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순씨는 아픔의 개인사를 뒤로하고 희망과 행복의 미래를 꿈꾸며 땀흘리고 있다. 신씨는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 책 서문에서 "궁정동 사건 이후 내 인생의 주제는 불신과 고독이었다. 불신과 고독에 지치다 보니 무관심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믿는다. 언젠가는 내 본래의 모습대로 되돌아가리라는 것을"이라고 쓴 것처럼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누구는 나보고 '들장미 소녀 캔디' 같다고도 합니다. 원래 긍정적이고 털털한 성격이거든요. 지나간 과거는 이미 과거일 뿐이고 남아있는 시간과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지 않나요?" 지난 온 삶에 대해 후회도 있다. "사람들은 죽을 때 더 잘해보고 살 걸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등 '걸걸걸' 하면서 숨을 거둔다고 하잖아요. 남들처럼 공부하고 직장 생활하면서 자신감 있게 살았어야 되는데 너무 움츠려 살았다는 것이 후회스럽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은 장사(구이집)를 하면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사람 사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손님을 상대해야 하는 장사를 시작한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새로운 인생에 대한 도전이요 구속에서의 해방이다. '나'를 내놓고 살아가는 삶을 택한 것이다. "10.26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가슴 속에 묵직하게 남아 있던 김재규 중정부장의 '버러지 발언'에 대해 진실을 밝혔다는 것이 무엇보다 홀가분합니다. 언젠가는 꼭 밝히고 싶었습니다. 또 초혼에 실패했던 사실을 고백했다는 점도 무거운 짐을 털어낸 기분입니다. 결코 자랑일 수는 없지만 내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한 부분을 다시 복구한 느낌입니다." 이웃들과 스스럼없이 수다를 떠는 횟수도 점점 늘고 있다. "가게를 닫을 무렵이면 친한 이웃들이 가끔 들러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서로 비즈니스가 어떤지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얘기를 나누며 웃고 안타까워합니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사진이 어떻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겠다고 걱정도 해줍니다. 이런 진심들을 나누면서 이웃들의 깊은 정을 느낍니다." 두 달 전부터는 교회에도 나간다. 10.26사건 현장에 함께 있었던 또 다른 여인인 가수 심수봉씨의 권유가 있었다. 지난 7월 말 오렌지카운티 기독교전도회연합회 주최 '심수봉 찬양간증콘서트'를 위해 남가주에 들렀던 심씨가 아는 목사 내외와 함께 신씨의 업소에 찾아와 성유를 머리에 발라주면서 기도해주고 간 후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다섯 살 많은 심수봉씨와는 사건 후에도 함께 여행하는 등 언니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내왔다. 심 씨가 공연이나 간증 등 행사로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서로 연락하고 때로 만나면서 '특별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오랜 겨울잠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며 봄맞이 대청소를 시작하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이제 우리의 이웃으로 자유로운 여인으로 함께하고 있다. 김병일 기자 [email protected]
2011.10.25. 19:34
신재순씨는 개인사적으로 비련의 여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10.26 당시 그녀는 딸을 둔 이혼녀였다. 대학교 3학년 신분이었지만 이미 만 20세 때 결혼하고 딸을 낳은 후 남편의 바람기 때문에 2년 만에 이혼했다. 이후 복학했다. 세간에는 대학생이었기 미혼으로 알려졌었다. 첫 남편은 종로에서 유명 유흥업소를 경영하던 재력가 집안의 아들이었다. "당시 그 업소에 DJ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갔다가 인연이 됐지요. 나보다 9살이 많았어요. 첫 남자였지만 기나긴 세월을 참고 살기엔 아직 너무 젊었었지요." 복학하면서 광고모델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이것이 인연이 돼 결국 궁정동 연회에까지 참석하게 된다. 10.26 후 잠시 쉬었다가 광고모델과 직장인으로 평범한 삶을 살려고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과 소문은 그에게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친구의 소개로 재미동포를 만나 재혼한다. 만난 지 한 달 만이었다. "한국생활이 답답했고 미국생활을 동경했거든요.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스타일로 멋있게 보였어요." 남편은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그룹 '무당'의 드럼 연주자로 이 결혼은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결혼 후 1983년 미국에 들어와서 LA북쪽지역에 있는 랭캐스터에서 둘째 딸을 키우며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산다. 1994년에는 자전적 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를 출간하고 1996년에는 연극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에서의 삶을 타진해 보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 두 번째 결혼생활도 이혼으로 끝났다. "첫 남편은 재력은 있었지만 성실하지 않았고 두 번째 남편은 사람은 좋았으나 생활력이 없었어요. 남자 복이 없는 것 같아요. 앞으로 다시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 같아요." 78년 전 남가주 한 호텔의 마케팅 부서에서 한국인 담당으로 약 5년 동안 근무하면서 미국에서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경험한다. 3년 전부터는 가디나에서 구이집을 경영하고 있다. 역시 첫 비즈니스다. "장사를 해보니 쉽지 않아요. 물건 구입에서부터 음식 맛 내고 종업원 챙기는 것까지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집에는 홀어머니와 여동생 둘째딸 손녀 2명 등 4대에 걸친 6명의 여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작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 봉양하고 싶습니다." 첫 결혼에서 얻은 큰딸은 5년 전 연락이 와 재회한 후 왕래하며 지낸다. 이 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형 은행의 간부로 근무하고 있다. 큰딸이 지난 여름 첫 딸을 낳으면서 작은딸 쪽 손녀 2명을 포함해 손녀가 셋으로 늘었다. 김병일 기자 [email protected]
2011.10.24. 19:25
32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사건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씨 단독 인터뷰에서 싣지 않았던 내용과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역사의 여인으로 남은 신재순씨. 1957년 10월 15일생으로 10.26사건 당시 만 22세의 H대 연극영화과 3학년 신분이었다. 훤칠한 키와 뛰어난 미모로 광고모델계에서 떠오르는 별이었다. 본격적인 연예계 진출을 꿈꾸던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궁정동 안가 연회에 참석하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신씨는 그의 자전적 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에서 어떻게 그 자리에 가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친구(희경이)를 따라 민 여사라는 분의 집을 방문했고 여기서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만났다. 박 과장은 좋은 자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제안하고 다음날 오후 5시쯤 프라자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10월 26일 예정보다 조금 늦게 박 과장을 만났고 이어 내자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수봉을 동승시켜 오후 6시40분쯤 궁정동에 도착했다. 만찬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대기실에서 행동거지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경호원으로부터 이 나라의 높은 어르신들만 참석하는 자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핸드백을 맡긴 후 만찬장으로 안내되었다. 온돌방인 그곳에는 중년은 넘어 보이는 4명의 남자가 직사각형 식탁을 가운데 놓고 앉아 있었다. 거기에 대통령이 있었다.' 신씨는 잠시 후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살해 당하는 역사적인 10.26사건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신씨는 대통령이 총에 맞고 등에서 출혈이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지혈을 하기도 한다. 사건 종료 후 박 과장은 신씨와 심수봉을 내자 호텔까지 데려다 줬다. 신씨는 자신의 책에서 10.26사건의 의미에 대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 나는 다만 내 젊음의 비상을 위해 아무것도 모른 채 궁정동에를 갔던 것뿐이다. 그 때문에 우연히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에 내가 증인이 되었던 것이고…. 그러나 나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부끄럽게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그 사건 때문에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치면서 내가 왜곡되는 현실이 슬플 뿐이다." 그녀는 이제 기나긴 터널에서 벗어났다. 이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보통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김병일 기자
2011.10.23. 19:38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 그래서 역사적인 인물로 남았다.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목격자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건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중견 배우로 활발히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후 거의 은둔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재미동포를 만나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왔다. LA인근에 자리 잡고 살았다. 세월은 어느덧 32년이 흘렀다. 20대 초반이었던 그녀도 이젠 손녀 3명을 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을 받고 숨을 거둔 10.26사건 현장에 있었던 신재순(54.당시 H대 연극영화과 3년) 씨. 그녀는 83년 이후 LA근교에서 우리의 이웃으로 살고 있었다. 3년 전부터는 가디나에서 구이집을 경영하고 있다. "당시 현장서 벌어진 상황, 합수부의 계속 된 세뇌로 나 자신 조차 혼란스러워 평생 지울 수 없는 그 사건, 내 인생 진로 완전히 바꿔 총성나면 지금도 가슴철렁" 구이집에는 9월 초 두 기자(김석하.박상우 기자)와 함께 셋이서 처음 방문했다. 문에 들어서는 순간 카운터에 서있는 여인이 당사자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고 소주가 몇 순배 돈 후 종업원을 통해 신 사장을 불렀다. 앉자마자 기자 신분을 밝히고 방문목적이 인터뷰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 인터뷰는 하지 않겠다고. 음식 맛있게 들고 가라고. 첫 대면은 그렇게 끝났다. 일주일 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첫 만남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상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사양하겠다고 말했다. 짐작했던 대로 쉽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여러차례 찾았다.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진심을 받아줬다. 인터뷰 날짜가 정해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약 14년 만이다. "사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각하 이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는데 이는 보안대(당시 합동수사본부를 그녀는 이렇게 표현했다)에서 시켜서 한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것 같았어요. 1994년에 출간한 자전적 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에도 한결같이 주장했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조사과정에서 요원들은 함께 자리했던 심수봉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너는 왜 다르게 이야기하느냐며 다그쳤고 지속적으로 세뇌시켰습니다. 나중에는 나 자신조차 어느 게 진실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 발언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김 부장이 차 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느냐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특히 같은 자리에 있었던 심수봉 씨는 신 씨의 책이 나온 후 4개월쯤 뒤에 펴낸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책에서 "김 부장이 대통령 앞에서 다른 참모들과 다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버러지 같은 …"이라는 발언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신씨의 고백으로 '버러지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됐다. 통설로 여겨지던 이 부분에 대한 신 씨의 증언이 거짓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그동안 소수설로 남아있던 심 씨의 증언이 앞으로는 역사에 남을 것이다. 신 씨는 하지만 10.26과 관련된 나머지 책 내용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심수봉씨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빠앙~ 갑자기 총성이 들렸지요. 총성이 들리기 전에 언성을 높여 싸웠다고요? 그런 건 다 거짓말이에요. 그분 앞에서 김씨하고 차씨가 투닥거리는 그런 장면은 감히 생각지 못할 일이죠. 사전 알력은 있었겠지만 총성은 그냥 갑자기 난 것이었어요. … 중략 … 각하는 총소리에도 조금의 동요도 없이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계셨어요. 이 녀석들이 또 철없이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는 식의 태연한 모습이었어요…" 10.26사건은 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한 여자의 인생진로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대학 2학년 때 첫 결혼 휴학, 두 번의 이혼 굴곡…두 딸 얻어 3년 전부터 가디나서 음식점, 심수봉씨 권유로 신앙생활 언젠간 한국 무대 서고 싶어, 주위 모든 사람들 행복 기원" "10.26사건은 나에게는 운명적인 사건입니다.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뜻밖의 일입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사건으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만약 그 사건이 나지 않았다면 연예계 쪽으로 풀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습니다. 정말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참석한 자리에 대통령이 앉아 있었고 거기서 부하에게 총격을 받고 돌아가신 거예요. 이후 10.26사건을 무던히도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어요. 아직도 충격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건은 내가 태어나서 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또 총격사건이었기 때문에 총에 대한 공포가 여전합니다. '땅' 소리만 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지요. 사건 직후에는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잠은 잘 잡니다." 김재규 중정부장과 그 일당은 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사살하지 않고 살려뒀을까? "아마 자신들이 계획했던 일이 성공했다고 확신해서 안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해 봤습니다. 데려다 주면서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 이후 입이 무거운 여자가 됐지요." 짧고 비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대한민국을 아주 사랑했던 사람이고 훌륭한 분으로 생각해요. 독재를 하기는 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많이 이루고 국민을 위했던 분입니다. 사건 현장에서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나는 괜찮아'라고 한 말을 잊을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었어요." 박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라는 점에 대해서는 "관심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만 "누가 대통령이 되든 대한민국이 잘되고 국민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또 다른 고백을 했다. 10.26사건 당시 그녀는 이미 한 번 결혼하고 딸아이까지 둔 이혼녀였다. 대학생 미혼 여성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다른 사실이었다. "대학 2학년 때 첫 결혼을 했었습니다. 결혼과 함께 휴학했었지요. 재력가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가정적인 남자는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도 차를 몰고 다닐 정도로 여유있는 생활이었지만 막 20대를 넘긴 젊은 나이였고 참으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자식의 미래를 걱정한 친정 어머니가 어느 날 손녀를 친가에 보냈습니다. 5~6년 전에 큰딸로부터 연락이 와 다시 만났습니다.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대형 주류은행의 간부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혼으로 역시 끝난 두 번째 결혼에서도 딸을 하나 얻었다. 현재 같이 살고 있다. 큰딸이 낳은 딸과 작은딸이 낳은 두 딸 등 모두 3명의 손녀를 두고 있다. 신재순씨는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 "자식들 손녀들 잘되고 하고 있는 비즈니스가 잘됐으면 좋겠어요. 또 내가 받은 만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나중에는 다시 한국에 가서 살고 싶습니다. 조용한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며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기회가 된다면 연극도 해보고 싶어요. 언제든지 오면 받아준다는 학교 선배가 대표로 있는 극단이 있어요. 자신은 없지만 하고 싶어요." 신씨는 두 달 전부터 교회에 나가고 있다. 심수봉 씨가 권유했다고 했다. 새로운 신앙인의 삶을 익혀가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두 손을 모은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소서.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웃음과 자유로움을 찾게 하소서. 평범한 삶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소서."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10.26사건은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부장이던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등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정부장과 함께 가수 심수봉 대학생 광고모델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김재규 중정부장은 차 경호실장과 박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했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재규가 차지철과의 권력암투 과정에서 충동적으로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시각도 있다.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인 1980년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5월24일 교수형이 집행되면서 유명을 달리했다. 10.26사건 후 이 사건을 맡아 처리했던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제5공화국 시대의 개막이었다. 김병일 기자 [email protected] ** 신재순씨의 남은 이야기는 24일(월)부터 3회에 걸쳐 연재 됩니다.
2011.10.20. 20:24
"합수부 지시 따라 법정서 거짓 진술 당시 여대생 이었지만 딸 둔 이혼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총을 쏘기 전에 '각하 이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정치가 올바로 되겠습니까?'라고 한 발언은 사실무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2명의 여인 중 한 명인 신재순(54.사진) 씨는 최근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법정진술을 통해 그 같이 이야기한 것은 합동수사본부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신씨는 법정진술과 1994년에 펴낸 자전적 소설 '그곳에 그녀가 있었네' 그리고 이후 각종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김 부장이 '버러지 발언'을 했다고 한결같이 주장했었다. 이에 따라 '버러지 발언'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됐다. 신씨는 또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신은 10.26사건 당시 이미 한 번 결혼해서 딸까지 둔 이혼녀였다고 털어놨다. 신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대한민국을 아주 사랑했던 분이었다. 비록 독재를 하긴 했지만 경제적으로 나라의 발전을 많이 이루고 국민을 위했던 분"이라고 평가했다. 신씨는 재미동포와 재혼한 후 1983년부터 LA인근에서 생활하고 있다. 두 번째 남편과도 15년전 이혼하고 현재는 독신으로 가디나에서 구이집을 운영하고 있다. 신재순씨는 1979년 10월26일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연회에 가수 심수봉씨와 함께 참석했다가 10.26사건의 목격자로 남게 됐다. 당시 이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경호원 등 6명이 사망했다. 김재규 중정부장을 포함한 사건 주동자 6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됐다. 글=김병일 기자·사진=백종춘 기자 ** 신재순씨의 남은 이야기는 24일(월)부터 3회에 걸쳐 연재 됩니다.
2011.10.20. 20:06
박정희대통령 동상 및 비문건립을 위한 미주 후원모금대회가 3일 40여명의 한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후원회(회장 윤병인)가 주최하고 재미LA서독동우회(회장 김창수)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서는 2012년말 독일 에센주의 파독산업전시회관 내 정원에 만들어지는 기념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인들의 후원을 부탁했다. 김창수 회장(가운데)이 참석자들에게 기념물 제작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의: (213)220-5554 백종춘 기자
2011.10.03. 20:16
"옛날이 그립고 구관이 명관이다" LA 한인사회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각종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어 주목된다. 두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는 사업은 주로 올드타이머와 70~80대 고령층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28일 저녁 LA 한인회관에서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을 추모하고 건국절을 국가적 기념행사로 승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이를 출발점으로 앞으로 이승만 대통령 동상 건립 운동도 본격 전개될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음달 3일 한인타운 내 한 호텔에서 '박정희 대통령 동상 및 비문 건립 후원사업' 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의 미주후원회장인 윤병인씨는 "조국이 어려웠던 시절 선진조국의 기틀을 다진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모임으로 그 첫 번째 사업으로 동상과 비문을 세우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윤 회장은 박 대통령의 동상과 비문은 LA지역이 아니라 독일 한인 문화회관과 파독광부 기념회관에 건립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한인사회 일부에서는 총선과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범보수층이 행사를 중심으로 조직화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박 대통령 사업과 관련해서는 이곳 남가주나 미국에 동상이 건립되는 것도 아닌데 박사모USA까지 협찬 단체로 나서는 것은 내년 대선을 겨냥해 한나라당 대선 주자로 유력한 박근혜 전 대표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있지 않겠느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 행사 관계자들은 정치적인 목적은 없으며 조국을 사랑하고 고인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병일 기자 [email protected]
2011.09.28. 21:23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말까지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코드명 '890')를 추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제문제 영문 저널인 '글로벌 아시아'의 편집장인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편집위원인 피터 헤이스(Peter Hayes) 미 노틸러스 연구소장은 26일 발간되는 가을호에서 "박 대통령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76년 말 비밀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77년 이후에도 미사일 사거리 증대 연구와 고폭 실험 핵분열 물질 실험 등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지속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78년 6월 작성한 '한국: 핵개발과 전략적 정책결정' 등을 분석했다. 다음은 그 요약.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은 1960년대 말~70년대 초반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과 전격적인 미.중 화해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74년 말 핵무기 개발 계획인 '890계획'을 승인했지만 76년 미국의 외교 압박으로 중단했다. 그러나 77년 1월 카터 대통령이 취임 1주일 만에 핵무기와 보병 2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키라고 지시하면서 890계획의 일부가 재가동됐다. 국방과학연구소(ADD)에 고폭 실험과 화학무기 개발 연구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CIA는 "고폭 실험은 한국이 핵무기 개발로 방향을 틀 경우 유익한 연구"라고 했다. 77년 9월에는 미사일 연구진도 작업장으로 복귀했다. CIA는 "78년 4월 ADD는 개량된 나이키-허큘리스 지대지미사일의 시험 발사에 착수했다"며 "박 대통령으로부터 '85년까지 사거리 3500㎞의 미사일 개발 계획'을 승인받았다"고 덧붙였다. CIA는 당시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면서도 "한국이 개발을 시도했던 핵탄두의 사이즈와 중량은 미사일 개발 프로젝트에 비춰 수㏏에서 20㏏의 재래식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김수정 기자
2011.09.25. 20:59
어제로 5·16 군사 쿠데타가 50주년을 맞았다. 때맞추어 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작업이 활발하다. 필자는 박정희 시대의 시종을 관통하는 개념은 한계 상황에 대한 대처라고 판단한다. 그에게는 주어진 한계 상황을 일정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실리를 최대화 하는 능력이 있었다. 박정희 시대는 주권적 한계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한반도에서의 피할 수 없는 미국의 영향력을 말한다. 이 같은 한계 상황 때문에 5·16 혁명공약은 다소 어색하게 시작한다.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나선 혁명세력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의 국가 이념은 흔들지 않겠다는 연속성을 강조한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반공을 국시로 삼고 미국을 위시한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하겠다는 선언은 백악관을 향한 호소였다. 박정희가 구상하고, 상당부분 현실로 이루어진 새로운 한국 사회의 모습은 제3항에서야 등장한다. 이런 한계 상황에서 국정을 시작한 박정희의 실리추구 정신은 세 가지 예에서 잘 나타난다. 첫째가 1963년 대통령 선거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민정이양을 늦추려 했다. 미국은 반발했다. 원조를 중단하겠다며 위협했다. 박정희는 이 한계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선거에 임해 당선됐다. 그는 하루아침에 반란군 우두머리에서 나라 건설자(nation builder)로 바뀌었다. 합법성을 확보한 그는 미국에 대해 당당하게 그의 필생의 화두 '조국 근대화'에 필요한 지원을 요구했다. 잉여농산물을 넘어 기술, 재원, 시장을 요구할 수 있는 지위는 그가 한계 상황 속에서 택한 정면승부의 결과이다. 미국의 월남전 개입 또한 박정권이 당면한 한계 상황을 노출했다. 한국이 월남에서 미국을 돕지 않을 경우 일부 주한미군의 재배치를 고려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린든 존슨 정부로부터 흘러나왔다. 역시 박정희는 이 상황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월남전에 관한한 존슨보다 전략적으로 더 큰 그림을 그렸다. 소위 한반도와 베트남의 공동 전선론이었다. 한반도에서 김일성을 제압해야 베트남에서 호치민도 물리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결국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계속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빠져 든다. 박정희가 가장 절실하게 한계 상황을 실감한 때는 1968년 초이다. 청와대 습격을 목표로 한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미국의 정보수집선 푸에불로호의 나포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박정희는 군사 대응을 준비했다. 미국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또 다시 한계 상황에 봉착한 그는 응징을 포기하는 대신 그의 또 다른 집념 '국군 현대화'를 위한 지원을 받아 낸다. 이 당시 존슨이 참석한 백악관 안보회의의 비밀기록문에는 어쩌다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 미국 같이 큰 나라가 끌려 다니게 되었냐는 한 참석자의 자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한계 상황 속에서 박정희가 억척스럽게 실리를 챙겼다는 증거다. 박정희 시대의 종말은 그가 처한 한계 상황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1976년 미국 대선. 무명의 지미 카터가 현직 대통령 제럴드 포드와 겨루어 승리한다. 카터의 승리는 시대적 변화요구의 표출이었다. 워터게이트로 압축되는 제왕적 대통령(imperial presidency)에 대한 종말요구였다. 닉슨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국가 공권력, 특히 정보기관을 이용한 정치적 조작술은 미국인들의 강한 반감을 유발시켰다. 자신이 이런 미국 사회의 시대적 변화를 상징한다고 믿었던 카터에게 장기집권, 정보정치, 군사대립으로 요약되는 박정희 정권은 혐오대상이었다. 박정희는 내정간섭을 외치며 반발했고, 긴장은 고조됐다. 이 상황은 결국 그의 암살로 끝났다. 한계 상황에 대한 대처는 박정희 시대의 흥망사를 푸는 열쇠인 것이다.
2011.05.17. 0:18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뉴욕본부는 오는 16일 플러싱 코리아나연회장(구 아리수)에서 ‘5·16 50주년 기념식 및 제3대 회장 취임식’을 연다. 행사 홍보 차 5일 본사를 방문한 최영삼 사업회 총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 경제성장의 밑바탕을 제공했다”며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준 박 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정성욱 행사준비위원장은 “박 전 대통령은 다른 군인 출신 대통령들과 다르게 부정을 하지 않았다. 장기집권에 대한 부분도 ‘경제성장’을 이끌기 위해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엔젤라 정씨가 3대 회장으로 취임한다. 미주한인여성회 현 회장으로도 활동중인 정씨는 “장기적으로 박 전대통령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만들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 등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917-916-2447. 강이종행 기자 [email protected]
2011.05.05. 21:15
북한 평양 만수대의 김일성 동상과 비슷하다는 논란을 빚은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이 친서민적으로 바뀐다. 이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추진위 측에 "동상의 높이를 5m 정도로 하고 기단 없이 평지에 세워 서민과 함께하는 모습으로 해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또 동상 주변엔 돌 대신 잔디와 조경수를 심어 친환경적으로 꾸민다. 박동진(64) 동상건립추진위원장은 19일 "설계를 다시 하고 박 전 대표 등 유족과 협의한 뒤 동상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은 "박 전 대통령 동상 공모에 당선된 작품을 두고 논란이 일자 지난 15일 박 전 대표가 이런 요청을 해왔다"고 전했다. 구미지역 25개 사회단체로 구성된 동상건립추진위는 지난달 15일 김영원 홍익대 미술대학장이 낸 지름 16m 높이 2.7m의 둥근 좌대 위에 8m 높이로 설계된 '중단 없는 전진'이라는 작품을 당선작으로 발표했다. 당시 추진위는 이 작품을 토대로 여론을 수렴한 뒤 오는 10월까지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에선 무릎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입고 오른손을 어깨보다 높게 들고 전방을 응시하는 모습이 김일성 동상과 닮았다는 지적을 제기해 왔다. 송의호 기자
2011.04.19. 20:43
지난 3월 23일자 한국 중앙지 C일보 칼럼 ‘아침논단’에 실린 ‘용기 있는 변절과 비겁한 지조’라는 제목의 글이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서울대에서 서양사를 가르치는 박지향 교수의 글이다. 1970년대 국내에서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박 교수는 군사독재로 인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혐오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차라리 암살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가 외국유학을 하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다. 그의 글 일부를 인용해보자. “국내에서 듣던 바와는 달리 모든 객관적 지표는 대한민국이 부(富)에 있어서 상당히 좋은 나라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경제성장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성공 케이스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박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 ‘비겁한 지조’보다는 ‘용기 있는 변절’을 택하게 된 자신의 입장을 박대통령이 주도한 한국의 경제성장 업적을 통해 설명했다. 박 교수의 ‘용기있는 변절’은 나의 입장을 잘 반영했다고 본다. 1965년 봄 나는 내가 근무했던 일간지에 2달간의 기획연제기사를 쓰다 도중하차한 경험이 있다. 기사의 제목은 ‘보릿고개’였으며 경남 전남 농촌지역을 두루 다니며 춘궁기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상을 현장 취재하는 임무였다. 연재가 3주쯤 진행되었을 때 사회부장으로부터 취재를 취소하고 귀사 하라는 전화연락을 받았다. 내용인 즉 ‘남산’(중앙정보부)에서 호출이 왔다는 것이었다. 사회부장과 함께 남산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우리는 수사관의 호출설명에 기절초풍을 했다. 보릿고개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참상을 신문에 연재하면 북한에게 좋은 ‘선전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이적죄에 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연재는 당장 취소돼야 한다는 것. 나는 그때 박지향 교수가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똑같은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그 뒤 1960년대 후반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나는 박사학위논문을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주도 경제발전계획과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쓰기로 결정하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내가 박대통령에 대해 가졌던 혐오감을 다른 방향으로 점점 바꾸기 시작했다. 금년으로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되었다. 이제 그에 대한 형평성 있는 역사적 평가를 해야 될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의 군사독재로 민주주의는 퇴보됐으며 많은 독재항거민주투사들이 고난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경제발전계획이 가져다 준 보릿고개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더 나가 세계 8번째 경제 강국으로의 밑거름을 그가 이룬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용기 있는 변절’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00년 한국으로 돌아가 11년째 살고 있으면서 방학에는 미국 집에서 지낸다. 미국으로 유학올 때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다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역사를 되돌릴 수 없지만 만일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지금 한국의 경제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경북 구미에 있는 그의 생가 앞뜰에 세워진다. 새마을 운동 중앙회 구미시 지회 등 구미지역 25개 사회단체들이 마련하는 동상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 부부는 2년 전 이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나서 대구사범을 다닐 때까지 살던 집이다. 그가 얼마나 가난에 쪼들리며 살았는지를 잘 알려주는 생가다. 입구도로며 주차장이며 너무 부실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가 이룩한 한국의 경제발전에 비해 너무 초라했다. 지금쯤은 박대통령의 동상뿐 아니라 그의 기념관이나 도서관이 세워질 만한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김대중 대통령 재직시 국고와 국민헌금으로 세우기로 했던 박정희기념관은 그 뒤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전남 무안 전남도청앞 김대중광장에 군사독재항거 민주주의 회복투쟁의 전사인 김대중 대통령 동상이 지난해에 세워졌다. 박정희의 동상과 김대중의 동상이 우리 한국 사람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가 각각 다를 줄 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경제발전의 터전을 이룩한 상징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회복투쟁의 상징으로 표상되기 때문이 아닐까? [email protected]
2011.03.31. 21:23
박정희 전 대통령(사진 오른쪽)이 재직 당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김종필(JP) 전 총리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려고 결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69년부터 9년간 박 전 대통령 곁을 지킨 김정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10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개원 40주년 기념 강연에서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종료(1984년) 1년 전에 김종필 전 총리를 다시 총리로 지명한 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려 했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은 1978년 취임하자마자 유신헌법의 완화를 지시했다"면서 "박 전 대통령은 (하야 뒤) 대선에서 김종필 전 총리와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경합하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피력했다"고 밝혔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경제를 이만큼 일으켰고 카터 미국 대통령이 지상군을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안보기반을 단단히 다져놓았으니 나라를 위해 할만큼 한 것 아니냐. 이젠 나도 쉬면서 애들 시집.장가나 보내야겠다'고 밝혔다"면서 인간적 심경도 피력했다고 전했다. 김 전 실장은 이어 박 전 대통령의 재산과 관련 "서거 후 남겨진 재산은 신당동의 일본식 단층 35평짜리 주택과 성금으로 받아쓰고 남은 9억원이 전부였다"고 소개했다.
2011.03.10. 2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