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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한인타운, 스시 격전지로

Los Angeles

2025.09.07 19:00 2025.09.07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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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언 오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

라이언 오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

LA 한인타운 베벌리길의 ‘노시 스시(Noshi Sushi)’는 한인 스시 애호가들에게 아련한 추억의 공간이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일본인 할아버지 노시 셰프가 쥐여주던 스시는 두툼하고 정이 넘쳤다. 특히 그의 시그니처였던, 밥이 보이지 않을 만큼 푸짐하게 올려주던 우니(성게알)는 맛의 정점이었다. 합리적인 가격에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뒤 계산하려다 “현금만 받는다”는 말에 당황했던 기억마저 이제는 그리운 풍경이다. 노시 할아버지가 은퇴하며 직원들에게 가게를 넘긴 후, 그 장인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발길은 눈에 띄게 줄었다.
 
노시 스시와 함께 한 시대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던 곳은 베벌리와 버질 인근의 ‘시부초(Shibucho)’였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던 이곳은 메뉴판조차 없던, LA 최초의 오마카세 전문점 중 하나였다. 스시 바에 앉으면 그날 가장 좋은 생선으로 셰프가 내어주는 니기리를 묵묵히 받아먹어야 했다.  
 
메뉴에 불평이라도 하면 쫓겨난다는 소문이 돌 정도의 뚝심과 자부심은, 역설적으로 LA타임스가 수차례 최고의 일식당으로 선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인들에게 ‘정통 스시’의 기준을 제시했던 이 전설의 식당 역시 팬데믹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노시 스시와 시부초로 대표되는 초창기 일본인 장인들의 일식집은 한인 커뮤니티에 단순한 ‘맛집’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일본 장인의 깐깐한 고집과 정성스레 다룬 생선 한 점은,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위로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는 작은 사치였다. 이들 가게의 존재는 한인타운이 타문화를 존중하고 수준 높은 미식을 향유할 줄 아는 커뮤니티임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두 거장의 퇴장과 함께 한인타운의 일식 지형도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솔에어 건물에 야심 차게 문을 열었던 회전초밥집 ‘카시라(Kashira)’는 ‘쿠라 스시(Kura Sushi)’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뒤, 한인이 운영하는 무제한 스시 식당으로 변모했다. 이는 푸짐함과 가성비를 선호하는 한인 시장의 특성을 명확히 보여준 사례다.
 
이후 한인타운 일식은 세분화, 전문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올림픽길의 ‘야마스시 마켓플레이스(Yama Sushi Marketplace)’는 바쁜 현대인을 겨냥한 ‘그랩앤고(Grab-and-Go)’ 스타일의 롤과 스시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6가 채프먼 플라자의 ‘카주노리(KazuNori)’는 유명 셰프 노자와의 명성을 등에 업고 ‘핸드롤’이라는 단일 메뉴에 집중, 미니멀한 공간에서 최고의 맛을 경험하게 하는 전략으로 젊은 층을 사로잡았다.
 
최근 6가와 웨스턴 코너에 문을 연 ‘노리카야(Norikaya)’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셰프 없이 획일화된 맛을 내던 기존 핸드롤 바의 한계를 넘어, 속을 풍성하게 채운 ‘오픈 핸드롤’과 다채로운 타파스 스타일의 이자카야 메뉴를 결합했다. 이는 스시를 가볍게 즐기면서도 제대로 된 요리와 주류를 곁들이고 싶은 새로운 소비층의 욕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최근 한인타운 일식 트렌드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단연 ‘고급화’다. “한인타운에서는 무조건 싸야 한다”는 오랜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다. 그 선두주자는 웨스턴 길의 ‘하토 스시(Hato Sushi)’다. 유명 일식집 출신 셰프가 제대로 숙성시킨 고급 생선으로 선보이는 니기리 스시는, 저녁에는 예약 없이는 맛보기 힘들 정도로 큰 인기를 끌며 한인타운에도 프리미엄 스시 시장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이러한 흐름에 방점을 찍은 것은 외부 유명 브랜드들의 한인타운 입성이다. 윌셔길에는 노부(Nobu) 출신 셰프가 가이세키 스타일의 정통 오마카세 전문점 ‘우마야(Umaya)’를 열었고, 베벌리힐스의 터줏대감이던 오마카세 명가 ‘마스모토(Masumoto)’가 7가와 웨스턴으로 이전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는 한인타운이 LA의 핵심 미식 상권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일본 최대 스시 체인 중 하나인 ‘스시 잔마이(Sushi Zanmai)’가 미국 1호점의 위치로 채프먼 플라자를 선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LA 한인타운 일식점의 연대기는 한인 커뮤니티의 성장과 진화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 일본 장인의 솜씨에 의존하며 ‘정통의 맛’을 소비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한인 자본과 기획력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캐주얼 롤집부터 무제한 스시, 전문화된 핸드롤 바, 그리고 최고급 오마카세에 이르기까지, 이제 한인타운은 스시라는 장르 안에서 거의 모든 스펙트럼을 갖춘 역동적인 ‘격전지’가 되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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