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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기 M&L 홍 재단 이사장 "우리 목소리 내려면 정치력이 필요합니다"

Los Angeles

2025.12.31 18:55 2025.12.3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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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의 아이콘' 홍명기 M&L 홍 재단 이사장
'듀라코트 신화' 일군 성공한 사업가
LA폭동 계기로 정치인 육성 필요 절감
도산 동산 건립·대한인국민회관 복원
한국학원 지원 앞장뿌리교육도 관심
고 홍명기 이사장은 항상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 홍명기 이사장은 항상 정치력 신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는 올해, 한인사회는 이민 123주년을 맞이한다. 새로운 한 세기를 바라보는 한인 사회의 관점에서, 한 사람의 개척자적인 삶이 한인 이민 역사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되돌아보는 일은 깊은 의미가 있다.
 
지난해 4월 재외동포청 ‘이달의 재외동포’로 선정된 고 홍명기 M&L 홍 재단 이사장은 한인 공동체의 앞길을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연구자이자 기업가, 그리고 자선사업가였던  그의 삶은 한인 이민사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미래를 보여준다.
 
1934년 서울 태생인 그는 한국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시기였던 1954년, 꿈꿔왔던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콜로라도 주립대 화학과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유학생활은 곧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현실의 무게로 바뀌었다. 그는 목장에서 우유를 짜고 허드렛일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를 이어갔다.
 
이후 LA로 옮겨 UCLA 화학과에 편입한 뒤에도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됐지만, 학업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지막 학기 당시 등록금이 부족해 수강신청을 못 하게 되었을 때 영어 교수가 “이건 당신을 위한 선물”이라며 조건 없이 건넨 200달러는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환원의 정신’을 심어준 순간이 됐다. 훗날 그는 이 경험을 “내가 공동체를 돕는 이유”라고 설명하곤 했다.
 
부인인 로리 홍 여사와 모교인 중앙고 남가주교우회의 송년 모임에 참석한 모습. [남가주중앙중고교우회 제공].

부인인 로리 홍 여사와 모교인 중앙고 남가주교우회의 송년 모임에 참석한 모습. [남가주중앙중고교우회 제공].

1959년 한인 최초로 UCLA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페인트 업계에 뛰어들어 연구원으로 일했다. 항공기·자동차 마감재, 철강 코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았지만, 당시 주류 사회의 보이지 않는 차별은 그의 승진을 번번이 가로막았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도 기회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는 그의 회고는 이민 1세대가 마주했던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결국 그는 쉰한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독립을 결심했다. 이때 그를 밀어준 사람은 평생 동반자였던 아내 고 홍영옥(영어명 로리) 여사였다. 1986년 자본금 2만 달러, 폰타나의 한 화학회사 구석의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듀라코트(Dura Coat)는 그렇게 문을 열었다.
 
시작은 작았지만, 그의 도전은 거대했다. 원료 시장이 대기업에 장악된 상황에서 그는 남들이 쓰지 않는 원료로 새로운 조성을 연구하는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잠을 줄이며 개발과 영업을 병행한 끝에, 창업 6개월 만에 150만 달러 규모 계약을 따냈고, 5년 만에 국내 시장을 석권했다. 친환경·특수 기능 도료를 개발하며 회사는 건축자재, 상용 차량, 전자제품 외장까지 영역을 넓혔다.  
 
듀라코트는 세계 곳곳으로 제품과 기술을 수출하며 매출 3억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듀라코트는 2016년 글로벌 코팅 기업 엑솔타에 매각되며 한인 성공 신화의 전설이 됐다. 이 시점부터 그는 자신이 일군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데 더욱 집중했다.
 
그의 인생에서 1992년 발생한 LA폭동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폭동 이후 상처만 남은 도시에서 그는 한인 사회가 정치·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 그는 “한인 정치인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품었다. 그는 한인 사회의 미래를 위해 정치력 신장이 필수라고 강조하며, 한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주류사회에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01년 1000만 달러를 출연해 밝은미래재단(이후 M&L 홍 재단으로 이름 변경)을 설립하며 한인 차세대 교육과 권익 향상에 나섰다. 특히 남가주한국학원이 폐교 위기에 놓였을 때 그는 이사장을 맡아 밤낮없는 모금 활동을 펼쳤고, 본인 기부금 20만 달러를 포함 300만 달러를 마련해 학교 정상화를 이뤘다.  
 
2001년 리버사이드 도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홍 이사장.

2001년 리버사이드 도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홍 이사장.

 그리고 UCLA에 200만 달러, 라시에라 대학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며 화학·생명과학 분야 후학을 키우는 데도 헌신했다. 탈북민·다문화 가정 청소년 장학 지원, 글로벌한상드림 기부 등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도 이어졌다.  
 
차세대 한인 정치인 육성을 위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정치권에 도전하는 한인 후보들의 ‘숨은 조력자’로 꾸준히 활동했다. 한인 최초로 어바인 시장에 오른 강석희 전 시장을 시작으로, 가주 연방 하원의원 미셸 박 스틸과 영 김, 그리고 LA시 역사상 최초의 한인 시의원인 데이비드 류 전 LA시의원에 이르기까지 홍 이사장은 당적을 가리지 않고 한인 정치인들에게 후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의 보존 또한 그의 생전 사명을 형성한 중요한 동기였다. UCLA 재학 시절부터 흥사단 활동을 통해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접한 그는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야 한국 사람이 존중받는다”는 도산의 정신을 마음에 새겼다.
 
도산으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신념은 이후 수많은 역사 보존 활동으로 이어졌다. 2001년 그는 60만 달러를 모아 리버사이드 시청 앞에 도산 동상을 건립했고 2002년에는 LA 10번·110번 프리웨이 교차로를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IC’로 명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1909년 미주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대한인국민회관이 철거 위기에 놓였을 때 사재를 먼저 내놓고 복원 기금 70만 달러를 모아 건물을 한국 이민사의 교육 현장으로 되살려냈다.
 
UC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지원, 세계한상대회 리더십, 재외동포교육문화센터 기부 등 그의 발자취는 이민사회 연구와 글로벌 한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한인 사회 기부금은 알려진 것만도 2000만 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공로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한국 정부는 2002년 국민훈장 동백장, 2011년 국민훈장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가주 의회는 2022년 6월 20일을 ‘홍명기 기념의 날’로 제정하며 한인사회를 위한 그의 기여를 공식적으로 기렸다.
 
2020년 부인 로리 여사의 타계 이후 한동안 활동을 줄였던 그는 이후 다시금 한인 사회를 위해 강연과 행사에 나서며 끝까지 헌신을 이어갔다. 그는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광복절 기념행사, 리버사이드 도산 동상 제막 20주년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등 도산의 정신이 한인 차세대에게 이어지길 바랐다. 2021년 8월 18일, 그는 향년 8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홍명기 이사장은 개척자의 용기, 공동체를 위한 책임, 역사를 잇는 사명감,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한인 이민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의 삶은 미래 한인 사회의 방향도 제시하고 있다.
 

☞홍명기 이사장은...

 
서울 출생, 1954년 미국 유학
 
1959년 UCLA 화학과 졸업
 
1986년 ‘듀라코트’ 창업
 
1000만 달러 출연 밝은미래재단(나중에 M&L 홍 재단으로 변경) 설립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

우훈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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