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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새해, 한국계 캐롤튼 시의원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달라스 한인 사회는 한 때 한국계 시의원 ‘풍년’을 이뤘지만 현재는 시의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상태다. 특히 한인 비즈니스가 밀집해 있는 캐롤튼의 경우 한국계 시의원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행정 편의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한국계 시의원을 다시 배출하기 위해 한인사회가 뜻을 모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달라스에서 가장 먼저 한국계 시의원 타이틀을 거머쥔 인물은 성영준 전 캐롤튼 시의원이다. 성영준 전 시의원은 2017년 텍사스 최초의 한국계 시의원이 됐고, 2020년 2월에는 연임에 성공했다. 그후 2023년 캐롤튼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현 캐롤튼 시장인 스티브 베빅 후보를 넘어서지 못했다. 캐롤튼 시의원 임기는 3년이다. 두 번 연임이 가능하며, 그 후에는 출마할 수 없다. 다시 캐롤튼 시의원에 출마하려면 한 회기를 쉬고 출마해야 한다. 따라서, 성영준 전 시의원이 연임을 했기 때문에 다시 출마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영주 전 코펠 시의원은 지난 2020년 12월 치러진 코펠 시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다. 성영준 전 시의원에 이은 두 번째 한국계 시의원이자 코펠시 역사상 최초의 한국계 시의원이었다. 전영주 전 시의원도 재선에 성공했다. 지난 2023년 치러진 선거에서 전영주 전 시의원은 코펠시 제5지구에 단독으로 입후보했다. 그 후 전영주 전 시의원은 코펠 시의원직을 사퇴하고 2024년 11월 열린 텍사스 주하원 제115지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상대 후보인 민주당 소속 카센드라 에르난데스 후보에게 패했다. 또다른 한국계 시의원이었던 테미 서 전 프리스코 시의원은 올해 6월 열린 재선 도전에서 결선 투표까지 치르며 고군분투했지만 인도계 후보자에게 석패했다. 이처럼 달라스 한인사회에 한국계 시의원이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면서 한국계 시의원 배출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 예로 지난 2024년 11월 캐롤튼에서 열린 코리안 페스티벌이 캐롤튼 시와의 행정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시로부터 행사 허가를 받는데 제약이 많았고, 비용도 예전보다 더 많이 소요됐다. 일각에서는 만약 성영준 전 시의원이 캐롤튼 시의회에 있었다면 이러한 어려움들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성영준 전 시의원은 본지 인터뷰를 통해 “2024년 코리안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데 비용 문제라든가 허가를 받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며 “아무래도 내가 캐롤튼 시의원으로 있었다면 이러한 부분들에 있어서 어떤식으로든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캐롤튼 시의원에 다시 출마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성영준 전 시의원은 “현재는 내 비즈니스에 신경을 쓰고 있다”며 “절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출마를 하게 되면 시장이나 카운티 커미셔너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답했다. 성영준 전 시의원이 아니더라도 캐롤튼에 다시 한국계 시의원이 배출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26년간 코펠에 거주해온 전영주 전 시의원이 최근 캐롤튼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전영주 전 시의원은 캐롤튼으로 이사한 이유에 대해 네 자녀들이 모두 독립했기 때문에 더 이상 큰 집이 필요 없게 돼 새 집을 찾던 중 캐롤튼에 자그마한 주택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캐롤튼 시의원 출마 가능성에 대해 묻자 전영주 전 시의원은 “캐롤튼으로 이주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가족 구성원의 변화 때문”이라며 “캐롤튼 시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이사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캐롤튼 시의원에 절대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선거에 출마하려면 최소 1년 이상은 캐롤튼에 거주해야 한다”며 캐롤튼 시의원 선거 출마 가능성을 일축했다. 텍사스 주하원 선거에 재도전할 계획이 없느냐는 질문에 전영주 전 시의원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답했다. 전영주 전 시의원은 본인이 집을 구한 지역구는 ‘친한파’로 여겨지는 벤 범가너 하원의원의 지역구라고 지적하며, 굳이 주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캐롤튼에서 큰 규모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한 한인 업주는 익명을 전제로 한 본지 인터뷰에서 “이 식당을 처음 오픈할 때 성영준 전 시의원이 큰 도움을 줬다”며 “시의회에 한국계 시의원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큰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2026년 새해에는 다시 한국계 시의원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한인사회가 힘을 모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토니 채 기자〉시의원 한국계 코펠 시의원직 한국계 시의원 시의원 출마

2025.12.0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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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변호사 에린 달링 LA 11지구 시의원 출마

 인권변호사인 에린 달링(사진) 변호사가 LA시 11지구 시의원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형사법 전문 변호사인 그는 퇴거 위기에 처한 저소득층 등을 돕는 등 적극적인 인권 변호 활동도 했다.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서 선거 출마를 공식화한 그는 LA시의 주택 부족과 기후변화 등을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했다. 현재 해당 지역구의 마이크 보닌 시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여러 후보가 난립하고 있다. 짐 뮤레즈 베니스 주민의회 의장, 그레그 굿 LA공공사업위원회 위원, 트레이시 박 변호사 등이다.  LA시 11지구 시의원 선거는 6월 7일 예비 선거에 이어 1위와 2위 후보가 11월 결선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변호사 시의원 인권 변호사 시의원 출마 선거 출마

2022.02.06. 19:14

[김창준] 사업의 절정에서 가슴 속 뭔가가 꿈틀댔다

  ━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제 6화〉 '한인 정치' 물꼬 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21〉비즈니스맨에서 정치인 변신   신생도시 다이아몬드바 시의원 출마 결심 아무리 뛰어도 반응 냉랭…승리 나도 놀라 1977년에 회사 ‘제이킴 엔지니어스’를 설립했다. 상·하수처리장 등 도시개발 프로젝트 설계 회사였다. 중소기업청에서 지원 받은 10만 달러에 직장생활을 하며 번 돈을 합쳐 다이아몬드바에 사무실을 열었다.     직원은 파트타임 비서 한 명 뿐이었다. 낮에는 사업계약을 따내느라 동분서주하고 밤이면 주문받은 설계를 하느라 도면과 싸웠다. 다행히 일거리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서부 6개 주에서 일할 수 있는 면허증을 얻은 덕이었다. 나중에는 혼자서 일감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설계 직원을 더 채용했다. 시간이 지나니 고용할 사람은 더욱 많아졌다. 어느새 150명의 직원을 둔 회사로 컸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나만의 경영 전략을 세웠다. 첫째, 미국에서 사업하는 동안 한국적 사고방식을 버린다. 둘째, 미국 사회의 관습과 불문율을 기억한다. 셋째, 어떤 경우라도 경영자와 사원의 경계선을 지킨다. 넷째, 사원 모두가 내 회사라는 자긍심을 갖도록 애를 쓴다.     제이킴 엔지니어스는 설립 10년 만에 연 매출 1000만 달러를 올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캘리포니아 500대 설계회사 중 하나로 떠올랐다. 서부지역에만 여덟 군데에 지사를 설립했다. 도시개발 전문가로 인정받으면서 LA타임스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나를 소개했다. 여기저기 강연 요청도 쇄도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 한켠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직 욕심이 생겼다. 2년 동안 이웃 도시인 샌디마스의 도시계획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회가 바로 왔다. 신흥 도시인 다이아몬드바의 두 번째 시의원 선거가 다가왔다. 초대 시의원 3명 중 한 사람이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가슴이 뛰었다. 마치 나를 위해 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런데 ‘내 주제에 무슨 시의원 선거 출마냐’는 생각도 바로 엄습했다. 기대와 함께 괴로운 마음이 오버랩 됐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선거 출마를 놓고 고심했다.     설계 책상 위에 A4용지를 펼쳐 놓고 펜을 들었다. 종이 반을 접어 한쪽엔 ‘유리한 점’ 다른 한쪽엔 ‘불리한 점’이라고 썼다. 시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경우 나의 장단점도 써내려갔다. 불리한 점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출마 결심을 하니까 머리가 말끔해졌다. 다이아몬드바 시에 대해 공부했다. 지역도서관에 가서 시의 역사와 주민 분포, 재정 상태 등에 대한 자료를 모조리 찾아 읽었다. 인구 8만 정도의 다이아몬드바는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된 신생도시였다. 도시가 새로 생기면 보통 4년 안에 도시 전체의 마스터플랜을 세운다. 마침 시의원 선거 출마 시점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으로 다이아몬드바 시를 짓고 허물고를 반복했다.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나를 알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녔다. 주민의 85%가 백인인 이 도시가 과연 아시안을 대표로 선출할까. 속으로 여러 번 나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선거 기간 중 토론이 8차례 있었다. 최대한 쉬운 말로, 단순하게 내 생각을 말했다.     “정부와 개인기업이 공조해서 작지만, 효율 높은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여러분의 세금 부담을 확실히 덜어드리겠습니다. 도시계획 전문가로 일해 온 저의 경험과 노하우로 가장 합리적이며 안전한 도시를 만들겠습니다.”   이민자인 내가 변호사 출신인 다른 후보들을 토론으로 이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법은 오로지 하나였다. ‘단순하라.’ 그런데 주민들이 나를 주목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지역 언론 기자들도 나를 철저히 외면했다. 인터뷰 기회조차 없었다. 선거 전날까지도 그랬다.   이쯤 되니 당선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개표가 시작되니까 괜히 출마했다는 후회감마저 밀려왔다. 그런데 초반부터 충격적인 개표 결과가 나왔다. 개표 결과는 내 생각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2위보다 1000표나 많았다. 밤 11시쯤 승리가 확정됐다. 나보다 놀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었다.     당시 미 전역에서 시의원에 출마했던 한인은 3명. 이중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만 유일하게 당선됐다. 내 신분도 순간 확 변했다. 한인 언론과 한국 특파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어떻게 위상이 이렇게 빨리 바뀌나.’ 이튿날 한인과 한국 언론에 ‘한인·한국 이민자 최초로 미국 시의원에 당선되다’라는 제목의 보도가 잇따랐다. 그날 이후 내 이름 앞에는 ‘최초’ ‘유일’이란 수식어가 계속 따라붙었다.   캘리포니아주의 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LA나 샌프란시스코처럼 큰 도시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시장이 모든 행정을 책임진다. 하지만 대다수 작은 도시들의 시장과 시의원들은 자기 직장이 따로 있다. 이들은 시의회에서 결정권만 쥐고 있으며 시 운영은 시티 매니저에게 맡긴다. 다이아몬드바도 그랬다. 나는 제이킴 엔지니어링을 운영하면서 매주 화요일 시의회에 참석했다.   시의원 임기는 4년이다. 그런데 시의원이 된 지 1년 반 만에 시장 자리가 공석이 됐다. 다이아몬드바 시장은 2년마다 5명의 시의원 중에서 선출한다. 다이아몬드바 시장 선출은 유권자가 아닌, 시의원들 투표로 결정된다. 나는 출마를 결심했다. 이어 또 다른 시의원 3명은 물론 나와 경쟁하려던 시의원까지 설득해 만장일치로 시장에 당선됐다. 시의원에 당선된 지 2년 만이었다. 최초의 한인 시장 당선이었다.   시장이 되고 나서 바빴다. 아침 8시면 집무실로 향했다. 8시부터 9시까지 시장 업무를 본 후에 제이킴 엔지니어링으로 출근했다. 파트타임 시장으로 일하면서 받는 급료는 600달러에 불과했다. 말 그대로 봉사활동이었다.   공약대로 나는 작은 정부 만들기를 실행에 옮겼다. 시청사를 지으려던 계획을 없애고 빌딩에 세를 얻어 들어갔다. 시장실도 책상 하나 겨우 놓을 정도로 좁은 방을 빌려 썼다. 시의회도 별도 건물 없이 카운티 환경부 회의실을 임대해 사용했다. 시 공무원 채용도 중단했다. 다이아몬드바와 같은 규모의 시를 운영하려면 통상 150명 정도의 공무원이 필요하다. 나는 파트타임 직원 2명을 포함, 총 24명의 공무원만 채용했다. 이런 노력으로 연 1000만 달러의 예산을 줄였다.   다이아몬드바는 효율적인 재정관리로 흑자를 냈다. 또 경찰서를 두지 않고 매년 LA 카운티 셰리프국과 계약을 맺고 외주를 줬다. 예산 절약에 주민들은 크게 감격했다.  원용석 기자김창준 사업 절정 시의원 출마 시의원 선거 시의원직 욕심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1.19.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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