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 마이러브’‘은 산후 우울증을 단순한 질병의 서사로 소비하지 않고 여성 존재의 균열로 확장한다. [MUBI]
2025년 연말 수상 시즌을 기해 여러 부문에서 후보작으로 거론되고 있는 영화 중 ‘산후 우울증(Postpartum Depression)'이라는 비교적 드문 주제를 다룬 3편의 영화가 있다. 이들 영화는 각기 다른 배경과 스타일로 산후 우울증에 접근한다.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는 혁명적 여성 캐릭터가 산후우울증을 겪으며 가족과 단절하고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는 내용이고, '내게 다리가 있다면 너를 차버릴거야(If I Had Legs I'd Kick You)'는 산후 우울증과 육아 스트레스로 고통 받는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며 경험하는 정신적 붕괴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린 램지 감독의 '다이, 마이 러브(Die, My Love)'도 앞의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산후우울증을 단순한 질병의 서사로 소비하지 않는다. 램지는 이 소재를 보다 근원적이고 본격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른 이 영화는 산후우울증을 '여성 존재의 균열'로 확장하며 출산 이후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모성 신화의 허상을 해체한다.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과정에 시적이면서도 잔혹한 폭력이 동원된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불편한 진실은 린 램지 감독 특유의 표현 방식이다. [MUBI]
스코틀랜드 출신의 감독 린 램지는 현대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자신만의 미학을 완강히 고수하는 감독이다. 그녀의 영화는 서사보다 감정, 사건보다 정서를 택한다. 램지에게 이야기란 인물의 심리 상태를 투영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일 뿐이며 그 감정의 궤적은 언제나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시간의 리듬으로 표현된다.
이런 감각적 구성은 관객에게 단순히 이야기를 이해시키기보다, 감정을 체험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녀의 영화는 종종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난해함은 결코 불친절함이 아니라 감정의 깊이를 향한 램지만의 미학적 선택이다.
작가 그레이스(제니퍼 로렌스)와 남편 잭슨(로버트 패틴슨)은 뉴욕을 떠나, 잭슨이 상속받은 몬태나 시골 외딴집으로 이사한다. 농가형 주택에서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며 집을 고치고 둘만의 자유로운 생활을 꿈꾼다.
둘의 부부 관계는 뜨겁고 열정적이다.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추며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둘만을 위한 것인 듯한 순간들이 펼쳐진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서 이들의 삶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산후우울증과 고립감, 정체성 혼란을 경험하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글을 쓰는 본업에서도 멀어지고 잭슨은 집을 떠나 일하러 가는 날이 많아진다.
그레이스의 육아 스트레스는 점차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른다. 집과 아이, 남편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며 갈등이 극대화된다. 그녀의 정신이 무너짐에 따라 충동적이고 파괴적으로 행동한다. 이러한 변화는 부부의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서서히 주변과의 관계도 깨어진다. 그레이스의 내면세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충격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그레이스의 심리적 붕괴는 더욱 심화하고 부부 관계는 본격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잭슨의 어머니 팸(시시스페이식)과 아버지 해리(닉 놀티)와의 거리감이 깊어지면서 그레이스는 외로움과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든다. 집이라는 공간은 이제 그녀에게 무겁고 위협적인 장소로 변해 있다.
제니퍼 로렌스의 몰입도 높은 연기는 칸영화제 이후 꾸준히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됐다. 그녀의 슬프고 용감한 연기는 아마 올해 가장 빛나는 연기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MUBI]
'다이, 마이 러브'는 산후우울증을 중심으로 한 여성의 심리적 갈등과 사회적 압박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진지하게 제기한다. 램지 감독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며 미세한 균열 속에 갇히는 그레이스의 감정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촉각적인 사운드와 불안정한 카메라 워크로 그녀의 내면을 시각화한다.
아이의 울음, 강한 바람, 비명과 같은 음향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그레이스의 분열된 정신이 만들어낸 내면의 잔향이다. 램지 감독은 사운드를 현실의 층위로 배치하지 않고, 심리적 리듬으로 재구성한다. 이 영화의 진짜 공포는 피나 폭력이 아니라,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진 사회적 강요에 있다. '모성'이 갖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여성의 정체성 붕괴를, 램지 감독은 시적으로 그리고 시각적으로 그려낸다.
'다이, 마이 러브'는 산후우울증이라는 임상적 용어의 경계를 넘어, 여성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과정에 폭력이라는 잔혹한 표현을 동원한다. 램지의 이전 작품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에서 보았던 폭력성은 이 영화에서보다 은밀하고 밀도 높은 사적인 방향으로 침잠한다.
분열된 모성의 심연과 그 고통은 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으며,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감정의 해소를 허락하지 않는 불편한 영화이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현실의 잔혹함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램지 특유의 표현 방식이다.
그레이스의 남편 잭슨은 아내를 사랑하지만 그레이스가 겪는 극단적 심리 변화에 대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며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다. 어찌 보면 잭슨 자신도 끊임없는 아내와의 불협화음, 그리고 자아와 충돌로 인한 고통의 당사자이다. 그러나 그는 곁에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남편으로 설정된 탓에 무능한 면만 부각되는 측면이 있다.
그는 집안일이나 아내의 정서적 붕괴를 스스로 맞서 해결하지 못하고 일하러 떠나는 등의 회피하는 방식을 택한다. 존재하되 개입하지 않는 유형, 그 무기력한 태도에 아내의 고통은 더욱 심화할 뿐이다. 최근 들어 대중 스타의 위치에서 작가주의 또는 실험 영화의 영역(미키 17)으로 연기폭을 확장하고 있는 로버트 패틴슨은 이 작품에서 단순한 조연이 아닌 주인공의 내면 붕괴를 반영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제니퍼 로렌스는 자아 안에 내재한 모성의 어두운 그림자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한 여성의 심연을 온몸으로 연기해 낸다. 현실 감각이 무너진 로렌스의 얼굴에 슬픈 모성의 신화가 담겨 있다. 로렌스는 절제와 폭발 사이를 오가며 정적 속에서도 내면의 소용돌이를 표현하는데 단 한 컷도 낭비하지 않는다.
제니퍼 로렌스의 몰입도 높은 셈세한 연기는 칸 영화제 이후 꾸준히 오스카 후보로 거론됐다. '부고니아'에서 삭발 연기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엠마 스톤과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한다. 로렌스의 슬프고 용감한 연기는 아마 올해 가장 빛나는 연기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