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이 되지 않는 오후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일찌감치 저녁 준비나 해야 하겠다고 부엌에 들어섰다. ‘알렉사’ 설치가 되어 있어서, “알렉사야, 바흐의 샤콘 틀어줘” 했더니, 친절하게 작곡한 해, 악보 넘버랑, 바이올린 연주자 이름을 가르쳐 주고, 이어서 샤콘 곡이 흘러나왔다.
이 곡을 쓸 때, 바흐가 지금의 나같이 어수선하고 좀 아프고, 화나는 마음이었을까? 어떻든 내 기분은 꿀꿀하다. 어쩌면 세기적인 작곡가 바흐의 슬픔은 세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은데, 여기에 감히 내가 편승하는 것은 무례할 것이다. 그래도 왠지 나의 이 찜찜하고, 슬픔에 가까운 아픔과 정리되지 않는 분노를 그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용서해 줄 것 같다.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바흐는 18세기 초에 레오폴드 왕자와 타지로 며칠 출장을 갔다고 한다. 귀가했을 때, 그는 일곱 명 아이의 엄마인 그의 아내가 죽었고, 이미 땅에 묻혔다는 비보를 접했다고 한다. 급작스러운 죽음이 실제로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슬퍼하거나 그립다는 정서적 세계에 있지 않았을 것 같다. 시간이 걸리면서 차츰 상황을 이해하고, 아플 능력도 생겼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였을지도 모른다.
샤콘은 바흐가 1717년부터 작곡을 시작해서 1720년에 완성했던 바로크 춤곡, ‘바이올린을 위한 파티다 2번’ 다섯 곡 중 제일 마지막 것으로, 아내 마리아 바버라 바흐의 죽음을 접한 후에 썼다고 한다.
바흐의 샤콘의 초입 부분은 그의 영적인 갈등, 감성적인 아픔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 음악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면 평화로움, 인간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허락하는 것이 의아스럽다. 바흐에게는 공평하지 않았을 마리아 바버라 바흐의 죽음이었다.
그렇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나에게 세상이 공평하다고 가르친 사람은 없다. 내가 어렸을 때, 밥상머리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은 세상사를 놓고, 여러 가지 토론을 하곤 하셨다. 어렸던 나는 의견을 내세울 처지는 아니었지만,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전쟁도 나고, 시스템의 실패로 쿠데타도 일어날 수 있고, 숱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는 것을 이해했었다. 어쩌면, 그 철학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한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공평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사회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난 두 달 반 동안, 세상이 불공평하고, 사회정의는 빛 좋은 개살구같이 화려하게 장식되는 단어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는 배심원 의무를 이행하고 있었던 터였다. 배심원 의무는 영주권자가 아닌 시민권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미국 시민이나 영주권자들은 납세, 국방, 법률 준수의 공동의무가 있다.
이 사건은 아동 학대에서 시작하여 살해까지 도달한 범죄의 형사재판이었다. 피고인은 아이의 생모와 생모의 남자 친구로 두 명이었다. 양측의 변호인단으로는 캘리포니아 주민을 대표한 검사 두 명과 피고인 측은 피고인 한 명에 관선 변호사 2명씩 종합 4명이었다.
배심원 후보들은 개인 신상 조사서를 문서로 작성하였다. 자신의 ID를 오픈하지 않는 요즘, 생물학적 정보 이외에도 소속기관, 학력, 경력, 관심 분야 등의 내용을 기재하고, 은퇴하였다면 어떤 직종을 어디에서 몇 년 종사하였는지를 써야 했다. 배우자나 자식들에 관해서도 같은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 과정은, 배심원들이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중심적인 분석의 시작이자 끝이라 보였다.
이 과정에서 법치 국가의 의미를 확인했다. 제출된 부검(剖檢) 내용 사진과 영상, 그리고 퍼킨스 에이전트를 이용해서, 범인으로 검거된 아이 엄마의 자백을 녹취한 내용, 증인들의 협력으로 배심원 전원이 범행의 심각성과 그들이 범한 여러 가지의 죄목을 이해하였다.
증거자료로 제출된 것 중에는 전화 통화 내용뿐 아니라, 전화를 건 시간, 통화가 오간 지역 등도 모두 제출되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모든 것은 시간이 걸리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을 하직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죽음의 문턱을 넘는 마지막 반년 동안, 아이는 사회와의 철저한 격리 중에, 수갑이 발목에 채워진 채 감금되어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받았던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뭘 했을까? 학교 교사, 동네 사람들, 친척들, 소셜 워커는 어디에 있었나?
나는 지금도 밤잠을 설친다. 미국 의협 소아학 저널(Vol 177, No 2)은 1999년부터 2020년까지 2년 동안 집계된 아동 살해 통계를 분석하여 발표하였다. 통계는 미국 질병 통제 예방 센터(US Centers for Disease Control & Prevention)의 레베카 윌슨 박사 보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신생아부터 17세까지 살해된 3만8362명 중 눈에 띄는 숫자는 70%가 남자아이, 신생아부터 다섯 살까지가 40%, 흑인 아동이 46%, 남부지역에서 42%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죽였을까? 친부모가 죽인 경우가 42%나 되고, 생모의 남자 친구가 죽인 경우가 15.5%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국가통계포털 (KOSIS) 2022년 통계에 의하면, 2만7971명의 학대가 접수됐다. 약 1/3이 중복적 학대이었고, 10% 정도는 방임하여 돌보지 않은 종류의 학대이었다고 한다. 2023년 검찰청은 801건의 살인 범죄를 보고했다. 그중 아동 학대 살인, 영아 살인이 각각 0.6%로 총 1.2%(9.6명)이었다고 한다.
아이를 포기하고, 기관에 보내거나 친척에게 맡기어도 될 일을, 장시간에 걸쳐, 학대하고 살해에 이르는 우매하고 아프고 부당한 처사가 어디 있겠느냐 싶다.
세상 사람들 누구도 자기 뜻에 따라 태어난 예는 없다. 그렇게 세상에 도달한 우리들은 집 밖에서 공평을 이룩하려 애쓰기 전에, 나 자신과 가족, 주위 친구들에게 공평한, 정의로운 대우를 해 주고 있는지 숙고해 보자.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알기에, 공평하도록 노력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