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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장비도 없이 그래도 산을 오르기로 했다. 퇴촌의 작은 골짜기를 따라 지도에는 지명되어 있지 않지만, 동쪽 산자락 자줏빛 노을이 아름답다고 하여 지역 주민들이 영동산 자주봉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퇴촌 전원마을 거목골을 지나 언덕 끝자락 주택을 지나면서 산행은 시작되었다. 낙엽이 떨어진 제법 가파른 길은 가느다랗게 연결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또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겹쳐 산행의 마음들이 겹쳐져 길을 내었다. 그 길 위로 힘찬 새벽의 정기가 있었을 게고 꺼져가는 한숨도 스며있었겠지. 가파른 구간을 지나 정상에 올랐다가 오른 반대편이 양평이고 저 멀리 북한강이 흐른다. 안개가 먼 산을 휘감고 있다. 잠시 머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개는 여전히 산허리를 붙잡고 하루가 내 앞에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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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봉 교수(중앙대 대학원)와 〈현대시학〉 정진규 시인의 생가를 방문했다. 퇴촌에서 안성까지 가는 동안 정시인의 이야기로 행복했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우릴 반겨준 외대 정민영 교수(정 시인의 아들), 시카고에서 인연이 된 이진희 선생(정 시인의 여동생) 부부와 함께 고인이 된 시인의 자취를 돌아보았다. 방대한 양의 자료와 육필 원고, 심지어 고교 시절 습작한 시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시를 사랑했던 고인의 손길과 호흡이 고스란히 담긴 서재엔 평소 즐겨 쓰시던 문구며 작은 메모지까지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방명록에 짧은 문구와 꽃 한송이 그려놓았다. 생가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내내 사진을 통해 뵈었던 정진규 선생의 환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시인이 시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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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눈물
돌아 올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직 떠오르지 않은 산등성
뒤로 하늘이 붉다
빛을 기다리는 잎사귀들
또한 얼마나 행복할까
이 고요의 풍경과
차 한잔을 마주하고 있다
이 순간의 행복은
오래 지워질 리 없다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산을 만나게 된다
동쪽 산자락 자줏빛
노을이 아름다운 퇴촌
거목골 길 끝 편에
길게 누운 영동산 자주봉
그려보지 못한 그리움
색깔이 자줏빛이라니
오르는 발걸음 반기듯
얼굴을 만지며 피어오른 안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저 아래서 시달린, 분주했던
옹이진 양팔을 편다
산 정상에 쏟아 놓은 기도 소리
어머니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반대편 산자락 따라 물안개
피워내는 북한강 눈물
산길을 오르다 보면
안개 속에 숨어도 선명한
한 얼굴을 만난다
좁은 길,
밤송이 길,
가파른 길,
내리막길,
막혀 되돌아 가는 길
길을 걷다 보면
뒤돌아보지 않아도
떠나온 길이 보인다
돌아갈 길이 있다는 건
얼마나 따뜻한 위로인가 (시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