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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애리조나 연방 편입

애리조나(Arizona)가 1912년 2월14일 미연방의 48번째 주로 편입됐다. 주정부 도시는 피닉스. 1536년 스페인 탐험대가 이 지역을 처음 찾아왔지만 이후 멕시코 영토에 편입된 바 있다. 미국은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힐라강 이북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1853년에는 '개즈던 매입'에 의해 힐라강 남쪽도 구입해 주전체가 미국령에 속하게 됐다. 주의 이름은 파파고 인디언의 말인 '아리조낙(작은 샘)'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목화 양상추 옥수수 등의 농업이 발달했고 구리는 미 전체 생산량의 50%를 차지한다. 한편 1893년 같은 날 하와이가 연방정부의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2009.02.13. 18:36

[오늘은…]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 USS노틸러스가 1955년 2월7일 처음으로 항해에 들어갔다. 길이 323피트 배수량 3180톤의 이 잠수함은 제너럴 일렉트릭사에서 건조했다. 전지동력을 이용한 이전 잠수함들은 전지 충전을 위해 주기적으로 해면 위로 부상해야 했지만 노틸러스는 가압수형 원자로에서 만들어진 증기로 터빈을 돌려 장기간 잠수가 가능했다. 노틸러스는 1958년 8월 처음으로 해면이 언 바다 속을 통해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잠수항해로 횡단하는 데 성공했고 항해 도중에 북극점을 통과하기도 했다. '노틸러스'는 프랑스 소설가 줄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잠수함의 이름에서 따왔다.

2009.02.06. 19:46

[오늘은···] 레이건 전 대통령 탄생

1911년 2월6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일리노이주 탐피코에서 태어났다. 레이건은 1981~89년 대통령 재직시 소련과의 ‘무한 군비경쟁’으로 소련의 경제력을 파탄내 결국 소련 및 동구권의 해체를 가져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 그의 재임기간중 미국의 재정적자와 경상적자 등 쌍둥이적자가 급증해, 미국경제의 기반을 결정적으로 악화시켰고 결국 그의 후임자인 조지 부시대통령이 단임밖에 하지 못하게 만든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임기간중 최대 이익을 올리는 데 성공했던, 공화당의 근간을 이루는 군수자본 등은 지금도 레이건을 ‘역대 최고대통령’으로 꼽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2004년 6월5일 캘리포니아 자택에서 오후 2시께 9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09.02.05. 18:50

[오늘은···] 하이램 맥심 출생

자동소총을 처음으로 개발한 하이램 스티븐스 맥심이 1840년 2월5일 태어났다. 메인주에서 출생한 맥심은 1884년에 반자동 소총에서 일보 개량된 완전 자동소총을 발명했다. 자동소총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맥심 건’으로 명명됐다. 미국에 살던 맥심은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1901년에는 빅토리아 영국 여왕으로 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총을 발명한 그의 공적을 영국 왕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맥심은 총외에도 비행기, 폭탄 등의 각종 무기류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이 분야에서 많은 특허를 등록했다. 이 과정에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과 특허 분쟁에 휘말려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26년 11월24일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2009.02.04. 19:30

[오늘은···] 얄타회담

얄타회담이 1945년 2월4일 시작됐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등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 얄타에서 만난 이 회담은 전후처리에 대한 기본 방침을 협의했다. 7일간 계속된 이 회담에서 전후 독일의 배상 및 분할에 관한 최종안이 합의됐고 국제연합의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도 있었다. 또한 이 회담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전투에 소련군을 파견해 줄 것을 요구했고 그 대가로 러일전쟁에 패해 제정 러시아가 일본에 양도한 땅을 소련에게 다시 주는 것을 제안했다. 한국과 관련해 5년 이내의 기간으로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비공식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2009.02.03. 20:18

[오늘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 사망

미국의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1924년 2월3일 사망했다. 1856년 버지니아주 스탠턴에서 출생한 윌슨은 모교였던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10년 뉴욕주 주지사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선에 도전해 승리했으며 이후 1916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중립을 지켰으나 참전으로 태도를 바꿔 전후 미국이 세계적인 지도력을 갖는 발판을 구축했다. 윌슨은 파리평화회의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창하기도 했다. 그의 민족자결주의는 전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재선 임기를 마친 후 정계를 은퇴한 윌슨은 투병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2009.02.02. 18:32

[오늘은···] 미국·멕시코 강화조약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848년 2월2일 미.멕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미국은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서부지역을 1만5000만달러에 구입했다. 전쟁 전 미국은 멕시코 영토였던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를 사려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1846년 전쟁을 선포 뉴멕시코를 점령하고 캘리포니아에서는 정착민들이 멕시코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베라 크루즈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과를 올린 미국은 멕시코시티 입성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전쟁에 패한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지금의 뉴멕시코 유타 네바다 애리조나와 콜로라도 등을 헐값에 미국에 넘겨주었다. 미국이 서부의 광활한 땅을 손에 넣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2009.02.01. 19:27

[오늘은···] 리, 남군 총사령관 임명

1865년 로버트 E. 리 장군이 남군(컨페더릿 아미)의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미국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한 남부 11개주는 리 장군이 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며 사령관직을 맡겼다. 그러나 전세는 점차 우세한 전력을 지닌 북군쪽으로 기울어 결국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을 선언하게 된다. 버지니아주 애포머톡스에서 열렸던 항복 조인식에서 그랜트 장군은 육군사관학교(웨스트 포인트) 선배인 리 장군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시했다. 패장 리 장군은 비록 항복을 인정하는 자리였지만 조금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채 명장의 품위를 지켰다. 두 장군은 항복 조인식에서 선후배의 우정을 나누었으나 리 장군에게는 패장의 멍에가 그랜트 장군에게는 후에 대통령직을 안겨준 승장의 영광이 교차했다.

2009.01.30. 20:36

[오늘은···] 마하트마 간디 피살

1948년 1월30일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가 78세의 나이에 총격 피살됐다. 간디는 1922년 12월 인도의 시성 타고르로 부터 '마하트마(Mahatma:위대한 영혼)'라고 칭송한 시를 받고 마하트마 간디라고 불리게 됐다. 간디는 본인 스스로 열성 힌두교도였으나 독립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를 끝까지 반대하면서 필요하다면 단일 인도의 통치권을 이슬람 연맹에 줘야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과격 힌두교도들은 간디의 이같은 태도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1947년 7월 인도는 힌두-이슬람 분란 속에서 분할 독립했다. 하지만 간디는 결국 독립을 쟁취한지 불과 5개월만인 1948년 1월30일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다 열성 힌두교도가 쏜 총탄 3발을 맞고 사망했다.

2009.01.29. 21:10

[오늘은···] 켄자스주 연방 편입

중부의 캔자스주가 1861년 1월29일 미연방의 34번째 주로 편입됐다. 주도는 토피카 최대도시는 위치타다. 16세기중엽 스페인 탐험대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고 프랑스의 지배를 거쳐 1803년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미국 영토가 됐다. 캔자스의 뜻은 이곳에 살던 인디언 부족의 언어로 '남풍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농토가 비옥해 밀 생산량이 미국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서부의 대평원에서는 축산업이 활발하다. 공업으로는 항공기 철도차량 타이어 식품가공업 등이 발달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농장주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공업주로 변모했다. 캔자스주 출신의 주요 인물로는 제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있다.

2009.01.28. 20:54

[오늘은···] 이스탄불 국민헌장 채택

88년전 이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유럽 열강에 의해 국토가 갈라질 위기에 처한 터키 국민이 이스탄불 의회를 통해 새 국민헌장을 제정 위기에서 벗어났다. 세계대전후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터키의 국토를 분할해 자국 이익을 도모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케말 아타튀르크를 중심으로 터키의 조국 해방군은 이미 에르주룸.시바스 회의에서 터키 영토의 보전과 국민 주권.국민의회 소집 등의 정책을 내놓았다. 1919년 조국 해방군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탄불에서 소집된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고 이에 힘입어 이듬해인 1920년 의회로 하여금 결의된 정책을 '국민헌장'으로 채택케 하며 반전에 성공했다. 아시아와 유럽의 한가운데 자리잡은채 기독교와 회교 문화를 다양하게 포용한 터키는 현재 유럽연합(EU) 회원으로의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2009.01.27. 17:47

[오늘은···] 모차르트 탄생

1756년 오늘 불멸의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모차르트의 부모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다섯을 잃고 모차르트와 난네를 만이 살아남았다. 영아 사망률이 60%에 달하던 시절에 모차르트는 가까스로 생존했다. 모차르트는 아홉 살 때 다시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세 살 때 클라비코드를 연주했고 다섯 살 때는 첫 작곡을 선보이는 등 모차르트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그는 '마적'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등 불후의 걸작을 비롯해 600편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791년 12월 5일 빈에서 35세의 짧은 삶을 마쳤다.

2009.01.26. 17:51

[오늘은…] 맥아더 장군 출생

1880년 1월26일 아칸소주 리틀락의 한 병영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출생했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던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던 맥아더는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13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미역사상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에 오르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연합군을 지휘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후 중공과의 전쟁 주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의 저지로 무산되면서 군에서 해임됐다. 대통령을 꿈꾸기도 했으나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해 포기해야 했다. 그가 남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말과 함께 군인의 전형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2009.01.25. 19:09

[오늘은···] 윈스턴 처칠 사망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1965년 1월 24일 사망했다. 1874년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쿠바전쟁과 보어전쟁에 참전했다. 2차 세계대전동안 영국의 수상으로 재임하며 카이로 선언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에서 활약했다. 1953년에 발표한 '2차세계대던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성을 갖췄으며 재치있는 유머감각으로도 유명했다. 처칠이 80세를 넘겨 한 파티에 참석했을 때 한 여성이 "총리님 남대문이 열렸네요"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처칠은 "해결하지 않아도 문제될 것이 없어요. 이미 '죽은 새'는 새장 문이 열렸다고 해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까요"라고 답해 주위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2009.01.23. 18:52

[오늘은···] 자니 카슨 타계

토크쇼의 황제 자니 카슨이 2005년 1월23일 79세의 나이로 가족들에 둘러 싸인 가운데 지병인 폐기종으로 숨졌다. 자니 카슨은 1992년 5월 단골 초대손님이었던 제이 리노에게 '투나잇 쇼'를 물려주고 은퇴하기까지 거의 30년 동안 NBC 간판프로그램을 이끌어 경쟁사 CBS를 압도했다. 한때 500만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아 TV출연자 가운데 사상최고 '몸값'을 기록하기도 했다. 카슨은 1987년 TV 명예의 전당에 헌정됐으며 은퇴하던 1992년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수상하는 등 방송인으로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사생활에서는 굴곡이 심해 무려 4번이나 결혼하고 세차례 이혼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특히 1991년에는 세 아들 가운데 하나인 리키(39)를 자동차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기도 했다.

2009.01.22. 18:51

[오늘은···] 낙태합헌 판결

텍사주의 제인 로(가명)라는 여성이 임신 3개월 이후의 낙태를 불허하는 주법이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상대는 당시 텍사스주 검찰총장이었던 헨리 웨이드였다.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케이스에 대법원 판사가 '낙태합법 판결'을 내렸다. 후에 '로 대 웨이드'로 유명해진 판결이 내려진 날이 바로 1973년 1월22일이었다. 텍사스주는 산모의 생명에 위험을 주는 임신을 제외하고는 낙태를 불허했는데 이 판결로 낙태가 가능하게 됐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각 주정부들이 경쟁적으로 낙태를 금지하는 입법을 만들었다. 1950년대 들어서는 낙태를 적발하는 팀을 구성해 가동하기도 했다. '제인 로'라는 가명으로 알려졌던 여성은 후에 노마 맥코비로 밝혀졌다.

2009.01.21. 17:23

[오늘은···] 혁명가 레닌 사망

러시아의 소비에트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1924년 사망했다. 심비르스크에서 출생한 레닌의 본명은 울리야노프며 150개 정도의 가명을 사용했다. 볼셰비키당(소련 공산당)의 창설자로서 러시아 10월혁명을 지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국가(소비에트 연방)를 수립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독점자본주의의 출현이나 사회주의의 건설과 같은 새로운 역사적 조건 아래서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이론적 공적이 커 마르크스.엥겔스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오늘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하다. 형 알렉산드르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가한 죄로 처형되었으며 이것이 레닌의 사회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7년 10월혁명을 성공시켜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결성에 성공했다. 1922년부터 뇌 발작을 여러 차례 경험한 뒤 2년뒤 모스크바 교외의 고리키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2009.01.20. 17:42

[오늘은···] 선박왕 오나시스 출생

1906년 1월20일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가 터키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담배상인의 아들인 오나시스는 그리스와 터키가 전쟁을 벌이면서 무일푼 난민이 됐다. 17세에 단돈 63달러를 들고 아르헨티나로 떠나 전화교환수로 일하며 얻게 된 사업정보로 그리스산 담배를 수입 24세엔 백만장자가 됐다. 1931년 중고선박을 사들여 해운업에 뛰어들었고 2차대전 때 군수물자 수송 군수송선 불하 등 사업수완을 발휘 거액을 벌었다.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수송 독점계약을 맺어 세계 해운업계와 석유업계에 군림했다.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와 동거중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과 재혼했으며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 에바 페론과도 염문을 뿌리는 등 1975년 사망까지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2009.01.19. 19:08

[오늘은···] 에드가 앨런 포 출생

시인이면서 단편소설 작가였던 에드가 앨런 포가 1809년 1월19일 태어났다. 보스턴에서 출생한 포는 3살 때 부모가 잃고 버지니아의 부유한 사업가 집으로 입양됐다. 1839년 소설 '어셔가의 몰락'으로 문단에 이름이 알려지지 시작했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검은 고양이' '황금벌레' '모르그가의 살인' 등이 있고 시로는 '애너벨 리'가 유명하다. 14세때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10대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하는 등 40세의 짧은 인생이 기행의 연속이었다. 알코올 중독과 정신착란 등의 불안한 심리상태에서 죽음 공포 우울 괴기 등의 분위기를 낭만적인 필치로 작품에 담았다. 도덕성을 강조한 이전 문학에 반대해 포는 '심미'를 강조했으며 이점이 바로 근대문학에 그가 공헌한 부분이다

2009.01.18. 20:30

[오늘은···] 알 카포네 출생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1899년 1월17일 태어났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27살에 시카고 제1의 갱스터 자리에 오른 알 카포네는 금주령 시대 밀주와 매춘 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가 하면 자신의 라이벌을 잔인하게 제거한다. 그런 와중에도 거리의 실업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독지가로서의 이름을 알리는 등 이중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1929년 라이벌을 제거하기 위해 저지른 발렌타인데이 학살극을 계기로 시카고 검찰이 알 카포네를 사회의 공적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정에 세우기 위한 수사를 시작했다. 결국 알 카포네는 11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는데 그에게 붙여진 죄목은 단지 탈세 뿐. 알 카포네는 결국 알카트레즈 감옥과 병원을 오가다 사망하고 만다. 알 카포네의 드라마틱한 삶은 1987년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영화 '언터쳐블'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09.01.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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