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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유튜브 끄니, 꽃이 보였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왔다.  온 천지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세상은 시끄럽고 요동치건만 한 편에선 자연의 질서 속에 생명력이 넘친다. 햇살이 부드럽고 공기 속에 온기와 생기가 충만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좋은 봄날에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스마트폰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얼마 전까지도 잘 보지 않던 유튜브였는데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이 요란해지면서 자꾸 클릭하게 됐다. 보다 보면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특히 숏폼 영상은 짧고 자극적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안다. 보다 보면 관련된 다음 영상이 자동으로 나오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보게 된다. 자기 전에 보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잤는데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또 찾게 된다. 중독성이 있어 끊기가 매우 힘들다.   처음엔 정보가 궁금해서였지만 이젠 그냥 습관이 됐다. 생각해보니 그 중심엔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 정당이 있었다. 마음을 쏟는 만큼, 그들이 공격당하면 나도 같이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더 자주 찾아보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열을 올린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과 미국의 뉴스 속으로 빠져드니, 어느새 마음이 지치고 만다. 점점 나 자신을 잃어가는 기분이다.   유튜브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막상 보다보면 내용이 부풀려졌거나, 심지어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제목이 호기심 나서 보면 내용은 딴판이다. 조회 수만 올리면 돈이 되니까, 사실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제목을 붙인다. 그걸 잘 알면서도 끌려가는 내가 바보다. 인터넷 중독에서 벗어나야 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와이파이 왜 꺼?”라며 친모에 흉기를 들이댄 10대 세 딸에 관한 뉴스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었다. 보도에 따르면 14, 15, 16세의 세 자매는 엄마가 와이파이를 차단하자 인터넷에 접속이 안된데 격분해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엄마를 위협했다. 엄마가 도망가자 세 자매는 뒤쫓아가 찌르려고 했으며, 자매 중 한 명은 벽돌을 던져 엄마를 맞혔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할머니도 다쳤다.     다행히 자매의 엄마와 할머니는 심각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고 한다. 인터넷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20대 여성이 자기의 반려견을 창밖에 던져 죽인 아버지를 경찰관이 보는 앞에서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 한 사건이 발생했다. 뉴스에서 이런 소식을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말세다 말세야.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쯧쯧”하며 혀를 찼다.   ‘말세’란 옛날부터 어른들이 젊은이를 보고 많이 하던 소리이긴 한데, 세상에 워낙 끔찍한 소식이 많이 들려서 인지 요즘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입에서도 심심찮게 들린다. 예전부터 지구 종말론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최근엔 세상이 혼란스럽고 도덕이나 풍속이 아주 타락한 상황에서 말세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어느 때 건 말세 소리는 항상 있었던 것 같다. 말세라는 개념 자체는 시대와 종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성경에서는 말세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전쟁과 기근, 지진, 거짓 선지자 등 도덕적 타락 등이 말세의 징조로 언급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를 말세 현상이 나타나는 때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자주 일어나는 땅꺼짐, 지진, 홍수, 전쟁, 자연재해와 이상기후, 대형 산불, 이런 현상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말세의 징조와 맞아떨어진다.   현대에는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사회적, 도덕적 타락 등이 있을 때 “세상이 말세”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요즘 나타나는 말세 현상으로는 사이버 폭력과 가짜뉴스 확산, 악성 댓글로 인한 인신 공격, 마약, 묻지마 범죄 등이 있다. 특히 성전환 수술로 남녀의 성이 바뀌는 현상 등도 이에 해당된다.   SNS와 온라인 문화가 발전하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주의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 AI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모르는 게 있으면 부모나 선생님에게 묻지 않고 AI 에게 묻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멀쩡하게 잘난 남자 연예인이 사람 대신 AI 여자친구와 사랑을 나누고 외로움을 달래는 이야기가 소개되기도 했다.   AI는 비난하지 않고 늘 반응해 주고, 사람처럼 떠나거나 상처주지 않는다. 외로운 시간에 함께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큰 위로가 돼서 인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랑이 사라져 가는 시대의 증거 같아서 씁쓸하고 점점 인간성이 무너져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 AI로 대체되는 세상, 사랑조차 인공적인 위로로 채워지는 현실이 말세의 또 하나의 징조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앞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 감탄하고 놀라고 무섭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딥페이크의 시대라 할지라도 인간만은 진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석학인 유발 하라리 교수는 “사람끼리 서로 믿으면 사람이 AI를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믿지 못한다면 곧 AI가 인간을 통제하는 날이 올 것이다”라는 절박한 메시지를 낸 바 있다.     이 시대가 말세 같아 보이긴 하지만 사람 안엔 여전히 사랑과 선함이 살아있고, 판도라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던 작은 희망의 불씨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늘 잔소리처럼 말한다. “컴퓨터 앞에 너무 오래 앉아 있지마라” “나가서 햇볕을 쬐며 걸어라” “이 좋은 날씨에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을 즐기라”고. 유튜브에 매몰된 나에게는 그런 소리가 귀담아 들릴 리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마치 신부처럼 화사해진 우리 동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집집마다 집 앞에 큰 나무 한 그루와 아담한 화단이 있는데, 나무에는 푸른 잎이 무성하고 화단에는 ‘핑크 레이디’라는 연분홍 꽃들이 일제히 만발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소란스럽고 사람들은 분노에 고함치지만 봄은 늘 그랬듯이 제때에 오고, 초목은 철을 따라 소리없이 꽃을 피우는구나.’     나도 이젠 다시 삶에 접속해야겠다. 지금 내 곁엔 흐드러지게 핀 봄꽃과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이 있다. 그들을 보고 느끼며 세파에 찌든 내 마음이 맑게 닦이기를 원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봄에 나 또한 새롭게 소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유튜브 수필 뉴스 속으로 말세 현상 말세 소리

2025-04-24

[문예마당] 삼국 봄맞이

어릴 때부터 봄이 오면     봄앓이를 한다       겨우내 입어던 옷 벗으려니     얼었던 골짜기 풀리고     논두렁 모퉁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에     연두색 댕기머리 휘날릴 무렵       뒷동산 언덕     양지바른     산소 밑에 누워     따듯한     햇살     두 눈     지그시 감추고...       한 눈 감고   가만히     다른 한 눈으로     강건너 바라 보노라면     아득히 보이는     산밑 들판 위로     소년의 미래가     아지랑이 되어 지나간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봄이 오면     유치한 봄앓이 반복하면서     미래에 대한 생각     장래의 꿈을     어릴 때 보았던     아지랑이 속에서 키워 나갔다         2025년 봄은     먼 여행길 떠난다     3월 초순인데     과수원 꽃들은 만발하고     따듯한 햇볕은 북가주 들판을   메운다         어느새     꽃잎은 떨어지고     과일나무에     새 열매 맺힐 무렵         13시간 비행길     태평양 건너     일본에 오니     이곳은 늦겨울 새봄이   후지산 위에 걸려 있고...       일본에도     봄비가 내린다     나뭇 잎새마다     물맞은 연록색 얼굴     금년     두 번째 봄을     일본에서 바라본다         거기서 두 시간     더 비행 후     고국에 오니     늦겨울 산야가     봄 하늘을 붙잡는다     참 아름다운 우리나라     진달래 개나리 구경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마음 뒤로     춘삼월 함박눈이     전국에 내린다   한달 사이         3번째 맞이하는 봄   고국에서     봄맞이 꽃은     눈속에서   떨고 있나 보다 남영한 / 은퇴전문의문예마당 봄맞이 삼국 삼국 봄맞이 비행길 태평양 늦겨울 새봄

2025-04-17

[문예마당] 나는 행복한 호랑나비

그날, 오후가 내려앉던 풀숲에 눈길을 끄는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엔 누군가 색종이를 오려서 숲으로 날려 보냈나 했다. 오후의 아지랑이가 여러 가닥으로 옅어지자,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온몸을 노랑과 검은색으로 휘감은 호랑나비 두 마리였다.     화사한 의상으로 단장한 그들 한 쌍의 호랑나비는 그러나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몸놀림은 수줍었다. 날개를 조금씩 털며 작은 나뭇가지에 나붓이 앉아 있었다. 현란한 색의 의상을 휘날리며 하늘하늘 비상을 계속해야 십상인데 의외였다.   그들은 몇 시간 전에 부화해서 허물을 벗고 막 그물망을 벗어난 어린 호랑나비들이었다. 아직 몸이 덜 말라서 날갯짓을 할 기력이 부족하다. 힘을 비축해 창공 높이 날아오를 꿈을 꾸며 햇볕에 몸을 말리는 중이었다. 얼마 후 그들은 날개를 움직여 삽시간에 건너편 숲으로 사라졌다.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후배 P의 집 뒤뜰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그건 태평양과 대서양의 거리만큼 아득한 느낌의 허탈함이었다.     후배 P의 집을 방문했던 그날, 그녀는 우리를 뒤뜰로 안내해서 천으로 덮어 놓은 그물망을 보여줬다. 거기엔 어른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초록색 나무 막대 같은 생물이 여럿 있었다. 호랑나비 애벌레라는데 곧 탈피해서 날아오를 날이 머지않았으니 그 장관을 보여주겠노라 했다.   코로나 델마에 있는 로저스 가든에서 밀크 위드(Milk Weed) 화분 두 개를 샀다. 하루 정도 베란다에 화분을 놓아두었다. 이틀 후에 보니 깨알 같은 흰점이 화분마다 두어 개씩 흙 위에 돋아나 있었다. 어느 틈에 호랑나비가 찾아와 성은을 내려준 것이다. 미리 짜둔 넓은 그물망 안에 화분째 넣어 주었다. 일주일쯤 지난 후에 그 알들은 가느스름한 까만 점으로 변했다. 알들이 제대로 자라고 있었다. 두 주일 후부터 알들이 고물고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밀크위드 여기저기에 구멍이 났다. 알들이 잎사귀를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쪽은 머리로, 다른 쪽은 꼬리로 짐작되었고 몸통에는 가느다랗게 노랑 줄과 검정 줄이 세로로 희미하게 그어져 있었다.   2주가 지나 3주에 접어들자 왕성한 식욕이 없어지고 하루 종일 기어다니기만 했다. 고치가 되려고 먹이는 안 먹고 헤매던 그들은 어느 순간 천정을 찾아 올라갔다. 몸에서 끈적끈적한 하얀 액체를 분비해서 거기에 몸통을 걸고 매달렸다.     그때까지도 노랑과 검정 몸통이던 그들은 하루 정도 지나자, 몸을 비틀어 허물을 털어내고 어른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쭉한 초록색 물체로 변했다. 그렇게 열흘 내지 2주 정도 매달려 있다가 그들은 차례대로 몸을 비틀어 허물을 벗어 던졌다. 초록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며 몸이 갈라지다가 어느 순간 호랑나비의 형체를 갖췄다.   몸이 덜 말라서 아직 날 수 없는 그들은 조용히 그물망 안에서 힘찬 날갯짓을 하게 될 때를 기다린다. 보통 서너 시간 후면 날개를 대충 말리고 성급한 순서대로 한 마리씩 그물망에서 탈출한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면 그새 날개 근육이 퇴화해서 날지 못할 수도 있다.     망을 활짝 열고 가느다란 젓가락을 몸에 갖다 대어주면 기꺼이 그것을 의지해서 날아간다. 그들이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최적의 시간은 오전 열한 시에서 오후 세 시 사이다. 새벽에 모이를 충분히 먹은 새들의 움직임이 뜸한 시간이다. 어릿어릿한 나비들이 노련한 새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새들의 먹이 활동이 다시 활발해지는 오후 4시 이후의 시간도 피해야 한다.   그물망을 빠져나오면 몸을 충분히 말리기 위해 그들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나뭇가지를 찾아가 앉는다. 마치 마지막으로 나를 즐기세요! 하는 듯한 몸짓이다. 두엇쯤 모여서 날개가 다 마르면 그들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둘이서 ‘파 드 두(pas de deux·남녀 둘이 추는 춤)’를 추면 머지 않아 뒤늦게 부화한 새내기들이 선임들과 합류해서 함께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군무)’를 펼친다. 인근 숲이 나비들의 춤사위로, 노랑과 검정의 축제로 무르익는다. 지난 두 달여간의 노고와 기다림이 보상받는 순간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다음 해에 아들과 딸은 각기 가정을 이루고 곧 아이들이 태어났다. 첫 손자가 태어나고 2주 후에 외손자가 태어났다. 두 아이는 키도 체중도 늘 고만고만하게 자랐지만 성격은 판이했다.     친손자는 음표로 표현하면 스타카토로 통통 튀는 매력이 있고 외손자는 신중하고 어린아이답지 않게 자신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녀석이다. 할아버지의 품을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관심과 사랑을 배나 더 주려고 노력했고 그만큼 그들의 일상은 때론 벅차기도 했다.   두 아이의 각급 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날은 자주 겹쳤다. 학교에서 상을 받거나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날은 물론이고 학우들과의 관계에서 적잖은 상처를 받은 날, 콩쿠르에서 기대했던 순위에 들지 못한 날 등, 열여덟 해에 걸친 그들 성장의 고비마다, 성공과 좌절의 순간마다 내게 부딪히는 임팩트는 늘 두 배였다.     할머니는 동시에 기쁨과 근심을 표현하고 두 개의 금일봉을 준비하고 두 곳의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친구 문제로 의논해 올 때 피드백을 주고 공감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두 아이의 친구들 이름과 그 부모들 원래의 고국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토트넘 손흥민 선수 동료들의 등번호와 출신 국가명을 숙지할 때처럼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따로 수첩에 적어서 들고다녔다.   두 아이가 올해 나란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저녁마다 식탁에서, 거실에서 여러 대학 이름과 순위, 그리고 입학허가서를 제출하는 시기와 에세이를 작성하는 방법 등, 여러 얘기들이 화두에 오른다.     저들의 부모가 대학에 진학하던 당시에도 그 과정을 거쳤고 내가 유학 올 때도 밟은 절차이지만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두 녀석의 진학 드라마는 다채롭다. 각 대학마다 다른 입학 사정 과정과 또 지원자들에게 합격과 불합격을 통보하는 방법과 시점 등을 매일매일 거의 시간 단위로 듣고 있다.     하입슴(HYPSM) 학교들 가운데 S와 M은 아이비가 아닌 스탠포드와 MIT의 머리글자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얼마 후면 그들은 덜 여문 깃털을 팔랑거리며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꽃은 피어 있지만 위험한 새들은 없는 길이었으면 한다. 아늑한 그물망을 벗어나 낯선 도시의 상아탑에서 그들의 날개는 단단해지고 지식과 지혜가 쌓이리라.   여기 한적한 바닷가에서 먼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하고 지식과 지혜의 만선(滿船)을 타고 오는 나비들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는 어린 나비들이 있어 나는 행복한 호랑나비다. 유니스 박 / 수필가문예마당 호랑나비 행복 순간 호랑나비 마리씩 그물망 후면 날개

2025-04-17

[문예마당] 남일 같지 않은 젤렌스키 반성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자  ‘미국 우선주의’가  더욱 강하게 돌아왔다. 세계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3년간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짊어진 지도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원치 않는 ‘굴욕 휴전’의 압박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다.   지난 2월 28일 젤렌스키와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광물 협정에 서명할 예정이었으나 종전 방안을 둘러싼 두 정상의 의견 충돌로 협정 서명은 무산됐다. 이 협정은 그간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매장된 희토류 등 광물자원 이익의 절반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젤렌스키는 “종전 논의는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며 안전 보장 없는 협정에 반대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안보 보장을 제공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는 고성이 오간 설전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의 협공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트럼프에게 도를 넘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도 대서양과 태평양만 믿고 안주할 수만은 없다. 전쟁이 나면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며 트럼프를 자극했다.   트럼프는 “무례하다”며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수천억 달러를 썼는데, 이게 미국 국민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가?” “당신은 우리한테 고마워 해야한다” “당신은 이제 카드가 없다”며 괘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또 젤렌스키 면전에서 “멍청한 대통령이 돈을 그냥 줬잖아!”라고 했다.     유럽연합은 대출을 해 준 거였고 미국은 그냥 무상으로 돈을 줬으니 트럼프로서는 화가 날만도 했겠다.   정상회담에서 이런 험악한 설전이 생방송으로 나가자 세계는 경악했다. 예정된 오찬도, 기자회견도 취소되고 젤렌스키는 백악관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왔다.   백악관 회담이 파국으로 끝나자 트럼프는 즉각 우크라이나의 군사지원을 끊었다.  자신의 종전 구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젤렌스키에게 “협상에 나설 생각이 전혀 없는 지도자가 우크라이나를 이끈다면 전쟁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오래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정권교체 필요성까지 언급했다.   약소국의 현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처지를 보며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6.25 당시 우리나라도 똑같이 미국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조기 휴전을 압박받았고 그때 이승만 대통령도 젤렌스키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그보다 덜하지 않은 수모를 받았다. 당시 미국은 휴전 반대를 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부담스러워 했다. 골칫거리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려 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겪는 설움이었다.   회담은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젤렌스키는 군복 스타일의 옷을 입고 워싱턴  DC 백악관을 찾았다. 그는 전쟁 중인 군인들에 대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그간 공식 행사에서 비슷한 복장을 입어왔다. 트럼프는 젤렌스키가 백악관에 도착하자 비꼬듯 “오늘 잘 차려입었다”고 말했다. 어느 기자는 “왜 정장을 입지 않느냐”, “정장이 있기는 한 건가”라며 젤렌스키를 조롱했다. 밴스 부통령을 비롯한 회담 배석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젤렌스키는 불편한 심기를 참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 정장을 입겠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자기네 대통령이 당한 수모에 분노했다. 외무부는 “우크라이나 인들에겐 우리만의 정장이 있다”면서 군장을 착용한 군인, 피 묻은 수술복 입은 의사 등 사진을 올리며 반격에 나섰다. 또 “무례하다고요? 백악관에 젤렌스키를 불러놓고 트럼프가 한 행동을 보세요”라고 항변했다.     미국내 우크라이나인들은 조국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과 그렇다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부담감이 교차했다.   젤렌스키가 당한 모욕을 보며 러시아가 얼마나 재미있었겠나. 그들은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터무니없이 무례했다며 트럼프와 밴스가 젤렌스키 뺨을 때리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며 약을 올렸다.   굴욕을 당한 젤렌스키는 하루 만에 유럽에서 위로를 받았다. 백악관 해프닝에 국제 사회에선 유럽을 중심으로 우려가 커졌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정치인들이 젤렌스키를 응원하며 결집했다.   가브리엘 아탈 전 프랑스 총리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에 있는데 트럼프가 우방의 대통령을 잔혹하게 망신 줬다. 오늘밤 미국은 자유세계의 리더라 말할 자격을 잃었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영국 의회는 트럼프에게 전한 찰스 3세의 국빈초청을 철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트럼프는 러·우 전쟁 종전 협상에서 “유럽의 안보는 유럽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밝혔다. 동맹국들이 안보에 무임 승차하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걸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유럽 정상들은 런던에 모여 유럽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 생존을 해야한다는 ‘자강론’을 펼쳤다.     우방을 무시한 채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트럼프가 자국 이익과 안보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패권을 추구하자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꿈틀대는 것 같다.   젤렌스키는 회담 파국 나흘만에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상 의지와 미국과의 광물 협정에 사인할 준비가 됐다”는 의사를 트럼프에게 전했다.  또한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고도 했다.     일종의 반성문으로 젤렌스키가 트럼프에 백기를 든 것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소국과 강대국의 대전을 보며 어쩔 수 없는 약소국의 비애가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 시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는 ‘멜로스의 대화’ 편이 있다. 강대국 아테네가 작은 도시국가 멜로스를 공격했을 때 벌어진 아테네 사절단과 멜로스 지도자들 간의 대화 중 하나이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당연히 할 수 있고 약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 견뎌야 한다.”     정의는 오직 동등한 힘을 가진 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현실주의 사례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젤렌스키는 이전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 총리가 트럼프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미리 공부했어야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줄기찬 칭찬과 경의로 트럼프의 비위를 맞춰줬다.     만약 젤렌스키가 자국의 이익을 덜 잃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트럼프의 비위를 맞췄으면 어땠을까. 또 트럼프가 강자의 아량을 조금이나마 보여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방도 적도 없는 미국 우선주의가 이렇게 가다가 혹시 자유세계의 우방들이 등을 돌리고 반미 감정이라도 품게 된다면 미국인들은 밖에서 호감을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또 앞으로 우리 조국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어떤 대접을 받을까. 우크라이나 사례에 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광자 / 수필가문예마당 반성문 수필 트럼프 대통령 우크라이나 침공 우크라이나 처지

2025-04-10

[문예마당] 성공의 그늘, 양심의 무게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오래된 속담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삶의 진리를 담고 있다. 부모의 언행과 가치관은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고스란히 자녀에게 투영되며, 때로는 부모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그들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아무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더라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는 부모 밑에서는 자녀 역시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기 쉽다. 반대로,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를 쌓거나 남을 착취하는 행태를 보이는 부모의 영향 아래서는 자녀가 그릇된 길을 걸을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부모는 자녀에게 삶의 좌표를 설정해주는 나침반과 같기에, 그 책임은 막중하다.   대다수의 한인 이민자들은 자녀에게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머나먼 미국 땅을 밟는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경제적인 어려움 등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굳건히 자녀를 키워내 사회적으로 성공시키고, 나아가 한인 사회 전체에 희망과 자긍심을 안겨주는 자랑스러운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의 이야기는 종종 언론을 통해 소개되며, 같은 이민자로서 큰 감동과 용기를 주곤 한다. 내 자식이 아닌 그들의 성공에도 마치 내 아이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은, 그들의 노력이 곧 우리 모두의 노력이자 결실임을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 탄탄한 기반을 가진 가정의 자녀들이 미국으로 유학 오거나, 기업 주재원이나 정부 관료의 자녀로 파견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비교적 풍족한 환경 속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최근 하와이 한인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풍요로운 환경이 반드시 올바른 인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인 의사가 무려 100만 달러에 달하는 보험 사기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현지 언론의 상세한 보도에 따르면, 와이키키, 와이파후, 카일루아 등에서 오랫동안 진료 활동을 해 온 이 의사는 정부 및 민간 의료 보험사에 허위 또는 과장된 진료 기록을 제출하여 거액의 보험금을 부당하게 청구한 혐의를 받았다. 지난해 9월 기소된 후 끈질긴 법정 공방을 벌였으나, 결국 지난주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보석금을 납부한 채 석방되었다. 내년 1월로 예정된 그의 선고 결과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미 그의 범죄 행위는 하와이 한인 동포 사회 전체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오랜 기간 쌓아온 한인들의 신뢰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언어 소통의 어려움 때문에 한국인 의사를 찾았던 많은 한인 노인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들은 자신의 건강을 믿고 맡겼던 의사로부터 오히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다. 30분 남짓한 짧은 진료 후 3시간 진료를 받았다는 서명을 요구하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는 환자들에게 “정부에서 무료로 의료 혜택을 받으면서 불만이 많다”며 오히려 윽박지르는 몰상식한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병원 주차장에서 1시간밖에 주차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시간 진료비를 청구하는 황당한 사례까지 발생했다. 결국 그의 부도덕한 행위는 연방 정부의 수사망에 포착되었고, 그는 이미 구치소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으며, 의사 면허마저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의 범죄 기록은 연방 법원 기록에 영원히 남을 것이며, 이는 단순히 개인의 일탈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을 저버린 심각한 범죄 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단순히 개인의 탐욕과 일탈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의 부모 역시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녀는 부모의 삶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가치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고 명문 대학을 졸업했으며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할지라도, 가난하고 병든 동포들을 착취하는 삶을 살아온 그의 모습은 어쩌면 부모의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결과일 수도 있다. 그는 결국 연방 정부에 의해 발각되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범죄 기록을 갖게 되었고, 이는 돈으로도 명예로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들의 범죄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는 소식이다. 자식의 잘못을 감싸려는 부모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진실을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느껴져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악은 인간 본성에 깊이 뿌리내린 질병과 같아서,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부모가 끝까지 자녀의 죄를 변명하고 은폐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태도이다. 성경에도 주홍빛 죄라도 회개하면 눈처럼 희게 씻어주신다는 약속이 있지 않은가.   미국의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짓게 되는 죄를 가능한 한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괴로움과 고통을 피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실천한 결과, 록펠러 가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자선 단체를 설립하여 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이는 진정한 회개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다.   이민자로서 자녀의 성공은 개인과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한인 사회 전체의 위상을 드높이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소외된 저소득층 동족들을 상대로 부당하게 과도한 의료비를 청구하여 착취하고, 결국 연방 범죄 단속반에 발각되어 벌금형과 함께 감옥살이까지 한 이번 사건은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한인 커뮤니티 전체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뼈아픈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을 지켜야 한다. 특히 부모 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정직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한 점 부끄럼 없이 솔직해야 한다.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의 태도는 고스란히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내 속에 숨겨진 작은 악함조차 자녀는 무의식적으로 닮아갈 수 있다.     부모가 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최소한 우리의 자녀가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가는 불행한 일을 겪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자신을 냉정하게 거울에 비춰보며,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평가해야 할 때이다. 차덕선 / 수필가문예마당 성공 그늘 한인 사회 한인 의사 한인 이민자들

2025-04-03

[문예마당] 대피령에 깨달은 진짜 귀중품

지난 1월7일은 LA카운티를 휩쓸고 간 사상 최대의 산불이 있었던 날이다. 전날 저녁에 불었던 돌풍이 엄청난 화재의 원인이 됐다.     우리 동네 글렌데일을 중심으로 동쪽 알타데나와 서쪽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난 산불은 삽시간에 동네로 번져 마을 전체를 태우고 있었다. TV에서는 계속해서 화재 현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산골짜기 여러 곳에서도 조금씩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다간 LA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동네만 빼놓고 온통 하늘이 컴컴했다. 에어 퀄리티 지수가 30정도가 정상인데 무려 10배가 넘는 380에 달했다. 바깥 출입도 자제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동쪽 알타데나와 같은 능선에 있는 모든 동네에 전기를 끊고 대피 명령이 내려졌다. 라크레센터 산 중턱에 사는 큰딸 식구가 모두 글렌데일 우리 집으로 대피해 왔다. 애들과 간단한 짐만 챙겨 왔다.     많은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동네가 탔으니 거기에 있는 초중고 학교도 탔다. 보통 산에 있는 집들이 화재를 당했지만 이번 경우는 동네로 불이 번졌다. 바람의 방향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큰 뉴스였다. TV에서는 거의 모든 방송을 중단하고 집들이 불에 타 무너지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영화 쿼바디스에서 봤던 로마의 화재가 연상됐다. 한국에 있는 친지들에게서 안부를 묻는 카톡이 왔다. 우리도 이글락까지 불이 번지면 대피해야 했다.   작은 가방 2개를 꺼내놓고 이틀 정도 입을 속옷과 양말, 겉 옷을 먼저 챙겼다. 액세서리는 집락에 부어 가방에 넣고 옷장을 열었다. 무엇을 골라야 할 텐데 골라지지가 않았다. 한참 생각하다가 밍크 코트와 밍크 목도리를 골랐다. 부피가 나간 것이라 가방에 넣으니 가득 찼다.     집 안을 둘러보니 그동안 내 손때 묻은 것들로 가득하다. 그들도 눈치를 챈 듯 모두 “나도! 나도!”하며 챙겨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벽에 걸려있는 내 그림들이며, 오랜 세월 벽장에 무수히 걸려있으며 철 따라 바꿔 입었던 옷가지들, 책들, 가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해야했다.     그래도 뭔가 허전해서 온 집을 오르락 내리락 하다가 이민 와서부터 띄엄띄엄 써왔던 일기들이 생각났다. 대충 서너 권을 빼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차에 실어 놓았다. 일기장을 챙기고 나니 마음이 좀 푸근해졌다. 보석 한두개와 친지를 도우려고 샀던 밍크 코트와 목도리는 값만 비쌌을 뿐 큰 위로는 못되었다.   학창 시절에 읽은 기억이 난다. 교과서에 실렸던가. 외국 단편인데 가난한 친구 집에서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모두 보석을 끼고 와서 자랑들을 해댔다. 집 주인 차례가 되었다. 가난한 친구는 방에 들어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나온다. 그녀는 두 아들이 자기에게는 귀한 보물이라고 했다. 이번 LA 산불로 가족이 무사한 것으로 위로를 삼았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그 슬픔과 절망은 말로 다 어찌 표현하겠는가.   산불이 있고난 얼마 후에 남편 친구들 모임이 있었다. 요즘은 거의 부부가 같이 모인다. 나이도 들고 오랫동안 만나니 여자들도 동창처럼 반갑다. 평소에 우리는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를 묻곤 하는데 그날은 보자마자 한 부인이 이번 화재로 그녀의 딸 집이 탔다고 했다.     당시 산불이 발생한 지 꽤 지났는 데도 여전히 전화만 하고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에어비앤비에 대피해 있는데 집 잃고 수습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날마다 바빠 전화도 자주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집에 물건들을 그대로 두고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아이들 둘만 데리고 나왔다고 했다. 평소에 농담을 잘하셔서 주위를 재미있게 해주셨던 바깥 분은 끝까지 별말이 없이 초조한 표정이었다.   요즘도 TV에선 화마가 휩쓸고 간 빈 터를 가끔 보여준다. 아직도 까맣게 탄 잔해가 남아있다. 1만여 세대가 훨씬 넘은 피해 가정은 다 어디에서 기거하고 지낼까 걱정된다.     미국은 집 하나하나가 다 개성이 있다. 집 밖을 참 개성 있게 가꾼다.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높은 담이 없고 모두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집 앞뜰이 정말 아름답게 보였다. 남을 위하여 돈과 정성을 들여 꾸며 놓은 정원은 걷는 이의 마음을 행복하게 한다. 미국과 한국의 다른 점은 주택에서 가장 많이 구별된다. 그래서 동네를 걷는다거나 차를 타고 밖을 보면 특색있게 꾸민 집들을 구경하느라 지루하지가 않다.     집안에 있는 정들었던 물건들, 가구들, 사진들, 그림들, 오랜 세월을 거쳐 모아온 수집품들이 모든 것들을 놓고 나왔을 화재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신문에 LA 주택 렌트 값이 많이 올랐다는 기사가 났다. 화재로 인해 수요가 급증해서 화재 난 지역 부근에서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을 딛고 일어선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고 겸손하게 고별사를 쓴 것을 보았다.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지금, 이런 후회의 말이 아닌“나의 조그마한 배려가 남에게 큰 행복이 될 줄 몰랐다”로 바꾸어 보고 싶다. 이영희 / 수필가문예마당 대피령 귀중품 집들이 화재 화재 현장 친구들 모임

2025-03-27

[문예마당] 가려진 사람들

둘째 큰오빠가 1960년대에 미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자마자, 막내였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 대학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가르치더라.”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지만 사실이었다. 조선 왕조는 500년 이상 중국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는 ‘조공체제(Tribute System)’ 아래에 있었다. 국가의 중대한 결정마다 중국의 윤허를 받아야 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를 상전으로 삼아야 했다. 당시 중국은 조선뿐만 아니라 베트남, 티베트,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물에도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조선은 계유정난을 시작으로 갑신정변에 이르기까지 15차례에 걸친 내란과 외란을 겪으며 태평성대를 이루지 못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양반 계층은 혈통을 세습하며 부를 독점했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교육 시스템도 철저히 양반 중심으로 운영되어, 서민들에게는 배움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조선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한글 창제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하면서 조선은 더 이상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지만, 1876년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은 교묘히 조선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왕권은 박탈되고, 따라서 국민은 보호막이 될 나라가 없어지게 된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싸움이 시작될 때,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고, 1905년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한국지배권과 만주 남부 철도부설권을 양도받는다. 강대국 간의 싸움터는 한반도였다.   일본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동아시아 24개국을 침략하며 식민지로 삼았다. 조선, 만주, 중국 본토,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를 포함해 일본의 영토는 광대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 놓인 나라들은 강제 징병, 위안부 동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희생을 겪어야 했다. 김상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보고에 따르면, 일본 식민 통치 아래에서 조선인 희생자가 8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김 전 관장은 일본의 침략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아니라 1876년 개항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70년간 지속되었다고 분석했다.   며칠 전, 106돌 삼일절을 맞이했다. 삼일절이 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윤동주…. 그러나 오늘은 이름 없이 희생된 수많은 소년, 소녀, 그리고 어르신들을 기억하고 싶다. 당시 사진을 보면, 소녀들은 남루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치고 있다. 청년들은 짧게 깎인 머리에 수인번호가 적힌 죄수복을 입고, 푸석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그들의 굳게 다문 입매와 날카로운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만세운동은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원산뿐만 아니라 만주,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각지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1918년 만주 길림에서 조소앙 선생이 작성한 ‘무오독립선언서’, 이듬해 1919년 2월 8일 일본 YWCA,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앞에서 이광수 선생이 작성하고 영문으로 번역하여 해외까지 보내었다는 ‘2·8 독립선언서’에 이어서, 같은 해 3월 1일 최남선 선생이 작성하고 15명의 천도교 대표, 16명 기독교, 2명의 불교 대표 총 33명의 민족대표가 서명하고 7개의 도시에서 낭독된 ‘기미독립선언’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원래 탑골공원에서 낭독될 예정이었으나, 민족대표 33인이 경찰에 연행될 것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조용히 치렀다. 이후 그들은 스스로 자수했다. 교육자인 정재용 선생은 2만1000부의 독립선언서를 받아 탑골공원으로 갔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직접 선언서를 낭독했다고 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독립을 외치다가 투옥되었고, 일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남은 이들조차 고문과 수형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이들의 희생을 기록한 문서는 광복 8년 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정리되었다. 총 67권에 이르는 책자로,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생년월일, 주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한일회담 당시 협상 자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분실되었다가 2013년 주한 일본대사관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여기에 유관순 열사의 기록도 남아 있는데, 그녀의 주소는 ‘천안군’, 순국 장소는 ‘서대문 경찰서’로 명시되어 있다.   광복 이후에도 한국은 많은 아픈 고비를 넘겼다. 2009년,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을 남긴 4000여 명의 명단이 공개되었는데, 그중에는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왜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의 길을 선택했을까.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기록에서 누락된 이들, 반대로 친일을 했으나 유명하지 않아 조용히 잊힌 이들.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정부는 늦었지만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훈장을 수여하고, 생존자와 유가족을 지원하고 있다. 남편의 외조부 한순회 선생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동학을 계승해 만들어진 천도교의 광주교구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사후 30년이 지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06돌 삼일절, 한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 시위가 열렸다. 남가주 LA와 오랜지 카운티 곳곳에서는 한인사회가 삼일절 기념행사가 치러졌다. 대부분 대형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교인뿐만 아니라 총영사, 교육자, 원로들이 함께했다고 한다.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LA총영사관이 완공되면,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그곳에 모여 다 함께 삼일절을 기념하고, 일제강점기 희생된 800만 선조들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란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학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이사장문예마당 수필 조선인 희생자 한국지배권과 만주 최남선 선생

2025-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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