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 특별기고]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자유에서 가능 독재와 싸워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 한국만큼 빠르게 성장한 나라는 없어
자체 핵무장은 값비싼 어리석은 선택 제조업 부흥 협력으로 한미관계 돈독 미군 주둔 유지와 전작권 환수 바람직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왼쪽)가 1993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고 있다. 레이니 대사는 김영삼 대통령 취임 첫해인 93년 10월 부임해 5년차인 97년 2월까지 재임했다. [중앙포토]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최근 백악관을 찾았다. 징조는 좋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부정적인 글을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예상을 뒤엎고, 예측 불가능하기로 악명 높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자신감 있고 능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회담에서 논의된 쟁점은 무역, 관세, 주한미군 주둔비 분담, 미국 내 투자(조선업 포함) 등이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김정은과의 관계 구축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그런 일에서 배제 당하는 데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전 한국 대통령들과는 다른 태도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이재명 한국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다. [로이터]
백악관 집무실을 나서며 트럼프는 환하게 웃었고, 이 대통령 역시 성공적인 회담 결과를 이야기하며 두 정상이 시진핑을 만나러 함께 방중할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 북한의 위협적인 핵무기에 대한 억지력 문제 등 여전히 많은 난제가 남아 있다. 관세는 15%까지 낮추었지만 무역과 투자 세부 사항은 여전히 조율이 필요하다.
한국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친구로서, 내가 사랑하는 두 나라가 보다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의사 결정 방식에는 깊이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중요한 사안을 독점하려 들며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들고 있다. 외교정책 역시 임의적인 관세 부과, 무역·투자 양보 요구 등으로 흔들리고 있다. 이는 국제질서를 교란시키고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는 여러 나라의 핵무기 증강을 부추겨 국제 안보를 위협한다.
나는 4분의 3세기가 넘는 세월에 걸쳐 한국과 관계를 이어왔다.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47년 1월, 19세의 나이에 미 점령군 소속 대공방첩대(CIC) 일원으로 배치되면서였다. 나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2차 대전 동안 한국이 겪은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38선은 단순한 분계선이었고, 수많은 피난민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안정을 흔들고 반란을 조장했다. 우리의 임무는 그러한 활동을 저지하고 자유 민주 선거를 위한 최소한의 치안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948년 8월 대한민국의 첫 선거가 치러졌다.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고 종종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국민은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언론·집회·표현의 자유), 투표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힘든 것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처음부터 독재적이었고 선거는 형식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에 한국전쟁 기간에는 면죄부를 얻었다. 전쟁이 끝나자 젊은 세대는 더 많은 자유와 공정한 선거를 요구했고, 결국 1960년 4·19로 이어졌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100여 명의 학생이 서울 도심에서 희생되자 분노가 폭발했고, 이승만은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 찾아온 자유는 민주주의가 아닌 혼란을 낳았고, 이는 곧 군사 쿠데타로 이어졌다. 박정희 장군은 권력을 장악해 16년간 독재자로 군림하다 암살당했다. 그의 통치는 가혹했지만, 그 시기 한국이 현대적 경제로 나아간 진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나는 1959년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돌아와 연세대에서 일하며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 함께했다. 다섯 해의 격동 속에서 학생들에게 봉사와 국가 건설의 정신을 심으려 노력했다. 군 복무 시절 한국 동료들과의 인연이 나를 다시 불러들였고, 이때 사귄 친구들은 훗날 내가 미국 대사로 세 번째 한국에 올 때 현명한 조언자가 돼 주었다.
북한은 언제나 남한 정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울에서 불과 35마일 떨어진 거리와 비무장지대의 요새화는 남한의 독재정권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요구는 공산주의자의 선동으로 몰렸다. 훗날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된 김대중조차 공산주의자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았고, 미국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광주에서는 학생 봉기가 수백 명의 희생을 낳았고, 이는 전국적인 분노로 이어졌다. 자유를 향한 힘은 커져갔으나, 최초의 문민 대통령 김영삼이 선출된 것은 1992년에 이르러서였다.
물론 공산주의의 위협이 국내 정치적 도구로 악용된 측면이 있지만, 북한이 실제 위협이 아니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북한은 수 차례 테러 행위를 저질렀다. 1990년대 초 북한은 원자로 건설을 시도했으나 국제 압력으로 감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93년 사찰단 추방을 위협하며 위기가 고조됐다. 내가 대사로 부임한 해였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협의해 미국이 주도적으로 김일성과 접촉하도록 설득했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경수로 대체와 사찰 수용이라는 합의를 도출했다. 이는 미·북 간 ‘제네바 합의’로 확정됐다. 김영삼·김일성의 정상회담도 예정되었으나,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동결은 8년간 이어졌으나,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끝이 났다.
이후 북한은 핵무기와 운반 수단을 크게 확충했다. 이는 처음엔 미국의 공격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부강한 한국에 대응할 수단도 되었다. 그러나 핵이 자존심과 억지력의 원천이 될 수는 있어도, 오늘날 핵무기를 선제 사용한다면 스스로 파멸을 부를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는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체제를 지키는 방패이자 외부 세계로부터의 차단 장치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병력을 파견해 외화를 벌고 있으며, 제재 회피에 골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자신들의 100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주민들이 아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1953년 정전 이후 미국은 줄곧 주한미군을 유지하며 억지력을 제공해왔다. 트럼프 정부 전까지 미국은 이를 자국의 이익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비용을 더 부담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노골적인 ‘거래적 접근’은 미국에 대한 신뢰에 불안을 촉발했다. 이에 따라 남한의 자체 핵무장 여론도 커졌다. 남한은 충분히 핵개발 능력을 갖고 있으나 이는 수십억 달러의 비용과 국제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어리석은 선택일 것이다. 남북 간의 미묘한 현상(status quo)을 뒤흔들 위험도 크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서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첫째, 비무장 지대에서의 과격한 선전 활동을 중단하는 것이다. 이는 북한을 불안하게 만들 뿐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
둘째, 트럼프가 노벨 평화상을 간절히 원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평화조약으로 한국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일은 큰 업적이 될 수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회담을 주선하려는 이 대통령의 태도는 훌륭한 정치수완으로 비칠 것이며, 트럼프의 호감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다.
셋째, 서울이 자체 핵개발을 포기한다면 수십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고, 그 자금을 한반도 내 주둔 미군 방위비 분담에 활용할 수 있다. 이는 트럼프의 끊임없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그 대가로 이 대통령은 ‘이원적 지휘구조’를 요구할 수 있게 되며, 이는 곧 대한민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자국 군대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는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입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주둔은 한국에 대한 북한의 선제공격을 막는 인계철선 역할을 계속 수행할 것이다.
남은 논의는 미국 내 한국의 투자 문제다. 한국은 이미 자동차와 배터리 생산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세계 2위 조선 강국인 한국에 대해 트럼프는 미국 조선업 부흥에 도움을 원했다. 세부 조건은 미정이지만, 원칙적으로 합리적인 요구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취임 초 타고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트럼프를 상대할 강력한 카드를 쥐고 있으나, 국내 정치적 합의 형성이라는 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이를 통해서만 그는 국제 무대에서 유연성과 힘을 발휘하며 안보를 지키고 한미 관계를 굳건히 할 수 있다.
지난 75년에 가까운 세월을 되돌아보면 나는 한국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1947년 처음 왔을 때, 한국은 일본 지배로 극도로 가난했고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렸다. 당시 한 민간 고문은 “영양과 의료만 충분하다면 한국인은 반드시 무시 못할 민족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옳았다. 한국만큼 빠르게 성장한 나라는 없다. 경제적으로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었고, 여러 연구 분야에서는 미국을 앞섰다. 문화적으로는 K-팝이 세계를 휩쓸고, 한국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첫 비영어권 영화가 되었으며, 김치와 한식은 전 세계 상점에서 팔리고 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북한의 위협 탓에 오랜 세월 독재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30년 넘게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비록 당파적이고 갈등이 심했지만, 꿋꿋이 버텨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계속 살아남으려면 정당들이 연합을 이루고, 타협 속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독재자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오늘날 독재와 자유의 차이는 남북한의 차이에 그대로 반영돼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