전초밥집 ‘모모야마’에서 영감을 얻었다. 웨스트할리우드 회전초밥집 ‘모모야마’에서 일하던 스시 셰프의 한마디, “실내에 진짜 포장마차를 지어보는 건 어때?” 이 무모해 보이는 아이디어는 LA 한인타운 밤 문화의 지형도를 바꿀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됐다. 운명처럼, 비슷한 시기 소주가 하드리커에서 비어앤와인 카테고리로 법적 분류가 변경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는 LA 최초로 테이블 위에 소주병을 당당히 올려놓고 마실 수 있는 ‘소주방’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단성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2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매일 저녁이면 다양한 인종의 손님들이 20~30명씩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이들에게 단성사는 K-컬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타운의 소주방은 단순한 술집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고된 이민 생활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해방구이자 주머니 가벼운 유학생들에겐 넉넉한 인심의 안주와 함께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아지트였다. 단성사의 성공은 이러한 한인들의 잠재된 갈증을 정확히 꿰뚫었기에 가능했다. 단성사의 유전자는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첫 매니저는 독립해 ‘뒷골목’을, 두 번째와 세 번째 매니저는 버몬트 길의 ‘고래섬’을 인수해 ‘고포차’를 열었다. 이들은 단성사에서 체득한 운영 노하우와 포장마차의 정서를 자신들만의 색깔로 재해석하며 소주방 열풍을 확산시켰다. 단성사 이전, LA에서 소주는 ‘귀한 몸’이었다. 하드리커 라이선스가 없는 대부분의 식당에선 판매 자체가 불법이었고, 구할 수 있다 해도 주전자에 몰래 담아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시절, 8가 길 ‘R Bar’ 자리에 있던 ‘8가 식당’은 빨간 두꺼비 소주를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지만, 사장은 소주보다 양주 판매에 더 치중했다. 단성사 성공 후 부랴부랴 실내 포장마차 콘셉트로 변신을 꾀했지만, 당시 8가의 험한 동네 이미지는 발목을 잡았다. 시간이 흘러 6가 ‘채프맨 플라자’에는 젊음의 거리다운 소주방 ‘토방’이 문을 열었다. 토속적인 인테리어와 폐쇄형 파티오는 아늑한 포장마차 분위기를 자아냈다. 클럽 매니저 출신 부부의 감각적인 운영 덕에 초반부터 문전성시를 이뤘고, 이들은 이후 ‘월매’, ‘초막’ 등을 거쳐 현재 발렌시아에서 새로운 한식당을 준비 중이다. 소주방 열풍이 절정에 달했을 때, 4가와 웨스턴에는 삼형제가 의기투합한 ‘종로포차’가 등장했다. 여러 부침 끝에 지금은 페르시안 식당 ‘테헤란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삼형제 중 막내는 12가와 웨스턴 ‘옛골’ 쇼핑센터에서 ‘치맥’을 운영하며 외식업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히카리’는 채프맨 플라자의 일식집이지만 소주방 느낌이 강한 이자카야였다. 주로 사케를 소주처럼 즐기던 곳으로, 현재는 일본 스시 프랜차이즈 ‘스시 잔마이’에 인수되어 7월 오픈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8가 길의 ‘짠’은 웨이터 경험이 있던 젊은 친구들이 모여 시작한 소주방이다. 젊은 감성으로 또래 손님들에게 어필해 성공했고, 초기 파트너 중 한 명은 이후 다양한 식당 브랜드를 런칭하다가 최근엔 ‘에그턱’이라는 에그샌드위치 브랜드로 대박을 터뜨렸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에도 등장했던 ‘꿀밤 허니나이트’ 같은 이름의 소주방도 있었다. 패기 넘치는 젊은 부부가 감각적인 공간을 운영하며 주목받았던 곳이다. 야외 포장마차 콘셉트로 성공한 ‘똥꼬포차’는 식당 ‘무대포’를 성공시킨 사장님의 또 다른 작품이다. 현재는 텍사스로 이전해 ‘무대포 KBBQ’를 성공시키고 있으며, 최근엔 ‘어원’ 사장님에게 인수되어 계속 성업 중이다. 백종원 브랜드의 ‘한신포차’는 시티센터 3층에서 닭발과 주먹밥을 필두로 프랜차이즈의 안정된 맛과 야외 파티오의 매력을 앞세워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외에도 젊은 감각의 8가 ‘마징가’, 윌셔로 이전한 ‘불이야’, 야간업소 종사자들의 새벽 해장국집 같았던 ‘봉숭아학당’, 그리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막걸리와 동동주로 특유의 분위기를 자랑했던 3가의 ‘색동저고리’까지, LA의 소주방들은 타운의 밤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채웠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소주방 소주방 열풍 la 소주방 단성사 성공
2025.06.01. 13:15
곱창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소의 내장을 버리지 않고 활용했던 지혜로운 음식이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귀중한 재산이자 노동력이었기에,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살코기는 물론 내장까지 버릴 것 없이 모두 요리에 활용했다. 특히 곱창은 소의 부산물 중에서도 맛과 영양이 뛰어나 서민들의 귀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도 곱창을 이용한 요리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탕이나 전골, 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곱창의 특징이자 호불호가 갈리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곱창 속에 차 있는 쫀득쫀득한 액체다. 그 정체는 소장 안에 남아있는 수분, 지방과 소화액의 덩어리다. 신선한 곱창은 소의 종류나 품질에 상관없이 곱이 두툼하게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축 후 시간이 오래 지났거나 냉동한 곱창은 곱이 잘 차오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곱의 양이 곱창의 품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의 장은 부위별로 이름과 식감이 다르다. 곱창은 소의 소장으로, 안에 들어있는 ‘곱’이 고소하고 진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대창은 소의 대장으로 지방이 많아 부드럽고 기름진 맛이 일품이다. 막창은 소의 네 번째 위로 다른 내장 부위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 쫄깃쫄깃한 식감이 매력이다. 특양은 소의 첫 번째 위 중 살이 붙은 양질의 부위를 말한다. 쫄깃함과 은은한 고소함으로 미식가들에게 사랑받는다. 이처럼 곱창은 다양한 부위의 매력을 한 번에 즐길 수 있어 술안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LA 한인 이민사에서 곱창집 역시 한인들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얼큰한 곱창전골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타지에서의 어려움을 잊고, 고향의 맛과 분위기를 느끼며 위로를 얻는 곳이다. 특히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곱창집은 낯선 땅에서 삶의 활력을 되찾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한때 LA 곱창집은 ‘양마니’, ‘별곱창’, ‘아가씨곱창’의 3파전이 치열했다. 올림픽길에 위치했던 양마니는 한국 유명 곱창 브랜드의 직영점으로 시작하여 한인 사장 인수 후에도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4가와 웨스턴, 옛 ‘풍무’ 자리에 확장 이전하여 성업 중이며, 롤랜드하이츠 지점 또한 운영되고 있다. 한때 6가 일대를 장악했던 곱창 브랜드는 별곱창과 ‘별대포’였다. 특히 드럼통 테이블이 놓인 대폿집 스타일의 별대포는 주당들의 아지트로 불렸으나, 건물 재개발로 문을 닫았다. 현재는 별곱창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아가씨곱창은 원래 강호동 백정의 서브 브랜드로 출발했으나, 한국 본사와의 계약 종료 후 독자적인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올림픽길의 ‘연발탄’, 8가의 ‘마장동곱창’까지 가세하며 곱창 전성시대를 이뤘다. 하지만 현재는 상당수 가게가 문을 닫고, 양마니, 별곱창, 왕창, 아가씨곱창 네 곳이 LA 곱창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송학’ 또한 한때 LA 전역을 휩쓸었던 곱창 브랜드다. ‘학산’으로 시작하여 아티시아, 어바인, LA 웨스턴길, 샌디에이고까지 확장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상호를 변경했으며, 송학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은 샌디에이고 지점뿐이다. 송학 사장은 이후 ‘X-Fish’라는 무제한 스시집과 ‘강남스테이션’ 무제한 바비규로 브랜드를 전환하며 외식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 LA 6가에 자리했던 학산은 현재 다른 고깃집인 ‘대성로’로 바뀌었으며, 학산 본점은 토런스에 한 곳 남아 있다. ‘왕창’은 학산 출신으로, 현재 부에나파크와 LA 6가에서 성업 중이다. 이들 곱창집의 원조 격인 학산은 아가씨곱창 주방장 출신 사장이 개척한 브랜드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곱창의 역사는 지금도 LA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이야기 곱창 곱창 브랜드 곱창 전성시대 la 곱창
2025.05.26. 15:23
LA한인타운의 미식 지형도를 논할 때 ‘코리안 바비큐(K-BBQ)’는 빼놓을 수 없는 상징이다. 지글거리는 불판 위 익어가는 고기 냄새는 국적 불문하고 많은 이들을 유혹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무제한 고깃집(AYCE BBQ)’은 한인타운 외식업계의 독특한 진화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그 역사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웨스턴과 멜로즈 인근에 문을 연 ‘청운부페’를 만나게 된다. 뷔페 형식이긴 했으나 고기에 방점을 찍고 3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이곳은, 초기 무제한 고기 제공 업소의 원류 격이다. 청운부페 이후 한동안 무제한 고기 뷔페는 장례식 후 식사 장소 정도로만 머물렀다. 정체되어 있던 무제한 고기 시장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것은 바로 2000년에 등장한 ‘마당쇠’였다. 파격적인 가격(점심 13달러, 저녁 17달러)에 갈비, 주물럭, 막창 등 한인 선호 부위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콘셉트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나아가 옆 건물에 ‘벌몬 정육점’을 열어 소비자가 원하는 부위를 따로 구매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단순한 식당을 넘어선 사업 확장 시도로 평가받는다. 마당쇠가 무제한 고깃집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면, ‘무대포’는 ‘대형화’와 ‘주류화’의 물꼬를 텄다. 기존 상가 건물에서 벗어나 독립 건물을 개조, 높은 천장과 세련된 인테리어를 갖춘 무대포는 타인종 고객들에게도 어필하며 대형 무제한 고깃집의 새로운 성공 모델을 제시했다. 외국인 고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또 다른 대형 업소로는 ‘추풍령’이 있다. 알함브라에 2호점을 냈다가 매각하기도 했지만, 한인타운 내 옛 ‘쌈’ 자리에는 ‘서울소울’을, 버몬트 길 옛 ‘불판’ 자리에는 추풍령 3호점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무제한 고깃집은 빠르게 세분화되었다. 타인종 고객들에게 인기 있는 ‘불고기하우스’, ‘해장촌’, ‘쭈꾸쭈꾸’, ‘AYCE BBQ & Sushi’ 등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며, 20달러대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주로 히스패닉 고객층을 공략하는 ‘캐슬’과 ‘달대포’ 등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제한 고깃집 시장의 ‘고급화’를 선도한 것은 ‘우국’이었다. 당시만 해도 무제한은 저가라는 인식이 강했으나, 우국은 세련된 인테리어와 엄선된 고급 부위만을 제공하며 1인당 30달러 이상의 ‘하이엔드 무제한 BBQ’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사실 초기에는 단품 메뉴 중심의 고급 고깃집을 구상했으나, 무제한 BBQ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간파하고 과감히 콘셉트를 수정한 것이 주효했다. 한인타운 본점에 이어 알함브라 지점까지 성공시키며 ‘고급 무제한’의 가능성을 증명했고, 이는 이후 상장 기업인 ‘젠바비큐’의 초기 모델이자, ‘샤부야’ 등 외식 브랜드를 성공시킨 경영진의 기반이 되었다. 최근 한인타운에는 새로운 세대의 무제한 고깃집들이 출사표를 던지고 있다. 이미 업계 최고 수준의 매출을 기록 중이라는 ‘강남스테이션’, 와규 등 최고급 메뉴를 내세운 ‘무한 BBQ’, 그리고 ‘마당쇠’의 창업자가 새롭게 선보인 대형 매장 ‘청담 BBQ’ 등이 치열한 경쟁을 예고한다. 사실 고기 중심의 ‘무제한 뷔페’라는 개념의 원류를 따지자면, 브라질리언 바비큐(슈하스코)를 빼놓을 수 없다. 서버들이 테이블을 돌며 다양한 종류의 구운 고기를 직접 썰어주는 ‘로드리지오’ 방식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사랑받아왔다. 한인타운의 ‘M그릴’이나 베벌리힐스의 ‘포고 데 차오’ 같은 곳들은 이러한 고기 뷔페 시스템의 자부심을 지키고 있으며, ‘뷔페는 우리가 먼저’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한편, LA 한인타운에서 시작된 무제한 고깃집의 성공 신화는 주류 시장으로 확장되어 상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우국 경영진과도 연관 있는 ‘젠바비큐’는 터스틴과 알함브라에서 시작해 주로 외국인 고객을 겨냥한 AYCE BBQ 전략을 펼쳤다. 반찬 아웃소싱, 대형 물류 시스템 구축 등 한식당이 겪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한 결과, 3년 전 미국 주식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하는 쾌거를 이루며 K-BBQ AYCE 모델의 사업성을 증명했다. 청운부페의 소박한 시작부터 마당쇠의 대중화, 무대포의 대형화, 우국의 고급화, 그리고 젠바비큐의 상장에 이르기까지, LA 한인타운의 무제한 고깃집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해왔다. 이는 단순한 식당가를 넘어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며 성공 신화를 써온 한인 외식업계의 저력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과연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다음 주자는 누가 될지, K-BBQ AYCE의 진화는 어디까지 이어질지 자못 궁금해진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무제한 고깃집 무제한 고깃집 무제한 고기 초기 무제한
2025.05.18. 18:46
한국인의 소울푸드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설렁탕과 곰탕은 단순한 국밥을 넘어 역사가 담긴 뜨거운 위로다.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설렁탕은 조선시대 임금이 백성을 위해 풍년을 기원하며 밭을 갈던 선농단(先農壇) 제례 후, 참여자들에게 소를 잡아 끓여 나누어 주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선농탕’이라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설렁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반면 곰탕은 ‘고음탕(膏陰湯)’에서 유래했다는 설처럼, 고기와 뼈를 오랫동안 ‘고아’ 만든 국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곰탕의 ‘곰’이 푹 삶는다는 뜻의 순우리말 ‘고다’에서 왔다는 해석도 있다. 전통적으로 설렁탕은 소의 사골, 도가니, 잡뼈 등을 푹 고아내 뽀얗고 탁한 국물이 특징이며, 여기에 양지 등 고기를 함께 넣고 국수 사리와 수육을 곁들여 먹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곰탕은 사태나 양지 등 고기 위주로 맑게 끓여내는 것이 정석이며, 수육이나 양, 곱창 등을 추가하기도 한다. 맑고 개운한 국물 맛이 곰탕의 매력이다. 하지만 바다 건너 이역만리, LA 한인타운에서는 이 엄격한 경계가 자주 무너진다. 어쩌면 이것이 디아스포라 한식의 자연스러운 변주이자 미학일지도 모른다. 대표적인 예가 ‘영동설렁탕’이다. 육안으로는 맑은 국물의 곰탕에 가깝지만, 내용물은 설렁탕 재료에 충실하다. 이곳에서는 주전자에 담긴 깍두기 국물을 기호에 맞게 부어 넣어, 맑은 국물에 깍두기 특유의 시원함과 감칠맛을 더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풍미를 완성한다. ‘설가 진주곰탕’ 역시 명칭은 곰탕이지만, 사골을 고아낸 듯 뽀얀 국물과 푸짐한 고기 구성은 영락없는 설렁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상호 앞의 ‘설가(雪家)’가 눈(雪)처럼 뽀얀 국물을 의미하거나 설렁탕(雪濃湯)에서 힌트를 얻은 것일까 추측해보지만, 설렁탕과 곰탕의 구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최근에는 사골을 함께 넣어 끓인 ‘사골곰탕’까지 등장하며 이 경계는 더욱 모호해졌다. 라스베이거스의 명소로 꼽히는 ‘이조곰탕’ 역시 뽀얀 국물에 다양한 고명을 얹어 설렁탕 같은 곰탕을 선보인다. 결국 국물의 색이든, 내용물이든, 명칭은 업주의 철학과 선택에 달려 있다 하겠다. LA에서 오랜 세월 변함없이 사랑받는 터줏대감은 단연 ‘한밭설렁탕’이다. 한국에서 들여온 무쇠솥을 2대째 고수하며 일정하고 깊은 국물 맛을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프림을 탄 것 아니냐’는 농담 섞인 의혹이 나올 정도이지만, 그 중독성 강한 맛에 매주 수차례 ‘출근 도장’을 찍는 단골이 부지기수다.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은 넉넉한 파 인심이다. 테이블마다 비치된 통에서 파를 마음껏 퍼 담아 ‘파죽’처럼 즐기는 재미는, 요즘 ‘금파’ 시세에 괜히 사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게 하면서도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한다. 최근 한밭 대신 발길을 옮겨 흔들린 곳은 ‘착한설렁탕’이었다. 뽀얀 듯 맑은 국물에 MSG 없이도 깔끔하고 개운한 맛, 구운 소금과 달큰한 깍두기, 아삭한 겉절이의 조화가 일품이다. 김치 국물 없이도 그대로 완탕할 수 있는 맑은 국물은 마치 맛있는 베트남 쌀국수 육수를 떠올리게 한다. 쌀국수와 설렁탕 국물 제조 과정의 유사성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맞물려 흥미로운 미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웨스턴 길의 ‘전통설렁탕’ 역시 이름처럼 오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보기 드문 곳이다. 상가 개발 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어머니에 이어 아들이 가업을 잇고 있다. 맛있으면서도 달착지근한 깍두기 맛은 한밭설렁탕과 비견될 만하다. 시설 면에서는 ‘해마루’가 단연 앞선다. 입구의 대형 가마솥 4개에서 24시간 국물을 우려내며 대규모 손님에게도 일관된 맛과 위생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설렁탕의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한 곳이다. 최근 타운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곳은 6가에 위치한 ‘선농단’이다. 과거 다른 메뉴로 인기를 끌었던 이곳이 웨스턴가에 2호점을 24시간 영업으로 열면서 설렁탕 전문점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대부분의 설렁탕집이 쪽파를 쓰는 것과 달리 대파를 사용하는 점, 정구지무침, 오징어젓, 와사비 양파장 등 기본 찬 외의 다양한 곁들임 메뉴, 그리고 오전 할인($11.99)까지 경쟁력을 갖췄다. 이른 시간 어르신들의 조찬 모임 장소로도 인기가 높아 당분간 설렁탕 시장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설렁탕과 곰탕. 그 명칭과 스타일은 시대와 지역, 그리고 업주의 해석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결국 그 한 그릇의 뜨거운 국물이 주는 깊은 위로와 든든함일 것이다. LA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혹은 낯선 일상에 지칠 때, 익숙하거나 혹은 새롭게 변주된 설렁탕/곰탕 한 그릇이 우리에게 건네는 따뜻한 미학은 변치 않을 것이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설렁탕 곰탕 설렁탕과 곰탕 설렁탕 국물 설렁탕 전문점
2025.05.11. 16:15
1970년대 후반, 낯선 땅 LA에 첫발을 디뎠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식 짜장면을 주문했지만, 눈앞에 놓인 것은 단무지 한 조각 없이 덩그러니 놓인 생양파와 춘장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낯선 ‘양배추 김치’가 곁들여 나왔다는 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단무지를 한인 마켓에서 꽤 비싼 값을 치르고 따로 사야 했던 시절이었다. 1970~80년대 LA에서 제대로 된 한국식 짜장면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1978년, 현재 올림픽 길의 TGI 바비큐 자리에 ‘기린원’이라는 중식당이 터를 잡았다. 이 업소의 주인은 훗날 ‘용궁’으로 명성을 떨쳤던 사장이었다. 웨스턴 애비뉴의 ‘왕관반점’, 8가의 ‘왕궁’ 등은 그보다 한참 뒤에 등장했다. 또 간짜장과 탕수육 등 튀김 요리명성이 자자했던 ‘연경’, 한때 한인 사회 돌잔치 시장을 석권했던 ‘신북경’, 현 이태리안경 렌즈랩 부지의 ‘경화반점’, 버몬트 애비뉴에 대형 연회장을 갖췄던 ‘용궁’, 그리고 올림픽 길 뒷골목 재개발로 건물조차 사라진 ‘만리장성’ 등 언급된 대부분의 업소는 기린원 이후 시대를 열었다. 기린원과 비슷한 시절 한인 중식당의 또 다른 강자로 부상한 곳은 ‘진흥각’이다. 매콤하면서도 깊은 국물의 짬뽕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탔고, LA에서도 한국식 중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당시만 해도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문화가 생소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매번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푸념하면서도,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그 얼큰한 짬뽕 국물에 대한 강렬한 이끌림에 다시금 발걸음을 향했다. 그곳의 짬뽕 한 그릇은 기다림의 불만을 한순간에 잊게 하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지녔다. 진흥각을 일군 형제들은 이후 8가, 코리아타운 플라자, 갤러리아 마켓, 다운타운, 밸리, 글렌데일 등지에 잇따라 지점을 확장하며 LA 한인타운 중식의 역사를 새로 썼다. 한편, ‘저가 짜장면’을 앞세워 한인타운 중식 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업소도 등장했다. ‘소용궁’의 출현은 타운 중식당 업계에 일대 지각 변동을 예고했다. 가격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에 맞서 진흥각 역시 새우 크기를 줄이고 오징어와 홍합을 잘게 썰어 넣는 등 원가 절감을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이는 타운 중식 업계 경쟁 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진흥각의 전성기가 서서히 저물 무렵, 한인타운에는 추억 속의 ‘옛날식 짬뽕’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커다란 새우 두 마리, 꽃게 반 마리, 그리고 푸짐한 홍합, 조개, 오징어가 듬뿍 들어간 넉넉한 인심의 짬뽕이었다. ‘주막’, ‘원산면옥’, ‘황태자’를 운영하던 형제들 중 막내 사장이 6가 ‘알베네’ 자리에서 ‘옛날 짬뽕’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양지감자탕’이 성업 중이다. 그 뒤를 이은 후발주자들로는 한국 프랜차이즈인 ‘홍콩반점’과 ‘짬뽕지존’이 돋보인다. 윌셔길에 있는 짬뽕지존은 무봉리 순대 사장 등 몇몇 투자자들이 사업 확장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프랜차이즈의 상륙은 로컬 식당 위주였던 한인타운 중식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밖에도 배달 서비스로 강세를 보이는 ‘짜몽’은 혼밥족에게도 부담 없는 물짜장 스타일의 짜장면과 콩나물이 푸짐한 짬뽕이 특징이다. 혼밥족에게 인기 있는 또 다른 짬뽕 전문점은 ‘뽕’이다. 최근 사발 크기가 커지고 해산물 양도 늘어나면서 만족도를 높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식 업계 가장 최근 소식은 로텍스 호텔에 있던 고급 중식당 ‘홍연’이 버몬트길의 옛 ‘용궁’ 자리로 대규모 확장 이전한 것이다. 200석 규모의 연회장과 20여 개의 룸을 포함, 총 500석 규모를 자랑하는 ‘홍연’은 멘보샤, 동파육 등 수준 높은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으로 꼽힌다. 이렇듯 LA 한인타운의 중식 역사는 세대의 변화와 고객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변모하고 발전해 왔다. 단무지로 시작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돌이켜보면, 그때 단무지 한 조각의 부재는 단순히 음식이 아닌, 타향살이의 서글픔과 고국 음식에 대한 간절함을 상징했다. 그래서 중식당은 한인 이민자들의 중요한 모임 장소이자 소통 공간으로 이어져왔다. 이민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중식당들이 앞으로도 새로운 추억의 맛으로 한인들을 즐겁게 해주길 기대한다. 라이언 오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단무지 조각 한국식 중식당 한인타운 중식 타운 중식당
2025.05.04. 19:00
“미스터 김. 왜 그래? 돈이 없어 그래? 그럼 그냥 가라고…” 1970년대 말 LA 한인타운의 정서와 인심을 대표하던 ‘호반식당’의 광고 문구였다. 이 한마디에는 끈끈한 정과 넉넉한 인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969년 문을 연 ‘뉴코리아 식당’과 더불어 당시 올림픽길 상권의 유일한 한식당이었던 호반식당은 단순히 음식점의 의미를 넘어 1990년대 말 문을 닫기 전까지 올드 한인타운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돈을 긁어모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성업을 이뤘다. 현재 그 자리는 ‘서울소울’이라는 무제한 고깃집으로 바뀌어 있다. 건물만은 자제분이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호반식당의 성공은 올림픽길 한식당 전성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징기스칸 요리로 유명한 ‘서울회관’, 냉면의 ‘세종회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강서회관’, 파란 기와 지붕이 인상적인 ‘청기와’, 크랜셔길의 ‘강남회관’ 등 쟁쟁한 이름의 한식당들이 속속 들어섰다. 이들 식당의 공통점은 모두 주인이 건물주였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올림픽길의 ‘오너-유저’ 시대를 연 주역들이었다. 현재는 1983년 문을 연 강남회관만 유일하게 같은 사장이 운영하고 있다. 웨스턴길에도 한식 신화는 탄생했다. 지금의 마당몰 자리에는 한인타운을 대표했던 고급 한식당 ‘우래옥’이 있었다. 한국 우래옥 가문의 막내 딸이 소유주였던 이곳은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와 테이블마다 설치된 구릿빛 후드가 인상적이었다. 가족 간 상표권 문제로 식당은 ‘마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개발 과정에서 건물 소유권을 잃고 식당 상호도 ‘현대옥’, ‘정육점’ 등으로 바뀌면서 안타깝게도 그 명맥을 잃었다. 웨스턴길은 대형 한인 뷔페식당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원조 명동칼국수 박시연 사장님의 이름을 딴 ‘시연부페’가 ‘올유캔잇 코리안푸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창업주의 타계 이후 건물은 팔려서 재개발되었고, 식당도 이름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신라부페, 궁전부페, 비원 등 대형 뷔페 업소들이 그 흐름을 이었다. 8가길에도 올드 타이머들의 모임 장소로 빠지지 않았던 전설의 식당이 있다. 1978년 문을 연 ‘동일장’이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 폐업했지만, 40여년간 한식과 일식을 겸비한 최고의 식당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주방장들을 초빙해 여러 명장을 배출한 식당이었다. 서울회관 전 사장님과 강남회관 현 사장님이 그 주인공들이다. 동일장의 대표 메뉴는 로스구이였다. 호반식당의 따뜻한 인심이 기억되는 그 시절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LA 한인타운을 대표하는 한식당을 꼽으라면 단연 ‘조선갈비’가 떠오른다. “먹어보니 정말 맛있지예?”라는 주인장의 친근한 경상도 사투리처럼, 맛과 서비스에서 정통성을 느낄 수 있다. 전설의 소공동순두부 사장님이었던 이 여장부는 대형 주차장과 야외 패티오를 갖춘 단독 건물을 유명 건축가에게 설계까지 의뢰해 완성해냈다. 비슷한 시기, ‘박대감’ 또한 한인타운의 또 다른 얼굴이 되었다. 버몬트길에 위치한 이곳은 꽃살로 유명하다. 맛도 맛이지만 박찬호 부부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들과의 친분은 활용한 ‘스타 마케팅’ 전략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규모는 앞선 두 곳에 비해 작지만, 맛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 숨은 강자도 존재한다. ‘수원갈비’는 소박하고 토속적인 분위기 덕분에 외국인 손님 접대 장소로 자주 애용되는 곳이다. 그밖에 최근 10년 내 오픈한 식당 중 눈에 띄는 곳으로는 소리꾼 장사익씨의 ‘칠보면옥’ 자리에 문을 연 ‘형제갈비’, 윌셔 에퀴터블 빌딩의 ‘무한 바비큐’로 한인타운을 다소 벗어난 미라클마일과 베벌리힐스, 다운타운에 지점을 둔 ‘젠와(기와라는 뜻)’등이 있다. 이번 칼럼은 음식에 비유하면 LA한인타운 한식당 족보 맛배기다. 순두부로 첫 칼럼을 쓴 뒤 주변에서 ‘한식당 비사’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앞으로 나만의 한식당 구별 기준에 따라 식당들을 소개해볼 생각이다. 예를 들어 불고기와 갈비 등 BBQ를 비롯해 면, 탕, 찌개, 볶음류까지 아우르는 정통 한식당부터, 고기구이 전문점, 무제한 고기집, 그리고 특정 메뉴만을 고집하는 전문점까지, 한인타운의 다채로운 한식의 세계를 맛있게 써보려한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한인타운 노포식당 올림픽길 한식당 고급 한식당 올드 한인타운
2025.04.20. 19:00
순두부는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 중 하나다. 순두부는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상태의 하얀 두부를 일컫는데, 그 어원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순수한 두부’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순두부의 기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콩을 갈아 만든 콩물로 끓여내는 순두부는 제조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여 서민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었다. 특히 차가운 날씨에 따뜻하고 얼큰한 순두부찌개는 든든한 한 끼 식사로 사랑받아 왔다. 순두부는 단백질과 수분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 되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좋은 영양 식품으로 여겨진다. LA의 순두부 열전의 뿌리는 지금은 없어진 ‘베벌리 순두부’와 ‘소공동 순두부’다. 그중에서도 LA 스타일 순두부의 원조는 1986년 현재의 곤지암 소머리국밥 자리에서 시작된 베벌리 순두부라 할 수 있다. 레시피는 의외로 간단하다. 모든 한식의 기본인 육수와 매운 다진 양념, 그리고 순두부를 기본으로 다진 양념의 양에 따라 매운맛을 조절하고 해물, 소고기, 섞어 등 단백질 종류를 선택하는 것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베벌리 순두부 출신 주방장이 독립해 올림픽길에 전설적인 소공동 순두부를 차리면서 본격적인 순두부 식당 경쟁이 벌어진다. 이에 자극받은 베벌리 순두부가 소공동 길 건너편에 2호점을 열면서 올림픽길은 그야말로 치열한 순두부 전쟁의 무대가 됐다. 자연스럽게 LA의 순두부 손님들은 올림픽길로 몰렸고, 베벌리 순두부는 현재의 버몬트길 ‘국대고집’ 자리에 3호점까지 문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은 소공동 순두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3개 지점의 베벌리 순두부는 단 1개 지점의 소공동 순두부를 넘지 못하고 결국 1호점과 3호점을 정리, 올림픽 2호점에서 고군분투하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지난 2020년 34년 만에 폐업을 결정했다. 그리고 2023년 마지막으로 베벌리 순두부 요리책을 발간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후발 주자였던 소공동 순두부의 성공 비법은 바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맛있는 밥’이었다. 언제나 윤기가 흐르는 찰진 밥의 비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무성했다. 여러 대의 전기밥솥을 이용해 매 30분마다 새로 밥을 짓는다거나, 밥을 지을 때 소량의 마요네즈를 넣는다는 등의 소문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더욱 확산시킨 사건이 있었다. 수십만 달러의 피해를 본 미행 강도 사건에 대한 신문 기사가 보도됐다. 결국 베벌리 순두부보다 먼저 거액에 사업을 정리하고 현재 올림픽길 조선갈비 건물주가 되는 신화를 이뤄냈다. LA 순두부의 또 다른 신화는 북창동 순두부다. 그 시작은 버몬트길 고바우 식당 옆 현재 월남국수 식당 자리에서 미약했다. 하지만 현재는 LA 웨스턴점과 24시간 운영하는 LA 윌셔점, 그리고 어바인점을 포함해 가주에서만 총 9개의 지점으로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뉴욕, 뉴저지 3곳과 텍사스점 등 타주로도 지출해 전국적인 규모의 ‘BCD Tofu House’ 그룹을 이루어냈다. 사우스베이 지역에 자체 생산 시설을 갖춘 웨어하우스에서 각종 반찬류와 하선정 브랜드로 한인 마켓 등에 다양한 김치까지 납품하고 있다. 창업 1세대인 고 이희숙 사장님이 지난 2020년 별세하시고 현재는 2세대인 아들들이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그 독보적인 신화에 최근 ‘라성순두부’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올림픽길 전 ‘오야붕’ 자리에 신장개업을 해서 성업 중이다. ‘쿼터스’, ‘강호동백정’, ‘무한’, ‘라성돈까스’ 등을 운영하며 한인타운에서 무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패기의 젊은 사장이 주인이다. 다른 순두부 집들과 비교해서 밑반찬 수가 많고 뚝배기 대신에 스테인리스 재질의 솥에 지어나오는 즉석 솥밥과 누룽지서 우러나오는 숭늉 등등 후발 주자로서의 승부수를 띄우는 대범함을 엿볼 수 있다. 기본 솥밥 이외에도 20여 가지 타핑을 올린 다채로운 솥밥 메뉴도 신선하다. 대표적인 타핑으로는 꽃살, 명란과 가격이 좀 비싸지만 랍스터 등이 있다. LA의 순두부 역사는 단순한 음식점을 넘어 한인 이민자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성공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한국인의 소울 푸드인 순두부가 LA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여정이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순두부 연대기 베벌리 순두부 소공동 순두부 순두부 식당
2025.04.13. 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