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저서 『인공 J(예수)』를 읽었다. 대학 시절 기독교인이 된 그는 예수의 언행뿐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문학박사 학위를 지닌 저자가 기독교 조직신학의 깊은 내용을 풀어낸 대목에 감동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진의를 독자들이 바르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지만, 기록 주체는 인간이다. 성서 대부분은 1세기 혹은 그 이전에 쓰였으며 그 시대의 언어와 문화, 세계관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그래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과 낱말이 적지 않다. 특히 성서의 용어들은 히브리적이거나 헬라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어, 그 문화권 밖에 있는 현대인에게는 신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주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 내려오시어 장막 어귀에 서시고”(민수기 12:5),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으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복음 24:30)와 같은 구절들은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모습으로 묘사한다. 이 표현은 1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사람들에게 구름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유일한 매개였기 때문이다.
16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동서남북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고, 해는 바다 끝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반대편에서 떠오른다고 믿었다. 그들의 세계는 하늘(천국), 땅(지구), 땅 밑(지옥)으로 이루어진 삼층적 구조였다.
이 틀 안에서 보면 천국은 물리적으로 ‘위’, 지옥은 물리적으로 ‘아래’에 존재했다. 만약 이 관념대로 LA에서 지옥을 향해 곧장 땅을 판다면, 결국 지구 반대편 티베트 땅을 뚫고 히말라야 산 정상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1세기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성서의 몇몇 표현은 당시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지, 오늘의 과학적 시각으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그렇기에 21세기의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는 신화처럼 들리는 표현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사실처럼 들리도록’ 해석해 주어야 한다.
이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서와 신화」에서 강조한 ‘비신화화(demythologizing)’의 핵심이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이 ‘하늘’은 유대인의 관념으로 보면 구름 위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의도한 의미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공간, 즉 시공을 초월한 ‘하늘’이었을 것이다. 예수가 하늘 나라를 설명할 때 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당대와 다른 깊은 우주관을 품고 있었다.
이처럼 천국이나 지옥 같은 개념도 삼층적 우주관의 산물이다.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신화처럼만 보이지만, 성서 기자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되도록 사용한 언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성서의 신화적 표현을 오늘 우리의 관점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 바르고 건강한 성서 이해라고 나는 믿는다. 불트만의 비신화화가 추구한 방향에 나 역시 동의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세이이치의 통찰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사실 예수는 특별한 인간, 다른 누구와도 질적으로 격절한 존재가 아니었다. 예수는 보통의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을 더욱 진실하게 드러낸 사람이다.” 그의 이 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신 예수의 삶 속에서 드러난 깊은 진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