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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 "오렌지 하나를 정성스럽게 따는 것도 애국"

Los Angeles

2025.12.31 18:53 2025.12.3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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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혼 심어준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
최초 한인 공동체 '파차파 캠프' 설립
교육·종교활동 등 통해 민족의식 고취
대한인국민회·흥사단 창립 계몽 운동
한인 사회 발전 위한 든든한 토대 마련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의 핵심 인물인 도산 안창호 선생. [중앙포토]

미주 한인 독립운동사의 핵심 인물인 도산 안창호 선생. [중앙포토]

1916년 도산 안창호가 독립운동 단체인 흥사단원들과 함께 한 모습. [중앙포토]

1916년 도산 안창호가 독립운동 단체인 흥사단원들과 함께 한 모습. [중앙포토]

오는 1월 13일은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이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첫 한인 이민자들이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올해는 한인 이민 123년이 되는 해다. 남가주는 미주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특히 남가주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요 활동지역이었던 까닭에 해외 한인 독립운동의 핵심 축으로 기록돼 있다.
 
안창호 선생은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나 1894년 상경, 구세학당에서 수학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평양에서는 관서지부 설립을 주도했다.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임화리에 점진학교를 설립하고 황무지 개간사업을 병행하는 등 교육과 실력 배양을 중심으로 한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미주 한인 사회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미주 활동에서 중요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남가주의 리버사이드다. 리버사이드는 1904년 이후 한인 이민자들이 오렌지 농장 노동자로 정착한 지역으로, 1905년 조성된 파차파 캠프(Pachappa Camp)는 미 본토 최초의 한인 집단 거주지로 기록돼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며 공동 취사와 교육, 종교 활동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했다.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의 한인 이민자들의 노동은 도산 안창호의 미주 활동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일하던 한인들과 교류하며 생업과 독립운동을 분리하지 않는 자세를 강조했다. 안창호는 오렌지 농장에서의 성실한 노동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된다고 보았으며, “오렌지 하나를 정성스럽게 따는 것도 애국”이라는 말로 노동과 민족의식의 연결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농장은 초기 미주 한인 이민자들의 노동 현실과 도산의 사상이 교차한 공간으로 기록돼 있다.
 
리버사이드 한인 공동체는 단순한 거주지를 넘어 조직 활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공립협회와 대한인국민회 활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계몽 활동도 병행됐다. 현재 파차파 캠프 터에는 도산 안창호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리버사이드시는 이를 역사 유적지로 보존하고 있다.
 
안창호는 1903년 LA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선출됐다. 1905년에는 이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공립협회는 상부상조와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활동했으며,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1909년에는 미주 한인 사회의 중앙 조직 역할을 한 대한인국민회가 창립됐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전역의 한인 단체를 통합해 독립운동 자금 모금, 교육 사업, 언론 활동을 전개했다. 현재 LA에는 대한인국민회관을 계승한 기념재단이 운영되고 있으며, 도산 안창호의 생애와 미주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전시·보존하고 있다.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흥사단이 창립됐다. 흥사단은 무실역행과 인격 수양, 단결 훈련을 목표로 한 민족 계몽 단체로, 이후 미국과 중국, 한반도 등지로 확산됐다.
 
도산 안창호는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했다. 그는 연통제 실시, 독립신문 발간, 임시정부 행정 정비 등에 관여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임시 사료편찬회를 조직해 ‘한일관계사료’ 전 4권을 편찬·발행했다. 임시정부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후원회를 조직해 해외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 이후에도 임시정부 조직 통합과 독립운동 방략 논의에 참여했다.
 
도산 안창호는 1927년과 1932년 일제에 의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상하이에서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고, 1933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에도 독립운동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35년 대전형무소에서 출옥한 뒤에도 계몽 강연을 이어갔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됐다. 옥고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38년 3월 10일 경성에서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도산 안창호와 부인 이혜련 여사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안필립, 차남 안필선, 장녀 안수산, 차녀 안수라, 유복자인 안필영이다. 도산 안창호는 LA에서 가족과 약 13년 2개월간 함께 생활했으며, 세 차례에 걸쳐 미주에 체류했다. 현재 그의 후손들은 남가주를 중심으로 4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가주에는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와 LA 대한인국민회관을 비롯해 도산 안창호의 미주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과 기록이 남아 있다. LA 한인타운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산 안창호 우체국도 있다. 이는 연방정부가 한인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기념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이 밖에도 남가주 일대에 남아 있는 관련 공간과 사료들은 미주 한인 이민 사회의 형성과 해외 독립운동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적 흔적으로 남아 있다.
 
남가주에 남아 있는 도산 안창호의 발자취는 미주 한인 사회 형성과 해외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로 기록됐다.

 

☞ 도산 안창호는…
 
지난  1938년 11월 별세했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인 그는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인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임화리에 점진학교를 설립해 교육 계몽 운동에 나섰다. 1902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한인 사회 조직 활동에 적극 참여해 1905년 공립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1909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창립에도 관여했다. 1913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창립에 참여하며 해외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191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송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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