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은 잰 며느리가 본다’는 속담이 있다. 초승달은 떴다가 금방 지기 때문에 부지런한 며느리만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슬기롭고 민첩한 사람만이 미세한 것을 살필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초승달’은 음력으로 매월 초하루부터 며칠 동안 뜨는 달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그런데 ‘초승달’을 ‘초생달’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느 것이 맞는 말일까? 어찌 보면 그달의 시작 지점에서 생기는 달이므로 ‘초생(初生)+달(月)’의 구조로 ‘초생달’ 표기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초승달’이 맞는 말이다. 여기에서 ‘초승’은 음력으로 그달 초하루부터 처음 며칠 동안을 뜻하는 말이다. ‘초승’은 ‘초생(初生)’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이처럼 ‘생(生)’이 다른 글자와 결합하는 경우 음이 ‘승’으로 바뀌고 바뀐 형태인 ‘승’으로 적을 때가 있다. 사극을 보면 “내 그대와 금생엔 인연이 아니었지만 저승에선 꼭 부부의 인연을 맺겠소” 등과 같은 대사가 나오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등장하는 ‘금생’과 ‘저승’이 이런 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뜻하는 ‘금생(今生)’에선 ‘생’으로 쓰이지만,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저승’의 경우 바뀐 음인 ‘승’으로 사용된다. ‘금생’과 같은 뜻인 ‘이승’ 또한 ‘승’으로 바뀐 형태가 표준어가 됐다. ‘초승달’ 역시 ‘초생’으로부터 온 말이지만 ‘생’이 ‘승’으로 변한 ‘초승달’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우리말 바루기 초승달 초생달 그달 초하루 시작 지점 지기 때문
2025.08.07. 18:30
“짜장면과 짬뽕 중 뭘 먹을래요?” 늘 고민에 빠지게 하는 질문이다. 짜장면을 더 좋아한다는 설문 결과도 있지만 성별·연령에 따라 뒤바뀌기도 한다. “오늘은 짜장면요!” “얼큰한 짬뽕이요!” 같은 사람이라도 대답이 한결같지 않다. 답변 형식도 다르다. “짜장면요”라고 할 때도 있고 “짜장면이요”라고 할 때도 있다. 어떻게 말해야 바를까? 먼저 ‘요’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가령 “뭘 주문할래?” “나는 짜장면”이라는 대화에 ‘요’를 붙이면 “뭘 주문할래요?” “나는 짜장면요”처럼 존대 어투로 바뀐다. 이때의 ‘요’는 체언이나 부사어, 연결어미 따위의 뒤에 붙어서 청자에게 존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보조사다. 원래는 보조사 ‘요’ 앞에 ‘이’를 덧붙일 수 없었다. 앞말에 받침이 있든 없든 “짜장면요”라고 해야 맞춤법에 맞는 표현이었다. “짜장면이요”는 잘못된 표현으로 취급받아 왔지만 2020년 4분기 표준국어대사전의 정보를 수정했다. 주로 발화 끝에 쓰여 청자에게 존대의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로 ‘이요’가 추가됐다. 받침 있는 체언이나 부사어 따위 뒤에 주로 붙는다. 보조사 ‘요’가 와야 할 자리에 ‘이요’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언어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어디 가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구내식당이요”라고 답하는 것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구내식당요”라고 하면 낯설어한다. 사람들이 ‘요’와 ‘이요’를 섞어 쓰고 앞말에 받침이 있으면 ‘이요’를 선호한다. 우리말 바루기 보조사 짜장면과 짬뽕 부사어 연결어미 존대 어투로
2025.07.31. 18:04
한국식 인사법으로 가장 많이 오가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밥 먹었어”다. 특히 가족끼리는 더욱 그렇다. 나 역시 아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밥은 먹었냐?”는 식으로 먼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돌아오는 답은 “머거써” 아니면 “안 머거써”다. 그러고 무엇을 더 물어보니 이번에는 “어떠케 아라쩌”라고 한다. “아라써” 대신 “아라쩌”라고 하는 것을 보니 기분은 괜찮은 모양이다. 그나저나 오늘은 어떻게 대답에 받침이 하나도 없네. 이래도 괜찮나 싶어 이번에도 ‘머거써’처럼 먹는 것과 관련해선 탁월한 전문가이자 언어에도 영향력이 큰 백○○씨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뭔 걱정이 그러케 마너유. 그냥 내비 둬유. 다 알아들으면 됐지 뭘 그래유!” 그런다. 그래도 나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받침 없이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것은 ‘추카추카’에서 시작해 머거써, 아라써, 어떠케, 그러케(그렇게), 마너(많어)뿐 아니라 시러(싫어), 조아(좋아), 조타(좋다), 마니(많이), 아라요(알아요), 부지러니(부지런히), 가튼데(같은데), 일거써(읽었어)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이 역시 속도를 중시하다 보니 생기는 일로, 소통엔 별 문제가 없다. 그만큼 한글이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세종대왕은 어떻게 인터넷 시대, 디지털 시대까지 미리 알고 대비하셨는지 선견지명이 놀랍다. 다만 세종대왕도 이러다 올바른 표기를 아주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조금은 걱정하시지 않을까 싶다.우리말 바루기 한국식 인사법 인터넷 시대
2025.07.29. 18:28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총리직도 맡고 있는 그는 사우디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다. 우리 언론에도 거의 매일같이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름 전체를 밝히지 않을 때는 주로 ‘빈 살만’으로 통한다. 영어권의 이름에서처럼 성씨인 줄 알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빈 살만’에서 ‘살만’은 그의 아버지 이름이고, ‘빈’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랍권에는 대부분 성씨가 없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사우디 왕세자 이름의 한글 표기를 확정했다. 그동안 언론에서 많이 표기해 오던 ‘무함마드 빈 살만(Muhammad bin Salm?n)’이 표준 표기가 됐다. 풀이하면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다. 따지고 보면 ‘빈 살만’을 성씨나 성에 준하는 이름으로 적는 건 어색한 일이다. 현재 사우디 국왕인 무함마드의 아버지는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압둘아지즈의 아들 살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는 ‘빈 압둘아지즈’가 아니라 본인의 이름인 ‘살만’으로 불린다. 무함마드가 주로 ‘빈 살만’으로 불리게 된 데는 무함마드 직전 왕세자 이름과 관련이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앞의 왕세자는 무함마드 빈 나예프. 이름이 같다. 언론은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줄곧 ‘무함마드’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새로운 왕세자도 ‘무함마드’였다. 혼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빈 살만 왕세자’라고 표현하는 언론 매체가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 ‘빈 살만’을 성씨로 아는 사람도 늘어났다. 부자의 대명사 만수르. 그의 전체 이름은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이다. 아랍에미리트 부총리인 그를 가리킬 때도 ‘빈 자이드’라고 하지 않고 ‘만수르’라고 부른다.우리말 바루기 표현 왕세자 무함마드 아들 무함마드 무함마드 직전
2025.07.27. 18:13
유튜브를 보다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드립’이다. ‘드립’ 이야기를 하면 아마도 “그래, 드립 커피가 최고지!” 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드립’이 아니다. ‘개드립’이니 ‘막장드립’이니 하면서 쓰이는 ‘드립’ 얘기다. 이 ‘드립’은 ‘애드립(ad lib, 정확한 외래어표기는 ‘애드리브’)’에서 온 말이다. ‘애드립’은 원래 방송 출연자가 대본에 없는 대사를 즉흥적으로 하는 것을 일컫는 용어다. 이 ‘애드립’을 줄인 말이 ‘드립’으로, 인터넷에서 일종의 은어(隱語)로 쓰이고 있다. 주로 부정적 의미의 즉흥적 발언을 가리킨다. ‘드립’은 ‘○드립’ 형태로 수많은 말을 만들어 낸다. ‘개드립’ ‘막장드립’ ‘패드립’에서 ‘뻥드립’ ‘섹드립’ ‘지랄드립’에 이르기까지 온갖 말이 붙는다. 황당한 말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두루 쓰인다. “개드립 치고 있네”처럼 다소 거친 어감의 ‘치다’와 어울려 쓰이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드립’이 들어간 말은 부정적이거나 거칠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드립’이란 말엔 정확성과 구체성을 담보하지 않고도 얼렁뚱땅 상대를 깎아내리는 마법과 범용성이 있기 때문에 더욱 이 말에 유혹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드립’은 점잖은 사람이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다. ‘드립’이란 말이 공적인 문장이나 대화에서는 사용되지 못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또한 ‘드립’은 ‘거시기’처럼 구체성을 담지 못함으로써 때론 어휘력의 빈곤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다소 가벼운 것을 추구하는 매체이더라도 가급적 이러한 표현을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말 바루기 드립 드립 커피 즉흥적 발언 부정적 의미
2025.07.24. 19:32
현대인들은 모바일을 통한 대화에 익숙하다. 모바일 대화에서는 신속성과 경제성 등을 이유로 맞춤법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줄여 쓰는 경향이 다분한데 이는 문장부호에서도 나타난다. 말을 줄이는 경우 ‘..’처럼 간단하게 두 개의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말줄임표의 바른 표기는 어떤 것일까? 언어 역시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변한다. 국립국어원은 실제 언어생활에서 사용 빈도가 높아지는 등 표준어로 인정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경우 이를 반영해 맞춤법을 개정하곤 한다. 2015년에는 문장부호 표기방식을 개정했다. 마침표의 경우 이전엔 여섯 개의 중점(……)을 찍어야 했지만 세 개의 중점(…)도 가능하도록 표기법을 개정했다. 더불어 가운데 찍었던 기존 줄임표 외에 ‘......’ ‘...’처럼 아래에 찍는 것도 바른 표기로 인정했다. 연필 등으로 종이에 적는 것보다 컴퓨터·휴대전화 등 키보드를 통한 문서 작성이 주를 이루다 보니 낫표와 화살괄호도 키보드에서 쉽게 쓸 수 있는 따옴표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즉「한글맞춤법」→ ‘한글맞춤법’, 〈한글날〉 → ‘한글날’로 적을 수 있게 했다. 공통 성분을 하나로 묶을 때는 ‘금·은·동메달’과 같이 가운뎃점을 써야 했지만 ‘금, 은, 동메달’처럼 쉼표를 써도 되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또한 특정한 날을 표시할 때 아라비아 숫자 사이에 ‘3·1운동’과 같이 가운뎃점을 써 왔지만 ‘3.1운동’처럼 마침표를 찍어도 되도록 했다.우리말 바루기 문장부호 맞춤법 문장부호 표기방식 모바일 대화 아라비아 숫자
2025.07.22. 19:01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이 있다. 실수한 뒤 미안해하면서 웃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냥 괜찮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쑥스럽거나 미안해 어색하게 웃는 웃음을 표현할 때 ‘겸연쩍다’고 해야 할까? ‘계면쩍다’고 해야 할까? 아마도 ‘겸연쩍다’가 맞는 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듯하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둘 다 맞는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하나의 어휘가 음 변화 등으로 어형이 변해 두 가지 형태로 공존하고, 이들이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쓰이는 경우 이들을 원말과 변한말의 관계로 보고 사전에 등재한다. ‘겸연쩍다’와 ‘계면쩍다’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계면쩍다’의 원말은 ‘겸연쩍다’이다. 즉 ‘겸연쩍다’가 변화해 ‘계면쩍다’가 됐다. 사전은 이들이 모두 쓰이는 점을 감안해 둘 다 표준어로 등재했다. 따라서 ‘겸연쩍다’와 ‘계면쩍다’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겸연쩍다’ ‘계면쩍다’를 ‘겸연적다’ ‘계면적다’로 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것을 느끼게 하는 데가 있음’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는 ‘-적다’가 아닌 ‘-쩍다’이다. ‘미안해 볼 낯이 없다’ ‘쑥스럽고 어색하다’는 뜻을 지닌 ‘겸연하다’의 어간에 ‘-쩍다’가 붙어 ‘겸연쩍다’가 됐다. 그러므로 ‘겸연적다’ ‘계면적다’로 적으면 틀린 말이 된다. ‘객적다’ ‘멋적다’ ‘미심적다’ 등도 마찬가지다. ‘객쩍다’ ‘멋쩍다’ ‘미심쩍다’로 적어야 한다. ‘의심하다’의 어간 ‘의심-’이나 ‘수상하다’의 어간 ‘수상-’에 ‘-쩍다’를 붙여 ‘의심쩍다’ ‘수상쩍다’로 쓸 수도 있다.우리말 바루기
2025.07.17. 20:36
장마철이면 태풍으로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 “지난번 집중호우로 비닐하우스가 전부 절딴이 났는데…” “인삼밭이랑 고추밭이 완전히 절단이 나 버려서 막막하죠” “태풍으로 또 피해를 보면 올해 농사는 다 결단이 나는 거지” 등과 같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마음을 토로한다. 이들의 우려 속에 눈에 걸리는 표현이 있다. ‘절딴이 났는데’ ‘절단이 나’ ‘결단이 나는’은 잘못된 표현이다. 어떤 일이나 물건 따위가 아주 망가져 도무지 손쓸 수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은 ‘결딴’이다. ‘결딴이 났는데’ ‘결딴이 나’ ‘결딴이 나는’으로 고쳐야 한다. “경제가 결딴이 날 지경이다”처럼 살림이 망해 거덜 난 상태를 일컬을 때도 ‘결딴’이라고 해야 바르다. ‘절딴’은 사전에 없는 말이다. “회오리바람에 항아리가 죄다 쓰러져 절딴이 났다”와 같이 사용해선 안 된다. 글자 모양이 비슷해 헷갈릴 수 있으나 ‘결딴’으로 고쳐야 의미가 통한다. ‘결딴’을 ‘절단’으로 잘못 표현할 때도 왕왕 있다. ‘절단’은 자르거나 베어서 끊는 것을 뜻한다. ‘결단’ 역시 [결딴]으로 소리가 나서인지 엉뚱한 곳에 쓸 때가 있다. ‘결단’은 결정적인 판단을 하거나 단정을 내린다는 의미다. ‘절딴이 나다’ ‘절단이 나다’ ‘결단이 나다’는 모두 ‘결딴이 나다’로 표현해야 바르다. 무엇을 자르거나 끊을 때는 ‘절단’,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결단’, 망가지거나 거덜 나는 것을 이를 때는 ‘결딴’을 사용한다.우리말 바루기 쓰임새 결딴 결딴 결단 글자 모양 올해 농사
2025.07.15. 18:35
인공지능이 일상에 깊숙이 들어왔다. 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로드 같은 인공지능 챗봇은 인간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한다. 입력된 자료만 보여 주는 수준이 아니다. 시와 소설, 논문도 쓴다. 번역과 통역을 해 주고, 행사 일정도 짜 준다. 각종 매체엔 챗지피티 등과 관련한 소식이 넘쳐난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얘기들이다. 그런데 사물이고 물건이어서 챗지피티에 ‘출시’라는 말을 붙이지만, 돌·기계 같은 무정물을 대하듯 하지는 않는다. 사람이나 동물 등 유정물에 오는 조사 ‘에게’를 붙이고, ‘물었다’는 서술어를 사용한다. “챗지피티에게 물었다” “챗지피티가 답했다”는 문장이 흔히 오간다. 일상에선 ‘챗지피티한테’라고도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챗지피티를 인간처럼 대한다. 그러지 않았다면 ‘에게’ 대신 무정물에 오는 ‘에’를 붙였을 것이고, ‘물었다’ 대신 ‘입력했다’ 같은 표현을 썼을 것이다. ‘답했다’는 말은 챗지피티가 사람처럼 판단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한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도 “컴퓨터가 답했다”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컴퓨터는 감각이 없는 무정물로, 챗지피티는 감정이나 의지가 있는 유정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챗지피티에 물었다”는 표현이 없는 건 아니다. 무정물이란 의식의 확실한 표시다. 인격을 부여한 건 아니지만, 더 쓰이는 건 ‘챗지피티에게’다. 그렇다고 ‘에게’가 더 적절하다고 답하긴 어렵다.우리말 바루기 대신 무정물 번역과 통역 행사 일정
2025.07.13. 18:47
부고 기사 등에서 “2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운명을 달리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등과 같이 ‘운명을 달리했다’고 쓴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말은 맞는 표현일까? ‘운명(殞命)’은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형은 오랜 객지 생활로 아버지의 운명을 보지 못했다” 등처럼 사용된다. 따라서 사람이 죽었음을 뜻할 때는 ‘운명을 달리했다’가 아니라 ‘운명했다’고 써야 바르다. 이전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는 의미로 ‘운명이 달라졌다’고 표현할 수는 있다. 이때의 ‘운명’은 ‘운명(殞命)’이 아닌 ‘운명(運命)’이다. ‘운명(運命)’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나 그것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를 가리킨다. ‘운명을 달리했다’로 잘못 쓰는 이유는 ‘운명’과 ‘유명’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나타낼 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은 ‘유명을 달리하다’이다. ‘유명(幽明)’은 어둠과 밝음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저승과 이승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명을 달리하다’는 이승의 밝은 세상을 떠나 저승의 어두운 곳으로 갔다는 의미로 ‘죽다’를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유명을 달리했다” 또는 “운명했다” 둘 중 하나를 사용하면 된다. 우리말에는 이 밖에도 죽음을 완곡하게 나타내는 표현이 많다. “세상을 떠나다” “한 줌의 재가 되다” “잠들다” “돌아가다” “고동을 멈추다” 등과 같은 표현이 있다. “별세(別世)하다” “타계(他界)하다” “영면(永眠)하다” “작고(作故)하다”와 같은 한자어식 표현도 있다.우리말 바루기 운명 한자어식 표현 투병 생활 객지 생활
2025.07.10. 18:49
조선시대에는 쌍꺼풀이 있는 눈보다 외꺼풀 눈을, 얄쌍한 얼굴형보다 둥그런 얼굴형을 선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미의 기준이 바뀌어 온라인상에는 ‘넓데데한 얼굴을 얄쌍하게 만드는 방법’ 등과 같은 글이 많다. 얼굴이 둥글고 평면적일 때 ‘넓데데하다’고 표기하곤 한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넓데데하다’를 찾아보면 ‘너부데데하다’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설명돼 있다. ‘너부데데하다’는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너부죽하다’란 뜻을 지닌 단어로, 이를 줄이면 ‘넙데데하다’라고 쓸 수 있다. ‘넓적한 얼굴’에서와 같이 ‘펀펀하고 얇으면서 꽤 넓다’는 의미로 쓰는 ‘넓적하다’를 떠올려서인지, ‘넓데데하다’를 바른 표현으로 알고 있는 이가 많다. 그러나 ‘넙데데하다’ ‘너부데데하다’가 올바른 표기다. 두께가 얇거나 날렵해 보이는 모습을 표현할 때도 위에서와 같이 ‘얄쌍하다’라고 쓰곤 하지만 이 역시 바른 표현이 아니다. ‘얄쌍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얄팍하다’의 잘못이라고 나온다. ‘조금 얇은 듯하다’라는 의미의 ‘얄브스름하다’, ‘조금 얄브스름하다’라는 뜻의 ‘얇실하다’가 표준어인 반면, 많은 이가 사용하는 ‘얄쌍하다’는 표준어가 아니라는 사실이 의아하기도 하다. ‘얄쌍한 얼굴’을 사전에 나온 것처럼 ‘얄팍한 얼굴’이라고 바꾸면 뭔가 말맛이 살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맞지 않기도 하다. 언중(言衆)의 잦은 사용을 고려해 ‘얄쌍하다’의 표준어 등재를 생각해 볼 만하다.우리말 바루기 표준어 등재
2025.07.08. 20:44
“너는 내게 뭐든 다 이뻐~ 젤로 이뻐~” 이승환이 2015년 10월에 발표한 노래 ‘다 이뻐’다. 사랑에 빠진 연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노랫말이다. 가사에 반복해 나오는 ‘이쁘다’란 말은 곡을 발표할 당시엔 표준어가 아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쁘다’를 찾으면 ‘예쁘다의 잘못’이라고 나왔다. 어떤 지역의 사투리라기보다 발음상의 변이 또는 오류로 봤다. 이때는 ‘예쁘다’만을 표준어로 인정했지만 곡이 나온 그해 12월 복수표준어가 됐다. 생긴 모양이 아름다워 눈으로 보기에 좋다, 행동이나 동작이 보기에 사랑스럽거나 귀엽다, 아이가 말을 잘 듣거나 행동이 발라 흐뭇하다는 뜻으로 ‘예쁘다’와 함께 ‘이쁘다’도 사전에 올랐다. 국립국어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부분을 수용하겠다며 일상생활에 뿌리내린 단어들을 표준어로 포함시킨 결과다. 그간 바르지 않은 말로 분류돼 왔지만 노랫말로 자주 사용됐던 것도 ‘이쁘다’가 표준어가 되는 데 한몫했다. ‘예쁘장스럽다, 예쁘장스레, 예쁘장하다, 예쁘디예쁘다’만 표준말로 인정하던 것도 바뀌었다. ‘이쁘다’가 표준어가 되면서 ‘이쁘장스럽다’ 등 관련 낱말들도 당당하게 쓸 수 있게 됐다. 이들 단어가 사전에 오른 지 꽤 됐지만 언제 표준말로 바뀌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아직도 ‘이쁘다’를 잘못된 말로 알고 있는 이가 많다. 말은 생명력을 지닌다. 시간이 흐르면서 언중(言衆)의 말은 변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우리말 바루기 표준말 발음상의 변이 이들 단어 관련 낱말들
2025.07.03. 18:43
여름에는 무엇보다 시원한 음식이 당긴다. 냉면 등 시원한 국물에 쫄깃한 면이 생각난다. SNS에도 이런 음식을 먹으면서 인증 사진을 올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면이 들어간 음식은 육수나 국물의 맛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면의 상태가 맛을 좌우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진에는 ‘쫄깃쫄깃한 면빨이 끝내줘요’와 같은 내용이 달린 것이 많다. 면이 탱글탱글하고 쫄깃해야 혀에 전해지는 촉감과 씹는 맛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면이 불어 터져 흐물흐물하다면 별다른 맛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냉면·콩국수뿐 아니라 라면·짜장면 등 면이 들어간 모든 음식은 면의 상태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앞의 사진 설명처럼 ‘면빨’이 맞는 말일까? 탱글탱글 쫄깃한 면을 생각하면 어감상 ‘면빨’이 맞는 말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면빨’이 아니라 ‘면발’이 맞는 말이다. 발음은 [면빨]로 나지만 적을 때는 ‘면발’이라고 해야 한다. ‘면발’은 국수 가락을 지칭한다. “쫄깃쫄깃한 면발이 끝내줘요” “면발이 쫀득쫀득해요” 등처럼 사용된다. SNS에 이런 음식을 올릴 때는 얼굴도 함께 잘 나오게 찍어야 한다. 이때도 ‘사진빨’이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맞는 말일까? 이 역시 ‘사진발’이라 적어야 한다. 이때의 ‘-발’은 효과의 뜻을 더하는 말이다. ‘화면발’ ‘카메라발’ ‘화장발’ 모두 ‘-발’로 표기해야 한다. 그럼 ‘말빨’ ‘끗빨’ 등은 어떻게 될까? 이 또한 ‘말발’ ‘끗발’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우리말 바루기 국수 가락 인증 사진
2025.07.02. 19:41
날씨가 더워지니 기운이 쭉 빠진다는 이가 많다. “요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그런지 주변에서 영 맥아리가 없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날씨가 너무 덥고 꿉꿉해 기분이 처지고 매가리가 없다” 등과 같은 이야기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이처럼 기운이 빠지고 힘이 없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맥아리가 없다’ 또는 ‘매가리가 없다’고 표현하곤 한다. 우리말은 원형을 밝혀 적는 단어가 많기 때문에 ‘매가리’가 틀린 표현이고, ‘맥아리’가 바른 표현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바른 표현은 ‘매가리’다. ‘매가리’는 ‘맥’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맥’은 기운이나 힘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매가리가 없다’는 기운이나 힘이 없다는 뜻이 된다. “시험을 보고 나니 온몸에 매가리가 풀리고 잠이 왔다” “무거운 학원 가방을 어깨에 멘 어린이들 모두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간혹 “어디선가 메가리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에서와 같이 ‘메가리’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으나 ‘매가리’가 ‘맥’으로부터 시작된 단어라는 사실을 알면 이 같은 실수를 줄일 수 있다. ‘매가리’의 어원은 ‘맥(脈)+-아리’이다. 원래는 ‘맥아리’라는 말로 쓰였으나 언중(言衆)이 ‘매가리’를 더 많이 사용해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매가리’만 올라 있다. 정리하자면, ‘맥’을 낮잡아 이르는 말은 ‘매가리’이므로 ‘맥아리’ ‘메가리’로 쓰지 않도록 하자.우리말 바루기 맥아리 학원 가방 현재 표준국어대사전 요즘 컨디션
2025.07.01. 18:40
“그가 울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울려고 하던 참이었다.” 이 문장의 ‘그렇지 않아도’는 적절할까? 아니면 ‘그러지 않아도’여야 할까? ‘그렇다’도, ‘그러다’도 앞의 말을 대신한다. ‘그렇다’는 ‘상태(어떠함)’를 가리키고, ‘그러다’는 ‘행동(움직임)’을 대신 나타낸다. 울라고 한 것은 ‘움직임’이다. ‘그러지’로 받는 게 더 적절해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는 그가 울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울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린다. 움직임이 아니라 어떤 상태였다는 것을 대신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어서 여기서는 ‘그렇지 않아도’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나는 울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울어 버렸다.” 이 문장에서는 ‘그렇지’라고 하면 어색하다. 여기서는 ‘울었다’는 행동을 대신하는 말 ‘그러지’가 와야 어울린다. “네가 그러니까 나도 그러지.” “갈래? 그래, 가자.”가 맞는 표현이다. “배가 고팠다. 그렇지 않아도 밥을 먹었을 것이다.” 이 문장에서는 ‘그러지’가 어색하다. 배가 고픈 상태를 받는 말 ‘그렇지’가 와야 자연스럽다. ‘그렇지 않아도’는 문장을 시작할 때도 자주 보인다. 말로 할 때는 ‘그렇잖아도’로 흔히 줄여 쓴다. “그렇잖아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그렇잖아도 한번 가려고 했어”…. 어떤 상태나 상황을 생각하고 쓴 표현들이다. 앞의 동작을 대신할 때는 ‘그러지 않아도’, 상태나 성질, 모양 등을 대신하거나 어떤 상황을 염두에 뒀을 때는 ‘그렇지 않아도’가 어울린다.우리말 바루기 구별 성질 모양
2025.06.30. 18:44
‘주책’이 본래 지닌 뜻은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이다. ‘주착(主着)’이 변해서 ‘주책’이 됐다. 부정적인 말과 주로 어울려 쓰인다. “주책도 없이 웃고 말았다.” “어쩜 그리 주책이 없는지.” “그는 정말 주책이 없는 사람이다.” 이 문장들에서 보이는 ‘주책’은 분명히 ‘판단력’이나 ‘생각’ 정도쯤 된다. ‘주책’ 대신 ‘생각’으로 바꿔도 다음처럼 비슷한 말이 된다. “생각도 없이 웃고 말았다.” 그런데 습관처럼 뒤에 오던 ‘없다’의 부정적인 의미가 ‘주책’에 붙기 시작했다. ‘주책’은 다음 문장들에서처럼 “일정한 줏대가 없이 되는대로 하는 짓”이라는 말로도 의미가 확장됐다. “주책을 떨었다.” “조용한 카페에서 주책을 부렸다.” “어디서나 주책이 심했다.” ‘주책’과 ‘없다’는 아예 한 단어처럼 붙어 쓰이기 시작했다. ‘주책없다’는 “일정한 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해서 몹시 실없다”는 뜻을 지닌 말이 됐다. “나는 주책없이 눈물을 보였다.” “그는 주책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책이다’도 ‘주책없다’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없다’의 뜻이 완전히 ‘주책’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참 주책이네.” “그러면 주책이지, 뭐야.” “보고 싶다고? 주책이다.” 너도나도 ‘주책이다’를 ‘주책없다’와 같은 말로 썼고, ‘주책이다’도 표준어가 됐다. ‘주책맞다’나 ‘주책스럽다’도 비슷한 말로 국어사전에 올랐다. ‘주책없다’가 아니라 ‘주책이다’라고 하면 잘못이라고 질타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대중은 ‘주책이다’를 썼다. 말을 바꾸고 새로 만들어 가는 건 대중이었다.우리말 바루기 주책 다음 문장들
2025.06.29. 16:26
어느덧 6월 하순으로 접어들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듯하다. 낮 기온이 80도 중반을 넘기 일쑤다. 이렇게 더울 때 예부터 많이 먹던 음식이 있다. 바로 삼계탕과 같은 보양식이다. 보양식은 여름철 입맛을 잃고 기운이 없을 때 허해진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먹던 음식으로 선조들의 지혜가 배어 있다고 한다. 직장에서도 점심시간이면 “푹 고은 삼계탕으로 몸보신하러 갈까” 하고 분위기를 잡는 이가 있다. 이처럼 고기 등을 흠씬 삶았다는 것을 나타낼 때 “푹 고은…”이라고 말하곤 한다. ‘고은’은 “가마솥에 푹 고은 사골육수”와 같이 종종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그럼 이 ‘고은’이 맞는 말일까? 고기나 뼈 등을 무르거나 진액이 빠지도록 끓는 물에 푹 삶는다는 뜻을 지닌 단어의 기본형은 ‘고다’이다. ‘고다’를 활용하면 ‘고니, 고면, 곤’ 등이 된다. 이를 ‘고으니, 고으면, 고은’과 같이 사용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고으니, 고으면, 고은’이 되려면 기본형이 ‘고다’가 아닌 ‘고으다’가 돼야 한다. 하지만 ‘고으다’는 ‘고다’의 옛말로, 지금은 표준어가 아니다. ‘푹 곤 삼계탕’보다 ‘푹 고은 삼계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고은’이 발음하기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곤’보다 리듬감이 더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고은’이 아니라 ‘곤’이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3시간은 끓여야 푹 고을 수 ?있다”에서 ‘고을’은 어떻게 될까? 이 역시 ‘고을’이 아니라 ‘골’이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3시간은 끓여야 푹 골 수 있다”고 해야 바르다.우리말 바루기 고은 삼계탕 여름철 입맛
2025.06.26. 20:49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을 들어왔다. 그만큼 예의(禮儀)가 바르다는 뜻이다. 예의는 태도는 물론 언어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우리말은 존댓말이 발달해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상대에게 존대를 표현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그중에 하나가 ‘시’를 붙이는 것이다. ‘시’는 “사장님이 오셨다” “부장님은 키가 크시다” 등처럼 쓰인다. 그런데 요즘 이 ‘시’를 지나치게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유튜브 등 SNS상에서 이러한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전원을 켜시고 원하는 항목을 선택하신 다음 저장 버튼을 누르시면 편리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십니다”와 같은 경우다. 동작 또는 상태를 나타내는 모든 낱말에 ‘시’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를 꼬박꼬박 붙이면 말하는 사람도 발음하기 몹시 힘들고 듣는 사람도 거북하게 느껴진다. 이는 언어의 경제성에도 위배된다. 이 문장에서는 ‘시’가 하나도 없어도 된다. “전원을 켜고 원하는 항목을 선택한 다음 저장 버튼을 누르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처럼 ‘있습니다’ 표현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바쁘신 분임에도 불구하시고 대외 활동도 많이 하시고 좋은 일도 많이 하시고 계십니다”는 표현은 어떨까? 이 역시 ‘시’가 과도하게 사용된 것이다. “바쁜 분임에도 불구하고 대외 활동도 많이 하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계십니다”고 해도 충분하다. ‘시’를 과하게 사용하면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 있다.우리말 바루기 대외 활동 표현 하나 다음 저장
2025.06.25. 19:15
화를 드러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타인에게 공격성을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속으로만 끙끙 앓다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한다. “분을 삭히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시다 건강이 안 좋아졌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꾹 누르고 속으로 삭히다 보니 화병이 났다”와 같은 사연을 접할 때가 많다. 여기서 ‘삭히다’는 올바르지 못한 표현이다. “분을 삭이기 위해” “속으로 삭이다 보니”로 바꿔야 한다. 이런 혼란이 생기는 것은 ‘삭다’가 ‘삭히다’와 ‘삭이다’ 두 가지 형태의 사동사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사동사란 문장의 주체가 자기 스스로 행하지 않고 남에게 그 행동이나 동작을 하게 함을 나타내는 동사를 말한다. ‘삭히다’는 김치나 젓갈 따위의 음식물을 발효시켜 맛이 들게 하다는 의미의 사동사다. “가자미식해는 가자미를 삭혀 만든 함경도 지방의 젓갈이다” “코를 알싸하게 만드는 삭힌 홍어는 특유의 향으로 인해 호불호가 갈린다”처럼 쓰인다. 젓갈 등을 오래되도록 푹 삭히다고 할 때도 ‘곰삭히다’를 사용한다. ‘곰삭이다’란 말은 없다. ‘삭이다’는 어떤 감정이나 생리작용이 수그러들게 하다는 뜻의 사동사다. “화를 삭이려 무던히 애썼다” “생강차는 기침을 삭이는 데 좋다”와 같이 쓰인다. 긴장·화를 풀어 마음을 가라앉히다, 기침·가래 등을 잠잠하게 하다고 할 경우엔 모두 ‘삭이다’로 표현한다. 먹은 음식물을 소화시키다고 할 때도 ‘삭이다’를 쓴다. “돌도 삭일 나이라더니 정말 잘 먹는구나”처럼 사용한다.우리말 바루기 함경도 지방 젓갈 따위
2025.06.24. 18:35
금이나 집, 물건 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자산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도 막연한 자산이 있다. 누군가 미래에는 그 가치가 크게 오를 거라며 이에 투자하라고 권유한다면 많은 이가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실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화폐를 사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상대에게 대꾸할 때 많은 사람이 위에서와 같이 “택도 없다”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맞춤법상 잘못된 표현으로, “턱도 없다”라고 해야 올바르다. ‘턱’은 마땅히 그리해야 할 까닭이나 이치를 뜻하는 말로, 흔히 “도대체 영문을 알 턱이 없다”에서와 같이 어미를 ‘-을’ 뒤에서 ‘없다’와 함께 쓰이거나, “사랑을 고백한 그가 나를 속일 턱이 있겠니?”에서처럼 ‘있다’와 함께 반어형으로 쓰인다. 또한 ‘턱’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이 늘 그 턱이다”에서와 같이 그만한 정도나 처지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인다. ‘턱’이 단독으로 쓰일 경우 “택도 없다”에서처럼 ‘택’으로 더 많이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그런 턱없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에서와 같이 ‘터무니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턱없다’의 경우엔 ‘택없다’라고는 잘 쓰지 않는다. ‘턱없다’와 ‘턱도 없다’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라는 걸 기억한다면 앞으로 ‘택도 없다’와 같이 틀리게 쓰는 실수는 범하진 않을 것이다.우리말 바루기
2025.06.22.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