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새벽바람이 게 눈 감추듯 숨어 버리면, 따가운 햇살은 밤새 참아 온 열기를 쏟아붓는다. 여름 햇살은 절약이라는 미덕이 없다. 마지막 한 줌까지도 노을에 담아 쏟아내고야 밤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이 더위에도 숟가락은 놀려야 하기에 점심을 해결하러 식당을 찾았다. 자리에 앉아 냉수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냉면으로 더위를 이기고 있었다. 주문하려는데 옆 테이블에서 “어, 시원하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삼계탕 국물을 넘기신 어르신이 흘리시는 탄성이었다. 더위를 더위로 이기는 이열치열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탄성 속의 ‘시원하다’는 이열치열에서 온 말이 아니었다. 사실 ‘시원하다’는 본래 차갑다는 뜻에서 온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더위의 반대말도 아니다. 옛말 ‘싀훤하다’의 ‘훤’은 ‘훤하다’와 같은 뿌리라고 한다. 막히지 않고 탁 트였다는 뜻이다. 막힌 마음을 탁 트이게 하니 시원한 것이다. 게다가 이열치열도 본래 열을 더 큰 열로 다스린다는 말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이 말은, 역적을 처리할 때 같은 당파에 맡기면 피를 덜 흘린다는 데서 왔다고 한다. 대립이 아니라 관용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즉 뜨거운 것을 더 뜨거운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것에 공감하여 이를 어루만지고 앞길을 열어 주는 것이 참된 이열치열이요, 그래서 탁 트인 시원한 이열치열이다. 뜨거운 국은 뜨거워서가 아니라 답답하고 찜찜한 속을 탁 뚫어 주니 시원한 것이다. 세상에 찌든 복잡한 마음을 뜨거운 온천에 풀어 버리니 시원한 것이다. 우리는 무더위를 먹는다. 무더위는 더 심한 더위가 아니라 찌는 듯한 더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국물도 차가운 얼음도 아닌, 시원함이다. 우리가 먹고 찌들게 된 것이 더위뿐인가. 우리는 욕도 먹고 돈도 먹고 뇌물도 먹는다. 그래서 세상은 끊임없이 더 돈을 먹고 성공을 더 먹으라고 한다. 그것이 세상의 이열치열이다. 더 큰 성공이 거짓을 덮고, 겉으로 드러난 더 큰 권세가 불의를 덮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원한 것이다. 골짜기가 메워지고 산과 언덕이 낮아지고 거친 길도 평탄하게 되는 후련함이다. 더 큰 성공이 아니라 성숙을 먹고, 욕이 아니라 용서를 먹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먹는 시원함이다. 여기 놀랍게도 “나를 먹으라” 하시는 분이 있다. 바로 생명의 양식이시요, 후련하게 탁 트인 길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이열치열 이열치열도 본래 삼계탕 국물 여름 햇살
2026.08.10. 18:02
쨍쨍한 뙤약볕이 정수리를 내리누르는 여름이다. 그 아래 서 있기조차 힘든 우리와 달리, 이 더위를 먹어 치우고 해를 향해 꼿꼿이 몸을 세우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바로 도시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텃밭 작물들이다. 이들은 더위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우리는 더위를 먹으면 탈이 나지만, 이들은 더위를 먹고 열매를 낸다. 텃밭은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이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 우리 곁을 맴돌았다. 그러더니 이제는 건강한 먹거리를 제 손으로 기른다는 ‘농사’가 되어, 한국에서는 어느덧 150만 명 이상이 텃밭을 가꾸고 있다고 한다. 웰빙과 우울증 완화 등 상당한 이점이 있다는 사실도 최근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사실 텃밭은 낭비가 상당한 밭이다. 비료값과 물값이 만만치 않다. 가장 비싼 것은 바로 주인의 노동이다. 직접 기른다고 해서 늘 싼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텃밭 인구가 줄지 않는 까닭은 생산성이 아니라 가치성을 보기 때문이다. 노동을 여가와 건강으로 여기는 한, 텃밭은 명백한 이익이다. 텃밭은 자투리땅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순진하다. 대개 상업적으로 재배하기 힘들거나 싱싱하게 먹고 싶은 작물을 제 손으로 키워 먹는 곳이기 때문이다. 상추, 케일, 깻잎, 토마토, 호박은 물론 부추와 마늘, 파, 심지어 뚱딴지(돼지감자)와 참나물까지 인기가 있는 이유다. 놀랍게도 이 순진성이 상업 작물이 포기한 다양한 종자를 지켜 주게 됐다. 방아와 씀바귀 같은 재래종의 살아 있는 저장고가 된 것이다. 텃밭은 엉뚱한 밭이기도 하다.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를 보면 어른들은 텃밭을 재산으로 보지만, 어린아이를 상징하는 토끼에게 텃밭은 모험과 유혹의 장소다. 그야말로 엉덩이로 자연을 이해하는 자리이자, 쓸모없다고 여겼던 잡초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훈련장이다. 그런데 이 엉뚱함과 순진함, 비효율의 텃밭이야말로 교회가 잃어버린 자리는 아닐까. 어느새 성공과 최고라는 말에 물든 신앙을 회복하는 길이 단지 ‘농지’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심고 가꾸고 엉덩이로 배우는 ‘텃밭’에 있지 않을까. 점점 멸종해 가는 참된 제자의 씨앗을 지켜 내고, 돈 계산이 아니라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밭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뚱딴지 한 그루를 키우면 어떨까. ‘뚱딴지같은 말’이 창조와 유머의 시간이 되도록 말이다. 뚱딴지같은 소리 말라고? 하나님이 키우시는 여름 텃밭은 오늘도 싱싱하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신앙 여름 텃밭 텃밭 인구 사실 텃밭
2026.07.27. 18:05
바다 근처 언덕 동네들은 틈만 나면 안개가 비처럼 내려앉는다. 안갯속에서 잠시 숨을 들이켜면 촉촉하면서 차가운 공기가 가슴을 거쳐 머리까지 상쾌하게 하고 돌아 나온다. 하지만 안개라고는 장충단 공원만 생각나는 서울 촌사람에게, 앞차 꼬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안개는 여간 애를 먹이는 것이 아니다. 구름처럼 길거리를 채운 안개를 보고 있자니, 아침에 집 근처 동산에 올라 내려다보던 서울 동네가 생각난다. 기와집들 사이에 공깃돌처럼 초가집이 끼어 있던 그 동네는 안개 낀 이곳만큼 운치가 있었다. 약수터 돌마루에 서서 보면 아침에 굴뚝마다 피어오르던 하얀 구름이 안개처럼 동네를 채웠으니까. 물론 간간이 차 시동 소리만 들리는 이곳과 달리 동네는 정겨운 소리들로 가득했다. 집집마다 아침 쌀 씻는 소리, 도마 위 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 해가 엉덩이를 치받았는데 뭐 하냐는 어머니들의 잔소리, 번개탄을 사러 새벽부터 가게를 두드리던 아이들의 발소리. 밋밋하던 지붕이 아침 햇살에 물들고 그 위로 굴뚝 연기가 흐르는 모습은 그대로 한 장의 그림엽서였다. 굴뚝은 운치만 있지 않았다. 연기가 오르면 먹을 것이 있고 쉴 곳이 있는 집이었다. 아이들에게 굴뚝은 숨바꼭질 명당이었다. 따뜻한 굴뚝에 기대어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온 동네가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딱지를 치고, 구슬치기를 하고, 공기놀이를 하던 곳도 굴뚝 옆이었다. 큰 나무 그늘이 없던 아이들에게 서울살이는 굴뚝 아래였나 보다. 모두 굴뚝 아래서 그렇게 저녁노을을 맞이했다. 다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 소리가 창문을 넘어오면, 그제야 다들 엉덩이를 털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정답기도 하지만 굴뚝은 연기에게 길이기도 하다. 아무리 뜨거운 불길도 굴뚝이 없으면 계속 타오르지 못한다. 우리에게 열심은 있고, 아궁이에 나무는 계속 집어넣는다. 예배당은 높아 가고, 사람들은 모여 뜨겁게 하나님을 부르고 설교가 넘쳐난다. 그런데 불은 오히려 사그라지는 것 같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일은 희미한 추억의 한 장면이 되었다. 정작 굴뚝이 막힌 것은 아닌가. 뜨거운 열정이 불타오르되, 그 곁에 기대어 잠들 수 있는 곳. 연기를 위해 길을 내어주듯 서로서로 길을 내어주는 곳.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까르르거리고, 어른들은 “들어와 밥 먹자” 하는 집. 하늘의 밥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굴뚝이 뚫린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져 가면 어떨까.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굴뚝 교회 불길도 굴뚝 정작 굴뚝 위로 굴뚝
2026.07.06. 18:13
‘별(別)볼 일 없다’는 말이 정말 별(星) 볼 일 없는 날이 될 때가 있다. 혼자 다 해버리는 보름달이 별들을 삼키는 밤도 있고, 큰 도시에서는 도시의 조명이 별을 가리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구름이 하늘을 메워버리는 날도 있다. 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경우가 실망이겠지만, 특히 구름이 가득한 날은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별빛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데 대개 수백 년에서 수백만 년이 걸려 왔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구름이 하루 드리웠다는 이유로 별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별빛은 여전할 텐데 우리 눈에는 구름만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알지 않는가. 백만 년을 어찌 하루가 막을 것인가. 구름 속에서 천둥과 번개가 심술을 부려도, 구름이 눈물이 되어 쏟아져 내려도, 어찌 하루가 백만 년의 별빛을 지우겠는가. 그렇다면 수만 년, 수억 년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을 달려온 빛이 있다면 어떠한가. 창세 전이라는 영원에서 출발한 사랑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나의 분주함과 눈앞의 유혹과 욕망이, 그리고 실망과 우울이 이 빛을 구름처럼 막아선다. 백 년을 겨우 채우거나 넘기는 우리의 삶 속 부와 가난, 성공과 실패, 권력과 명예는 물론 건강과 병까지 영원을 달려온 빛을 막아선다. 영원을 달려온 이 사랑을 이런 백 년이 끊을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이 빛은 당신을 기다리는 빛이 아니다. 당신에게 달려온 빛이다. 그런데도 구름만 보고 별 볼 일 없다고 돌아설 것인가. 남가주의 밤바다에 서 보라. 하늘의 별들이 바다를 적시며, 작은 물결 하나하나까지 별빛이 스며드는 장관이 밤마다 펼쳐진다. 바다가 별들에게 가슴을 여는 것을 보라. 우리 역시 별에게 가슴을 여는 바다가 될 수 없을까. 백만 년을 당신을 위해 달려오는 사랑의 빛 앞에서 가슴을 열 수 없을까. 내 인생의 파도뿐 아니라 세미한 물결까지 그 빛으로 물들어버린다면…그 아름다움은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여기 놀라운 빛이 있다. 우리를 위해 달려왔을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빽빽한 구름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를 모두 걷어내고 자신을 던지는 빛이 있다. 나를 감싸고 나를 물들이려고 그 눈부신 빛을 나에게 내어준 빛이 있다. 하늘에서 빛나기보다 당신의 가슴에서 빛나기를 기뻐한 빛이 있다. 숨이 차도록, 목숨이 다하도록 영원을 달려온 빛. 왜냐고, 하루 같은 나를 위해 영원을 왜 달려왔냐고 묻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쏟아지는 빛이 있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구름 가난 성공 우리 인생 실패 권력
2026.06.15. 18:08
중국 진(秦)나라 재상이었던 여불위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소편(?小篇)에는 제 환공(齊桓公)이 나라를 평화롭게 했던 세 마디 말이 나온다. 맹수를 사육하지 말고, 곡식 먹는 새를 기르지 말며, 비단으로 짠 사냥 그물을 없애라는 명령이었다. 별것 아닌, 오히려 이상해 보이는 이 명령들은 사실 군주가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말고, 백성이 배불리 먹게 하며, 백성을 괴롭게 하지 말라는, 백성을 위한 마음이었다. 제 환공은 거대한 군사 정복이 아니라 작아 보이는 세 가지 명령으로 백성의 칭송을 받고 신하들을 기쁘게 했다. 여불위는 이런 고사들을 모아 작은 것이 주는 무게를 글에 담았다. “사람의 마음은 큰 산에는 걸려 넘어지지 않지만, 작은 개미 둑에는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작은 것 같으나 백성을 아끼는 마음, 신하를 존중하는 마음, 군주의 오만을 경계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작은 일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 반면 작으면서 그 안에 담긴 것도 작을 수 있다. 낯선 운전자가 우리 앞으로 끼어들 때를 생각해 보라. ‘그럴 수 있겠지’ 하는 연민 대신 우리는 분노를 택하고, 그 분노로 하루를 망치기도 한다. 리처드 칼슨이 말한 ‘생각의 눈덩이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도대체 저런 운전자를 도로에 그대로 방치하는 정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한번 본때를 보여 줘야지.” 이런 경우, 우리는 역설을 만난다. 칼슨의 책 제목처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마라.” 지혜의 혼란에 빠진 것 같지만, 길은 분명하다. 사소한 것을 결정하는 기준은 보이는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과 가치다. 그 마음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개미 언덕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반대로, 그 마음을 분별하지 않은 채 왕관을 씌워 주면, 그 마음은 우리를 지배하려 덤벼들 것이다. 작은 겨자씨에 하나님 나라를 담는다면, 이는 사소한 일이 아니다. 큰 다툼이어도 그 안에 욕심과 자존심만 남았다면, 이는 사소한 일이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오늘의 상처와 문제도, 그 안에 변치 않는 가치와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면 실은 사소한 것이다. 흘려보낼 일이다. 그러나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이라도 살 희망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형제에게 건넨 빵 한 조각에, 목마른 자매에게 베푼 소자(小子)의 물 한 잔에 응원과 사랑이 담긴다면 이 일은 영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도 거창하다면, 오늘 지금 당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의 한마디 기도는 어떠한가.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기도 마음 신하 마음 군주 한마디 기도
2026.05.25. 20:00
기독(基督)이라는 한자어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말이다. 기독은 그리스도를 비슷한 발음으로 옮긴 기리사독(基利斯督)의 준말이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그저 소리만이 아니라 의미의 그릇도 만들려 했다. 이 말은 예수가 우리의 기초(基)이며 구원의 유익(利)을 주시는 분으로서, 곧 이 분(斯)이 우리를 다스리시는(督) 분이라는 뜻을 담은 것이다. 아마 네 글자를 두 글자로 줄이는 한자의 관습에 따라 앞뒤 글자가 남아 기독(基督)이 되었을 것이다. 이 남은 글자들의 의미는 근본적인 통치자가 된다. 주 예수님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과거 왕이나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를 택할 때 사명을 위해 기름을 부어 세웠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처럼 성령님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슬픈 자를 위로하는 ”(이사야 61:1)분임을 가리킨다. 그럼 이 뜻을 한자로 만든다면 어떨까. 상한 자를 다시 일으키고(起), 부서진 것을 바로잡아 치유하며(釐), 포로와 갇힌 자를 사면하여 풀어주고(赦), 슬픈 자를 속 깊이 위로하시는(篤) 분, 곧 기리사독(起釐赦篤)이다. 그리고 기독(起篤), 즉 상한 자를 일으키시고 진실하고 깊이 위로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그분은 진정 기독(基督)이시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 속에서도, 물가를 걱정하는 한숨 속에서도, 불안한 직장 앞에서도, 높고 험한 인생의 파도를 만나 어둠 속에서 풍랑을 헤쳐 나가는 중에도, “두려워 말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내가 너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참으로 기독(起篤)이시다. ‘두려워 말라’ 하시는 그분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다. 우리 가운데 계셨고,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직접 몸과 마음에 새기셨기에, 우리의 속 깊은 곳까지 아시는 분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 위로의 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그 좁은 십자가 형틀에 스스로 묶이신 분이다. 이 분이 우리의 기독이시다. 상처를 아실 뿐 아니라 상처를 몸소 입으시고, 우리를, 우리 가정을, 교회를, 그리고 이 세상을 참으로 치유하는 분이다. 암울하지 않다. 불안만 가득한 세상이 아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基督)이 온 세상의 치유자(起篤)이시다. 그리고 이 예수님 안에서 기리사독이 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소망 예수 그리스도 앞뒤 글자 선지자 이사야
2026.05.04. 18:37
종아리를 감아 흐르는 선선한 바람이 아직 여름을 가로막고 있는 오후, 뜰에는 어느새 순에서 자라 부챗살처럼 하늘을 향한 가지들이 무성하다. 위를 향한 가지는 볼수록 대견하다. 햇빛을 향한 가지들의 몸부림이 아래로만 잡아당기는 중력을 떨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력은 나무가 뿌리를 땅에 내리는 소중한 힘이다. 그러나 그곳에 매몰되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나무는 바꿀 수 없는 중력이 아니라 나아갈 수 있는 햇빛을 바라본다. 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인가. 우리 역시 인생의 중력 속에 산다. 고통과 상처, 그리고 눈물과 한숨이 그들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잡아당긴다. 멈추게 하고 아픈 상처만을 돌아보게 한다. 물론 이들 역시 외면할 수 없다. 뿌리를 내리는 힘은 바로 이 중력이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붙잡혀버리면 자랄 수 없다. 나무가 햇빛을 향해 중력을 떨쳐 내듯, 우리도 하늘을 향해 몸과 마음을 펼쳐야 한다. 새순을 내고 위를 향해 가지를 뻗듯,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빛을 구하는 것이다. 잎을 펼치고 양분을 만들며 잎과 순을 자라게 한다. 그렇게 나무는 무성해지고 줄기는 굵어진다. 그런데 더할 수 없이 건강하게 위로만 자란 가지들이 곤란해지는 때가 있다. 위로만 힘을 받으며 훌쩍 혼자 올라가는 가지들은 그늘을 만든다. 성장이 또 다른 성장을 가리는 것이다. 게다가 아쉽게도 이렇게 웃자란 가지에는 꽃이 달리지 않고, 열매도 없기에 보람이 없는 가지, 곧 도장지라고 불린다. 꽃을 달고 열매를 맺으려면 농부는 가지를 누인다. 힘을 빼는 것이다. 그렇게 힘이 빠지면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린다. 위로만 올라가며 굵어지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누워야 한다. 열매는 그때 맺는다. 신앙의 현장에서도 성장을 위해 애쓰는 성도를 만난다. 소중한 가지들이다. 그러나 온 힘이 자기 성장에 몰려 있다면, 잎은 무성하고 가지는 굵어지고 힘은 넘치지만 꽃은 달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혹시 그늘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힘을 빼고 겸손을 담아야 한다. 열매는 그곳에 맺힌다. 나무의 지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햇빛을 받아 만든 양분으로 잎, 줄기 그리고 뿌리가 자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양분의 꽤 많은 부분을 뿌리가 다시 땅으로 내보낸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나온 달콤한 양분은 땅을 먹이며 살리고 그 땅은 다시 나무를 붙든다. 우리 역시 이렇게 버리는 법을 잊어서는 안 된다. 햇빛으로 만든 양분을 땅에게 내어주듯,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흘려보내야 한다. 오늘 당신이 세상에 흘려보낼 달콤한 양분은 무엇인가.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양분 나무 자기 성장
2026.04.20. 21:08
가끔 방송에서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유감(遺憾)’이라고 말하는 때가 있다. 이 말은 때로 사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과를 피하는 기술이 되기도 한다. 이 말을 한자로 풀어 보면 “섭섭하다”는 의미가 되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하는 말에 어울린다. 그러니 “유감이 정말 유감이다”라는 말도 심심찮게 쓰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말은 정치권은 물론 대중에게까지 들어와 자존심을 지키는 사과 방식으로 쓰이곤 한다. 이런 경우 “사과까지는 아니다”라는 말이 되니, 아픈 사람을 두 번 아프게 하는 말이 될 수 있다. 이런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데는 우리가 쓰는 사과의 표현들도 한몫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안하다”는 말은 이 일로 내 마음이 편치 않다는 뜻이다. “면목이 없다”는 내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이고, “죄송하다”도 잘못으로 내가 두렵다는 말이다. 대부분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사과의 목적이 상대의 감정이나 책임 소재보다는 나와 사회의 관계 회복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화인류학자 와가쓰마와 법학자 로셋이 분석하듯, 사과가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보다는 주로 사회적 윤활유로 쓰이는 경우에 해당된다. 사회적 윤활유로서의 사과는 사회적으로는 의미가 있겠지만, 교회가 이런 사과를 경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잘못했다”, 혹은 “사과한다”고 말하더라도, 마치 이것이 자신의 희생으로 교회를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적 윤활유로서의 사과’는 말씀 앞에서는 충분할 수 없다. 이는 성도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진정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자신이 맡았던 자리를 내려놓는 것이 사죄가 될 수 있지만, 교회는 도둑이 도둑질을 그만둔 것이 사과의 다가 아니다. 성경은 그 손으로 일하여 다른 이들에게 선을 베풀라고 말한다. 이것이 참된 사과, 즉 회개다. 오늘날 회개는 한 번 하나님 앞에 크게 울고 반성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회개란 분명 마음이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며, 그 삶 전체가 방향을 바꾸어 돌이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어떻게 다 지키며 사냐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말씀대로 사냐고 물으면 모두 고개를 젓는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겸손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대로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실수하고 잘못하면 회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실수도 잘못도 하지 않는 것만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유혹과 죄가 만연한 이 땅에서 회개하는 삶이 바로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사과 회개 사과 방식 오늘날 회개 하나님 말씀
2026.03.09. 20:36
따스한 햇살이 어김없이 봄이 왔다고 동백과 목련을 재촉한다. 게으른 텃밭 주인에게 속히 파종하라는 채근이기도 하다. 별수 없이 농부 흉내라도 내려고 찾은 씨앗 봉지에는 단아한 필체로 ‘단호박’이라 적혀 있다. 호박 중에도 달고 밤 같은 식감을 가진 데다, 속까지도 황금색을 띠고 있어서 혹시 보석인 호박의 이름을 여기서 따 왔나 했던 적도 있다. 물론 서로 아무런 고리가 없다. 보석인 호박은 나무가 상처를 감싸려고 내보내는 수지가 오랜 세월 굳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수지가 끈적하기에 자주 곤충이나 식물 조각 등이 들어가서 특이한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단단하지는 않지만 따뜻한 색이 마음을 편히 안정시켜 주기에 실제로 중국에서는 안정을 위한 약재(본초강목)로도 썼다고 한다. 먹는 호박이야 그 맛과 항산화 기능에서 각광받는 음식이니 말할 나위가 없지만, 호박씨까지도 건강에 유익을 주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들어온 복을 말할 때 호박이 넝쿨째 들어왔다고 말하나 보다. 이렇듯 우연히 같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불리게 된 호박은 하나는 상처를 감싸며 은은한 빛을 내는 보석으로, 하나는 우리의 식탁 건강을 지켜 주는 먹거리로 우리 곁에 있다. 이렇게 보면 교회를 ‘호박스럽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상처 입은 아픔을 사랑이라는 수지로 감싸서 결국 보석을 만들어 내는 곳이고, 맛나고 따뜻한 속살로 서로에게 평안이 되어 주는 공동체를 바라보니 말이다. 그러나 호박 속 호박씨는 겉과 속이 다르게 몰래 실속을 챙기는 경우를 빗대기도 한다. 따뜻하고 풍성했던 호박인데, 뒤에서는 호박씨를 까서 그 속만 챙기는 일은 뜻밖이다. 더 충격이고 더 아프다. 막상 호박씨는 오해라고 억울할 수도 있지만, 몰랐던 호박에게는 놀람과 실망일 수밖에 없다. 역시 호박씨는 뒤에서 몰래가 아니라 속 시원히 까야 하는 것이다. 그럼 호박씨를 호박이 감싸 주고, 호박을 또 다른 호박이 감싸 준다면 어떨까? 몰래 깐 호박씨가 아니라 건강한 호박 안에서 생명과 치유가 되는 호박씨로 말이다. 실수나 오해가 아니라 잘못을 보고 참된 회개를 통해 건강해진 호박씨, 그리고 이런 상처를 지닌 호박을 품어 보석을 만들어 간다면 어떨까. 회개를 통해 상처를 품는 보석이 되듯, 끊임없이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호박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호박(琥珀) 속의 호박”, 곧 상처조차 영광이 되는 호박이 되기를 기도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호박 보석인 호박 식탁 건강 항산화 기능
2026.02.16. 18:00
분주한 하루가 도시를 깨운다. 모두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인터넷에서 뉴스를 읽으며 커피를 내려 마신다. 아침 식사를 입에 문 채로 신발을 신고 손으로는 자동차 키를 눌러 문을 열고 어느새 차에 몸을 싣는다. 그래서인지 항상 무언가 잃어버린 느낌이다. 따뜻한 아이의 미소, 가족들의 포옹, 힘내라는 인사들은 길바닥에 다 떨어뜨린다. 우리 마음도 별로 다르지 않다. 필요도 없는 분노와 상심은 챙기면서 감사와 용서, 그리고 여유는 어디서 떨어졌는지 찾기조차 힘들다. 돈으로, 건강으로, 관계로도 우리는 바람 잘 날이 없어 보인다. 변화무쌍, 들쑥날쑥이다. 평온이라는 단어는 사전에만 있는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속을 걷는 기분이다. 차라리 태양처럼 매 순간 마음껏 폭발해도 된다면 시원하기라도 할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폭발하는 태양이 수억 년 동안 표면의 온도를 거의 변함없이 섭씨 약 5500도로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아는가? 태양의 중심에서는 매초 수소폭탄 수조 개가 동시에 폭발하는 에너지가 나온다고 한다. 까마득한 숫자다. 가령 우리가 쓰는 전기로 치면, 태양이 1초 동안 만드는 에너지는 LA시가 약 50억 년을 쓸 수 있는 양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표면까지 오는 데는 불과 2초면 된다. 그렇다면 태양 표면은 천만 도에 도달할 것이고, 당연히 지구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태양은 여전히 5500도를 지킨다. 태양 자체가 마치 두꺼운 이불처럼 고밀도의 기체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생긴 빛과 열이 이 층을 통과하려면 10만 년에서 수십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 여정에서 에너지는 수도 없이 부딪치고 흡수되었다가 다시 방출되기를 반복한다. 결국 표면에 이를 때면 거의 일정한 온도가 되어 밝게 타오르는 것이다. 변함없는 태양이 되는 기적 같은 과정이다. 폭발을 품어 내는 그 과정에서 지구를 유지하는 빛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두꺼운 이불이 필요하다. 그저 참고 기다리기만 하는 긴 여정이 아니라, 마침내 모든 것을 조절하여 빛나게 하는 이불이 필요하다. 폭발하며 튀어나가는 우리를 부딪치고 품어 주고 다시 잡아 주면서 결국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는 이불. 시간만이 아니라 인생을 사랑해 주는, 폭발을 빛으로 만드는 이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렇게 우리를 불러 주시고 기꺼이 두터운 이불이 되어 주신 분이 있다. 그분은 지금도 당신을 위해 두터운 이불을 준비하신다. 오늘, 당신이 따스한 빛이 되도록.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등불 아래서 이불 태양 표면 태양 자체 수소폭탄 수조
2026.01.26. 18:33
분주한 시간이다. 쫓아오지 않는 시간인데 이맘때는 서두르게 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인데 새해를 맞을 준비로 마음도 몸도 바빠진다. 손가락 사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에 놀라면서도, 한 해를 정리하는 생각에 멈춰 서기도 한다. 그렇다. 마무리가 진행 중이다. 마무리는 달력의 마지막 장만 넘기는 것이 아니라 흩어진 시간의 조각들을 살피고 가장자리까지 다듬는 일이다. 익숙한 일상으로 닳아버린 마루에 새로운 나무를 대어 가다듬는다. 당연했던 하루에 묻히기 쉬운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땡볕과 비로 거칠어진 문틀도 정성스레 손을 본다. 그 역시 나와 우리의 소중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해의 가장자리를 정돈하다 보면 나도 미처 보지 못한 모서리의 거친 나무결에도 따뜻한 손길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낀다. 아직은 이루지 못한 일들이 거칠고 모질게 마음을 채근하지만, 그조차도 작품으로 만들고 계신 손길을 바라본다. 깊은 숨을 마시고 한 자 한 자 고백한다. “감사합니다.” 지나가는 한 해는 매번 기쁨과 보람은 데리고 가버리고, 후회와 아련한 아픔은 남겨놓는다. 내일을 바라보며 “잘해 보자”고 결단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 눈에 지난날이 그저 과거로만, 그것도 후회로만 남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갈무리는 지나온 시간을 후회와 아픔으로 보관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에는 잘하겠다는 결심으로 씨를 뿌리는 것이 다가 아니다. 싹을 틔우는 양분은 후회의 눈물, 그리고 고통 그대로가 아니라 이들을 선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눈물을 닦으사 소망으로, 고통을 짊어지사 찬송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열매를 거둘 것이다. 그래서 이 옅은 믿음으로도 갈무리한 한 해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담겨 있고, 우리를 여전히 붙잡아 주신 성실하신 사랑을 알기 때문이다. 내 창고에 생각 없이 쌓아놓은 욕심과 미움을 어느새 햇볕 아래 끌어내 놓고, 섬김과 용서를 잊지 말라고 눈짓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제 지나온 길에서 동행하며, 넘어지는 우리와 함께 넘어져 주시고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우리를 일으키신 주님을 내일로 초대하는 시간이다. 우리의 창고를 은혜로 갈무리하고, 우리의 구석구석을 사랑으로 마무리하자. 그리고 내일을 주님과 함께 찬란한 빛무리로 만드는 새 날로 열자.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마무리 갈무리 마무리 갈무리 손가락 사이 햇볕 아래
2025.12.29. 17:44
살아가면서 따뜻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그리고 대개 그렇듯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우리는 행복을 만나곤 한다. 그날도 아이는 몰래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 오히려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순진한 눈으로 내 눈에 마주쳐 왔다. 눈썹을 슬쩍 치켜떠 왜냐고 묻는다. 말 없이 손을 등 뒤로 감추면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거린다. 웃음 사이로 “이제 나도 다 컸다고요”라고 인사하는 까만 창문이 두 개나 보인다. 뒤로 감춘 손에는 아까부터 주물럭거린 사탕 반쪽이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안달이 났다. 아이의 입가에는 그득한 미소가 큰 비밀을 맞혀 보라는 듯 매달려 있다.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비밀을 감추는 진지한 표정이라니. 이쯤 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허허” 기분 좋게 소리 내 웃는다. 아이는 결국 비밀을 활짝 열어 자기 보물을 슬그머니 내어놓는다.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두 눈을 가늘게 만들고 마음이 환해진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조그만 사탕 반쪽은 아이의 전 재산이다. 아이는 한마디를 덜하고 한 발자국을 더 왔다. 내세우기보다 숨기면서도, 나누고 싶은 사랑을 위해 한 발자국 다가와 곁에 섰다. 수줍어하는 용기. 잘난 척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다. 남은 반쪽은 사라진 반쪽이 있다는 말이다. 절반, 딱 그만큼 아이는 자기 기쁨도 챙길 줄 안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사탕이 반쪽이라 나는 더 기분이 좋다. 자기를 아낄 줄 알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나눌 줄 아니, 이 얼마나 지혜로운 것인가. 함께 사랑을 이어갈 힘을 남기니 참으로 귀하지 않은가. 달콤한 보물을 가진 아이는 보물을 나누어 주고 싶다. 좋은 것을 가지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그래서 사랑이다. 더하기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빼기를, 앞으로 달려갈 줄밖에 모르게 된 우리에게 쉬어가는 디딤돌을 알려준다. 높이 쌓기만 하는 우리에게 낮은 곳을 걷는 상처의 발을 보게 한다. 예수님이 수건을 두르고 보셨던 그 발 말이다. 지혜로운 사랑은 사랑을 알아본다. 자신이 만난 이 사랑을 부려먹고 곶감처럼 빼먹으며 사용설명서처럼 읽어가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을 사랑한다. 반쪽 사탕을 내 손에 떨어뜨리듯 쥐어준 아이의 두 눈에 가득 담긴 말이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당신은 예수님이 보내주신 오늘 나의 예수님입니다. 당신을 알아봐서 행복합니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용기 사탕 반쪽 반쪽 사탕 자기 보물
2025.12.08. 19:21
바다는 여전히 신비의 세계다. 우리는 바다 표면에 대해 화성만큼도 알지 못한다. 해양 생물의 약 90%는 아직 분류조차 어렵다고 추정한다. 지금 이 순간도 새로운 생물이 계속 발견되는 곳이 바로 바다이다. 그만큼 놀라운 생물들이 많은데, 새끼를 품는 일에 독보적 존재가 그 안에 있다. 북태평양에 사는 대왕문어는 한 달도 아닌 6개월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을 지킨다. 알 주위를 떠나는 법이 없다. 그 기간 동안 8개의 다리를 끊임없이 움직여 신선한 물과 산소를 불어넣는다. 계속 알을 하나하나 빨판으로 만져서 오염이나 감염을 막아 준다. 애석하게도 어미는 극심한 영양실조로 허약해지고 죽게 된다. 이 부분에 알려진 가장 놀라운 기록은 심해문어가 가지고 있다. 북태평양 심해에 살고 있는 이 문어는 무려 4년이 넘게 알을 품는다.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당연히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이고 역시 쇠약해져 죽음을 맞는다. 심지어 40만 개에 가까운 알을 낳는 대왕문어는 알을 하나하나 만지고 닦는다. 돌본다는 단어가 어울린다면 바로 이 경우가 아닐까. 차가운 심해에서 4년이 넘는 기간을 먹지도 않고 새끼 곁을 지킨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렵다. 게다가 산소가 극히 희박한 그곳에서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여 산소를 불어넣는 어미의 모습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다. 4년 동안 문어의 알은 그대로 알이다. 변하지 않는 그 알을 만져 주고 다리를 흔들며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문어를 생각해 보라. 그저 조금 관심을 가져주면서 왜 이리도 변하지 않느냐고 조급해하는 우리에게 울림을 주지 않는가. 섭씨 2도의 추위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쉬지 않고 다리를 휘저어 마침내 생명을 지키는 문어를 보라. 환경을 탓하며 힘을 잃어가는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응원가가 아닌가. 그런데 이 문어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우리를 품으신 분이 있다. 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나를 품고 나의 인생을 기다려 주신 분이 있다. 나에게 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오물 속에 빠져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때, 그때 나를 보고 팔을 뻗어 닦아주고 돌봐주며, 자신의 생명까지 모두 주신 이가 있다. 오늘,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시고 당신 곁을 떠나지도 않으시며, 당신을 위해 탄식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그분이야말로 위로의 노래요, 힘내라는 외침이 아닌가. 지나치지 마시라, 이 사랑을.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응원가 문어 동안 문어 북태평양 심해 해양 생물
2025.11.17. 17:53
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이를 만끽하는 것이 세속적이거나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도사리는 경우가 많다. 신앙은 자기희생, 자기부인이란 말들과 더 잘 어울려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자기 부인’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좀 다르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이유가 곧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천하를 모두 가진 것보다 귀한 것이 당신의 영혼이고 당신의 생명이라고 설명하신다. 말하자면 자기 부인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세속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너무 적게 행복하다. 우리는 너무 행복을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적게 그리고 가볍게 사랑한다. 자신을 가볍게 사랑하기에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며, 실망하고 작은 비교와 실패에도 흔들린다. 내 환경이나 벌어진 사건이 나에게 값을 매기고 남이 나를 판단한다. 내 환경이나 다른 이들은 나의 가치를 모른다. 그러니 무슨 가격표를 붙이겠는가. 기막힌 일은 내가 나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준 가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예수님짜리’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마치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인 듯 사랑하신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사랑이 있다. 이기적 사랑으로서 자기 사랑이다. 이는 내가 아닌 왜곡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가장 아프고 불행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진실한 가치를 모르고 자신을 더 치장하려고 사랑하니 말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사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욕심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살라고 하니 자기 욕심 아닌가? 그럴 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행복하다는 말이 들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기쁘게 하는,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하나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자로 사는 것이다. 우리만큼 큰 사랑을 받은 존재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역시 없다. 행복을 야무지게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감출 수 없고 감추지 않는다. 등대는 경적을 울리지 않고 다만 빛날 뿐이다. 행복은 다만 빛날 뿐이다. 행복은 우리의 매일 사는 삶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기 때문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추구권 행복 행복 추구권 이기적 사랑 자기 부인
2025.10.27. 18:22
16세기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프랑스 오롱 강에 친구와 함께 놀러 나온 한 청년이 있었다. 친구들은 술에 취한 채로 강을 건너려고 배를 탔고, 그만 배가 뒤집혀 버렸다. 물에 빠진 친구를 본 이 청년은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지만, 자신도 물에 빠져 버렸다.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마침 강둑에 있던 한 하인이 자기 주인인 줄 알고 그를 구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 청년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나를 구해 주신다면 독일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목숨을 잃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유명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헤르만 루트비히였다. 그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 청년을 기억하고, 당시 박해받던 그를 궁정 설교가로 부른다. 그리고 청년은 그와는 전혀 다른 소심했던 청년 우르시누스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다. 이 열정과 소심이 만나 프리드리히 3세의 부탁을 받고 어린아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들게 되니,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 이런 섭리 속에서 태어난 이유이리라. 문답 안에는 구원뿐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가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명시되어 있다. 바로 “감사”다. 우리말 감사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 혹은 마음”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감사는 하나님께 고마움을 보답하는 인사나 마음이다. 반면에 성경의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기쁘게 이를 따라 사는 것을 감사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부담과 짐이 아니라 즐겁게, 기꺼이 따라가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역시 자신의 신앙을 공격했던 여러 제후들 앞에서 성경을 탁자 위에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연령, 신분, 계급의 사람이든, 심지어 가장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으로부터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제게 가르쳐 준다면, 저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하고 그 신적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그 말을 이제 제국의 회의 앞에서 다시 말합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추석이다. 풍요의 시간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감사에 있다. 그렇다면 문답이 말하듯,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추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보답 감사 우리말 감사 하이델베르크 문답 선제후 프리드리히
2025.10.06. 17:52
농부는 씨나 모종을 심어 기르고 이를 거두는 사람이다. 그러나 농부가 키우는 것은 작물만은 아니다. 씨가 떨어지는 곳은 땅이다. 땅은 씨를 가두는 어둠이 아니라 씨가 싹을 틔우는 곳이다. 뿌리를 내리고 백 배, 천 배의 씨가 시작되는 곳이 땅이다. 그래서 농부는 땅도 키운다. 텃밭을 가꿔 본 이들은 잘 알듯이 수확은 해마다 같지 않다. 날씨가 조금만 다르고, 밤과 낮의 기온 차만 바뀌어도 호박과 오이는 몸살을 앓는다. 조심조심하고 마음 다해도 갑자기 덮친 벌레나 곰팡이로 예상치 못한 성적표를 받게 될 때가 부지기수다. 풍성한 수확은 농부가 바라는 기쁨이지만, 지혜로운 농부는 열매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그 열매를 달고 한 해를 햇빛과 함께 보낸 나무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내년을 부탁한다며 비료를 준다. ‘감사 비료’가 그것이다. 열매가 모든 관심을 받는 듯하지만, 사실 열매가 받는 것은 없다. 상은 나무가 받는다. 우리처럼 열매만 먹는 이들에게는 나무조차 잘 보이지 않지만, 농부의 감사는 나무에서 멈추지 않는다. 감사 비료는 나무에게 고맙다고 아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무를 길러 준 땅을 향한다. 나무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것이 바로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 비료는 나무가 아닌 땅에 뿌린다. 농사가 잘돼서만은 아니다. 수확이 적어도 같은 마음으로 뿌려 준다. 단지 다음 해를 기약하는 것만은 아니다. 올해의 수고를 알기 때문이다. 땅은 애썼고, 나무는 힘을 쏟았다. 나무에게만 감사하는 농부는 오히려 나무에게서 배우게 된다. 나무는 열매를 떨구고 나면 곧 땅을 덮기 위해 잎을 떨어뜨릴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감사다. 나무는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심겨진 것이다. 자라난 싹은 뜨거운 여름의 햇볕으로 쉼 없이 열매를 키우지만, 땅 역시 멈추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지치지 않고 뿌리를 기른다. 그렇게 어둠은 뿌리를 단단하게 했고, 빛은 잎을 찬란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열매는 익어 갔다. 남가주의 9월은 감사 비료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어두운 땅도, 찬란한 햇살도 우리에게는 벅찬 감사다. 어둠 속에서조차 뿌리내리게 하시고, 햇살로 반짝이는 잎을 달아 주시는 분은 가장 선한 길을 이루어 가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나무는 잎을 떨궈서 땅을 덮는다. 오늘 나의 감사 비료는 무엇이며 어디에 뿌려질 것인가.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감사 비료 감사 비료 사이 열매 사실 열매
2025.09.15. 17:45
아무리 무더운 여름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아이들의 기세를 꺾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호주머니에 비장의 무기를 챙겨, 하루 종일 태양이 뜨겁게 달군 동네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땅바닥에 삼각형이 그려지면, 아이들의 표정은 오케이 목장의 결투만큼이나 긴장감이 넘친다. 쪼아 찍기, 깔 빼기, 날라 찍기 같은 화려한 기술들이 등장하고, 마당은 승부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오늘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번뜩였지만, 방앗간 집 큰형은 염소가 종이를 집어먹듯이 구슬을 모조리 가져갔다. 아, 오늘도인가. 또랑또랑했던 눈망울이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질 때, 뜻밖의 환호가 터졌다. 마지막 하나까지 쓸어가려던 그 엄지 구슬이 삼각형 안에 굴러 들어온 것이다. 판세는 단숨에 뒤집혔다. 따먹혔던 죽은 구슬들은 모두 살아났다. 기적 같은 반전에 월드컵 축구 결승전처럼 아이들은 흥분해 버렸다. 그랬다. 삼각형 밖으로 밀려난 구슬은 죽은 구슬이었다. 땅 위에 그은 선이 무슨 힘이 있다고, 선을 넘은 구슬은 판에서 밀려나 숨을 잃었다.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놀이에 끼지 못한다. 나중에 보니 세상에도 세상이 그어 놓은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벗어나면 실패요 좌절이라 부르고, 더 이상 끼워주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내일도 이 땅도 우리 편이 아니다. 죽은 구슬은 그렇게 내일을 잃는다. 그런데 엄지 구슬 하나가 삼각형 안으로 넘어왔다. 엄지 구슬은 죽었지만, 다른 구슬들은 모두 살아났다. 어쩌면 우리 속에는 이 감추어진 소망이 있었나 보다. 삼각형에도, 오징어게임에도, 술래잡기에도 이 반전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얻는 이야기. 집 나간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아들의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는 아련한 이야기가 숨겨진 보석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잘하려고 애쓸수록, 손가락에 힘을 줄수록 선 밖으로 벗어났다. 죽지 않으려고 내가 삼각형을 그려 보았지만, 결국 남의 구슬조차 죽였다. 그러나 죽기 위해 선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계셨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셨다. 내가 예쁜 구슬이어서도, 잘나고 똑똑한 구슬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선을 넘어 들어와 우리가 그은 선을 지우셨다. 자유를 선언하시고 우리에게 땅을 돌려주셨다. 우리를 아끼시고 또 아끼셨다. 오직 그렇게 사랑하셨다. 우리를 살리는 구슬이, 여기 이 땅에 오셨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구슬 엄지 구슬 동네 마당 입고 가락지
2025.08.11. 18:15
“모든 훌륭한 일은 개미가 일하듯이 이루어진다.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라프카디오 허언) 개미는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이다. 그래서 캐나다 출신 배우 마리 드레슬러는 “아니, 개미들이 그렇게 바쁘다면 어떻게 모든 소풍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거야”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개미는 정말 쉬지 않고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여왕이 통치하는 개미 왕국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통치자도 감독도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어떤 개미도 다른 개미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스스로 할 일을 알고 움직인다. 지혜의 책인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개미의 자발성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것이야 생물학자들의 몫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개미에게 가서 배워라.”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이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 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라는 말을 내세워, 어찌 되었든 한 번 믿기만 하면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에 일정 부분 진리가 담겨 있더라도, 많은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거나 게을러지는 단초가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신세 진 것 정도로 여긴다. 값없이 받았다고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진실은 그 반대다.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았을 뿐, 실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짜리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고백한 이들은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만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루터의 말처럼 믿음은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묻기도 전에 선한 일을 한다. ‘예수님짜리’이니 그 액면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게으른 자가 아니라, 감독이 없어도 스스로 일하는 자이다. 불한당이란 떼를 지어 다니며 재물을 빼앗는, 남을 괴롭히는 파렴치한 무리다. 그런데 한자로는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땀을 흘리지 않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을 불한당이라 부른 것이다. 우리가 어찌 선한 일에 불한당이 될 수 있는가. 믿음은 값없이 받으나, 그 믿음은 게으름과 함께하지 않는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불한당 개미 왕국 하나님 자신 몫이지만 성경
2025.07.14. 19:26
해변을 지나다 보면 절벽 위에 혼자 서 있는 집을 볼 때가 있다. 절경과 어우러진, 바위 위에 아슬하게 얹힌 집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든든한 돌 위에 지은 집이다. 영어로는 ‘on the rock’이다. 재미있게도 위기에 빠졌다는 말 역시 ‘돌’을 써서 표현한다. 이때는 ‘on the rocks’라고 한다. 배를 타고 가다가 만나는 암초를 뜻하기 때문이다. 같은 돌이지만, 단지 복수가 되자 든든한 돌에서 무덤 같은 돌이 된 것이다. 이리보면 흔하고 작은 돌이 좀 불리해 보인다. 예로부터 저잣거리에서 말도 안 되는 물건을 파는 이들은 ‘돌팔이’라 불렸다. 돌은 쓸모없고 아무 효과도 없는 엉터리로 여겨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돌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큰 바위에 누가 걸려 넘어지는가? 오히려 ‘큰 바위 얼굴’처럼 사람들이 경이롭게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큰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 하나에 넘어진다. 큰 바위는 오히려 피난처가 된다. 높은 바위는 요새가 되고, 넓은 바위는 그 아래에 숨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반석이라 표현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크지 않은 돌이라고 모두 걸림돌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귀한 돌, 즉 보석이 있다. 금강석뿐 아니라 감람석, 단백석, 남보석 등 모두 돌이다. 그중에서도 귀한 돌은 ‘옥’이라 하여 황옥, 녹옥, 자옥이라 불렀다. 어쩌면 우리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보석’일 수 있다. 우리 인생에도 암초를 만난 것 같은 때가 있다. 위기에 빠진 배처럼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힘든 상황이 있다. 그때 우리는 먼저 ‘rocks’가 아닌 ‘rock’을 생각해야 한다. 위기의 돌들이 아니라, 반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돌들을 보면, 그들이 사실은 빛나고 있는 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그 어려운 순간을 지나면 그것이 ‘보석 같은 시간’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나를 보석으로 빚어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직접 보석이라고 부르신다. 아름답고 빛나서만은 아니다. 그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돌’로 여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도 그를 길가에 버렸다. 그러나 그분은 보배로운 산 돌이셨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을 보배로운 산 돌로 만든 집으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거처로 삼으신 살아 숨 쉬는 보석의 궁전, 그것이 우리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보석 반석이신 하나님 바위 얼굴 감람석 단백석
2025.06.23. 17:40
이른 아침, 어둠을 밀어내는 이슬을 밟는다. 담벼락을 따라 번져가는 햇살이 눈 부시다. 그 사이로 커피잔을 든 채 전화를 받으며 자동차로 향하는 사람이 보이고, 신문을 든 채 뛰어가는 이, 시동을 걸어 놓고 물건을 찾느라 소리치는 이도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된다. 분주한 하루가 저물고 어둠이 내릴 즈음, 나직이 되뇌어 본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시지.” 나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지키시며 나와 동행해 주셨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내 일, 내 감정, 내 필요에만 얼마나 매달려 있었던가. 하나님은 그저 아플 때는 의사가 되어 주시고, 속상하면 위로자가 되어 주시며, 부족하면 채워 주는 분이라고만 믿었다. 어릴 적, 붐비는 장터에는 늘 어묵 가게가 있었다. 좁은 가게 틈에 어깨를 밀어 넣고는 10원어치 어묵을 참 맛있게도 먹었다. 찌그러진 양은 사발에 담겨 나온 어묵 두 개를 다 먹고 나면 대나무 꼬치만 남았고, 가게 바닥에는 어묵 없는 꼬치들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문득 그 꼬치들 속에서 하나님이 겹쳐 보인다. 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해 온 것이 아닐까. 정작 가장 어리석은 것은, 그런 대접을 받으시면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토록 내 곁에 있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어묵 없이 팽개쳐진 꼬치가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배를 채우려는 그 마음을 외면했던 것이다. 나는 보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나에게 주셨을 때조차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어찌 이리 어리석고 무딜 수 있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걸으신다. 내가 좋아서, 나를 보고 싶으셔서 그러하신다. 나와 말하고 싶으셔서 내 안에 오신다. 함께 숨 쉬고, 함께 고통받고, 함께 눈물 흘리신다. 이 바쁜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신다.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오늘도 질문을 받는다. 너는 그 사랑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그 사랑에, 너의 심장은 어떻게 뛰고 있느냐고.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오뎅 사랑 어묵 가게 대나무 꼬치 어치 오뎅
2025.06.02.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