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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죽음은 고통인가?

New York

2025.12.15 21:18 2025.12.15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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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라는 답으로 이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현대 의학에서는 환자와 보호자가 원하면 생의 마지막(end of life)을 고통 없이 편안하게 맞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비교적 최근에 생긴 전문 분야로 통증 완화팀(Palliative Care)은 환자의 통증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둔다. 대부분 말기 암 환자나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통증을 치료한다. 견디기 힘든 통증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때 전문가의 도움으로 통증 문제를 해결해 삶의 질을 높인다는 의도이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은중과 상연’이라는 드라마를 감명 깊게 보았다. 초등학교 때 만난 이 둘은 경쟁자였다가 절친이었다가 서로 동경하다 미워하며 일생에 걸쳐 서로 얽히고설킨다. ‘선망과 원망’이라는 부제에 맞게 이들의 친구 관계는 우정, 미움, 질투, 동경을 경험하며 그들 사이에 교차하는 심층 변화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압권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분노와 오해를 남기고 몇 번의 절교를 맞이하지만 무슨 악연인지 계속 또 만나게 된다. 10년의 공백을 깨고 40대에 재회한 상연은 은중에게 자신이 시한부 인생의 말기 암 환자여서 안락사를 택해 스위스로 가기로 했는데 동행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은중은 이 모든 사실을 믿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쇼를 벌이나 천대하며 밀쳐낸다. 그리고 이것은 “폭력이야”라고 외친다.  
 
결국 은중은 상연의 요청을 수락하며 마지막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 스위스로 간다. 그들은 과거의 오해와 갈등을 서로 되짚어가며 서로의 감정을 이해해 보려 애쓴다. 그동안 묻어두었던 진실을 털어놓고 우정의 의미를 되새긴다. 홀어머니와 가난하게 살아왔던 은중은 자존심이 강하고 화사한 성격에 친구가 많았으나 반면 부잣집에서 태어나 뛰어난 두뇌와 미모를 타고났지만, 계속되는 불운한 가정사로 늘 사랑에 목마르고 혼자였던 상연은 은중과 비교하며 서로 가지지 못한 그것에 대해 선망하고 선망은 질투를 낳고 질투는 원망을 낳아 이 둘은 평생 애증 관계로 고통스러워했음을 서로 고백하고 오해를 풀어간다. 은중이 상연에게 꼭 이 선택(안락사)을 했어야만 했는지, 후회는 없는지 묻는다. 상연은 동성연애자였던 오빠의 자살과 말기 암 환자로 너무 괴로워 괴성을 지르는 엄마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자신은 이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연이 찾아간 스위스의 안락사 장소는 디그니타스(Dignitas)라는 비영리 단체다. 이 단체는 실제로 존재하며 외국인에게도 안락사를 허용한다. 엄격히 말하면 안락사가 아닌 조력자살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돕는다. 의사나 간호사가 약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고 환자 자신이 구강으로 마시거나 정맥주사의 밸브를 열어 수면 상태로 유도한 다음 혼수상태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디그니타스 비영리 단체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먼저 이 단체의 회원이 되어야 하며 가입비와 연회비를 내고 정신적 올바른 판단력이 있어야 하며 최소한의 체력과 이동성이 있어야 한다. 의사의 진단서와 소견서도 필요하며 간단한 자신의 일대기를 보내고 승인을 기다린다. 일단 서류로 승인되면 스위스에 가서 의사와 인터뷰를 마친 후 최종 승인을 받는다. 이 준비 과정에 따르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까다로운 과정이고 준비할 서류도 무척 많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큰 비용에도 불구하고 이를 선택하는 경우는 자기 죽음에 대해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마지막 자존감이 아닐까? 맞다. 그 어떤 죽음에도 정신적인, 신체적인 고통이 따른다. 다만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위해서 현대 의학도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한 지인이 “난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죽을 때 고통스러울까 너무 두렵다”라고 고민한다. 아직 의식이 있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가족에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면 된다. 평생 많은 죽음을 목격해온 나 자신이 독자들에게 꼭 전달해 주고 싶은 내용이다.

정명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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