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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나의 살던 고향’의 오류

봄꽃들이 주변에서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인들도 꽃구경을 다니느라 바쁘다. 이렇게 봄꽃이 만개하는 계절에는 어릴 적 시골에서 보며 자랐던 무성한 꽃들이 생각나면서 고향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노래가 ‘고향의 봄’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이원수 시, 홍난파 작곡)   노래 제목은 ‘고향의 봄’이지만 ‘나의 살던 고향’으로 제목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다. 그만큼 첫 구절인 ‘나의 살던 고향’이 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살던 고향’은 음식점 이름이나 홈페이지 제목 등에 두루 쓰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나의 살던 고향’은 ‘의’가 잘못 쓰이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던 고향’이 정상적인 우리말 어법이다. 이처럼 주어(‘내가’) 자리에 ‘의’가 쓰이는 것은 일본어 조사 ‘노(の)’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어에서 ‘노(の)’는 여러 문장성분으로 쓰인다. 우리말의 ‘의’와 비슷한 용법으로 소유격조사로 주로 사용된다. 더불어 ‘노(の)’는 일본어만의 특수 용법으로 주격조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주어 ‘나의’가 바로 이런 용법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선 ‘의’가 주격조사로는 쓰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의 살던 고향’이 익숙하다 보니 이와 비슷한 구조의 말이 흔히 사용된다. “정치의 변화하는 모습을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가 그런 표현이다. ‘정치의’를 ‘정치가’로 고쳐야 한다. “우리의 나아갈 길은 정해졌다”는 ‘우리의’를 ‘우리가’로 바꿔야 한다. 이 밖에도 ?‘~의’를 남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스스로의 약속’은 ‘스스로 한 약속’,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은 ‘저마다 타고난 소질’이 우리식 표현이다. ‘소득의 향상과 식생활의 서구화’도 ‘명사+의(の)+명사’로 이루어진 일본어식 표현으로 ‘의’가 필요 없다.우리말 바루기 고향 오류 주격조사 역할 산골 복숭아꽃 홍난파 작곡

2025.04.02. 18:39

돌아온 고향, 무너진 터전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 간 휴전으로 지난 18일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 경계선 마을들에서 철수했다. 이에 따라 가자 지구 전쟁이 시작된 2023년 10월 마을을 떠나 피난나온 레바논 주민들이 속속 귀가했다. 집들이 있던 자리는 폐허로 변해있었다. 폭격과 공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군은 온전한 가옥들도 철거 해체했다. 국경선 아래 사는 이스라엘 주민들의 신변 보호가 이유였다. 크파르 킬라 마을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1년 6개월여만에 고향에 돌아온 크파르 킬라 주민 마나르 페레스가 부서진 집 잔해더미에 앉아있다.   [로이터]고향 터전 레바논 주민들 이스라엘 주민들 레바논 남부

2025.02.20.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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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특산물·관광 홍보 힘쓸 터”

OC호남향우회는 지난달 28일 가든그로브의 OC한인회관에서 회장 이, 취임식을 겸한 송년 잔치를 가졌다.   이날 서철영 전 회장의 뒤를 이어 취임한 장정숙 신임 회장은 올해 주요 목표로 ▶고향 특산물·관광 홍보 ▶회원 화합과 단합 도모 ▶지역 사회 봉사 강화 ▶젊은 회원 영입 확대 ▶향우회 기금 조성 등을 제시했다.   장 회장은 “세계호남향우회총연합회가 지정한 호남의 날(10월 4일)을 맞아 열릴 고국 방문 행사에 많은 이가 참가하도록 하겠다.   또 사각지대에 놓인 어려운 이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사장은 크리스 김씨가 맡았다.   문의는 전화(714-822-7744)로 하면 된다.특산물 고향 고향 특산물 회원 화합 회원 영입

2025.01.0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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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고향 달라스에서 근심 걱정 내려놓고 흥겨운 시간”

 달라스 한국노인회(회장 이형천, 이하 노인회) 회원들이 고국에 대한 향수를 추석잔치로 달래는 시간을 가졌다. 노인회는 지난 21일(토) 오전 11시 달라스 한인문화센터 아트홀에서 ‘추석잔치’를 겸한 9월 정기 월례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주달라스영사출장소 도광헌 소장과 달라스 한인회 김성한 회장이 특별히 함께 했고, 가수 하청일 씨와 전통 공연팀 아리랑 텍사스 그룹이 흥겨운 공연 한 마당을 펼쳤다. 특히 가수 하청일씨가 ‘과수원 길’을 부를 때 몇몇 회원들은 고국에 향수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날 점심식사는 KS & JS Chong LLC에서 제공했고, 한국홈케어 유성주 원장이 행사를 후원했다.   월례회가 시작하기에 앞서 노인회는 지금까지의 월례회 모습을 담은 사진을 파워포인트로 제작해 상영했다. 이형천 회장은 앞으로 매달 열리는 월례회 모습을 사진 및 영상으로 담아 파워포인트로 상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형천 회장은 노인회관은 1930년도에 건축됐고 노인회관 대강당은 1990년도에 건축된 터라 손을 봐야 할 곳이 너무 많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형천 회장에 따르면 회원들 중에는 노인회관을 재건축하자는 의견, 대강당만 우선 수리하자는 의견, 새로운 건물로 이전하자는 의견,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달라스 한인 문화센터로 입주하자는 의견이 많다고 밝혔다. 이형천 회장은 노인회관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한 의견이 모아질 때까지 달라스 한인문화센터에서 월례회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형천 회장은 “항간에 우리가 후원금을 받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다.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절대 후원금을 걷고 있지 않다”며 “이는 헛소문이며, 설령 후원금을 받는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달라스영사출장소 도광헌 소장은 축사를 통해 “그리운 고향에 못 가셔서 아쉬움이 크시겠지만 오늘 하루 만큼은 제2의 고향인 달라스에서 근심걱정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껏 즐기시기 바란다”며 “노인회에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것은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한국 전통 문양의 작은 손주머니를 선물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달라스 한인회 김성한 회장은 “달라스 한인회가 파워포인트 제작 등, 노인회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어 기쁘다”며 “한인회 사무실도 문화센터에 있고, 노인회와 서로 공조하며 좋은 모임이 되길 바라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는 노인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토니 채 기자〉  달라스 고향 달라스 한국노인회 달라스 한인문화센터 고향 달라스

2024.09.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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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고향에서 근심 없이 흥겨운 시간”

 달라스 한국노인회(회장 이형천, 이하 노인회) 회원들이 고국에 대한 향수를 추석잔치로 달래는 시간을 가졌다. 노인회는 지난 21일(토) 오전 11시 달라스 한인문화센터 아트홀에서 ‘추석잔치’를 겸한 9월 정기 월례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주달라스영사출장소 도광헌 소장과 달라스 한인회 김성한 회장이 특별히 함께 했고, 가수 하청일 씨와 전통 공연팀 아리랑 텍사스 그룹이 흥겨운 공연 한 마당을 펼쳤다. 특히 가수 하청일씨가 ‘과수원 길’을 부를 때 몇몇 회원들은 고국에 향수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날 점심식사는 KS & JS Chong LLC에서 제공했고, 한국홈케어 유성주 원장이 행사를 후원했다.   월례회가 시작하기에 앞서 노인회는 지금까지의 월례회 모습을 담은 사진을 파워포인트로 제작해 상영했다. 이형천 회장은 앞으로 매달 열리는 월례회 모습을 사진 및 영상으로 담아 파워포인트로 상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토니 채 기자고향 근심 달라스 한국노인회 정기 월례회 달라스 한인문화센터

2024.09.24.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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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슬픔과 함께 고향의 추억 속으로

어릴 적 친정아버지가 꾸민 서재에는 보물단지 책상 하나가 있었다. 큰오빠가 이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그 연유로 고등학생이던 나의 두 사촌 오빠가 교대로 우리 집의 그 책상에서 공부하다 가는 날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머니 오빠의 아들들이었다. 그런데 큰집의 막내아들인 오빠는 서울대에 들어갔고 작은집의 오빠는 후기 대학에 합격했다. 최근 큰집 오빠의 부음을 작은집 올케로부터 들으며 둘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기도 했다는 사실도 알았다. 올케는 남편이 장례식에서 서럽게 울더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고인이 된 오빠는 자기 형처럼 유명한 농대를 졸업했지만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잘 난체도 열등의식 같은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좋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미남이었다.     큰 외갓집은 어머니 집안의 제사를 물려받은 양자로 들어오신 삼촌이다. 외조부가 돌아가신 1928년은 딸에게는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어머니는 그 삼촌과 공동명의로 논밭 조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한 관계가 있었지만 나는 큰 외사촌 언니와 오빠를 좋아했다. 시청 근처인 광산동에서 외삼촌은 삼천리 자전거 대리점을 오래 운영했다. 그리고 외삼촌 댁 이층에서 제사가 있는  날이면 초중고생 사촌들이 모였다. 차례로 교자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며 추억을 쌓았다. 당시 오빠는 대학 졸업 후 서울의 유명회사에 지원했지만 잘 안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오빠는 결국 외삼촌처럼 자전거 대리점을 양동 상가에 차렸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결혼했다. 올케는 우리 동네 이웃의 착한 딸이라며 어머니는 기뻐하셨다.     당시 올케도 나처럼 교사여서  퇴근길에 오빠네 가게에 들러 올케랑 이야기도 종종 나누며 정도 들었다. “아가씨, 오셨수?”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인지. 고향에 가면 꼭 하루 자고 싶은 그 다정한 오빠와 올케네 집.     얼마 전 한국의 한 지인이 나에게 공진단을 보내준다기에 대신 그 오빠에게 선물해 달라고 했다. 오빠는 그때 간암 투병 중이어서 본인이 먹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오빠는 공진단을 보내준 지인에게도 감사 인사를 갔었다고 한다.     오빠의 병환 중에 가끔 안부를 전하곤 했는데 최근 내가 병원에 다니느라 잠시 소홀했더니 그사이에 별세한 것이다.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그래그래 잘 있냐, 애 아빠 잘 계시냐”고 말했던 오빠였다.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는 “예쁜 동생아, 좋은 글 많이 써라”였다.  보고 싶은 오빠, 우리가 모르는 고민 다 떨구시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구려. 최미자 / 수필가문예 마당 고향 추억 어머니 오빠 막내아들인 오빠 오빠네 가게

2024.08.29. 18:2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게 넌 돌아오는 길이었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소리 없이 다가오는 저녁이었어   너의 서 있는 자리, 그리고 노을이었어       깃털의 날림 같은 공기를 밟으며   무심한 듯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어   잎사귀에 구르는 이슬, 긴 가지마다   써 내려간 너의 노래, 그리고 몸짓이었어       서둘러 모아지는 잔가지들의 유희   아쉬움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어     너의 향기는 새벽을 깨우는   이슬이었는데   봄볕같이 스며드는 따뜻한   엄마 손이었는데   안겨 오는 바람처럼   흥겨웠던 날이었는데       돌아오는 차창 안으로 별이 스미는 날   내 힘으로 걷기 힘든 날   돌아서는 너의 뒷모습에 오랫동안   너의 이름을 부르던 날       오늘이 내일이 될 거야   내일도 오늘이 되어 지나갈 거야   기억이 차오르도록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생생한 기억의 그늘에 앉아 있으면 돼       높은 갈대숲도,   불어오는 바람도,   굽이치는 강물도,   너의 깊은 숨소리도   먼 길 돌아 스친다 해도   내게 넌 돌아오는 길이었어       이창봉 교수(Chicago 시 창작 캠프)의 12번째 강의가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어제 시작한 듯 느껴지는 문학 캠프가 이제 막바지로 가까이 가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간다. 갈증에 단비처럼 다가왔던 시 창작캠프 20명의 열린 마음들이 마음을 열고 강의에 임했기에 곳곳에서 시심이 터지고 꽃이 피어나고 향기가 주변에 진동하였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감추었던 마음의 표출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누구를 위함도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새로운 아침이 깨어나고 한낮에 내리쬐는 햇살 아래 따사로움이 마음 문을 활짝 열게 하였다. 구름의 하얗고 푸르른 소망의 창들이 바깥 풍경을 실내로 끌어들이고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 질 때까지 우리는 움직이지 않고 하나가 되었다. 노을을 바라보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단단히 잠가 놓은 눈물샘이 터지듯 감성이 터져 나왔다. 신기하고도 새로운 시간들이 어느 사이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껍데기를 결코 바꾸지 못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감겨 있던 눈이 떠지고 닫혀 있던 귀가 열리고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동토의 땅이 녹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거둘 수 없던 마음 밭에 나도 모르는 사이 씨가 뿌려졌고 햇살과 비와 새벽이슬로 싹이 솟고 줄기와 잎사귀를 보이더니 단단한 꽃망울 피워 내기 시작했다. 머지 않은 시간에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저마다의 꽃들이 피어나게 될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이제 새것이 되었다.” 성경 말씀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바람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시 창자 캠프 동안 웃고 떠들고 서로의 벽돌을 허물어 가면서 시인의 마음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시 창작 캠프의 일환으로 1박2일의 문학 기행이 미시간 호수가 펼쳐지는 호변 에어비앤비에서 시작되었다. 간밤에 쏟아졌던 바는 마치 하늘 문이 열리고 퍼부었던 폭우였다. 어두운 호수가 밤새 일렁이고 번뜩이는 섬광 속에도 불구하고 새벽은 오고야 말았다. 모두가 일출을 기대했지만 구름에 가려진 해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일찍 깨어나 해변을 걸었고 간혹 구름을 헤집고 살짝 비친 붉은 하늘에 탄성을 지르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굴렀다. 새벽을 단장 하고 기다리고 있던 호수는 선물처럼 시원한 파도 소리를 들려 주었다. 새벽을 맞는 창문을 말끔히 닦고 찬물에 얼굴을 씻고 유인 반짝이는 눈망울로 새날을 기다릴 일이다.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수를 마시게 하고 슬픔에 가슴을 조였던 사람에게는 눈물을 닦아 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수고와 애씀이 사라지지 않도록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할 일이다. 소란 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호수 가득 내려앉은 고요를 꼭 닮은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미시간 호수 창작캠프 20명 창작 캠프

2024.08.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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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고향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가슴 같아서, 스며드는 솜사탕 같아서, 언젠가 마주했던 싱그런 파란 바람 한 점 같아서, 이마에 송송 맺힌 땀방울 닦아 주는 엄마 눈물 같아서, 누군가에게 달려가 전해 주고픈 반가운 편지 같아서, 깨어 보니 멀리서부터 온 굽은 인생길 같아서, 길 따라 소담히 핀 들꽃 같아서, 무심히 걸었던 가로수길 느티나무 그늘 같아서, 붉게 피었다 이내 자취를 감춰버리는 서글픈 서쪽 노을 같아서, 하늘 멀리 달아나는 연 꼬리 따라 마냥 뛰었던 숨 가쁜 오솔길 같아서, 싸리비로 쓱쓱 쓸어낸 말끔한 안마당 같아서, 숲길 오르다 잠자리 날갯짓에 걸음을 멈춘 까까머리 친구 뒷모습 같아서, 뿌리치지 못한 애정한 손잡음 같아서,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 같아서, 그렇게 또 그래서       그렇게 마음을 저미고, 그래서 또 다지고, 어느 사이 가슴을 열게 하는, 바람 불어오는 들녘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하는, 엄마 누운 한 평 남짓 로즈힐 세미토리, 먹먹한 그리움으로 유년의 기억들이 펼쳐지는, 소식 끊긴 친구 얼굴 흐르는 구름에 밀려가는, 노랑 보라 잔잔한 들꽃들이 반갑게 손짓하는, 노랑나비, 흰나비 한 쌍 날개 겹치며 뒤뚱뒤뚱 언덕 넘어 사라지는, 그 숲길에서 나를 잃고 너를 잃어버리게 되는, 노을 그 깊은 회한의 물감이 별빛에 풀어지는, 싸리문 열면 정갈한 장독대 그 옆 기슭에 앉아 편지를 읽는, 그림 하같은 풍경을 집안에 가득 들여놓고 잠들지 못하는, 그렇게 또 그래서       물병에 들꽃   한나절 햇살은 지고   싸리문 열고 들어온 노을과   가지런한 고무신 한 켤레       나에게 흐르시오   내 그대에게   나의 고요를 모두 내어 드리이다   가슴을 풀으려니   그 자리에   한 송이 꽃으로 오시오       나에게 오시오   내 그대에게   나의 아픔을 이야기 하리다   두 팔을 뻗으리니   그대 떨리는 별자리로   파랗게 손짓해 주시오      나에게 별이 뜨고   소리 없이 밤이 오고 있소   내 그대를 향해   숲이 되어 흐르리니   내 눈 가득   그대 어디라도 오시오   그렇게 또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계단의 끝은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작은 실개천이 강물로 이르고, 강이 바다 향해 흘러가듯 계단 끝에는 이상의 존재 고향이라는 아득함이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는 날마다 고향을 향해 한 계단만큼 가까이 가고, 호수에 풀어놓은 달빛은 헤어진 기억을 어루만져 올이 풀린 고향의 등을 도닥거리고, 훤히 드러난 시간을 견고한 위로의 손으로 도닥여 준다 고향이라는 위로는 풍랑 이는 바다 한가운데 높은 파도에 깊은 심지의 뿌리를 내리고 다시 살아나고, 거울 속의 나는 나를 닮지 않았다 봄이 겨울을 닮지 않았듯이 생소한 너의 얼굴에 하얀 포말의 바다가 보이고, 가보지 못한 외로운 섬이 보이고, 싸리문의 작은 집이 그리움으로 보인다 저만치에서 고향이 손짓하고, 나를 부르고, 겨울나무 바라보다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를 그려보고, 그렇게 또 그래서       눈이 떠지고   귀가 뜨이는 거야   터지고 트여   보지 못한 것이 보이고   듣지 못한 것이 들리는 거야   그렇게 또 그래서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향 들꽃 한나절 친구 얼굴 노랑나비 흰나비

2024.07.2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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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고향 바다

고향 찾아가는 그대여   나를 잊지 마오         소금에 절 듯   외로움에 절었네요       석양에 물들듯   그리움에 물들었네요       고속도로 갓길에서   흐느끼기도 했죠       그대여       고향에 가거든     내 말 전해 주오       보고 싶다고   가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반나절이면 가는 길   반세기를 기다렸다고   그때마다   곰산에 올랐다고       봄에는 아지랑이   여름에는 흰 구름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눈꽃         어느 때나 친구   잊은 적 없다고       가을에 만나요   바닷가에서       바다는       변하지 않았겠지요   내 친구와 같이           *곰산: Bear Mountain 이강민 / 뉴저지글마당 고향 바다 고향 바다 고속도로 갓길 bear mountain

2024.07.11. 18:17

‘고향’의 그리움 음악으로 푼다

남가주 서울대 동문합창단(단장 박진국·의대 65)이 오는 8월 24일 오후 4시 LA 다운타운 소재 콜번음대 지퍼홀(200 S. Grand Ave.)에서 한여름 밤의 향연을 펼친다.   ‘고향’을 주제로 준비하고 있는 올해 공연에서는 장진영(음대 88) 동문의 지휘 아래 합창곡, 독창과 중창 등 주옥같은 노래 11곡을 들려준다. 또 가야금 산조 연주와 재즈 앙상블까지 풍성하게 꾸며진다.   박진국 단장은 “이번 정기 공연을 위해 단원들이 지난 10개월여 동안 거의 매주 한 차례씩 거르지 않고 모여 강도 높은 연습을 해왔다”며 “관객들을 결코 실망시키지않겠다”고 자신했다.   이어 “우리 모두 고향을 그리워하는 ‘디아스포라’들”이라며 “많은 분이 오셔서 음악을 즐기시는 한편 동문끼리 교류하는 모처럼의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 2부로 나눠 진행되는 공연에서 들려줄 곡들은 유럽 대학들의 교가라는 애칭이 붙어있는 ‘대학축전서곡(GaudeamusIgitur)’부터 슈베르트의 ‘음악에게(An Die Musik)’, 장 폴 마티니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파올라 토스티의 ‘세레나데(La Serenata)’ 등 한인들에게 친숙한 노래들이다.   또 소프라노 김수정 외에 박영, 조은아, 김주연, 김주혜, 테너 이규영, 베이스 장진영이 특별 출연한다.   이 밖에 김동석(음대 64) 동문의 가야금 산조 독주와 재즈 음악 앙상블도 만날 수 있다. 티켓은 20달러(도네이션).   서울대 합창단은 지난 2018년 미주에서는 유일하게 한국 국립합창단의 초청을 받아 한민족합창축제에 참여, 호평을 받은 바 있을 만큼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음대 성악과 출신들은 물론 간호대·공대·문리대·사대·생과대·의대 등 각 단과대 동문이 고루 참여하고 있어 단원들 간의 유대관계도 매우 돈독하다는 평이다.     한편 합창단은 동문의 기부 또는 프로그램에 게재할 광고를 접수하고 있다.     ▶문의: (213) 380-3366게시판 고향 사진설명남가주 서울대 재즈 음악 서울대 합창단

2024.07.1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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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감독 ‘별들의 고향’ 재상영

재미한국영화인협회(회장 정광석)가 오는 24일 오후 5시 CGV LA지점에서 1974년 흥행 영화인 ‘별들의 고향’ 50주년 기념 특별상영회를 개최한다.     이번 상영회에는 당시 영화를 연출한 이장호 감독이 직접 참석해 관객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는다.     또 25일에는 재미한국영화인협회 디너쇼가 개최돼 재미 영화계, 예술계 인사 등 참석자들의 교류의 장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최인호 작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으로, 당시 유명 배우인 안인숙, 신성일, 백일섭 등이 출연했다. 1974년 한국 영화 관객이 주로 2~3000명 안팎이던 가운데 ‘별들의 고향’은 당시 46만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정광석 회장은 “이번 상영회는 영화를 탄생시킨 이장호 감독이 한국에서 직접 참석하는 만큼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영회 이후 진행되는 디너쇼는 25일 오후 5시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진행된다. 이날 이장호 감독의 색소폰 특별 연주가 있으며 이외에도 가수 김정홍씨, 민요 가수 김현숙씨 등의 공연과 단막극 ‘아가씨와 건달들’도 무대에 올려진다. 무료로 진행되는 상영회와 달리 디너쇼는 식사를 포함해 60달러의 입장료가 있다.     ▶문의: (213)663-3050, (714)743-5740 김경준 기자게시판 특별상영회 고향 기념 특별상영회 재미한국영화인협회 디너쇼 재미한국영화인협회 정광석

2024.05.19.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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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나의 살던 고향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가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고향의 봄’이다. 국민 동요라 할 만큼 많이 불리는 노래다.   그러나 노래 가운데 ‘나의 살던 고향’은 ‘의’를 잘못 사용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내가 살던 고향’이 정상적인 우리말 어법이다.   우리말에선 원래 조사 ‘~의’가 흔하게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가리키는 ‘나, 너, 저’를 예로 들면 조사 ‘ㅣ’가 붙어 ‘내, 네, 제’로만 사용됐다. ‘내 마음’ ‘네 물건’ ‘제 자랑’ 등 현재도 그대로 쓰고 있는 형태다.   ‘~의’가 붙은 ‘나의, 너의, 저의’ 형태는 조선 후기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 개화기에는 흔히 쓰이게 됐다고 한다. 이는 일본어에서 여러 가지 문장성분으로 두루 쓰이는 조사 ‘노(の)’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선 ‘~의’를 남용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AI의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는 “AI가 변화하는 과정을~”로 해야 한다.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스스로 한 약속을~”로 고쳐야 한다.   “소득의 향상과 식생활의 서구화로 쌀의 소비량이 부쩍 줄었다”는 ‘명사+의(の)+명사’로 이뤄진 일본어식 표현으로 ‘의’가 전혀 필요 없다. “소득 향상과 식생활 서구화로 쌀 소비량이 부쩍 줄었다”가 훨씬 간결하고 깔끔하다.우리말 바루기 고향 식생활 서구화 소득 향상 복숭아꽃 살구꽃

2024.03.26. 19:40

[문예마당] 내 고향은 어디인가

한국 체류 중이던 지난해 10월 미국에 사는 5명의 친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중 3명은 여행사 단체여행 상품으로 왔다가 개인 시간을 보낸 후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모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인데 하필 그때 발가락을 다쳐 뉴욕에서 온 친구 한 명만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미국서 함께 살다 한국에서 만나면 더 반갑고 새로운 느낌이었을 텐데 전화 통화만 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하기도 했다.         LA로 돌아온 후 그중 한 명을 만났더니 “한국은 타향이니 이제 고향인 LA에서 만나야죠”라고 말한다. 그 말에서 ‘옛 친지가 그리워 한국을 찾았지만 반기는 사람 하나 없고 낯선 도시만 헤매다 왔다’는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대학 졸업 직후 유학을 왔거나 유학생 배우자를 따라왔으니 반세기 훌쩍 넘게 고국을 떠나 살았다. 한국에서 산 날보다 미국에서 지낸 세월이 훨씬 더 길다. 이젠 미국이 제2의 조국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아련한 향수에 잊지 않고 고국을 찾는 분들이다.     남편은 얼마 전부터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자주 한국을 찾는다. 그런데도 친지들의 즉각적인 반응이 없으면 섭섭한 마음이 든다. 나만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불쑥 나타나서 내 자리를 찾으려는 것은 무리다. 앞으로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지에게만 귀국 소식을 알려야겠다.   요즘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 이주를 고려하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민 와 고생하다가 애들도 다 커서 독립했고, 형제자매가 있는 한국서 살고 싶다”, “늘 마음속으론 고국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한국적인 문화가 더 친숙한 것 같아요” 등 이유도 다양하다. 한마디로 고향이 그립기 때문일 게다.  대체 고향이 뭐길래!   오랜 세월 미국에 살다 보면 알게 모르게 소위 ‘미국물’이 든다. 오랜만에 돌아가면 한국은 말이 잘 통하는 또 다른 외국일 수 있다. 달라진 한국 문화나 생활 방식에 적응하지 못해 후회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또 미국생활을 청산해서 한국에 들어와 살기 힘들 정도로 한국의 주택가격과 물가가 올랐다. 어쨌든 목표가 뚜렷해야 후회하지 않는다.   지인 중에는 “미국과 한국, 어디가 더 살기 좋아요?” 라고 묻는 분들이 있다. 이 물음에 나는 “한국에 가면 한국이 좋고, 미국에 오면 미국이 좋다”고 답한다. 공연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남편은 한국에 살고, 애들은 미국에 살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미국과 한국이 늘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타향도 정들면 고향’이라는데 그러면 내 고향은 어디인가?       타국 땅에 수십 년을 살아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마음속에 ‘내 나라가 어디인가’ 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지금 한국에 가도 모두 낯선 풍경으로 바뀌어 기억 속의 옛 모습은 다 사라졌다. 마음에 품고 있는 나라보다는 세월이 갈수록 내 몸이 머무는 땅이 우리나라가 된다.       한국은 ‘우리나라’라는 의미보다는 고향이라는 의미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갈 땅이 미국이라면, 한국은 나의 고향이다. 고향인 한국이 잘되고, 살고 있는 나라도 잘되는 것, 그것이 이민자가 품고 있는 이중적 바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LA에 ‘hi-5’ 라는 5명의 친구 모임이 있다.  전부터 인연이 있거나 새로 알게 된 친구들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직도 LA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지만 한번 만나면 몇 시간이고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친구들이다.     미국에 ‘hi-5’가 있다면 한국에는 역시 5명의 친구 모임인 ‘오색회’가 있다. 학연으로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더니 내가 외국에 나가 사는 동안 그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듯해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중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빨리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내가 많이 아팠고 서로 시간을 맞추느라고 이제야 만나자고 연락한다.”     서운했던 마음이 스르르 봄눈 녹듯 사라졌다.  5명이 모두 모였다. 한 명은 침대에서 떨어졌다며 가슴 둘레에 거북이 등 같은 보장구를 하고 나왔고, 또 한 명은 무릎이 아파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귀가 잘 안 들려 큰 소리로 말해야만 소통이 되는 친구도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걸 참으며 보장구를 착용한 친구에게 “야, 너 검투사 같다”며 웃어버렸다. 불편함을 무릅쓰고 나를 만나려고 나와 준 친구들이 너무 고마워 귀갓길 전철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양 속담에 ‘친구와 포도주는 오래된 것이 좋다’는 말이 있다. 고려 말 길재는 500년 도읍지 개경을 둘러보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라고 탄식했다. 오늘날 한국은 아파트와 빌딩 숲으로 변해 옛 모습은 사라졌으나 옛 친구들은 여전하다. ‘산천은 간데없고 인걸은 의구하네’라는 생각을 한다. 오랜 친구들이 나를 변함없이 반겨 주는 곳, 그곳이 내게는 고향이다.   배광자 / 수필가수필 고향 고향인 한국 친지가 한국 한국 문화

2024.02.08. 19:52

한인사회는 내 고향…안전·정의 위해 헌신

“이민온 부모님이 한인타운에서 겪은 사건 탓에 법조인이 됐습니다.”     LA 법원을 더 반듯하게 만들고 싶다는 제이콥 이(36·사진) 카운티 법원(39호) 판사 후보가 설명한 자신의 출마 배경이다. 10년차 선임 검사로 활약해온 이 후보는 한인사회를 ‘고향’이라고 표현하며 안전과 정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전했다. 이 후보의 포부와 희망을 들어봤다.       - '강도 피해 경험’이 출마 이유라고 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넉넉치 않은 이민 생활을 꾸려가셨는데 몇 차례 강도 피해를 받으셨다. 물론 나이가 어려서 내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이후 범인도 무섭고 경찰도 무서워 제대로 신고도 못하고 금전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셨다. 당시 그런 분들이 한두분이었겠나. 그래서 검사가 됐다. 이제는 법원을 이끄는 판사로서 시민들을 보호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 교육과 검찰에서의 경험은     “UC버클리에서 수사학(Rhetoric) 전공 후 로욜라법대를 졸업했다. 첫 2년 동안 프레즈노 카운티 검찰에서, 이후 8년 동안 LA 카운티 검찰에서 일했다. 최연소로 ‘캘린더 검사(선임 검사)’ 역할을 맡아 다양한 형사 사건들을 다룬 경험을 갖고 있다.”   - 본인 고유의 경쟁력은   “다른 변호사 경력의 경쟁 후보들과 달리 형사 기소 검사로 일했다. 대부분 민생을 침해하는 범죄에 대해 강력한 단죄 의지를 가진 법정을 원할 것이다. 개스콘 검사장 등 법원의 제로 베일 정책에 맞서 소신있는 판단을 내리는 판사가 되겠다. 한인타운과 한인사회에서 자란 아들같은 저에게 기회를 주시면 좋겠다.”     - 검사장의 정책은 무엇이 문제인가.     “개스콘이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구속 수감을 줄이고 특정 인종의 혐의를 확대 수사하지 말자는 취지였고 흑인계와 라틴계가 호응했기 때문이다. 물론 포화상태인 교도소와 재범을 줄이는 방법 하나로 제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게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잡범들을 양산하는 부작용이 생겨났다. 시민들은 이런 정책의 조속한 폐기를 원하고 있다.”   - 현재 선거 판세는     “6년 임기로 현재 3명의 경쟁 후보가 있다. 이중에 2명은 관선변호사이며 1명은 로펌 변호사다. 3월 예선에서 50% 이상을 득표하면 본선 없이 당선된다. 그렇지 못한 경우엔 1, 2위 득표자가 11월 본선에서 붙게된다. 원래 판사 선거가 크게 화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한인 유권자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는 부분이다.”       - 사실상 2세인데 한국어 능숙하다.     “부모님이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대학 수업, 한국어 예배 등이 도움이 됐고 아내가 한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 후보는 현재 현직 판사 50여 명, 라티노검사연합회, 스티브 쿨리, 재키 레이시 전 검사장의 지지를 받고 있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한인사회 고향 개스콘 검사장 판사 후보 카운티 법원

2024.01.2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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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고향을 묻지 마세요

며칠 전 어느 그룹 카톡을 열었다가 질겁을 한 적이 있다. 그 그룹 카톡은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모임에서 회원들 간 화합과 신속한 정보전달을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 그룹 카톡에 버선발처럼 생긴 한반도 지도가 칼러로 예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단체 회원 가운데 누군가가 올린 것이었다.     지도는 우리가 늘 보듯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파란색, 북쪽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지도는 전라남북도를 북한과 똑같이 빨갛게 칠해 놓고 ‘전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 써놓고 있었다. 나는 지역적 편견은 물론 한국 정치에 별 식견도, 관심도 없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 의도로 지역감정을 조장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승만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장면 정권 때도 경상도와 전라도의 대립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정적 제거를 위해 반공을 앞세웠다. 당시 민주주의를 외쳤던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처벌받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적 치적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권력욕으로 인해 나라는 부패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퇴보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 지도, 바로 경상도와 전라도를 갈라놓은 그 기막힌 지도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취지로 발족한 단체의 그룹 카톡에 버젓이 올라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면적으로만 보면 지금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에 비해서도 훨씬 작은 나라다. 그런데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마저 동서로 나누자는 것인가. 다시 신라·백제·고구려로 나뉘었던 삼국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인지. 도대체 스스로 극우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며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마치 전라도에 콤플렉스라도 있는 것 같다.       나는 같은 단체 회원으로 그 지도를 그룹 카톡에 올린 분의 인성이 참으로 의심스러웠다. 어떻게 그런 지도를 단체의 공식 카톡방에 올릴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한국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이제부터 누가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미국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보다. 이곳에서 오래 살았고 묘지까지 사 뒀으니 말이다. 진짜 고향은 저승에나 가서야 마음 놓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고향이라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임지나 / 수필가발언대 고향 한반도 지도 진짜 고향 그룹 카톡

2023.10.09. 18:00

[문화산책] 돌아갈 고향 없는 디아스포라

‘날아라. 상념이여 빛나는 날개를 타고   내 조국 산비탈과 언덕에 내려앉아라.   부드럽고 따뜻한 산들바람   코에 맴도는 감미로운 흙냄새…’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첫 구절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3막에 나오는 이 아리아는 히브리 노예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조국을 향해 부르는 노래로, 디아스포라의 심정을 묘사한 대표적 노래로 꼽힌다.   길고도 끈질긴 유대인의 역사를 지탱해온 저력은 조국, 즉 고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촘촘히 엮어온 역사다. 인류의 빼어난 예술작품들이 거기서 많이 탄생했다. 고향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요, 예술 창작의 원동력인 것이다.   내게는 그런 고향이 없다.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고향의 추억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고향 그리는 마음을 멋진 작품으로 빚어내는 이들이 정말 부럽다. 추석 때면 펼쳐지는 귀향행렬도 부럽다.   삼팔따라지의 후손인 내게는 그저 여기저기를 서럽게 떠돌던 단편적 기억만 생생하다. 어쩌다 한국에 가도 찾아가고픈 추억의 장소가 없다. 기껏해야 대학 때 단골로 드나들던 학림다방 정도다. 서글퍼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무향민(無鄕民)’이라고 말하곤 한다. 마음 붙일 고향이 없다는 건 디아스포라에게는 결정적 약점이다. 정체성 확립에도 위태로운 걸림돌이다. 그래서인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같은 고향 그리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지곤 한다. 위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고향이 꼭 지리적인 장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결 더 간절한 것은 마음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가령, 어머니나 스승님처럼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 그래서일까, 어머니와 고향을 하나로 여기는 노래가 많다. 우리에게 친숙한 유행가에 그런 절절한 명곡이 많다.   “현해탄 파도 위에 비친 저 달아/ 찢어진 문틈으로/ 어머님 얼굴에도 비추어 다오”- 남일해의 ‘이국선(異國船)’   “어어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고향 하늘 아래/ 불효자식 기다리며/ 홀로 계신 어머님/ 떠도는 흰 구름아/ 고향산천 지나거든/ 몹쓸 놈 잘 있다고/ 어어이 어어이/ 전해주렴아”(이양일의 ‘내 고향 산울림아’)   ‘뉴 노마드’라는 낱말처럼 현대인들은 대부분이 타향살이 디아스포라들이다.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혼자 외롭게 살아간다. 태평양 건너 낯선 미국 땅 한 귀퉁이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도 같은 신세다.   조용필의 명곡 ‘꿈’은 그런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줄임〉…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를 듣는다”, 향기를 듣고 눈물을 먹는다…. 참 깊고 절절한 표현이다. 이런 가사를 쓰고 노래한 조용필은 빼어난 시인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고향 고향 산울림 고향 하늘 히브리 노예들

2023.10.05. 20:42

“명절이면 더 그리워지는 고향”

     워싱턴지역원로목사회(회장 김영숙목사)가 지난 29일, 인터내셔널갈보리교회(담임 이성자 목사)에서 추석행사특별예배를 개최했다.     이날 예배는 유흥태 목사가 인도 및 대표기도를 드렸으며 이성자 목사가 신명기 16장13절-15절 말씀으로 ‘너희는 온전히 즐거워 할지어다’를 주제로 설교를 전했다.     이 목사는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에 대해 설교하며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과 매우 닮아있다”며 “‘누구든지 목마르건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하신 말씀처럼 오늘은 기뻐하는 것이 마땅한 날”이라고 말했다.     신선태 목사의 축도 후 이어진 2부 추석행사에서는 모두가 하나되어 ‘고향의 봄’을 합창하며 아련한 고향을 떠올렸다. 이어 윷놀이, 오자미 게임 등 민속놀이와 장기자랑을 즐기며 향수를 달랬다.     이날 특별예배로 진행된 추석행사에 대해 김영숙 회장(33대)은 “원로목사회에서 처음 갖는 추석행사라 무척 감회가 새롭다”면서 “해마다 이맘때 원로목사님들을 보며 고향땅을 떠나 와 타국에서 맞는 한국 고유 명절이 얼마나들 외로우실까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한국에서의 옛 추억을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원로목사들을 위한 추석행사에는 쌀, 라면, 간장, 식용유, 시럽 등 푸짐한 명절 선물들이 참석자 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와싱톤중앙장로교회(담임 류응렬 목사), 교회협의회(회장 심대식 목사)에서 각각 1천불을 쾌척해 추석의 풍성함을 나누었다.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명절 고향 회장 김영숙목사 명절 선물들 이맘때 원로목사님들

2023.09.2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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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돌아갈 고향 없는 디아스포라

‘날아라. 상념이여 빛나는 날개를 타고   내 조국 산비탈과 언덕에 내려앉아라.   부드럽고 따뜻한 산들바람   코에 맴도는 감미로운 흙냄새…’   유명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의 첫 구절이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3막에 나오는 이 아리아는 히브리 노예들이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조국을 향해 부르는 노래로, 디아스포라의 심정을 묘사한 대표적 노래로 꼽힌다.   길고도 끈질긴 유대인의 역사를 지탱해온 저력은 조국, 즉 고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촘촘히 엮어온 역사다. 인류의 빼어난 예술작품들이 거기서 많이 탄생했다. 고향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요, 예술 창작의 원동력인 것이다.   내게는 그런 고향이 없다. 가슴 시리게 아름다운 고향의 추억이 내게는 없다. 그래서 고향이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다. 고향 그리는 마음을 멋진 작품으로 빚어내는 이들이 정말 부럽다. 추석 때면 펼쳐지는 귀향행렬도 부럽다.   삼팔따라지의 후손인 내게는 그저 여기저기를 서럽게 떠돌던 단편적 기억만 생생하다. 어쩌다 한국에 가도 찾아가고픈 추억의 장소가 없다. 기껏해야 대학 때 단골로 드나들던 학림다방 정도다. 서글퍼진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무향민(無鄕民)’이라고 말하곤 한다. 마음 붙일 고향이 없다는 건 디아스포라에게는 결정적 약점이다. 정체성 확립에도 위태로운 걸림돌이다. 그래서인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같은 고향 그리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이 복잡해지곤 한다. 위로가 되기도 한다.   물론, 고향이 꼭 지리적인 장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결 더 간절한 것은 마음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가령, 어머니나 스승님처럼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존재…. 그래서일까, 어머니와 고향을 하나로 여기는 노래가 많다. 우리에게 친숙한 유행가에 그런 절절한 명곡이 많다.   “현해탄 파도 위에 비친 저 달아/ 찢어진 문틈으로/ 어머님 얼굴에도 비추어 다오”(남일해의 ‘이국선(異國船’)   “어어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고향 하늘 아래/ 불효자식 기다리며/ 홀로 계신 어머님/ 떠도는 흰 구름아/ 고향산천 지나거든/ 몹쓸 놈 잘 있다고/ 어어이 어어이/ 전해주렴아”(이양일의 ‘내 고향 산울림아’)   ‘뉴 노마드’라는 낱말처럼 현대인들은 대부분이 타향살이 디아스포라들이다. 낯선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혼자 외롭게 살아간다. 태평양 건너 낯선 미국 땅 한 귀퉁이에서 힘겹게 살고 있는 미주 한인들도 같은 신세다.   조용필의 명곡 ‘꿈’은 그런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빌딩 속을 헤매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줄임〉… 슬퍼질 땐 차라리 나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의 향기를 듣는다”, 향기를 듣고 눈물을 먹는다…. 참 깊고 절절한 표현이다. 이런 가사를 쓰고 노래한 조용필은 빼어난 시인이다.   그렇게라도 위로받을 수 있는 고향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고마워할 일이다. 고향은 어머니 품처럼 짙은 향기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고향 고향 산울림 고향 하늘 히브리 노예들

2023.09.28.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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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고향 헌팅턴비치

나의 고향은 강원도다. 그러나 난 그곳에서 여섯 살에 떠나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울에서 졸업했다. 올해 강릉에 갔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곤 100세를 넘기신 고모 한 분뿐이었다. 고모는 홀로 외롭게 살고 계셨다. 고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운 친구, 친지, 누구 하나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그리던 진정한 고향은 어디 있을까? 미국서 온종일 한국 TV를 보며 그리던 고향산천은 어디였을까?  TV 속의 고향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친구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을 인사동 한복판에서 만났다. 점심 먹고, 차 마시고, 헤어졌다. 대학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고향은 꼭 시골이어야만 하나? 강릉은 더는 시골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뛰놀던 친구도 없고 이름도 기억 못 한다.   1980년 9월에 네 살, 한 살짜리 딸 둘과 남편,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몬테벨로에서 헌팅턴비치로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그 집 근처에는 오른쪽에 중국인 부부, 왼쪽엔 일본인 부부가 살았었다. 그들은 50세가 조금 넘어 보였다. 그 당시 29세였던 나를 딸처럼 챙겨 주었다. 그러나 직장을 오렌지카운티로 옮기는 바람에 정답게 살던 인연을 2년 만에 접고 이사를 했다.   헌팅턴비치로 이사 온 다음 날 집 앞에 세워둔 차 윈도에 누군가 쪽지를 남겼다. 자동차를 옮기라는 내용이었다. 옆집 아저씨가 쓴 것 같았다. 이사 오자마자 옛 동네가 그리웠다.     헌팅턴비치는 주민의 70%가 백인이고, 백인 우월주의자도 많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엔 그들의 갑질이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나 헌팅턴비치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지금 이곳에 사는 한인은 통계상 1500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계도 많아 아시안 주민 수가 늘면서 차별도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내가 사는 게이트 안에도 한인이 다섯 집이나 있다. 서로 바빠서 자주 못 보지만 만나면 반갑게 서로 손을 흔들어 준다.   헌팅턴비치로 이사 온 지 2년 만에 계획에 없던 임신을 했다. 한국에 계신 시아버지가 위독하셔서 남편이 임종을 보러 간 사이에 임신 사실을 알고 남편 몰래 유산을 고민했었다. 그때 아기를 돌봐줄 만한 사람도 없고 아이를 3명이나 키울 형편도 못 됐다. 그러나 친정 언니가 ‘너는 아들이 없는데 누가 아니 뱃속의 아이가 아들일 수도 있잖아?“ 하며 유산을 말렸다. 몇 개월 후에 태어난 아기는 정말 아들이었다. 그해 우리 동네에 아들이 여섯 명이 태어났다. 유치원에  갔는데 모두 옆집에서 같이 놀던 남자아이들이었다.     나도  아들 친구 엄마랑 친하게 지냈다. 그들 엄마 중 누가 아기를  낳으면 모여서 베비샤워도 해주고 여행도 같이 다녔다. 아이들 야구 원정 경기도 어울려 다니고 보이스카우트 캠핑도 따라다니며 금발의 엄마들과 몰려다녔다. 제레미는 우리 아들과 특별히 친한 친구인데 그의 엄마 데비는 나 대신 학교에서 자동차로 우리 아이를 자기 집에 데려가 점심도 차려주었다. 또 제레미와 그의 동생들과 같이 놀게 하며 돌봐주다 내가 퇴근하면 아들은 걸어서 집에 오곤 했다. 지금도 페이스북 친구로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데비는 아직 옛날 동네에 살고 있다. 마치 고향을 지키는 충직한 소나무마냥.   옆집 베티와 제리는 우리보다 나이가 20살은 많았지만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도와주었다. 우리 집 보험이 잘못되어서 걱정하니 전화로 해결도 해주고, 어느 해 여름휴가 때 마이애미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 놓았는데 허리케인 앤드류로 인해 비행기가 못 뜬다고 연락이 왔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결항은 항공료 환불이 안 된다고 하여 실망하고 있을 때 제리가 설명을 잘해 환불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제리와 베티는 나이가 70세가 넘으니 고향인 플로리다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가는 날 섭섭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     세 명의 아이들을 시간 맞춰 등교시키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때마침 뒷집에 살던 피클이란 예명의 몰몬교 신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녀가 6명이나 됐다. 아이들 중 세 명은 우리 아이들과 같은 반이어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 등교를 나눠서 시켰다. 피클은 다른 금발의 엄마들이랑 차원이 다른 여자였다. 첫째 잘난 척을 안 했다. 친절하고 자유스러우면서도 겸손했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되어서 집에도 자주 놀러 갔다. 그녀는 지금도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던 그 동네에 가면 데비도 있고 피클도 있다.     헌팅턴비치는 이렇게 많은 추억을 나와 내 가족에게 남겼다. 이 동네로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모래사장에 가서 집도 짓고 성도 쌓았다. 파도가 밀려오면 고향 생각이 나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 다 잊고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그러나 너무 바빠서 딴생각을 못하고 살았다.         인간의 계절이 봄에서 여름, 또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 선 지금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 때가 다시 찾아온 것 같다. 가까이 지내던 많은 사람이 한국으로 역이민을 간다.     그러나 나는 데비와 피클 같은 친구가 있고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가 있는 이곳에서 살련다. 사람이 모두 떠나버린 한국의 강릉이 아니라 많은 추억과 사람이 있는 이곳이 진정한 나의 고향이다. 나는 늘 바다 건너를 바라보던 내 마음을 헌팅턴비치에 앉힌다. 김규련 / 수필가수필 헌팅턴비치 고향 아들 친구 초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

2023.09.21. 20:51

[이 아침에] 고향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세월을 살면서 사람들은 착각에 빠져 살 때가 있다. 나도 그랬다. 내가 착각에 빠져 산 것은 고향에 대한 착각이었다.   나는 평북 신의주에서 출생했고 여섯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심야에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며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서울에서 6·25전쟁을 겪은 후, 우리 가족은 영등포구 신길동과 대방동 지역에서 살았고 나는 그 지역에서 성장하며 중·고·대학 등 모든 교육 과정을 마쳤다. 결혼한 후에도 그 동네에서 살다 50년 전 우리 가족은 미국에 이민을 왔다.    인간에게 고향이란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는 그리움의 원천이 아닌가. 나는 내가 출생한 신의주를 향해서는 전혀 그리움이 없었기에 고향이란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고단하고 힘든 이민생활, 타향살이에 이골이 나면서도 가끔 향수병에 걸릴 때는 가슴 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동네, 나와 내 가족들의 과거와 추억이 있는 곳, 신길동,대방동 그 동네를 회상하며 돌아가고 싶었던 그리움을 품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문학 행사가 있어 한국을 방문했다. 행사가 끝난 후, 건강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한국으로 이주한 딸네 집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잊을 수 없는 옛날을 찾아 고향 같은 동네를 찾아갔으나 내 딸들이 놀던 정든 그 동네는 그곳에 없었다. 내 옛집이나 내 이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이웃들은 수소문을 해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하늘 높이 솟은 고층 아파트와 새로운 상점들, 거리에는 온통 낯선 사람들로 붐볐다. 사라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았고 사라진 것에 대한 향수가 밀려왔다. 고향이라 여기며 그리움을 품고 살았던 마음의 고향은 나의 착각의 고향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해바라기 습성을 버렸다.   1년 7개월 만에 내 집으로 돌아오니 익숙한 것에 편안함, 행복감을 느꼈다. 내가 토런스 지역에 산 지도 어언 40년 세월이 넘었으니 모든 면에 익숙하고 정겨운 것이다. 타인종 이웃들도  나를 보자 놀라며 “오 마이 갓”을 연발하면서 네가 보고 싶었다며 두 팔로 나를 포옹해 주었고 너를 많이 걱정했다는 말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단골로 다니던 한인 업소들을 찾았더니 그들은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듯 나를 반겼다. 그동안 통 뵐 수가 없어 혹시나 병원에 입원해 계신 것이 아닌가 걱정이 돼서 우리 집으로 여러 번 전화를 해보았지만 받는 이가 없었다는 따뜻한 말들도 했다. 음식도 주고 선물도 챙겨 손에 쥐여주시는 것이 아닌가. 가슴에 뜨겁게 전해지는 뭉클한 고마움이 내 전신을 감싸며 감동이 아침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간다. 서로 인정을 나누며 외로운 이민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그들이 내 이웃이다. 내 이웃들이 사는 토런스가 나의 정신적인 고향이 아니겠는가. 누군가 고향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갈매기가 춤추는 레돈도의 푸른 바다가 보이는 토런스가 내 고향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김영중 / 수필가이 아침에 고향 토런스 지역 이민생활 타향살이 타인종 이웃들

2023.08.2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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