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쥐 들끓던 참호, 폐허였던 서울…세계적 도시로"

Los Angeles

2025.10.28 21:43 2025.10.29 10:43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91세 참전 용사 로이 히버트
열아홉살때 한국전 파병 통보
경기도 연천군서 중공군과 전투
"한국 젊은이들 자부심 가져야"
한국전쟁 참전용사 로이 히버트(왼쪽)가 지난 25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주한미군전우회(KDVA) 연례 총회에 아내 바버라, 아들 앤드루, 딸 리사, 사위 토니 리와 함께 참석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로이 히버트(왼쪽)가 지난 25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주한미군전우회(KDVA) 연례 총회에 아내 바버라, 아들 앤드루, 딸 리사, 사위 토니 리와 함께 참석했다.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든 앳된 청년이 어느덧 아흔이 됐다. 
 
로이 히버트(91)는 1952년 9월부터 1953년 9월까지 1년 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영국 육군 킹스 리버풀 연대 소속으로,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판부리 지역의 해발 656피트 고지인 187고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지난 25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주한미군전우회(KDVA) 제4회 연례 총회에서 그를 만나, 한국전 참전 당시의 경험과 세월이 흐른 뒤 달라진 한국의 모습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파병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은.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1952년 6월 베를린에서 파병 명령을 받았다. 당시 우리 연대는 독일 점령지 복구 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한국 파병 통보 후 영국으로 복귀해 몇 주간 훈련과 휴가를 보냈고, 리버풀에서 배를 타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한국 상황을 알고 있었나.
“베를린에 있을 때부터 전황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의 남침을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규정하며 유엔에 지원을 요청한 건 당시 큰 뉴스였다. 이미 영국의 글로스터 연대, 왕립 노섬벌랜드 퓨질리어 연대, 블랙워치 연대 등이 파병돼 있었다. 특히 글로스터 연대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도착 후 첫인상은.
“1952년 9월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정신이 없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낡은 열차에 올라 9~10시간 정도 북쪽으로 이동했다. 기차 안에서 실탄을 받았고, ‘이제 진짜 전선으로 가는구나’ 실감했다. 이후 미군 트럭으로 2~3시간을 더 이동하고, 마지막엔 걸어서 187고지에 도착해 호주 왕립연대 3대대와 교대했다.”
 
당시 환경은.
“참호와 벙커는 진흙투성이에 쥐가 들끓었다. 중공군 진지와 거리는 불과 0.75마일 밖에 안됐다. 도착 다음 날 그들이 확성기로 ‘킹스 연대 여러분, 환영합니다’라고 영어 방송을 했다. 보안을 위해 불빛도 금지됐는데 이미 우리 위치를 파악하고 있던 셈이다.”
 
참호 생활은.
“우린 참호를 ‘후치(hooch)’라 불렀다. 한국인 짐꾼들이 땅을 파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거처였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디젤 램프로 불을 밝혔다. 식사는 처음엔 미군 전투식량을 먹었는데 담배와 휴지가 들어 있을 정도로 잘 구성돼 있었다. 4주쯤 지나 영국군 취사병이 와서 영국 음식을 해줬는데, 정말 형편없었다(웃음).”
 
기억에 남는 전투는.
“187고지는 비교적 조용했지만, 옆의 ‘후크(The Hook)고지’는 격전지였다.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위험한 지형이라 그 이름이 붙었다. 나는 A중대였고, C중대가 그곳을 방어했다. 중공군에게 한때 빼앗겼다가 미 해병대 지원으로 탈환했다.”
 
한국군과 함께 싸운 적은.
“전선에서는 없었다. 다만 한국인 짐꾼 6명이 우리 부대에 배속돼 있었는데, 성실했다. 어느 날 탄약을 옮기라 소리쳤더니 놀라 도망간 일도 있다.”
 
전우를 잃은 적이 있나.
“100여 명으로 구성된 A중대 사상률은 25% 정도였다. 내가 아는 전우 중에도 3명이 전사하고, 중대장이 실종됐다.  2017년 한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실종됐던 중대장의 이름을 실종자 명단에서 봤다.”
 
2017년 한국을 찾았는데.
“한국 정부 초청으로 영연방(영국·호주·캐나다) 참전단의 일원으로 방문했다. 64년 만에 다시 본 한국은 감격스러웠다. 1953년 서울은 폐허였는데 2017년의 서울은 세계적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경제, 문화, 산업 모두 놀라웠다. 음악 수준도 최고다. 특히 임윤찬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다. 잿더미 속에서 일어선 한국의 저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국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말길 바란다. 전쟁의 폐허를 본 사람으로서 지금의 발전이 얼마나 놀라운지 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한국에 남아 계속 노력하길 바란다.”
 
 
☞로이 히버트는
1933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18세 때 영국 육군에 징집됐다. 그는 1951년 독일 베를린에서 2차대전 복구 작업에 투입됐다. 1952년 6월 한국전쟁 파병 통보를 받았다. 히버트는 한국전 이후 영국을 거쳐 1960년 도미했다. 위스키 업체 잭 다니엘스에 입사해 수입 담당 상무까지 올랐다. 지금은 아내 바버라와 함께 오렌지카운티에 살고 있다.

김경준 기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