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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칼럼] 미국 우선주의의 폭력적 민낯

Los Angeles

2025.09.1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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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뉴스룸 에디터

이무영 뉴스룸 에디터

지난 9월 4일 조지아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은 순식간에 전시작전의 현장으로 변했다. 헬기가 굉음을 내며 상공을 선회하고, 장갑차와 중무장한 연방 요원 500여 명이 공장을 급습했다. ‘저전압 작전(Operation Low Voltage)’이라는 이름으로 단행된 이번 급습은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국토안보수사국(HSI), 연방수사국(FBI), 마약단속국(DEA)까지 총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이민자 단속이었다. 한국인 근로자 317명을 포함한 475명이 체포됐다.
 
충격은 사상 최대 규모의 불법이민 단속이라는 사실에 그치지 않았다. 공개된 영상 속 한국인 근로자들은 손에는 수갑이, 허리와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진 채 구금시설로 이송됐다. 마치 범죄조직원 검거 작전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구금된 한국인 근로자들은 밀입국자도, 불법체류자도 아니었다. 단기 체류 비자(146명)나 전자여행허가(170명)로 합법적으로 입국해 배터리 공장 준공을 앞두고 장비 설치와 시험 가동을 맡은 고급 기술자들이었으며, 합법 취업비자를 가진 한국인 1명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한국 본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미국 공장 건설 현장에 출장 나온 인력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 당국은 미국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전문 인력을 불법 취업한 범죄자처럼 취급했다. 이들은 국경을 몰래 넘어 불법 취업과 불법 체류를 한 이민자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설령 비자 유형에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국가 간 외교 채널을 통해 협의하거나 투자 기업과의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불법체류 단속’이 아니다. 이는 미국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라는 구호 아래, 불법이민자 추방과 자국민 일자리 보호를 명분으로 외국 전문 인력과 동맹국의 투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사건이다. 이민 당국은 이번 작전의 목적을 “불법 고용 근절, 공정 경쟁 보장, 미국인 일자리 보호”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미국 내 투자 불안을 증폭시키고 동맹국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수십억 달러가 투입된 글로벌 투자 현장에서 동맹국 기술자를 쇠사슬에 묶는 장면은 외교적 모욕일 뿐 아니라 미국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경제적 자해였다.
 
한국 사회가 받은 충격은 크다. “미국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창출했는데, 돌아온 대접은 범죄자 취급이었다”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번 사태가 한미 관세 협상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에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현금으로 집행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게다가 원금 회수 이후부터는 투자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가겠다고 한다. 이는 투자라기보다 강탈에 가깝다. 3,500억 달러는 한국 외환보유액의 84%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일본이 미국과 합의한 조건과 비교하더라도,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이 수용하기엔 치명적인 불균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단속 다음 날인 5일 “그들은 불법체류자였고,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제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한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석방을 지시했다. 이어 14일에는 트루스소셜에 “외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위축시키고 싶지 않다”며 전문 인력 수용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이미 이번 사태로 대미 투자에 대한 신뢰는 크게 훼손된 뒤였다. “외국 기업들이 복잡한 제품을 제조할 때 일정 기간 전문 인력을 데려와 미국인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그의 해명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언제든 동맹국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미국 우선주의의 민낯을 드러냈다.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동맹국조차 가차 없이 희생양으로 삼는 폭력적 방식은 구시대적 제국주의의 연장선에 다름 아니다. 미국 내 정치 어젠다와 반이민 정서에 한국이 휘둘리는 현실은 “돈 대고 뺨 맞는” 처지로 비칠 수밖에 없다.
 
동맹은 상호 존중 위에 설 때만 의미가 있다. 미국 우선주의가 동맹의 신뢰마저 허무는 폭력으로 변질된다면, 그 피해는 결국 양국 모두에게 돌아올 것이다.

이무영 / 뉴스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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