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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제자의 편지

Los Angeles

2025.12.24 18:44 2025.12.2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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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선 소설가·미주문인협회 이사

김명선 소설가·미주문인협회 이사

‘존경하는 김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이렇게 만나 뵙고 이 글을 드릴 줄은 몰랐습니다.’
 
옛 제자가 보낸 글을 읽는 순간, 오십여 년 전의 시간이 영화 필름처럼 되감기기 시작했습니다. 내 얼굴에 지금처럼 주름이 잡히기 전, 젊음과 의욕이 넘치던 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눈빛이 맑고 귀엽기만 했던 남학생, 아홉 살, 열 살이던 그 아이가 이제는 예순을 훌쩍 넘긴 장년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습니다. 희끗희끗한 새치가 섞인 머리와 삶의 관록이 배어 있는 모습은, 길에서 스쳤다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신사의 풍모였습니다. 그도 나도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었지만, 서로 너무나 달라진 모습에 졸업 앨범을 펼쳐 들고서야 하하 호호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정성껏 카드를 준비했고, 화분과 함께 아내가 마련했다는 유명한 한국산 화장품까지 챙겨 와 늙어가는 옛 스승을 기쁘게 맞아주었습니다. 이미 은퇴했고 며느리까지 보았다니, 머지않아 손자를 안게 될 나이라고 했습니다.
 
각박하고 냉랭한 세상에서 옛 스승을 찾아와 기억해 주고 대접하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에 더없이 감격했습니다. 이 마음을 혼자만 간직하기 아까워 이렇게 짧은 글로나마 세상에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지나온 세월을 기억하고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늙은 스승을 찾아온다는 일이 과연 흔한 일일까요. 한국 신문을 펼치면 스승을 폭행했다는 학생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세상입니다. 얼마 전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접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며 한국 교육 현장의 살벌한 현실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교단에 서라고 한다면, 선뜻 나서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학생이 두려운 세상에서 어떻게 바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시즌, 거리는 불빛으로 가득하고 캐럴이 울려 퍼져도, 외로운 사람은 여전히 외롭고 고독한 사람은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화려한 파티 초대를 받지 않아도,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이민 생활 50년을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그리운 고향의 향기와 동포들의 숨결은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미국 땅에서 살며 이곳의 공기를 마시고 이곳에서 자란 음식을 먹고 살면서도 끝내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 나 자신이 때로는 촌스럽고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우리말을 쓰는 대한민국의 딸입니다. 꿈도 우리말로 꾸고,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도 한국어로 예배드리는 교회를 찾는 나는 여전히 미국 안의 이방인입니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살던 옛집은 온데간데없고 서양 도시처럼 변모한 풍경 앞에서 이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옛집은 성터처럼 사라졌지만, 그곳에 깃든 향수는 여전히 나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게 합니다.
 
잊고 지냈던 시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려 준 옛 제자에게, 그리고 그 제자의 삶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 작은 사랑 한 점이 허허로웠던 내 가슴 한복판에 ‘행복’이라는 점을 찍어 주었습니다.

김명선 / 소설가·미주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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