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 12월에 이웃이 50 년간 살아온 집을 팔고, 식사를 제공해주는 리빙 어시스턴트로 옮겼다.
밥을 못하게 된 아내 때문이지만, 사실은 딘 아저씨도 세상 떠날 준비를 한 것이다. 몇 해 전 자기가 묻힐 국립묘지를 우리 가족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피부암을 극복한 강인한 성품인 미 육군장교 출신인 딘 아저씨는 대형 병원의 약사로 은퇴했다. 우편으로 날아오는 카드 속 단정한 글씨체처럼, 부지런하고 집 안팎을 정리정돈 잘하던 가장이기도 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표정이 없지만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긴 세월 이웃으로 살아오며 자주 대화했기에 나의 이웃 중에 최고의 한 분이다, 아내는 토요일이면 여성 축구팀에서 활동했고 좀 냉정한 성격이지만, 내가 오픈 하우스로 저녁을 대접한 후, 자기 집에서 라쟈냐로 우리를 대접해준 다정함도 보여주었던 아주머니다.
모든 게 생소했던 이민 초기, 나는 동네를 자주 걸으면서 부지런한 가장들이 차고 앞에서 일을 할 때면 들여다보며 서 있곤 했다. 나의 서툰 영어로 묻고 배우며 안내도 받아서 지붕 등 집 수리도 했다. 삼십 년 전인가 개스 버너에 어떻게 불을 지필지도 모를 때, 새 텔레비전을 사서 연결이 잘 안 될 때도 내가 부탁하면 형제처럼 달려와 주던 이웃, 딘 아저씨.
한번은 탱크리스 물통 청소 기구를 아저씨는 호스를 만들고 나는 펌프를 사서 함께 사용했다. 잘 되지 않아 그가 와서 도와주고 있는데, 아내가 쫓아 와 투덜대며 떠난 적이 있었다. 몇 시간 후에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우리 집 대문 앞에서 딘의 아내가 서 있다.
그녀가 훌쩍거리며 조금 전 일을 나한테 사과하는 것이었다. 조용한 남편이 어떻게 호통을 쳤기에, 놀라운 사건이었다. 늘 서툰 영어로 고생하던 우리를 딘 아저씨는 “나도 한국말 하나도 모른다”며 도와주려 애쓰곤 했다. 딸이 방학에 찾아 와 인사를 가면 반가워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손재주도 없고 집 일에 관심이 없었던 내가 집 정원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다른 이웃이 남편에게 시키라며 조언하던 이민 초기였다. 남편이 은퇴하고 많은 집안일이 놀라 지금은 도우려고 애를 쓰지만, 답답한 영어는 여전히 우리 부부의 골칫거리다.
딘 아저씨가 이사 짐을 정리하며 나를 불러 식탁과 정이든 물건을 가져가 달라고 청했다. 집에 공간이 없어 나는 망설였는데 딸아이가 책상으로 사용하겠다며 몽땅 들고 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저씨가 손수 안고 온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인장’ 화분에 감동했다. “미자, 이것은 네 것이야.” 오래전 여러 지인에게 내가 선물했던 작은 화분들 중에 하나였다. 그가 십 년 넘게 정성들여 탐나게 길러온 화분이다, 뜻밖에 되돌려 받은 선물이었다. 지금 그 화분은 딘 아저씨의 조용한 미소처럼 화사하다. 12월이면 그리움은 뭉클하고 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