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에서 눈길이 끌렸다. 언어 학습에 심취한 한 미국 여자가 물음표 없이 던지는 타이틀에. “Are Bilingual Brains Really Different, 이중언어의 뇌는 정말로 다른가.”
깜짝 놀란다. 2018년 중앙일보에 ‘어라이벌’이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에서 내가 언급한 사피어-워프의 가설, ‘언어적 결정론’, ‘Sapir-Whorf’s ‘Linguistic Determinism(1929)’을 그녀가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 순간 자기가 한 말과 결속관계가 일어난다. 당신의 미국인 친구가 “I will give you my word.”라 말했을 때의 ‘word’는 ‘약속(約束)’이라는 의미가 된다. 맺을 約, 묶을 束. 그리고 그 친구는 당신을 향한 스스로의 발언에 단단히 묶여진다.
그는 자기가 뱉은 말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드라마틱하게 말하면 한마디의 말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사연이면서 좀 비관적인 냄새마저 풍긴다.
말은 결속감을 야기한다. “I promise.”와 “I will give you my word.”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뉘앙스의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전자, “약속하다”는 캐주얼한 의미로 쓰이면서 공식적인 계약에도 사용되는 반면에, 후자, “내가 한 말을 지킬게요”는 상대에게 자기 약속을 믿어달라는 맹세에 가까운 진술이다. 관료적 언어보다 짧고 순수한 말이 더 호소력이 있다는 것이 인지상정. 우리는 그만큼 말이 발산하는 진실된결속감을 추구하면서 제발 젠체하는 말을 멀리하고 싶다.
미국에서 반백 년을 넘게 갈고 닦은 나의 언어생활. 아직도 한국어에서 영어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영어로 전화통화를 하는 도중 누가 옆에서 한국말로 뭐라 하면 말의 흐름이 끊겨버린다. 영어를 할 때와 우리말을 할 때 내 성격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심하게.
우리말을 할 때 나는 감정에 마음 놓고 지배당하기를 잘한다. 쉽게 다정해지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거로 흥분한다. 또 한편, 영어를 할 때는 분석적이고 냉정하고 상대와 심리적 거리감을 둔다. 나는 이중언어를 구사하는 이중인격자다.
언어 속에 한 나라의 역사, 전통, 관습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릴 적 일본식 발음으로 듣던 ‘빳떼리’, ‘빤쓰’와 요즘 식으로 발음하는 ‘배터리’와 ‘팬츠’의 뉘앙스를 비교, 분석하면 재미가 난다.
같은 생활용품을 두고 유년기의 향수심과 미국 생활습관의 일부인 ‘AA battery’ TV 광고와 패션쇼에 나오는 멋진 바지가 교차되다니. 누가 빳떼리, 빤스, 하고 말하는 순간에 내 성격이 어린 시절 한국 배경을 떠올리는가 했더니, 배터리, 팬츠, 하면 내 성격이 얼른 다시 21세기 미국 배경과 엇갈리다니. 신기해.
6살 때 경상도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녔다. 지금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대학 친구와 대화를 하면 그때 말투가 튀어나온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계면쩍고 퉁명스러운 경상도 사나이 같은 성격으로 돌변하는 경이로움에 마음 놓고 빠져든다.
이중언어의 뇌는 단일어 뇌보다 훨씬 분주하고 다양하다. 한 언어의 인덱스 시스템이 딸리면 다른 언어 인덱스를 찾아보면 해답이 나온다. 이중언어의 뇌는 김소월의 시 ‘가는 길’에서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하는 언어적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 그것은 이민자로서 우리가 꾸준히 연마하는 문화적 ‘설정’이다. 우리에게는 그 ‘setting’을 변경할 수 있는 자유의사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