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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이 보는 미국정치] 오바마 ‘통합의 리더십’

미국 언론계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는 두 개의 신문을 들라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다. 종이매체인 신문이 온라인 매체에 점점 독자들을 잃고 있다지만 두 개의 신문이 아직까지 미국사회의 총체적인 흐름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두 신문에서 고정 칼럼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사람을 한 명씩 들라면 뉴욕타임스의 데이빗 브룩스와 워싱턴포스트의 찰스 크로서머다. 이 두 사람은 양대 신문의 고정 칼럼을 통해 미국내 지식인 사회의 보수주의를 옹호, 방어하고 있다. 데이빗 브룩스는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미국내 유대계 사회를 부시쪽으로 완벽하게 이끌어 내는 칼럼을 썼다. 찰스 크로서머는 일본을 핵 무장시켜 중국과 북한을 제압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했던 극보수 강경주의자다. 찰스 크로서머는 6자회담에서 북한과 중국이 짜고 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북한의 핵이 미국에 악몽이듯 일본의 핵무장은 중국에 악몽이다. 그래서 일본의 핵무장은 중국과 북한을 동시에 제압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극보수 논객으로 위의 두 사람을 능가하면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둘 더 있다. 네오콘 그룹에서 어둠의 왕세자로 불리며 위클리 스탠더드의 편집장인 윌리엄 크리스톨과 신문이나 방송 등 유명 언론매체를 넘나들면서 보수주의를 강변하는 역시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 조지 윌이다. 그는 자신이 레이건주의자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보수 논객이다. 이들 정상의 보수 논객들은 지난 2008년 대선기간 동안 흑인 대통령에 대한 불안감을 유포시키는 칼럼을 쓰는가 하면 오바마의 가치관에 대한 우려와 오바마의 경제정책이 시장경제의 본질을 위협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 주류 논객들의 오바마에 대한 파상공격은 지난 9월14일 월스트릿의 붕괴를 부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시인을 했음에도 이어졌었다. 오바마 진영에선 이들의 이러한 주장을 코미디 수준으로 무시한다고는 했지만 중남부지역내 보수성향의 국민여론을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 취임식 일주일전인 지난 13일 밤 워싱턴 시내에서 정상의 보수 논객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옷맵시가 깔끔하기로 소문난 조지 윌이 호스트가 되어 자기의 집으로 이들을 초청했다. 공화당 우파들의 합창을 기대해도 될 법한 사람들이 모였다. 윌리엄 크리스톨(위클리스탠더드 편집장)과 CNBC의 정치해설위원인 래리 커틀로우 그리고 뉴욕타임스의 데이빗 브룩스, 워싱턴포스트의 찰스 크로서머, 리치 라우리 내셔널 리뷰 편집장 등이다. 이 모임이 비밀리에 마련됐지만 세상에 화제 거리가 된 이유는 이들 정상급 보수 논객들의 합창을 감상하려고 오바마가 예고없이 찾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호랑이굴로 찾아 들어간 격이다. 어느 방송 앵커는 이 뉴스를 보도하면서 1970년대 닉슨이 마오쩌둥을 찾아간 것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X세대의 오바마다운 행동이다. 기가막힌 발상이고 타이밍 또한 좋다. 오바마는 당선 직후부터 내내 ‘경제 살리기’에 골몰했다. 자신의 경기 부양책이 효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반대파를 끌어 들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틈만 나면 공화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하원 외교위원회의 공화당 수장인 로스 렛트넨 의원은 누군가의 장난 전화인줄 알고 무시해 버려서 이야기거리가 되기도 했다. 오바마는 지난해 11월4일 당선직후부터 언론을 통해서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줄기차게 미국의 통합과 단합을 호소했다. 국민과 정직하게 소통하고 초당적인 입장을 지키겠다고 했다. 경제위기 극복의 선결 조건은 국민통합이란 인식이 분명했다. 정직하게 국민과 소통하고 당파를 초월해서 통합적인 리더십을 갖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야당(공화당) 의원들에게 자신의 진정(진심과 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주당이 절대 다수라고 반대하는 야당을 묵살하는 방식으론 난국 타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설득과 타협을 결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1일 첫 출근에선 간단한 기자회견 후에 집무실의 문을 걸어 잠궜다. 하원세출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공화당 의원들부터 간곡하게 설득을 했다. 회의 첫날 하원세출위원회는 정부의 경기부양특별법안을 통과시켰다. 상원에선 클린턴재단의 돈 문제를 거론해서 지연시키던 힐러리 클린턴의 국무장관 임명 동의안도 통과시켰다. 오바마의 초당적인 리더십이 의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미국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있다. 어려운 상황만큼 새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가 크다. 냉정하게는 기대만큼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오바마 대통령의 냉정한 현실 인식을 확인할 때마다 안도는 하지만, 여하튼 분명한 것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성공하는 일은 유색인종들에겐 자자손손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다.

2009.01.23. 21:38

[김동석이 보는 미국정치] 연방의회 개원식을 다녀와서

워싱턴 연방의회는 총 535명의 연방의원들로 구성돼 있다. 하원 임기에 맞춰 2년마다 회기수를 정하고 있다. 민주당은 2006년 중간 선거를 이기고 다수당의 지위를 확보해 의회를 주도했다. 2007년과 2008년 2년이 110회기였다. 그러한 의회 주도권의 변화 시기를 적절하게 파고들어서 미주동포가 획득한 성과가 바로 한미간 비자면제 프로그램이었고 역사적인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었다. 이 두가지 과제를 염두에 두고 유권자센터 직원을 동원, 2007년 1월3일 110회기 개원식에 참가했었다. 비자면제프로그램의 핵심의원인 오하이오주 보이니비치 상원의원도, 위안부결의안을 주도해 인권 이슈의 영웅이 된 일본계의 마이크 혼다도, 의회 안에서 가까운 친구관계를 맺게 된 아시아태평양환경소위원장 애니 팔레오바마네가의원도 바로 그 의회 개원식에서 처음으로 만났었다. 필자는 당시 30달러짜리 의회수첩을 구입, 의원실을 돌아다니면서 상임위별로 의원들의 이름자와 얼굴을 익히고 직접 인사를 나누느라 이틀 동안 전쟁을 치렀다. 이렇게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동안 의회안에서 뉴욕에서 온 사람들도 만났다. 힐러리 클린턴, 게리 애커맨 의원 초청으로 온 뉴욕의 한인들은 우리가 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묻기도 했었다. 당시 직접 만나려고 했던 13명의 의원들을 모두 만났었다. 110회기에서 당신들과 함께 할 과제가 있으니 관심을 가져 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마이크 혼다 의원은 이 정도에서 우리의 아젠다(위안부결의안)를 눈치챘다고 나중에 술회하기도 했다. “2년마다 있는 의회 개원식 현장에서 의원을 만나야 가장 빠르게 접근이 된다” 란 AIPAC(이스라엘공공정책위원회)의 조언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 지난 6일은 연방의회 111회기의 개원식이었다. 아태소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3일 동안 의회를 방문했다. 비자면제와 위안부결의안으로 우리와 함께 일했던 의원들에게 감사장을 전하면서 111회기 개원을 축하했다. 워싱턴 날씨는 엉망이었지만 그곳은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국 각 지역에서 올라온 다양한 이익단체와 각 인종그룹들이 이리저리 의회안을 누비고 다녔다. 특히 상·하원의 정통 유대인들의 복장은 마치 검은 파도의 물결 같았다. 그들은 각 지역별로 그룹을 만들어 뭔가 준비한 것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몰려 다녔다. AIPAC회원들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난해 12월 27일 가자지구 개전 이후 AIPAC은 지도부가 긴급 상황을 공지하고 전국 리더들을 워싱턴에 집결케 했다. 바로 1월6일 의회 개원식을 겨냥했다는 것이다. 개원식이 있은지 이틀후인 8일 오전 연방상원에서 민주당 대표인 ‘해리 리드’와 공화당 대표인 ‘존 맥코넬’이 동시에 이스라엘 지지 결의안을 발표했다. 과연 AIPAC이었다. 필자는 이틀 동안 9명의 하원의원을 만났다. 지난 110회기 동안 한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협력한 하원의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연방의회 111회기는 완벽한 민주당 권력이다. 오바마권력은 초당적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선언했다. 오바마는 워싱턴 진입을 철저하게 의회 중심으로 꾸리고 있다. 지난 5일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날아온 오바마팀이 가장 먼저 의회를 찾았다. 워싱턴에 도착하자마자 의회를 방문, 여야 지도부와 회동하는 오바마를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가 전면 사진기사로 냈다. 의회 중심으로 민주당 장기집권 플랜을 펼치겠다는 것이 오바마의 의중이다. 새롭게 출범하는 막강한 미국의 권력에 가장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권자들을 통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어느때 보다도 한인유권자들의 역할이 빚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09.01.09. 17:38

[김동석이 보는 미국정치] 오바마와 복음주의

국제대학생선교회(CCC)를 창립하고 총재를 맡았던 빌 브라이트(Bill Bright)는 남부 캘리포니아 출신의 보수적인 사업가였다. 그는 정치적으론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모든 이슈에서 공화당 우파와 의견을 같이 했다. 나중에 세계 최고의 복음 전도자가 된 빌 브라이트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에 집착했다.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기독교의 전세계화를 이루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는 청년 지식인들을 조직해서 미국을 복음화하고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전세계를 기독교화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미국 전역의 대학 캠퍼스에 성경공부 그룹을 만들었고 이를 토대로 전세계 대학을 파고들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김준곤 목사가 학원·민족·세계복음화를 부르짖으며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KCCC)를 조직해 이끌었다. 6.25전쟁때 아내와 부모가 학살당하는 시련을 겪었고 그러한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한다. 김준곤 목사의 한국대학생선교회는 한국대학에서의 기독교 운동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6년 빌 브라이트(Bill Bright)는 보수주의 크리스천들을 정치적으로 규합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는 미국의 도덕적 타락을 크게 염려했고 미국을 회복시키려면 정치권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는데 그것은 곧바로 극보수주의 정치 아젠다를 의미했다. 대권을 꿈꿨던 애리조나 출신 극우정치인인 존 코란(John Conlan)과 함께 정치권력을 목적으로 복음주의 기도회를 개최하면서 셀 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정치권내 종교적 우파를 탄생시키는 최초의 시도가 되었다. 팻 로버트슨의 기독교연맹, 제리 폴웰의 도덕적 다수 같은 강력한 기독교 정치단체가 탄생하기 여러해 전의 일이었다. 빌 브라이트의 이러한 섣부른 시도가 씨가 돼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은 그들이 금과 옥으로 여기는 사회가치 아젠다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권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은 교회와 사회의 중간지대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적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바로 병원과 학교 그리고 미디어 왕국을 건설했다. 워싱턴 정치권력내 공화당 우파와 정치적 보수주의 아젠다를 공유하게 되었다. 미국의 교회가 시장의 자본과 결탁을 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성장세의 미국교회가 사회·정치적인 불평등의 문제에 둔감하게 되었고 빈곤의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한국교회도 덩달아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성령부흥운동·국가조찬기도회 등이 바로 그러한 현상이다. 2008년 대통령선거에서의 또 다른 희망은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가 서서히 변하고 있는 조짐이다. 지난 8월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에 기독교 복음주의 교단내 가장 영향력이 큰 릭 워렌 목사는 자신이 맡고 있는 새들백교회에 양당의 대통령 후보를 초청했다. 기독교 가치 아젠다에 대한 후보들의 정견을 듣는 것이지만 분명히 그것은 건강한 사회, 평화와 공존을 위한 기독교 세력의 변화였다. 기독교 아젠다와 글로벌 이슈가 공통되는 부분을 들고 나온 것이다. 십자군을 전제로 한 정치적 입장이 아니었다. 빈곤과 환경이 주제였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바로 이때에 ‘릭 워렌 목사’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미국의 제 4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도할 사람으로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가 정해졌다. 오바마의 진보성에만 주목하는 좌파측에선 우려의 목소리를 내지만 오바마의 일관된 리더십은 ‘통합’이다. 오바마는 시민사회를 통합해서 위기에 처한 미국을 구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5%도 안되는 부자들의 나라가 아니고 95%의 시민들을 미국사회 중심에 세우겠다는 그의 정치철학이 엿보인다.

2008.12.26. 18:27

[김동석이 보는 미국정치] 오바마의 용인술

2005년 3월, 조지타운 외교학과 앤서니 레이크 교수는 뜻밖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주인공은 이제 막 시카고서 워싱턴으로 올라온 초선 외교위 소속 상원의원이었는데, 한번 만나줄 것을 요청하는 전화였다고 한다. 그는 3년전 누군가의 소개로 전화통화를 한 기억이 있었지만 희미했다. 바로 그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이었다. 오바마가 일리노이에서 연방상원을 꿈꾸고 있을 때부터 브레진스키의 측근이고 클린턴때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조지타운 앤서니 레이크 교수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앤서니 레이크 교수는 가치 외교에 비중을 많이 두지만 아주 실용적인 접근방식을 취했던 베테랑 전문 외교관 출신 교수다. 레이크는 키신저와 함께 미국외교의 쌍벽을 이루는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에게 오바마를 소개했다. 브레진스키가 오바마의 외교적 리더십을 높이 평가, 경선 초기 누구보다도 일찍 오바마를 지지하고 나섰다. 경선 초반에 브레진스키가 오바마를 공개지지한 배경이다. 앤서니 레이크는 오바마 당선자가 유엔대사로 임명한 전 국무부 차관보인 수전 라이스 와 함께 그동안 오바마 캠프내 외교·안보 분야를 총괄해 왔다. 앤서니 레이크는 지난 2년 동안 오바마 캠프에 매일같이 국제사회 현황에 대해서 이메일로 보고서를 냈다. 그동안 오바마가 언급해온 외교문제의 내용은 거의 다 레이크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당이 낳은 역사상 가장 탁월한 외교관으로 손꼽히는 리처드 홀부르크는 만일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되면 국무장관 1순위였다. 경선 초기 힐러리의 지지도가 크게 앞서고 있을때 리처드 홀부르크는 최고의 인물이었다. 독일대사를 지냈고 클린턴 전 대통령때 유엔대사를 역임했으며 1994년 보스니아 인종분규 사건을 무난하게 해결한 경력을 갖고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가장 가까이 두고 아끼는 외교 핵심이다. 뉴욕에 본부가 있는 아시아소사이어티의 이사장이고 중앙일보에도 고정으로 칼럼을 쓰고 있어서 홀부르크란 이름은 우리에게 비교적 낮익다. 오바마측 앤서니 레이크와 힐러리측의 리처드 홀부르크는 민주당 외교 전문가로 오랫동안 경쟁관계를 형성해 왔다. 레이크가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자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경선 초기 힐러리가 지지도에서 한창 앞서 있을 때엔 레이크는 홀부르크에 밀려 선거전에서 이름자도 나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상황은 역전됐다. 오바마가 당의 후보로 확정되자 홀부르크는 오바마 자문단 300인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1일 오바마는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발탁했다. 뉴욕에서 자세를 낮추고 주저앉아 있던 홀부르크는 이튿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워싱턴으로 날아갔다.(이때문에 당시 홀부르크를 만나기 위해 뉴욕을 찾은 한국 정치인들이 바람을 맞았다). 오바마는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하기 위해서 외교라인의 최측근 참모인 앤서니 레이크를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아닌 수석 고문으로 임명했다. 국무장관이 힐러리 클린턴이지만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줄 사람은 그래도 앤서니 레이크 수석 고문이다. 앤서니 레이크는 민주당 인사지만 북한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프리덤하우스의 핵심 3인방 중의 한사람이다. 프리덤 하우스는 북한의 인권문제에 관련, 가장 강경하고 비타협적이다. 프리덤하우스 3인방은 카터 당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클린턴때 CIA국장을 지낸 대표적인 네오콘인 제임스 울시, 그리고 앤서니 레이크다. 레이크의 영향인지 오바마 당선자는 북한의 인권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다. 인권문제에 가장 민감한 북한을 생각하면 오바마시대 북미관계를 크게 낙관할수만은 없다.

2008.12.05. 17:41

[김동석이 보는 미국정치] 오바마의 아이덴티티

2007년 12월6일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맨해튼 할렘을 찾았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하고서 가장 먼저 달려온 곳이다. 그는 1980년대 컬럼비아 대학에 다닐때 이곳에서 정체성을 찾았다. 인종과 빈곤 문제에 화두를 던진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가 대학에 다닐 때 할렘은 125 스트릿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천국이고 한쪽은 지옥이었다. 이유는 단지 흑인과 백인 동네라는 차이었다. 청년시절 ‘실존’에 대한 고민을 신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해 의식을 굳건히 한 곳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백인 동네와 흑인 동네의 차이를 아침 저녁으로 직접 목격하면서 자신의 삶을 공적인 영역에 결합시키겠다고 바로 이곳에서 결심을 했다. 그래서 오바마는 컬럼비아 대학을 떠나 시카고에서, 보스톤에서 그리고 지역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장 그리워했던 곳은 바로 이 맨해튼의 할렘이었다. 오바마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기반은 견고하다. 미국내 흑인 지성인들이 사회적 대우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들 스스로 ‘피 한방울의 법’은 침묵으로 공유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유색인종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백인이 아니다”가 피 한 방울의 법칙이다. 농장주인 백인 남성이 노예인 흑인여성을 수시로 겁탈했다. 그렇게 생산되는 자식은 여지없이 노예로 내몰렸다. 그러한 역사속에서 별난 희생을 다 치르면서 흑인들은 피의 투쟁의 결과로 민권법을 통과 시키고 마침내 투표권을 쟁취했다. 오바마는 대권선언을 하고서 10개월이 지나서야 맨해튼 할렘을 찾았다. 20년만에 찾아온 맨해튼 할렘의 아폴로 극장은 1960년대 흑인문화의 상징이 됐던 곳이다. 말콤 엑스가 뒷골목에서 헤매다가 철든 곳이고 킹 목사가 미국의 본질을 파헤친 곳이기도 했다. 흑인들의 영웅이었던 킹 목사와 말콤 엑스 이후 40년만에 대통령에 출마한 흑인 후보가 아폴로 극장에 나타났다. 말콤 엑스가 흑인들의 분노를 폭팔 시켰던 아폴로 극장의 바로 그 무대에 오바마가 올라섰다. 극장 2층 난간에 입장한 오바마는 민주당 경선을 앞둔 정치 후보자가 아니었다. 흑인 특유의 커다란 몸동작을 하면서 껑충껑충 무대에 뛰어 오르던 오바마는 몸짓과는 달리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의 카리스마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선지자 같은 이미지였다. 그는 흑인사회의 완전한 세대교체를 알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특별한 능력은(주류사회의 특별한 일원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속한 공적인 사회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바마는 자신이 ‘혼혈 흑인’임을 냉정하게 자각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철이든 때라고 했다. 개인이 특출하게 튀어 오르는 길을 거부했고 집단사회의 평균적인 지위상승에 집착했다. 그러한 의지로 그는 삶의 목표를 확고히 했으며 그러한 그의 삶의 목표는 미국이란 거대한 사회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백인 동네에 산다고 한국인이 백인이 될 수는 없다. 어머니가 언챙이라고 밖에 나가서 우리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이 사람이겠는가? 오바마의 자각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흑인이 흑인임을 분명히 했을 때 사람이 됐다는 것을 미국 역사는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난 대선기간 중 오바마에 열광한 한인 2세들은 아직도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 얘기로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다. ‘하버드 법대’(명문대)란 학력을 동포사회 미래에 기꺼이 투자하려는 한인 2세들이 눈앞에 보인다. 그들은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를 롤모델로 삼아 배우게 될 것이다.

2008.11.28. 19:32

[김동석이 보는 미국 정치] 차기정권 핵심 이매뉴얼

1993년 대통령에 취임한 클린턴은 이스라엘의 안정 없이는 백악관에서의 잠자리가 결코 편할 수 없음을 알았다. 걸프전으로 미국에 대한 중동지역의 분노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지해준 유대계의 전폭적인 지지에도 보답해야 했다. 중동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와 협력이 없이는 끝나지 않으리란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클린턴은 유대계로부터 선거자금을 가장 많이 모금해 ‘돈통’이란 별칭을 얻고 있는 ‘램 이매뉴얼’을 호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협상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클린턴은 팔레스타인 소멸을 외치는 로비단체인 ‘AIPAC’이 가장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AIPAC’의 반발을 무마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매뉴얼이었다. 그의 부모는 극우 유대계의 핵심인사였고 ‘AIPAC’의 핵심 간부다. 이렇게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평화협정은 1년도 채 안돼 ‘오슬로 평화협정’이란 빛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 협정은 1993년 9월13일 백악관에서 이스라엘 수상인 이츠하크 라빈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 사이에 체결됐다. 클린턴이 원칙을 선언한 그 유명한 ‘땅과 평화의 교환’이다. 클린턴의 중재로 중동에 평화의 길이 열린 것이 높이 평가돼 아라파트와 라빈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결정하면 성사 시킨다‘라는 전설의 사나이, 이매뉴얼은 1992년초 본격적인 선거전이 시작될 무렵 제발로 클린턴 캠프에 찾아갔다. 그는 클린턴 캠프에서 가장 많은 선거자금을 모금했다. 전국에 있는 유대계의 돈을 거의 싹쓸이 해온 공신이다. 예비경선전에서 클린턴의 강적이었던 폴 송가스는 패배를 인정하면서 이매뉴얼 때문에 졌다고 할 정도였다. 이매뉴얼은 클린턴 대통령 재임시 섹스 스캔들이 터졌을 때 백악관내 참모들을 으름장으로 단속, 탄핵정국을 무난히 모면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보스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의 성격이 한 몫을 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실력은 인정받았지만 평판은 제로였다. 이매뉴얼은 1959년생 돼지띠다. 시카고에서 출생, 노스웨스턴대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대 불타는 정의감에 시카고시 소비자권리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유대계 이민자의 아들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민족의 역사를 통해 유대인의 아들로 자기 역할을 분명히 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을 철저히 보호하는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지론도 폈다. 1985년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이었던 토니 코엘호의 눈에 들어 민주당 선거캠프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시카고 리처드 데일리시장실(이매뉴얼은 거기에서 오바마 부부의 대모격인 발레리 쟈넷과 인연을 맺었다)을 거쳐서 1992년 클린턴 캠프에 합류했다. 1991년 걸프전이 터졌을때 이스라엘 군에 자진입대,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1999년 백악관을 떠나 시카고로 귀향, 2002년 연방하원에 진출했다. 9·11 테러 사태 이후 매 선거 때마다 민주당이 완패하자 민주당 하원 원내 대표인 낸시 펠로시는 초선의 이매뉴엘 의원을 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했다. 이매뉴얼은 2006년 중간선거를 완벽하게 승리로 이끌었고 덕분에 겨우 재선의원임에도 불구하고 당서열 4위인 민주당 간부위원회 의장이 됐다. 필자는 2007년 ‘AIPAC’ 대회에서 그와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아시안이 ‘AIPAC’에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 눈치를 받았다. 나는 그와 악수를 나누던 중 그의 손가락 하나가 반토막인 것을 봤다. 학창시절 아르바이트로 식당에서 일하다 고기 절단 기계에 손가락이 잘못 끼여 잘렸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그는 투지와 의지로 똘똘뭉친 사람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차기 백악관 비서실장에 램 이매뉴얼을 임명했다. 깡마른 작은 체구의 이매뉴얼이 당선자 옆에서 매서운 눈매를 치켜세우고 두 손을 양 허리춤에 올린 사진을 보고서 오바마의 인사에 말들이 많다. 분명한 것은 어려운 난국을 이매뉴얼의 스타일로 풀어 나가겠다는 당선자의 의지이다. 공화당이 몸을 낮추었고 로비스트들이 숨을 죽이고 있다. 이매뉴얼을 넘지 못하면 대통령에게 다가갈 방도가 없을 듯하다.

2008.11.14. 20:22

[김동석의 대선관전평] 오바마 바로 알기

미국에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세계는 지금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고 대통령은 그 중심에 있다. 대통령 당선자를 정확하게 아는 일은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오바마 당선자는 정치계에서 아직은 신인이다. 한국에서는 오바마 인맥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내가 아는 워싱턴의 한 분은 오바마와 가까운 인맥의 절반을 알고 있다며 한국은 걱정할 것 없다고 한다. 이는 오바마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말이다. 이제 흥분에서 벗어나 오바마 당선자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오바마는 지난 3월 오하이오주와 텍사스주 예비경선에서 힐러리에게 패했다. 20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쏟아 부었는데도 대패했다. 뉴햄프셔에서 패한 후 수퍼 화요일에도 ‘박빙승부’가 되면서 경선을 조기에 마무리 하려는 전략에 차질이 생겼었다. 긴급전략회의에서 오바마는 우선, 후보인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의 책임이라고 단정, 침울한 전략팀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오바마는 과묵하지만 부드럽고, 신중하지만 단호하다. 취재기자들에게 오바마의 캠페인 매니저인 데이빗 플라프는 “오바마 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정치인은 없다”고 했다. 참모들과 직원들로부터 가장 존경을 받는 후보였다. 전략회의에서 언제나 가장 조용한 사람은 오바마라고 한다. 그는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의 의견에 더 주목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바마 캠프의 전략회의는 늘 조용하다. 오바마는 고민거리가 있어도 그런 걱정을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그는 쉽게 동요하지 않고 늘 침착을 유지한다고 한다.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 발언의 여파로 인디애나와 노스캐롤라이나 경선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수행기자들이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 물어오자 그는 “이는 실제 상황이고 해결 방법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바마는 핵심참모들에게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다. 이후 오바마의 캠프는 무보수 직원으로 점점 불어났다. 대다수가 당적이 없는 정치권내 고급 인력들이었다. 이러한 자원봉사 고급인력들은 전국의 각 주로 배정 파견되었다. 이것이 오바마의 성품이고 리더십이다. 오바마가 구체적으로 대선전략을 수립, 확정지을 때 가장 큰 고민이 힐러리 클린턴의 안방인 뉴욕의 도시권 공략이었다. 엑슬로드는 “나누어 확보한다”로 결정했다. 우선 뉴욕도시권의 정치세력중 소수계(유색인종권)를 골랐다. 이미 클린턴이 장악한 흑인사회는 별 방법이 없는 듯 보였다. 정치적으로 잠자고 있는 아시아계를 두드렸다. 오바마 캠프의 이러한 전략으로 한인사회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정치 참여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유권자센터에 기회가 왔다. 필자는 중간선거 민주당 후보의 지원 유세차 뉴저지를 방문한 오바마를 만났었다. 그 때가 2006년 10월이었다. 아시아계의 투표 참여율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시안커뮤니티의 현안에 초점이 맞으면 전폭적인 지지가 있음을 애써 알렸다. 그의 보좌관은 “오바마 캠페인은 일반 시민사회의 정치참여 운동 ”이라고 했다. 웹사이트에 의견을 보내면 반응할 것이라고 했다. 캠페인의 핵심 내용은 “돈 정치를 청산한다”였다. 오바마 의원은 커뮤니티 활동을 왕성히 했다. 시민사회의 상층부(오피니언 리더)를 통해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힐러리 안방을 깰수 있는 전략은 바닥을 훑는 것이었다. 서민층이 들썩거리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캠프 본부에 부지런히 의견을 냈다. 인도네시아와 하와이에서 살았았던 오바마와 아시아와의 인연은 깊다. 지난 2월12일 포토맥 프라이머리를 하루 앞두고 열린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오바마 의원은 처음으로 한국관련 발언을 했다. 그는 의회에 자신의 발언을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요청을 하면서 “한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200만 이상의 한국계 미국인과 10만여 한국내 미국시민들이다 ” 라고 언급했다. 풀뿌리 단체의 의견을 직접 수렴해서 소신있게 발언한 것이다. 오바마는 참모들로부터 민심에 관한 의견을 가장 중요하게 듣는다. 각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풀뿌리 사회운동 단체들의 의견이 들어오면 직접 일일이 챙긴다. 도시빈곤, 가정폭력, 청소년선도, 정치참여 등 비영리 기관들을 사회의 주축으로 여긴다. 그 자신이 커뮤니티 활동가 출신이기 때문이다. 풀뿌리의 의견에 신중했기 때문에 시민들의 요구에 정확하게 부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오바마는 전략팀에게 캠페인(선거운동)이라 하지말고 무브먼트(사회운동)라 하라고 했다. 오바마 권력의 작동방식은 철저하게 밑으로부터 출발한다. 핵심측근과의 인맥을 통하는 방식은 오바마가 일찌감치 유세에서 비판한 ‘워싱턴의 오염물’이다.

2008.11.07. 21:03

[김동석의 대선관전평] 빠짐없이 투표하자

미국은 2008년 역사에 최초 여성 부통령을 기록할 것인가, 아니면 최초 흑인 대통령 선출을 적어 넣을 것인가. 어느쪽이 승자가 되든 11월4일은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 대대적인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수정과 보완으로 현 계층을 안정적으로 고정할 것인가의 선택이기도 하다. 대통령 선거전 장장 20개월 대장정의 결말이 날 때가 됐다. 흐름의 방향에 대한 소신있는 판단이 대세론에 영합하는 것에 비해서 훨씬 수준 높은 선택임엔 분명하다. 단 양측의 입장과 정책을 명확하게 파악 할 때의 일이다. 올바른 선택이 아니면 오히려 기권을 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튼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에 왔다. 정치참여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는 ‘선거’다. 선거를 통해 의견을 내고 선거를 통해 평가를 한다. 한표, 한표를 쪼개어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거를 통해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선거가 노예제도를 철폐했고 선거가 인종주의를 징치했다. 선거가 참혹한 군사독재를 몰아내기도 했다. 그래서 시민에게 참정권은 피의 댓가이다. 특별히 소수계의 참정권리는 흑인들의 피어린 투쟁의 산물이다. 바로 그 참정권으로 미국의 유권자들이 21세기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고 있다. 역사발전의 문턱에서 바로 우리가 그 주인공이다. 올바로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역사적 책임을 갖고 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동시에 어설픈 지식으로 흑백논리의 잣대를 들이대지도 말아야 한다. 법적으로 동성결혼을 금지하자는 공화당측의 주장에 반대한다고 해서 민주당이 동성결혼을 장려하는 입장은 절대로 아니다. 민주당이 빈곤문제를 확대, 부각시키고 서민보호를 강조한다고 공화당은 빈곤문제에 무관심하고 부자들만을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똑같이 사회 안전을 위해서 민주당은 총기를 규제하자는 주장이고, 공화당은 총기를 허용하자는 입장이다. 그동안 극단주의가 팽배돼 왔지만 지금 우리가 맞이한 이 2008년 대통령 선거는 그야말로 시회발전의 흐름을 결정하는 일이다. 개별적인 신앙이나 이념의 잣대에 집착하기 보다는 나눔과 공존의 차원에서 이슈와 정책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정치는 현실이다. 유권자는 신의 나라를 이끌어나갈 종교적 차원의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고 시민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고 사회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을 도모할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다. 한인 유권자들에게 지독한 인종적 편견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미국의 지성인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은 소수계 유색인종 그룹이 이제는 미국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는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박혀있는 치졸한 백인 주도주의란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것이다. 2007년초, 버지니아 공대의 조승희 총기사건 때에 미국사회가 한인커뮤니티에 보여준 성숙한 대응과 반응을 숙지하면서 선거에 임해야 한다. 바로 우리가 그러한 성숙한 시민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건국을 위해서 독립전쟁을 치렀고 , 노예해방을 위해서 남북전쟁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사회평등의 일보 진전을 위해 선거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미국이 갖고 있는 숨기고 싶은 현실인 갖가지 차별, 인종차별을 포함한 ‘소수계 차별’이란 콤플렉스에서 지금 미국은 용기있게 탈출을 시도하는 중이다. 바로 이번 선거가 그러한 전쟁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선거전에 전 세계인들의 관심과 시선이 쏠려있다. 우리가 바로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역사발전의 문턱에서 우리가 직접 선택을 하는 일이다. 11월4일 한인 유권자들은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하자.

2008.10.31. 20:44

[김동석의 대선관전평] 변화를 갈망하는 미국인들

2003년, 1월 조지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대량살상무기의 은닉처인 이라크를 무장해제 시켜야 국제사회가 테러로부터 안전을 꾀할 수 있다는 논리를 유포시켜 왔지만 국제사회를 설득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서 유엔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파월 장관에게 유엔의 동의가 없는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파월장관은 명분 없는 전쟁의 무모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가장 반대했던 나라는 유럽의 프랑스다. 프랑스 외무장관 도미니크 빌팽은 뉴욕의 유엔본부로 날아와서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맞섰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빌팽의 연설에 유엔 회원국들이 박수를 보내자 존 네그로폰테 미국 유엔대사가 회의장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모습이 TV를 통해 전세계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미국안에서 반프랑스 여론이 조성되었다. 워싱턴 DC의 의회내 구내식당에서 파는 감자 튀김의 이름이 ‘프렌치(프랑스)프라이’에서 ‘프리덤프라이’로 바뀐 것이 바로 이때이기도 하다. 파월장관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군인출신인 파월 장관은 전쟁을 정치처럼 여기는 정치인들 틈바구니에서 ‘승리를 위한 신중론’을 혼자서 고집하며 거의 왕따 수준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마침내 미국은 유엔의 동의없이 전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백악관의 국가안보 상황실에선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럼스팰드 국방장관, 그리고 풀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이 개전일에 대한 논의로 머리를 맞대었다. 논의의 가장 중심역할을 해야 할 파월 국무부장관의 모습은 없었다. 그해 3월20일 오전 11시 30분, 수도 바그다드를 정밀 폭격하는 것으로 이라크 침공을 개시했다. 전쟁은 국제적인 지지를 받지도 못했고 전후 통치에 대한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라크를 침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난관에 부딛혔다. 외교, 군사, 정치적 난관이었다. 유엔 안보리 이사국인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미국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주도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미국은 부랴부랴 국제적인 지지가 있음을 과시해야했다. 세계 각국에 온갖 압력을 가했다. 미국은 아프리카 중소국가를 중심으로 46개국의 지지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46개 명단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의 이름도 외우기 어려운 작은 나라들이다. 전례없는 외교적 실패였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방법에 별 비중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심지어 이라크 침공직전 럼스팰드 국방장관은 영국이 멈칫거리자 “영국이 곤란하면 미국 혼자서 공격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럼스팰드 국방장관을 위시한 네오콘 전략가들은 이라크 점령이 예상보다 쉽게 성공하자 파월 국무장관을 비롯한 온건파의 말을 듣고 이라크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간 것이 잘못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성토하며 국무부의 전면적인 개편을 주장하기도 했다. 바그다드에서 후세인의 거대한 동상이 쓰러진 4월 하순, 럼스팰드 국방장관이 워싱턴 외교가에서 주최한 이라크 점령 축하 파티에는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 더글러스 파이 국방차관,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 영국대사 등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신중론을 주장하면서 침공에 소극적이었던 파월 국무장관은 초대받지도 못했다. 국무부쪽은 “그런 파티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라고 했다. 두달 후인 5월1일 부시 대통령은 미국 군함위에서 행한 승리연설에서 “병사들은 가장 빠른 속도로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미국 육군의 기술과 힘을 세계에 보여줬다”라고 표현했다. ‘전쟁승리’의 분위기를 만들고 그런 여세를 몰아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듬해인 200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 후 승리를 선언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아군의 피해는 늘어만 갔고 전쟁비용은 눈덩이 처럼 불어났다. 전비를 충당하느라 국가 재정은 고갈 되었다. 국제사회에서의 도덕적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미국민은 지난 2006년 중간 선거를 통해 잘못된 전쟁, 실패한 정부로 판결을 내렸다. 전쟁을 주장했던 강경파 네오콘들이 슬슴슬금 어느새 워싱턴에서 사라졌다. 부시정부의 전쟁에 동조했던 공화당내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부시와의 거리두기에 여념이 없다. 공화당내 가장 신망이 높은 지도자인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상대당 후보인 ‘버락 오바마’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의 성품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치철새 운운하지만 그는 매케인이 주장한 그야말로 국가우선주의(Country First)에 입각해서 그렇게 판단을 했다고 했다. 힘의 오만과 횡포는 끝내 망하고 만다는 사실이 국가차원에서도 이렇게 빨리 입증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2008년 대선을 통해서 엄청난 변화가 예고 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외교정책이 그럴 것이다.

2008.10.24. 22:22

[김동석의 대선관전평] 보름 앞으로 다가온 대선

9월초 전당대회와 페일린 효과로 지지율을 끌어 올렸던 존 매케인 후보측이 요즘 당황하고 있다. 월가의 금융위기로 거대 투자은행들이 스러졌고 그 불똥이 매케인 진영으로 튀었다. 부시 권력의 책임론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1980년 레이건 이후 공화당 권력과 월스트릿의 투기꾼들이 짜고 친 고스톱을 메인스트릿의 절대 다수 유권자(서민층)가 눈치를 챘기 때문이다. 경제 문제만 언급되면 오바마의 지지율이 오르는 현상이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맨해튼의 금융시장을 살리지 못하면 함께 죽어야 하는 공동운명체인 유럽연합과 캐나다, 일본, 중국까지도 미국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국제사회가 동시에 금리를 인하하는 것은 역사에 없던 일이다. 글로벌 대처 효과로 지난 13일 월요일엔 다우지수가 급등하면서 잠깐의 회복세를 보였다. 매케인측의 지지율도 순식간에 올랐다. 마지막 후보 토론회였던 지난 수요일 다우존스가 다시 폭락했다. 오바마가 지지율의 격차를 10% 이상 벌리면서 앞질렀다. ‘오바마 대세론’이란 용어가 공중파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후보 토론회가 열렸고 매케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토론에 임했지만 판세에 영향을 줄만한 히트는 치지 못했다. 선거 보름을 남겨두고 매케인측은 이대로 주저앉는가, 아니면 마지막 홈런을 위한 안타거리를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절박한 상황에 빠졌다. 매케인 캠프의 수석 보좌관중에 2004년 부시-체니 진영에서 칼 로브와 함께 실력을 발휘했던 30대의 스티브 슈미트가 있다. 네거티브의 대가이지만 전혀 티를 안내는 꾀돌이로 소문난 전문가다. 미디어 요술사로 소문난 찰리 블랙, 그리고 오바마측에서 가장 신경를 곤두세우고 있는 플로이드 브라운이 있다. 브라운은 정치 컨설턴트계의 가장 경험많은 인신공격 전문가이다. 1988년 대선 당시 인종문제와 범죄에 대한 유권자의 공포를 이용해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를 낙마시킨 악명높은 ‘윌리 호튼’ 광고를 제작한 장본인이다. 지난주 오바마가 과격한 테러 단체의 회원과 깊이 연루돼 있다는 비방성 소문이 스윙 스테이트인 오하이오에 퍼졌다. 플로이드 브라운의 작품이다. 공산주의 과격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의 회원이었던 ‘빌 아이어스’와 오바마를 연결시킨 장본인이 바로 브라운이었던 것이다. 사실 빌 아이어스(Bill Ayers)는 현재 시카고대학 교수이고 오바마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같은 학교 학부모다. 바로 그것을 엮어 낸 것이다. 매케인 캠프에는 플로이드 브라운을 능가하는 네가티브 전문가가 몇 명 더 있다. 과연 매케인이 이들 인신공격 전문가들의 네가티브 시도를 막아 낼 의지가 있겠는가가 관건이다. 전당대회 직후 사석에서 매케인은 취재기자들과의 담소 도중에 “대선운동에서 항상 발언권을 가지려는 다양한 외곽조직의 ‘심판자’ 역할을 자임하진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적극적 네거티브 의지라고 해석해도 될 발언이다. 매케인측은 점점 네거티브 유혹에 빠져들고 있다. 네거티브(인신공격과 비방캠페인)는 지지율에 밀리고 있는 후보가 한방에 앞지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아젠다는 가장 민감한 ‘인종문제’다. 마지막 후보토론회 이후 소위 브래들리효과(breadley effect)란 언급이 미디어에서 급증했다. 브래들리 효과란 백인유권자가 유색인종 후보를 “지지는 하지만 찍지는 않는다”란 소위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1982년 캘리포니아아 주지사에 출마했던 흑인 톰 브래들리 LA시장이 선거 직전까지 지지율에서 크게 앞섰는데 정작 개표 결과 떨어진 것을 가르켜 선거용어로 그렇게 말한다). 매케인 진영에 포진된 네거티브 고수들이 그냥 있을리 없다는 것이다. 오바마측에선 전국적으론 네거티브를 무시할 것이고 스윙스테이트에선 신속하게 받아 친다는 전략이다. 대통령 선거 보름을 남겨둔 시점에서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2008.10.1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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