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칼 융의 종교관 물리적 실재와 상관없이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실재와 똑같이 영향 미쳐
칼 융에 따르면 심리적 '신의 실재'라는 것은 어떤 사람이 물리적 실재와 상관없이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면, 물리적 실재와 똑같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다고 믿거나 생각하는 내용으로 지배받는다고 한다. 신의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신을 체험할 수도 있다고 한다. 신은 그들에게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참다운 종교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적 상태의 자발적 표현이고, 사람들에게 생명과 의미의 원천이 된다고 한다. 종교는 한 사람을 생명의 뿌리와 연결하고,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내적 분열이 조성될 때, 그것을 통합하면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종교체험은 정신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적 존재에 대한 체험은 그전까지 다른 콤플렉스에 집중되었던 정신에너지를 새로운 중심에 집중시켜서 정신에너지가 새로운 수로를 따라서 흘러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 융은 인간 영혼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자는 담대하게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갖은 고초를 겪는 편이 나을 것이라 한다. 가령, 무시무시한 수용소와 정신병원, 황량하고 외진 선술집과 매음굴, 도박장, 증권거래소, 사회주의자들의 모임, 기묘한 종교 분파의 부흥회 등을 경험하면서 사랑과 증오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좋은 체험이라고 하면서 조그만 교과서에서보다 훨씬 풍부한 지식을 안고 돌아올 것이라 했다. 그렇게 무장한 정신과의사는 환자들의 진정한 의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혼을 이해하기 때문이라 한다.
가령,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감옥의 난폭한 죄수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훗날 불후의 명작을 집필할 수 있었던 사실도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인다.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성인들도 몸소 세상에 뛰어들어 중생들과 함께 모진 고난을 함께 했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역사의 성인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칼 융은 할아버지와 이름이 똑같았다고 한다. 그는 슐라이어마흐와 매우 친한 친구였으며 동시에 사돈이었다. 슐라이어마흐는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로 불린다. 그에 따르면 성경의 해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해석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융의 할아버지는 당시에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스위스로 갔다고 한다. 융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어머니는 신비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융은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어느 날, 성당을 지나가다가 황홀경을 경험하는데, 하나님이 성당 지붕에 대변을 누는 환상을 보게 된다. 이때 융은 "신이 내게 원하는 것은 신앙적 복종이 아니라,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용기를 내서 해석할 수 있는 인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주체로서의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인격에 대해서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인간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인간의 의지(욕망)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헤겔로부터는 절대정신의 존재와 인간 이성의 무력감을 배웠다, 또한 인간 본질의 근본은 이성이 아니라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경도(傾倒)된다.
칼 융은 자신의 아버지는 목사임에도 아버지의 신앙은 매우 메마르고, 힘이 없고, 열정이 없는 것을 보고 교회에 '신은 없다고 깨닫게 되었다'라고 한다. 칼 융이 훗날 프로이트와 만나 무의식을 토론하게 된 계기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