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오기 전에는 솜씨 좋은 시어머님께 김치를 얻어먹었고, 이곳에 정착한 후로는 한두 포기의 김치를 대충 담가 먹거나 사다 먹곤 했다. 그래서 올해로 두 번째라는 산악회 단체 김장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은퇴로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도 있지만, 김치 담그기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행사 준비 과정은 작은 축제처럼 활기찼다. 재료 구매, 배추 절임, 양념 손질, 무채 썰기, 양념 만들기와 배춧속 넣기, 식사 준비까지 역할이 세세하게 나뉘었다. 단톡방에는 필요한 도구와 혼자서는 떠올리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장화와 앞치마는 물론, 양파를 썰 때 눈물이 나지 않게 물안경을 챙기겠다는 사람, 무채 썰다 손을 다치지 않도록 목장갑을 가져온다는 사람 등 ‘저요. 저요!’ 하는 자원 열기가 대단했다. 김장을 위해 한국방문 일정을 앞당겨 온 분도 있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사 온 꽃무늬 몸뻬를 입고 나타난 남자 회원 덕분에 큰 웃음도 터졌다. 함께 모인다는 의미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새삼 느꼈다.
며칠 내리던 남가주의 겨울비도 잠시 멈추고 늦가을 공기가 적당히 쌀쌀한 상쾌한 날씨였다. 누구 하나 어영부영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몸을 놀렸다. 끝나지 않은 팀의 일을 눈치껏 도우며 서로 챙겼다. 산더미 같은 배추가 드디어 김치가 되었다. 김장은 손맛만큼이나 마음의 온기가 더해져야 완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치 담그기에 서툰 나는 파와 마늘을 다듬고, 생강 껍질 까는 일을 맡았다. 껍질을 두껍게 벗겼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껍질을 모아 달이면 겨울철에 제격인 생강차로 그만이라며 내 편을 들어주는 분이 있어서 민망함이 조금 가셨다. 김장에 빠질 수 없는 돼지고기 수육 맛도 일품이었다. 프라이팬에 삼겹살의 표면을 일단 구워 기름기를 뺀 후 양념과 함께 푹 삶아낸다는 비법을 배운 것도 이날의 또 다른 수확이다.
겨울 무와 배추의 시원하고 고소한 맛에 김칫속이 배춧잎 사이에 차곡차곡 스며들면, 발효를 거치며 오묘한 맛과 영양이 생긴다. 세계적으로 K-food의 인기가 높은 요즘, 김치의 우수성을 더 연구하고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 김장은 ‘함께 만들고 나누는 문화’라는 공동체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음식이 아닐까.
나이가 들수록 떠나온 고향이 떠오른다. 이번 단체 김장은 서로 배려하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수고했어’ 하며 등을 다독여 주는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사계절 변화가 크지 않은 남가주에 살며 김장을 잊고 살았지만, 숙성된 김치를 밥상에 올리니 오래전 겨울 준비의 설렘이 생각났다. 이제 배추 절이기만 익히면 언젠가 나도 김치 한 포기 제대로 담글 수 있지 않을까. 단체 김장은 나에게 잊고 지낸 전통의 의미와 함께 ‘나도 할 수 있다’의 용기를 선물한 소중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