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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 세상 읽기] 서류 한 장이 찢어놓은 가족

Los Angeles

2026.05.0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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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이상명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2018년 1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공항. 10살 때 미국에 온 뒤 30년을 성실하게 살아온 호르헤 가르시아가 추방되던 날,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곁에 서서 탑승 시각을 기다리는 동안,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전과 한 건 없이 꼬박꼬박 세금을 내며 살아온 아버지, 미국 시민권자인 아내와 자녀들, 그에게 없는 것은 오직 서류 한장뿐이었다.  
 
그날 공항에서 찢긴 것은 단순한 체류 자격이 아니라 한 가정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남의 이야기로 읽지 못했다. 처음 이 땅을 밟던 날, 공항 입국장에서 손에 쥔 서류들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던 예전의 그 긴장감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고 계셨는가, 그리고 그것을 아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레위기 19장 34절은 단순한 권고가 아니다.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명령은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도덕법으로서 오늘날도 유효하다. 하나님은 이 명령의 근거로 이스라엘 자신의 역사를 제시하신다. 억압받던 자가 억압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그네였던 기억이 나그네를 향한 환대의 신학적 토대가 되며, 그 환대는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룻기의 보아스는 율법의 문자를 넘어 가난한 이방 과부 룻에게 식탁을 열고,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자원하여 짊어졌다. 그것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이 이방 여인은 결국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마태복음은 그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올린다(마 1:5). 카이퍼의 ‘영역 주권’ 개념이 이 행동의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19세기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하나님이 국가·가정·교회 각 영역에 서로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권위를 부여하셨다고 가르쳤다. 국가는 질서를 유지할 권한을 갖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을 해체할 권한까지 가진 것은 아니다. 전과 없는 가장을 자녀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공동체를 위협하는 범죄자를 추방하는 것과 같은 저울로 달 수 없다.
 
성서는 국가 권위를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로 인정하며(롬 13장), 국경을 통제하고 법을 집행하는 것은 공동체를 지키려는 진지한 책무임을 우리도 안다. 법치의 일관된 적용이 사회적 신뢰의 토대라는 주장도, 이민 제도의 공정성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그 자체로 진지하게 경청해야 한다. 서류 없이 수십 년을 지낸 이들에게 합법적 경로를 먼저 밟지 않은 책임을 묻는 것, 그리고 예외를 허용하면 제도 전체의 일관성이 흔들린다는 우려 또한 공동체의 질서를 사랑하는 이들의 진심에서 나온 목소리다. 그러나 어떤 법체계도 집행 방식을 선택할 재량권을 갖는다. 30년간 세금을 납부하며 미국 시민권자 자녀를 키운 가장과 공동체를 위협한 범죄자를 동일한 절차로 처리하는 것은 재량권의 포기이며, 법이 스스로의 목적인 공동체 보호를 배반하는 순간이다. 그 균열 앞에서 교회가 법률적 다리를 놓는 것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신학적 책무다.
 
“네가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다 들었느니라”(룻 2:11). 공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으려던 그 아이의 울음소리도 하나님은 들으셨다. 그리고 교회도 들어야 한다. 보아스가 율법 너머로 손을 내밀었듯, 그 들음은 선언을 넘어 구체적인 행동으로 피어날 때 참된 의미를 갖는다.  
 
미주 한인 교회가 연합해 ‘긴급 이민 법률 기금’을 조성하여 서류 한장으로 해체 위기에 놓인 이웃의 든든한 법적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나그네를 사랑하라”(신 10:18)는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하는 아름다운 연대이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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