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자 200명 뽑는데 800명 몰려 자원봉사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 정부·기업·자원봉사 함께 나서 2011년부터 연방자원봉사제 운영 개신교의 '디아코니' 가치 원동력 시민들 자발적 종교세 7% 납부해 독일 전역 3만 개 이상 시설 운영 개신교인 12만 명 난민 자원봉사 독일은 현재 유럽 최대의 난민 수용 국가다. 물론 정부의 주도로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포용의 토양은 '시민 사회'에 있다. 독일인에게 자원봉사는 일상과 매우 밀접한 활동으로 자리 잡고 있다. 봉사에 대한 선진적 시민의식은 독일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복지 국가로 발돋움하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난민 대부분은 독일을 종착지로 삼는다. 끊임없이 난민이 유입되고 있지만 독일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책정해 이들을 돕고 있다. 구심점은 독일이 지난 2011년부터 시행중인 '연방자원봉사제도'다. 이는 독일 내 청소년을 대상으로 5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자발적 사회봉사 제도(Freiwilliges Soziales Jahr)'를 보완한 것으로 자원봉사의 참여를 젊은층에 국한하지 않고 범위를 전 연령대로 확대한 것이다. 한미순 박사(베를린기독교대학)는 "한 예로 내가 살고 있는 베를린 내 스테크리츠 지역에서 난민을 돕기 위해 200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는데 무려 800명이 신청을 할 정도"라며 "독일에서는 자원봉사가 수요보다 공급이 많을 정도로 독일인은 자원봉사 활동에 여가시간을 할애한다"고 말했다. 본지가 방문했던 베를린 시내 난민 보호시설인 '기에르소(Gierso)'의 운영 체계를 보면 독일이 어떤 식으로 난민을 돕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본지 8월30일자 A-4면> 이 시설은 독일 정부가 운영 지원금을 조달하고 민간기업이 시설을 운영한다. 또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사회복지사 등이 함께 일하며 난민들에 대한 관리, 교육, 상담 등을 담당한다. 즉, 정부와 비영리 민간복지단체, 영리 목적의 기업, 자원봉사가 함께 힘을 모아 독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을 체계적으로 돌보고 있는 셈이다. 자원봉사자들은 비단 난민뿐 아니라 생활 체육, 노인 문제, 청소년 이슈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무려 독일 인구(총 8400만 명) 중 2300만 명이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 또는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자원봉사 참여 이면에는 기독교의 힘이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회 참여를 통한 종교적 자원봉사 시스템을 지탱하는 건 '디아코니(Diakonie)'의 가치다. 현재 독일에는 6대 비영리 복지 재단들(디아코니.카리타스연합.노동자복지회.독일복지단체총연합협회.독일적십자.유대인중앙복지회)이 있다. 그 중 개신교 중심의 봉사회인 '디아코니'와 가톨릭 계열의 '카리타스연합'이 가장 규모가 크다. 디아코니는 독일개신교협의회(EKD)에 속해 있는데 독일 전역에 3만 개 이상의 시설이 흩어져 각종 복지 서비스를 위한 자원봉사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한미순 박사는 "현재 난민 사역에만 디아코니를 통해 자원봉사를 하는 개신교인이 무려 12만 명, 교회는 1만4000개가 동참하고 있다"며 "독일인들은 정기적으로 교회 출석은 안 해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데 현재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돌보고 있는 난민만 20만 명에 이를 정도"라고 말했다. 난민보호시설 '기에르소'의 수아다 돌로바치 디렉터는 "난민 시설이 들어선 이후 지역 사회 시민들, 청소년 등 자원봉사 신청은 계속되고 있다"며 "난민 지원이 가능한 것은 자원봉사자들이 계속 와서 독일어 교육도 시켜주고 각종 봉사에 적극 참여해주기 때문인 것도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디아코니란 독일어로 봉사와 헌신을 뜻하는 단어다. 그리스어 '디아코니아'에서 파생됐다. 독일 내 장애인 시설의 절반 이상, 유치원 4개 중 1개, 병원 10개 중 1개는 독일개신교협회 디아코니에 의해 운영될 정도로 독일의 복지 시스템을 지탱하는 힘이다. 최근 독일개신교협의회(EKD)는 디아코니를 통해 난민 사역을 펼치는데 무려 3600만 유로(약 4200만 달러)를 투입했다. 독일 개신교는 크게 독일개신교협의회(EKD)와 자유교회(Freikirche)로 나뉜다. EKD는 현재 독일 전체 인구 중 2227만 명이 등록돼 있으며 이들은 국가에 종교세(본인 수입의 7%)를 자발적으로 납부하고 있다. 이 세금은 목회자 봉급 및 교회 운영비 등으로 쓰인다. 자유교회의 경우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생 또는 자립 형태로 운영되는데 독일 내 한인교회 같은 경우가 자유교회로 분류된다.
2017.09.08. 0:03
비극의 지점이 화합의 상징 베를린 장벽 인파로 북적대 독일 시민들 일상 속에서 생생한 역사의 현장 교육 국회의사당 유리 돔 의미 "정치 위에 국민이 있다" 24일 베를린 장벽으로 찾아갔다. 이곳은 한때 '죽음의 구역'으로 불렸다. 베를린의 흐린 날씨가 잿빛 장벽을 왠지 더 냉랭하게 덧칠하는 것 같다. 그 앞에 섰다. 냉전과 분단의 흔적은 인파에 묻히고 있었다. 장벽을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찍거나 벽화를 구경하는 이들로 북적인다. 사람들 얼굴엔 역사의 현장을 마주한 탓인지 들뜬 미소가 묻어났다. 장벽 단면에 손을 대보았다. 딱 한 뼘 정도다. 시선은 자연스레 장벽 끝으로 향했다. 일반 성인 키의 두 배(약 11피트) 정도. 의외로 두껍지도, 높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장벽이 무너지기까지는 무려 28년(1961~1989)이 걸렸다. 160km(약 99마일)에 걸쳐 독일의 동과 서를 하루아침에 갈라버렸던 담벽에는 현재 수많은 예술가의 벽화가 그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슬픈 눈물과 피가 서려있다. 자녀와 함께 장벽을 찾은 슈테펜 힌데가드(39.베를린)씨는 종종 가족과 함께 산책 삼아 이곳에 나온다. 슈테펜씨는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되어 독일 시민으로서 기쁘고 뿌듯함을 느낀다"며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이상으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자녀가 교과서를 통해서만 역사를 배우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고 접하게 하려고 가끔씩 아이들과 함께 나와 맛있는 것도 먹고 이런저런 대화도 나눈다"고 말했다. 장벽 바로 너머엔 슈프레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가에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연인, 가족 등이 함께 앉아 평온한 오후를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나는 구 동독 지역에 서있다. 슬쩍 강 폭을 가늠해보려고 한쪽 눈을 감은 뒤 강 건너편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봤다. 손가락 끝에 건너편이 너무나 쉽게 닿을 정도로 가깝다. 수영을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금세 닿을 수 있을 거리다. 그러나 슈프레 강은 과거 장벽으로 인한 오랜 단절의 시간을 흘려보냈었다. 무려 7만5000여 명이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다 구속됐다. 그 중 100명 이상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김현배 목사(베를린비전교회)는 "당시 동독 군인들에게는 '무조건 사살'이라는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이 강을 건너려는 정황만 포착되면 발포를 했다"며 "강폭이 짧아서 슈프레 강을 헤엄쳐 건너거나, 강 밑으로 잠수를 하고, 열기구나 행글라이더를 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탈출을 시도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베를린 장벽은 띄엄띄엄 세워져 있었다. 장벽 붕괴 후 역사적 실증 보존을 위해 일부분만 남겨둔 탓이다. 거리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시내 중심부에 들어서니 이미 신식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 더 이상 장벽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흔적은 선명하게 남겨뒀다. 길바닥 중간에 붉은 벽돌들이 아스팔트 사이에 묵직하게 박혀있는 것이 보였다. 'berliner mauer'라는 글자가 선명히 박힌 벽돌들이다. 그곳은 장벽이 세워져 있던 곳임을 알려준다. 역사를 그대로 땅에 새겨놓은 셈이다. 장벽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니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검문소 'C'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용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보잘것없는 구식 초소처럼 보였지만 분단 당시에는 삼엄한 검문소였다. 이곳은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페터 페히터가 철조망 바로 앞에서 총에 맞아 서독 땅 바로 앞에서 안타깝게 죽은 비극의 지점이다. 그가 숨진 곳에는 'er wollte nur die Freiheit(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베를린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인정하고 보존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역사가 뇌리에 똬리를 트는 곳이다. 김바울(베를린.금융 컨설턴트)씨는 "학창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독일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나치의 잘못, 독일의 과오 등 역사 교육을 매우 철저히 시킨다"고 말했다. 독일의 현대 정치를 움직이는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이 건물은 점령, 붕괴, 화재 등으로 역사의 고초를 담고있다. 웅장함이 압도하는 건물 전면부에는 'Dem deutschen Volke(독일 국민을 위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의사당은 유리돔이 지붕을 덮고 있다. 그곳에 올라가면 각종 사안을 논의하는 의원들의 모습을 위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의사당 직원은 "유리돔 위에서 정치인들의 모습을 내려본다는 것은 '국민이 정치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한편으론 정치의 투명성을 강조하겠다는 뜻으로 독일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건축 양식"이라고 전했다. 독일은 일상과 역사가 가깝다. 그리고 역사의 교훈을 실천하는 무대는 '현재'다.
2017.09.05. 22:45
일상에서 접하는 역사 흔적 주택가 옆에 수용소 보존해 유대인 외 독일인들도 방문 역사 반성 독일 교육의 핵심 베를린 중심부 유대인 추모비 역사 과오 잊지 않겠다는 다짐 독일 정부는 향후 5년간 약 900억 유로가 난민 보조에 투입될 것으로 내다본다. 난민에겐 매달 정착 비용(매달 약 350유로)은 물론, 숙식과 독일 시민과 같은 동등한 의료 서비스도 제공된다. 현재 독일은 유럽 최대의 난민 수용 국가다. 총선을 앞두고 극우 세력으로부터 불만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일은 난민 지원에 적극 나선다. 그 이면에는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역사 의식이 있다. 독일 오라니엔부르크=장열 기자 27일 오전 9시. 작센하우젠 유대인 수용소. 이곳은 베를린에서 북쪽으로 약 21마일(약 35km) 떨어진 오라니엔부르크다. 수용소로 향하는 길엔 다소 의외의 풍경이 펼쳐졌다. 수용소가 평온한 주택가 바로 옆에 붙어 있어서다. 살벌한 느낌과는 전혀 거리가 먼 풍경이다. 지금은 일요일 아침이다. 놀이터에서 부모가 그네에 탄 아이들을 밀어주는 모습이 눈에 띈다. 대문 입구를 빗자루로 청소하는 노인도 보인다. 이곳 주민들은 독일의 과오를 일상에서 매일 접하며 살아가는 셈이다. 수용소로 들어섰다. 한눈에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드넓고 휑한 공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곳이 과거 수용소였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수용소를 둘러싼 회색빛 높은 담장이 시야를 막아선다. 담장 중간 중간에 우뚝 선 탑 들은 감시대다. 공터 한 편에는 막사 서너 개가 허름하게 모양만 갖춘 채 역사의 흔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안내원은 "사람들은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로 '아우슈비츠'를 꼽지만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이곳을 가장 잔인하고 가혹했던 곳으로 평가한다"며 "이곳은 생체실험이 진행됐던 곳으로 1936년 세워진 뒤 1945년까지 20만 명 이상이 수용됐으며 그중 절반 이상인 10만 명이 잔인하게 죽어간 곳"이라고 소개했다. 실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들어갔다. 하얀색 타일이 붙은 수술대는 가운데 배수구가 있다. 분명 몸에서 흐르는 피가 그 배수구를 통해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곳에 잠시 손을 대보았다. 하얀색 타일에서 전달된 싸늘함이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안내원은 "생체실험으로 죽은 사람은 수레에 실려 이곳 지하에 있는 시체실로 옮겨졌다"고 소개했다. 분위기 탓일까. 창 밖의 아침 햇살이 왠지 야박하게 느껴진다. 잿빛 담벼락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휭'하는 바람소리만이 귓가를 때린다. 침묵속에 때때로 나오는 한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이곳에 갇힌 사람들은 저 담벼락 너머의 세계를 가슴에 소망으로 둘 수 있었을까. 높디높은 감시탑은 그러한 질문을 암묵적으로 묵살해버렸다. 안내소 직원 라후엔 씨는 "이곳엔 유대인만 오는 게 아니다. 실제 독일 학생들도 견학용으로 많이 방문하는 장소"라며 "나치 시대에 대한 반성은 독일 역사 교육의 핵심이다.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다음 세대에게 왜 독일이 앞으로 다른 나라를 도와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말했다. 역사의 과오는 비단 이곳에서만 접하는 게 아니다. 독일 내에는 작센하우젠 수용소를 비롯한 다하우, 부켄발크 등 세 곳의 수용소가 그대로 보존돼있다. 독일의 심장 베를린 도심에도 참회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 중심엔 유대인 추모비가 있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비석들(2711개)이 단 하나의 문구(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을 위한 추모비.Memorial to the Murdered Jews of Europe)로만 설명되는 곳이다. 독일 정부는 이곳을 3500만 유로(약 4000만 달러)를 들여 만들었다. 비석 사이사이로 들어가 걸어다녀봤다. 높이는 제각각. 무미건조할 정도로 짙은 콘크리트 색만 가득한 공간이다. 비석엔 아무런 글귀도 찾아볼 수 없다. 베를린의 흐린 하늘마저 더 어둡게 만들어버리는 단절의 시간이었다. 안내원 바슈티안 씨는 "이곳은 브란덴부르크문, 포츠다머 광장, 국회의사당, 프리드리히 거리 등이 인접한 베를린의 중심 지역"이라며 "시민들이 오가면서 매일 일상에서 이곳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했다. 한미순 박사(베를린기독교대학)는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의 책임과 유대인 학살이라는 과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객에 대한 법률적 보장이 유럽 어느 국가보다 잘되어 있다"고 말했다. 역사에 대한 참회는 곧 미래를 위한 만회다. 독일의 난민 포용 정책은 그 지점에서 기인한다.
2017.08.31. 22:37
메르켈총리 난민보호에 적극적 개인화장실까지 갖춘 난민시설 난민 거주 공간 법으로도 규정 월 350유로 생활비까지 지원 과도한 지원, 반대 여론 부각 총선 앞두고 난민 최대 화두 미국과 독일의 오늘은 닮은 데가 많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초 난민 입국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반 이민 기조는 숨죽이고 있던 백인우월주의의 출현과도 맞물린다. 유럽에선 난민들이 독일의 문을 두드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일단 그들을 품에 안았다. 지난 한해 동안만 무려 32만 명의 난민을 받았다. 사회적 반발도 거세졌다. 반 이민 정서 바람은 미국의 현실과 흡사하다. 지난 23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찾았다. 현재 난민 문제는 독일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베를린은 미국과 달리 묘하게 분위기가 갈리고 있다. 독일 베를린=장열 기자 8월임에도 베를린의 아침 바람은 제법 쌀쌀(59도)하다. 23일 오전 8시, 테겔 공항을 나와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민 뒤 죽 늘어서 있는 택시 중 하나를 잡았다. 출근 시간대인데 차창 너머 베를린의 풍경은 분주한 LA에 비해 다소 한가하다. 시내 가로수 곳곳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얼굴 사진이 눈에 띈다. 택시 운전사 마쿠스 아달후프는 "곧 독일 총선(9월24일)이 다가온다. 머무는 동안 선거 포스터를 자주 보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서늘한 날씨와 달리 독일은 선거 열기로 달구어지고 있었다. "지금 총리의 인기는 어떤가"라고 물었다. 아달후프는 "기독민주당(CDU·메르켈의 당)의 승리가 점쳐지지만 나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손을 내젓는다. 그는 "힘들게 벌어서 내는 세금이 난민 먹여살리는데만 쓰이고 있다"며 "메르켈은 이미 안정된 삶을 살거나 혹은 난민들에겐 천사 같은 존재일지 몰라도 나 같은 노동자들에겐 최악"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민에 관해 독일은 미국과 정체성이 비슷하다. 전체 인구(8120만 명) 중 무려 1640만 명(약 20%)이 타민족 배경이다. 5명 중 1명이 이민자인 셈이다. 수년간 100만 명 넘게 유입된 난민은 독일을 더욱 급격히 다민족 사회로 바꿔놓고 있다. 난민에 대한 보호는 자본의 출혈도 야기한다. 베를린 시내 한 난민 보호 시설(기에르소·Gierso)로 향했다. 베를린 주 정부는 난민이 증가하자 모텔로 쓰던 이 건물을 난민 보호 시설로 용도를 전환했다. 현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으로부터 온 난민 250여 명이 공동 생활 중이다. 이곳 책임자인 수아다 돌루박은 "주 정부가 난민 1명당 하루에 18유로씩 계산해서 시설 운영비(인건비 및 각종 비용 포함)를 지원해준다"며 "정부는 시설 규정도 꼼꼼히 검사하는데 한 예로 성인 난민 1명당 거주 공간은 약 300스퀘어피트 정도 확보되게끔 법으로 규정한다"고 말했다. 세르비아 난민 소피아(익명)는 아이 셋을 데리고 이곳에 1년 반째 살고 있다. 허가를 받고 방 내부를 살폈다. 머릿속에 허름한 난민촌을 그렸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모텔로 쓰였던 곳이라 그런지 TV, 간이소파, 침대 등 웬만한 살림살이를 갖추고 있다. 샤워실이 딸린 개인 화장실까지 있다. 소피아는 "공동 주방과 세탁장도 있기 때문에 사는데 불편한 건 없다"며 "이곳에는 유치원도 제공된다. 막내가 곧 유치원에 진학하면 나가서 직업도 구하고 보호소에서 제공하는 독일어 교육도 받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베를린주에 따르면 독일로 들어오는 난민은 일단 초기수용시설(3~6개월 정도 거주)에 배치된다. 이후 난민 자격을 얻게 되면(난민 승인율 62%) 체류 허가를 받아 '기에르소'와 같은 각 도시의 보호 시설로 재배치된다. 취재를 도운 한미순 박사(베를린기독교대학)는 베를린 주 정부 청소년청 난민부에서 근무했었다. 한미순 박사는 "초기 수용시설을 거친 난민에 대한 지역별 배치는 각 도시의 인구, 조세 상황에 따라 배치 비율이 결정된다"며 "베를린의 경우 전체 난민의 5% 정도를 수용중인데, 이들에게는 숙소 및 의료 혜택 외에도 매달 평균 350유로(약 417달러) 정도가 생활비로 지급된다"고 말했다. 난민 대우가 나쁘지 않아서일까. 추레한 난민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지난해부턴 사회 복지사도 난민 40명당 1명이 배정되게끔 규정이 변경(종전 난민 120명당 1명)됐다. 난민들이 생사를 건 여정에서 독일을 종착지로 삼는 건 이러한 환대 때문이다. 물론 사회 깊숙한 곳에선 갈등도 싹튼다. 이미 난민 정책을 반대하는 주장에 슬슬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지난 지역 선거에서 반 난민 정서를 등에 업은 독일대안당(AFD)이 무려 14%의 지지율로 의회에 입성한 것은 그러한 분위기를 방증한다. 지금 미국에선 백인우월주의가 기지개를 펴듯, 독일도 '페기다(pegida·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 유럽인)'가 등장했다. 무슬림이 대다수인 난민의 유입을 강하게 경계하는 움직임이다. 선거를 앞둔 지금 그러한 반발은 무시하기 힘들다. 일단 메르켈도 한발을 뺀 모양새다. 베를린에서 난민 사역중인 윤바울 선교사는 "한동안 베를린에선 비행기 격납고, 체육관 등을 난민 수용 시설로 내주거나 컨테이너 박스까지 개조해 늘어나는 난민을 받았다"며 "하지만 최근엔 정부도 거세지는 반대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일부 시설을 축소해 난민을 내보내려는 움직임도 보인다"고 전했다. 난민 이슈에 대한 독일 사회의 답변은 내달 총선에서 '표'가 대신한다. 베를린의 싸늘한 바람은 과연 누구에게 불까.
2017.08.29. 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