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이성이 멈춘 사회, 신념이 폭력되다

Los Angeles

2025.11.12 18:41 2025.11.12 19:41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부고니아]
엠마 스톤과 란티모스 감독 4번째 협업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
컬트 감성, 란티모스식 불안으로 해석
모호함 속 치밀한 심리 게임으로 전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주류 관객보다는 마니아 층에 어필하는 성향이 강하다. ‘부고니아’는 독창적 연출, 실험성으로 인해 수상 시즌 동안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Focus Features]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주류 관객보다는 마니아 층에 어필하는 성향이 강하다. ‘부고니아’는 독창적 연출, 실험성으로 인해 수상 시즌 동안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Focus Features]

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일상적인 상황을 이상하게 비틀고 인간의 본성, 도덕, 가족의 개념을 실험적으로 해체한다. 그의 영화 속 세계는 익숙하면서도 불안한 질서로 가득 차 있다. '도그투스(Dogtooth, 2009)'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외부와 철저히 단절시킨 채 집 안에 가두고 '랍스터(The Lobster, 2015)'에서는 45일 안에 연인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해야 하는 사회 규칙이 등장한다. 이처럼 란티모스의 작품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뒤흔들며, 일상의 논리를 낯설고 기이한 이야기로 변주한다.  
 
오늘날 가장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지닌 여배우로 평가되는 엠마 스톤의 최근 연기 변신은 란티모스 감독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장르가 혼합된 '부고니아(Bugonia)'는 스톤과 란티모스의 4번째 협업이다. 두 사람의 예술적 파트너십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주목된다.  
최근 끝없는 연기 변신으로 엠마 스톤은 오늘날 가장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지닌 여배우로 평가되고 있다. [Focus Features]

최근 끝없는 연기 변신으로 엠마 스톤은 오늘날 가장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지닌 여배우로 평가되고 있다. [Focus Features]

 
'부고니아’는 음모론· 외계인· 정체성 등 정보 과잉 시대로 불리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과 맞물려 있다. 특히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는 음모론자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를 상징하는 우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특별히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감독)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외계인이 등장하는 음모론이라는 기본 플롯만을 가져왔을 뿐, 성별 구성과 캐릭터 설정은 완전히 다르다. 란티모스 감독은 원작의 배경을 한국에서 오늘의 미국으로 옮겨온다. 한국색이 짙은 원작의 컬트적 감성과 분위기가 란티모스의 불안하고 어두운 세계관으로 다시 채색된다.    
 
테디(제시 플레몬스 분)와 돈(에이든 델비스), 사촌지간인 두 청년은 수퍼에서 산 허접한 가면을 쓰고 대낮에 유명 바이오 기업 최고경영자(CEO) 미셸(에마 스톤)을 납치한다. 이들은 강력한 권한과 부를 가진 미셸이 단순한 제약회사의 CEO가 아니라 외계인 침략 세력 안드로메단의 일원으로 지구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음모론을 확신하고 있다.  
 
이들은 미셸을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감금하고, 그녀가 잠든 사이 머리를 삭발한다. 그들은 미셸의 머리카락이 외계와 교신하는 안테나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었으며 이를 제거해야만 외계 세력과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고니아’는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감독)의 리메이크이다. 원작의 배경을 한국에서 오늘의 미국으로 옮겨 란티모스의 불안하고 어두운 세계관으로 다시 채색된다. [Focus Features]

‘부고니아’는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장준환 감독)의 리메이크이다. 원작의 배경을 한국에서 오늘의 미국으로 옮겨 란티모스의 불안하고 어두운 세계관으로 다시 채색된다. [Focus Features]

 
머리가 박박 밀린 채 깨어난 미셸, 두 남자와 처음으로 대면한다.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혼란스러워하는 미셸에게 테디는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다그친다. 미셸은 점차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이 외계인이 아니라고 테디의 음모론에 맞선다.  
 
미셸이 탈출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동안 외부에서는 미셸의 소재를 수사하는 경찰 케이시와 제약회사의 움직임이 병행되어 전개된다. 케이시는 테디가 미셸의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테디의 어머니가 이 회사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테디와 미셸의 관계에 복잡한 상황이 더해지면서 관객은 더욱 혼란에 빠진다. 이야기 중반 이후부터 미셸은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존재임이 암시된다. 돈이 자살을 선택하고 이를 계기로 사태가 점점 통제 불능으로 치닫는다.  
 
테디는 돈의 죽음 이후 더욱 극단적으로 미셸을 대한다. 신념과 광신 사이를 오가며 음모론자의 두려움이 드러난다. 미셸은 테디에게 “당신이 주입한 물질은 사실 우리가 개발한 차세대 인간 진화 실험체였다”고 알려며 반격에 나선다.  
 
이 한마디로 모든 균형이 무너지고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결국 미셸은 자신이 안드로메단 제국의 여왕급 존재임을 스스로 밝히며 인류 진화 실험이 실패로 끝났음을 선언한다.  
 
마지막 장면, 테디는 자폭 장치를 착용한 채 미셸의 회사로 침입한다. 절망적인 인간의 저항이자, 신념에 갇힌 인간의 파멸을 상징한다. 미셸은 냉정하게 인류의 전면적인 제거를 결정하며 인류 문명의 종말을 예고한다. 그녀는 비밀 통로를 통해 우주선에 올라타고 지구를 떠난다.  
 
‘부고니아’는 음모론·외계인·정체성 등 정보 과잉 시대로 불리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과 맞물려 있다. [Focus Features]

‘부고니아’는 음모론·외계인·정체성 등 정보 과잉 시대로 불리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과 맞물려 있다. [Focus Features]

이어 인류가 순식간에 사라진 듯한 정적이 흐르고 빈 도시 위에서는 벌들이 벌집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는 인류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연의 생태계가 다시 회복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은유적 이미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 결말을 통해 인간 중심의 문명이 무너진 뒤에도 자연은 결국 스스로의 질서와 균형을 되찾는다는 역설적 메시지를 던진다.
 
고대 그리스어 ‘부고니아’는 죽은 소에서 꿀벌이 생긴다는 전설에서 유래됐다. 극 중에서 벌, 양봉, 여왕벌 개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조직화한 집단 나아가 인류 사회 또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빗대는 은유로 해석된다. 테디가 벌의 존재와 여왕벌 개념을 사회의 권력 구조에 빗대어 설명하는 등 메타포가 반복된다. 미셸은 여왕벌(지베층)이고 벌집은 인류이며 벌집 붕괴는 인류가 구축한 사회·경제·생태계의 기반이 흔들리는 상태를 상징한다.  
 
'부고니아'는 납치극의 형식을 띠었던 원작보다 심리극의 면모가 한층 두드러진다. 그만큼 사건의 전개보다 인물들 간의 대화와 심리적 긴장이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란티모스 특유의 모호함과 불안의 미학이 깊어지며 영화는 점차 치밀한 심리 게임의 장으로 변모한다. 특히 테디가 병든 어머니를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며 음모론이 지배하는 그의 내면과 불안정한 정신세계가 드러난다.
 
미셸이 납치되는 상황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일종의 희극처럼 보인다. 그녀가 탈출을 시도하는 순간의 단순한 긴박감보다 인물들 사이에 서서히 조성되는 팽팽한 긴장과 심리적 대립이 영화의 핵심적 묘미다. 예측할 수 없는 반전과 긴 여운을 남기는 종결부의 피날레, 그리고 블랙코미디적 연출 감각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작품의 독특한 리듬을 완성한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주류 관객보다는 마니아층에 어필하는 성향이 강하다. ‘부고니아’는 독창적 연출, 실험성으로 인해 수상 시즌 동안 작품상, 감독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스카상의 경우,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보편성, 대중성 측면에서의 한계 때문에 수상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런데도 작품마다 변신을 거듭하며 놀라운 연기력을 보여온 엠마 스톤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기대할 만하다. 머리를 삭발한 채 발산하는 스톤의 비주얼은 그녀의 과거 어느 영화보다도 강렬하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