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권익 향상의 전사' 민병수 변호사 1948년 LA로 이주 소수계 차별 경험 교사로 일하며 야간 법학대학원 졸업 LA폭동 피해 집단소송 주도 등 활동 한인의 날·한인 이름 공립학교 앞장
LA시의회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민병수 변호사가 단일 선거구 필요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중앙포토]
고(故) 민병수 변호사의 생애는 남가주 한인 사회의 태동과 성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특히 그의 삶은 ‘자유·평등,법 앞의 공정함’이라는 미국 건국 정신을 한인 이민자 공동체가 어떻게 구현해 왔는지를 증명한다. 민 변호사는 한인 사회의 법률가로서, 한인이 힘을 모을 때 권익 신장과 정체성 강화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음을 몸소 실천했다.
민병수 변호사의 부친 민희식(1895~1980) 선생은 대한민국 초대 교통부 장관이자 제1대 LA 총영사(1948년 10월~1960년 8월 재직)를 지냈다. 민 변호사는 3남 2녀 중 차남으로 193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이던 1948년 가족과 함께 LA로 이주했다. 부푼 꿈을 안고 건너왔지만, 외교관의 아들이라는 배경조차 백인 중심 사회에서는 아무런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언어 장벽과 노골적인 인종차별, 교사와 사회로부터 받은 편견은 미국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일찍 깨닫게 했다.
청소년기 미국 정착 과정에서 겪은 소수계 차별의 경험은 그의 인식을 바꿨다. 그는 “미국은 자유와 법치를 말하지만, 소수자에게 그것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목소리를 내고 싸워서 쟁취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삶의 철학은 이후 그가 법률가로서 한인 사회의 권익 신장과 발전에 헌신하게 된 신념이자 동력이 됐다.
라번대를 졸업한 그는 생계를 위해 교사로 일하며 글렌데일의 야간 법학대학원을 다녔다. 대학 진학 상담에서 “변호사보다는 기술직이 낫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꿈을 접지 않았다. “중학생 때 배심원 제도를 읽고, 배심원 앞에서 피고인을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는 그의 회고처럼, 법은 ‘차별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언어’였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만난 모습. [중앙포토]
무료 법률상담 모습. [중앙포토]
1975년 그는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한인으로는 세 번째, 남가주에서는 두 번째였다.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자리 잡은 그는 한인 학생 3명이 연루된 총격 오발 살인 사건, 1987년 LA 한인 갱단과 한국 조직폭력단의 알력 다툼에 따른 살인 사건, 1995년 모래시계파·아이파 살인 사건 등 한인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을 맡았다.
이후 48년간 형사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그는 수많은 사건을 통해 ‘묵비권’과 ‘적법 절차’의 중요성을 한인 사회에 각인시켰다. 그는 “조사실 의자에 앉는 순간, 죄 없는 사람도 무너진다. 그래서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곤 했다.
1980년대 들어 그는 한인 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83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고, 협회의 전통이 된 무료 법률 상담을 시작했다. 그는 “70~80년대 한인 사회는 가난했고 법을 몰랐다. 법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고 밝혔다. KABA는 현재 한인 법조계의 구심점으로 성장해 다양한 법률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민 변호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92년 LA 폭동이었다. 그는 한인법률권익재단을 통해 폭동 피해 업주들을 대리해 LA시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 2년간의 법적 투쟁 끝에 LA시는 참여 업주들에게 업소당 2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한인 사회가 입은 피해를 제도권 법률 체계 안에서 공식 인정받은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민 변호사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 제정이다. 그는 LA시와 LA카운티, 캘리포니아주, 연방정부 결의안을 직접 작성해 1월 13일을 공식 기념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주 한인의 날 제정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굴곡진 역사를 기억하고, 근면과 성실로 미국 사회의 당당한 소수계로 성장해 온 한인 사회의 정체성을 확립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미주 한인의 날은 이제 전국의 도시와 주의회, 연방 의회에서 매년 기념되고 있다.
한인 차세대를 위한 교육과 정체성 함양은 민병수 변호사가 생전 가장 보람을 느꼈던 활동이다. 2000년대 들어 LA 한인타운에 학교 신축 붐이 일자 그는 공립학교 3곳이 한인 이민 선조의 이름을 달도록 앞장섰다.
찰스 H. 김 초등학교(2006년 개교), 김영옥 중학교(2009년 개교), 닥터 새미 리 매그닛 초등학교(2013년 개교) 등은 한인 사회에 공헌한 이민 선조들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다. 그는 이를 “100년을 내다본 교육 프로젝트”라며 자신의 활동 가운데 유일하게 자랑했다.
2012년 LA시의회에서 열린 LA 한인타운 선거구 단일화 공청회에서, 안구암으로 한쪽 눈을 적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병수 변호사는 검은 안대를 한 채 단상에 섰다. 그는 4개로 나뉜 선거구를 단일화해 한인 사회의 정치적 목소리를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뭐가 두렵나. 자유와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투쟁하고 쟁취하는 것”이라는 그의 발언은 지금도 한인 사회에 회자된다.
암 투병 속에서도 봉사를 멈추지 않았던 민 변호사는 2023년 6월 1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민병수 변호사의 삶은 한인 사회가 미국 사회의 일원이자 중요한 구성원으로 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그는 변호사로서 소수계 권익 신장에 힘썼고, 한인 사회는 물론 지역 사회 전체의 다양성과 포용성 강화에도 기여했다.
[자료: 미주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민병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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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수 변호사는…
1933년 서울에서 출생, 지난 2023년 6월 1일 별세했다. 초대 LA총영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자리잡은 뒤 라번대를 졸업하고, 글렌데일 소재 야간 법학전문대학원을 나와 1975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 합격했다. 이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KABA) 설립 및 초대 회장을 맡으며 한인사회 봉사에 앞장섰다. 한인청소년센터(현 KYCC) 이사, LA카운티 법률위원회 첫 한인 커미셔너, 한미법률재단(KALAF) 회장, 세계한인교육자총연합회(IKEN) 초대 회장, 애국동지회 고문을 역임했다. 한인사회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01년), 재미동포 첫 대한민국 법률대상(2009년), 세계한인검사협회 주최 평생공로상(2018년), 남가주한인변호사협회 주최 개척자상(2018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