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산업은 흑백에서 컬러, TV, OTT까지 끊임없이 변화의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신선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작품들이 영화의 생명력을 이어갈 겁니다.” 밴쿠버국제영화제(VIFF) 현장에서 만난 영화 '좋은 놈.나쁜 놈. 이상한 놈', ‘마더', '옥자'의 제작자인 바른손 C&C 서우식 대표는 인터뷰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영화제의 ‘Spotlight on Korea’ 섹션에 참석한 그는 “한국 영화가 국제 무대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밴쿠버는 그 고민을 나누기 좋은 도시”라고 전했다.
“밴쿠버는 세계적 촬영지… 인프라·안전·세제 혜택 모두 강점”
서 대표는 이번 방문의 이유를 ‘오래된 인연,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촬영지, 그리고 맞아떨어진 시기’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번 참여는 밴쿠버국제영화제의 전설적인 프로그래머 토니 레인즈(Tony Rayns)가 한국 영화에 보여준 애정과 열정에 대한 작은 보답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밴쿠버가 촬영 인프라와 안전성이 뛰어나고, 캐나다의 세금 인센티브 제도 또한 잘 갖춰진 도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실질적인 예로 영화 ‘옥자’ 촬영 당시 뉴욕·서울·밴쿠버의 제작비를 비교했을 때, 밴쿠버가 훨씬 효율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촬영지는 명성과 실제 경험이 다릅니다. 현장을 직접 봐야 그 도시의 진짜 역량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프로듀서로서의 제작 철학을 묻자 서 대표는 ‘기본과 유연성’이라는 단어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유연성을 현재 산업을 주도하는 30~40대 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생존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들과 소통하려면 나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기본’이 무너지면 유연함은 아무 의미가 없다며 ‘완성도, 스토리텔링, 그리고 관객에 대한 진정성’이라는 기본을 강조했다. 또한 OTT의 보편화로 관객의 취향이 세분화된 최근의 영화 시장 흐름 속에서 “이제 극장은 단순한 상영 공간이 아니라 ‘체험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사운드, 연출, 서사 모두 탁월해야 관객이 극장으로 돌아온다”고 덧붙였다.
한국 영화의 자금 구조와 독립 영화 생태계
최근 북미 영화 시장에서는 블록버스터보다 인디 영화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자금 조달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인디 감성’을 유지한 채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갖춘 덕분이다. 서 대표는 한국의 자금 구조에 대해 “상업영화는 대기업과 은행, 2차 투자자 펀드를 통해, 독립영화는 정부의 펀드 지원을 통해 제작된다”며 상업과 독립의 명확한 이분 구조를 짚었다.
북미처럼 인디 영화가 곧바로 블록버스터로 성장하는 사례는 드물다는 것이다. 대신 독립영화로 가능성을 입증한 감독이 상업영화로 옮겨가는 방식이 일반적이라고 덧붙였다. 대표적인 예로 봉준호 감독을 꼽았다. 그는 첫 관람 당시 ‘살인의 추억’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상업영화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오히려 탁월한 예술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보여줬다는 것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봉 감독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고, 이후 ‘마더’ 촬영 현장에 100% 참여하며 완벽주의적 디테일을 직접 체감했다고 회상했다. 서 대표는 “1cm의 거리도 허투루 두지 않는 감독의 태도는 내게 큰 자산이 됐다”며, 현장을 통한 배움이 자신에게 가장 큰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공동제작을 제안할 때 ‘한국과 함께하자’는 추상적인 표현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필요를 명시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금, 장소 협조, 캐스팅 등 큰 목적에서 작은 목적까지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 진정한 협력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할리우드의 관행이 한국의 제작 시스템과 충돌하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사전 공유가 부족하면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옥자’ 촬영 당시 할리우드 스태프가 한국 측 장비 운용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예산 낭비와 오해가 발생한 경험도 있었다. 그는 “결국 디테일의 공유가 품질과 효율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공동제작의 핵심은 ‘상호이익’이라며, ‘이 나라와 일하면 무엇을 얻을까’보다 ‘함께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과하게 포장된 제안보다 솔직한 요청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좋은 작품은 완성도·캐릭터·현실성·끈기에서 나온다”
작품을 선택할 때 서 대표는 시나리오의 완성도, 캐릭터의 힘, 현실적 가능성, 그리고 끈기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했다. 실제로 7년, 10년 이상 걸려 완성된 작품이 적지 않다. 그는 “영화를 끝까지 완성시키는 힘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영화 창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조언도 건넸다.
작품을 선택할 때 서 대표는 시나리오의 완성도, 캐릭터의 힘, 현실적 가능성, 그리고 끈기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했다. 실제로 7년, 10년 이상 걸려 완성된 작품이 적지 않다. 그는 “영화를 끝까지 완성시키는 힘은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데서 나온다”고 말했다. 영화 창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구체적인 조언도 건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으면 중심이 흐려지기 쉽고, 좋아하는 장르와 잘하는 장르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영역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좋아하는 장르에만 몰두하다 모방으로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화가 결국 ‘관객을 향한 예술’이라고 정의하며, 창작자는 자신의 표현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올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또 독립영화계에서 반복되는 주제의 형식화를 지적하며 “자기 경험만을 좇기보다 사회적 문제나 다른 인간군상을 같은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훨씬 풍성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 대표는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를 ‘공감’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은 2천 년이 넘는 역사와 기록을 지닌 나라로, 수많은 사건과 인물이 캐릭터와 이야기의 원천이 된다”며, 최근에는 웹툰과 웹소설이 이 흐름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헐리우드가 ‘나와는 거리가 먼 거대한 사건’을 다루는 반면,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내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고 말했다. 관객이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한국 스토리텔링의 힘이라는 분석이다.
“밴쿠버 영화제, 자기 색깔로 진화하길”
밴쿠버국제영화제에 대한 인상을 묻자 서 대표는 “영화제의 성공은 아이덴티티와 진화의 조화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유명인 중심의 행사보다는 고유의 색채를 유지하면서 시대 변화에 맞게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 대표는 또 영화제가 ‘왜 밴쿠버에서 촬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화제 기간 동안 본질에 집중한다면 훨씬 확장력 있는 영화제가 될 것이라는 견해다. 인터뷰의 끝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기본’과 ‘유연성’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영화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기본을 지키되 유연하게, 그리고 끝까지 관객을 향해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