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이를 만끽하는 것이 세속적이거나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도사리는 경우가 많다. 신앙은 자기희생, 자기부인이란 말들과 더 잘 어울려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자기 부인’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좀 다르셨다. 자기를 부인하는 이유가 곧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천하를 모두 가진 것보다 귀한 것이 당신의 영혼이고 당신의 생명이라고 설명하신다. 말하자면 자기 부인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을 추구하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세속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너무 적게 행복하다. 우리는 너무 행복을 즐기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적게 그리고 가볍게 사랑한다. 자신을 가볍게 사랑하기에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며, 실망하고 작은 비교와 실패에도 흔들린다. 내 환경이나 벌어진 사건이 나에게 값을 매기고 남이 나를 판단한다. 내 환경이나 다른 이들은 나의 가치를 모른다. 그러니 무슨 가격표를 붙이겠는가. 기막힌 일은 내가 나의 가치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르쳐준 가치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준 ‘예수님짜리’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을 마치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인 듯 사랑하신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사랑이 있다. 이기적 사랑으로서 자기 사랑이다. 이는 내가 아닌 왜곡된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가장 아프고 불행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진실한 가치를 모르고 자신을 더 치장하려고 사랑하니 말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고 사실은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직 욕심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살라고 하니 자기 욕심 아닌가? 그럴 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행복하다는 말이 들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기쁘게 하는,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은 하나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자로 사는 것이다. 우리만큼 큰 사랑을 받은 존재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역시 없다. 행복을 야무지게 누리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감출 수 없고 감추지 않는다. 등대는 경적을 울리지 않고 다만 빛날 뿐이다. 행복은 다만 빛날 뿐이다. 행복은 우리의 매일 사는 삶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살기 때문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추구권 행복 행복 추구권 이기적 사랑 자기 부인
2025.10.27. 18:22
16세기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프랑스 오롱 강에 친구와 함께 놀러 나온 한 청년이 있었다. 친구들은 술에 취한 채로 강을 건너려고 배를 탔고, 그만 배가 뒤집혀 버렸다. 물에 빠진 친구를 본 이 청년은 망설임 없이 물에 뛰어들었지만, 자신도 물에 빠져 버렸다. 수영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마침 강둑에 있던 한 하인이 자기 주인인 줄 알고 그를 구하게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 청년 올레비아누스는 하나님께 약속했다. “나를 구해 주신다면 독일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목숨을 잃었던 친구 중 한 명이 바로 유명한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헤르만 루트비히였다. 그는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 청년을 기억하고, 당시 박해받던 그를 궁정 설교가로 부른다. 그리고 청년은 그와는 전혀 다른 소심했던 청년 우르시누스를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다. 이 열정과 소심이 만나 프리드리히 3세의 부탁을 받고 어린아이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만들게 되니, 바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다. 이런 섭리 속에서 태어난 이유이리라. 문답 안에는 구원뿐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가 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명시되어 있다. 바로 “감사”다. 우리말 감사는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 혹은 마음”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감사는 하나님께 고마움을 보답하는 인사나 마음이다. 반면에 성경의 감사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기쁘게 이를 따라 사는 것을 감사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부담과 짐이 아니라 즐겁게, 기꺼이 따라가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역시 자신의 신앙을 공격했던 여러 제후들 앞에서 성경을 탁자 위에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연령, 신분, 계급의 사람이든, 심지어 가장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성경으로부터 무엇인가 더 나은 것을 제게 가르쳐 준다면, 저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하고 그 신적 진리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그 말을 이제 제국의 회의 앞에서 다시 말합니다… 여기 성경이 있습니다.” 추석이다. 풍요의 시간이지만 진정한 의미는 감사에 있다. 그렇다면 문답이 말하듯, 창조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추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보답 감사 우리말 감사 하이델베르크 문답 선제후 프리드리히
2025.10.06. 17:52
농부는 씨나 모종을 심어 기르고 이를 거두는 사람이다. 그러나 농부가 키우는 것은 작물만은 아니다. 씨가 떨어지는 곳은 땅이다. 땅은 씨를 가두는 어둠이 아니라 씨가 싹을 틔우는 곳이다. 뿌리를 내리고 백 배, 천 배의 씨가 시작되는 곳이 땅이다. 그래서 농부는 땅도 키운다. 텃밭을 가꿔 본 이들은 잘 알듯이 수확은 해마다 같지 않다. 날씨가 조금만 다르고, 밤과 낮의 기온 차만 바뀌어도 호박과 오이는 몸살을 앓는다. 조심조심하고 마음 다해도 갑자기 덮친 벌레나 곰팡이로 예상치 못한 성적표를 받게 될 때가 부지기수다. 풍성한 수확은 농부가 바라는 기쁨이지만, 지혜로운 농부는 열매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그 열매를 달고 한 해를 햇빛과 함께 보낸 나무에게 고맙다고, 그리고 내년을 부탁한다며 비료를 준다. ‘감사 비료’가 그것이다. 열매가 모든 관심을 받는 듯하지만, 사실 열매가 받는 것은 없다. 상은 나무가 받는다. 우리처럼 열매만 먹는 이들에게는 나무조차 잘 보이지 않지만, 농부의 감사는 나무에서 멈추지 않는다. 감사 비료는 나무에게 고맙다고 아부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무를 길러 준 땅을 향한다. 나무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것이 바로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사 비료는 나무가 아닌 땅에 뿌린다. 농사가 잘돼서만은 아니다. 수확이 적어도 같은 마음으로 뿌려 준다. 단지 다음 해를 기약하는 것만은 아니다. 올해의 수고를 알기 때문이다. 땅은 애썼고, 나무는 힘을 쏟았다. 나무에게만 감사하는 농부는 오히려 나무에게서 배우게 된다. 나무는 열매를 떨구고 나면 곧 땅을 덮기 위해 잎을 떨어뜨릴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감사다. 나무는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심겨진 것이다. 자라난 싹은 뜨거운 여름의 햇볕으로 쉼 없이 열매를 키우지만, 땅 역시 멈추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지치지 않고 뿌리를 기른다. 그렇게 어둠은 뿌리를 단단하게 했고, 빛은 잎을 찬란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열매는 익어 갔다. 남가주의 9월은 감사 비료의 시간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어두운 땅도, 찬란한 햇살도 우리에게는 벅찬 감사다. 어둠 속에서조차 뿌리내리게 하시고, 햇살로 반짝이는 잎을 달아 주시는 분은 가장 선한 길을 이루어 가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나무는 잎을 떨궈서 땅을 덮는다. 오늘 나의 감사 비료는 무엇이며 어디에 뿌려질 것인가.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감사 비료 감사 비료 사이 열매 사실 열매
2025.09.15. 17:45
아무리 무더운 여름도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는 아이들의 기세를 꺾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책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는 호주머니에 비장의 무기를 챙겨, 하루 종일 태양이 뜨겁게 달군 동네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땅바닥에 삼각형이 그려지면, 아이들의 표정은 오케이 목장의 결투만큼이나 긴장감이 넘친다. 쪼아 찍기, 깔 빼기, 날라 찍기 같은 화려한 기술들이 등장하고, 마당은 승부사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오늘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번뜩였지만, 방앗간 집 큰형은 염소가 종이를 집어먹듯이 구슬을 모조리 가져갔다. 아, 오늘도인가. 또랑또랑했던 눈망울이 힘을 잃고 땅으로 떨어질 때, 뜻밖의 환호가 터졌다. 마지막 하나까지 쓸어가려던 그 엄지 구슬이 삼각형 안에 굴러 들어온 것이다. 판세는 단숨에 뒤집혔다. 따먹혔던 죽은 구슬들은 모두 살아났다. 기적 같은 반전에 월드컵 축구 결승전처럼 아이들은 흥분해 버렸다. 그랬다. 삼각형 밖으로 밀려난 구슬은 죽은 구슬이었다. 땅 위에 그은 선이 무슨 힘이 있다고, 선을 넘은 구슬은 판에서 밀려나 숨을 잃었다.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놀이에 끼지 못한다. 나중에 보니 세상에도 세상이 그어 놓은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벗어나면 실패요 좌절이라 부르고, 더 이상 끼워주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내일도 이 땅도 우리 편이 아니다. 죽은 구슬은 그렇게 내일을 잃는다. 그런데 엄지 구슬 하나가 삼각형 안으로 넘어왔다. 엄지 구슬은 죽었지만, 다른 구슬들은 모두 살아났다. 어쩌면 우리 속에는 이 감추어진 소망이 있었나 보다. 삼각형에도, 오징어게임에도, 술래잡기에도 이 반전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얻는 이야기. 집 나간 탕자가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 아들의 옷을 입고 가락지를 끼는 아련한 이야기가 숨겨진 보석처럼 남아 있는 것이다. 잘하려고 애쓸수록, 손가락에 힘을 줄수록 선 밖으로 벗어났다. 죽지 않으려고 내가 삼각형을 그려 보았지만, 결국 남의 구슬조차 죽였다. 그러나 죽기 위해 선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 계셨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셨다. 내가 예쁜 구슬이어서도, 잘나고 똑똑한 구슬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선을 넘어 들어와 우리가 그은 선을 지우셨다. 자유를 선언하시고 우리에게 땅을 돌려주셨다. 우리를 아끼시고 또 아끼셨다. 오직 그렇게 사랑하셨다. 우리를 살리는 구슬이, 여기 이 땅에 오셨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구슬 엄지 구슬 동네 마당 입고 가락지
2025.08.11. 18:15
“모든 훌륭한 일은 개미가 일하듯이 이루어진다. 조금씩, 그리고 끊임없이.” (라프카디오 허언) 개미는 성실과 부지런함의 상징이다. 그래서 캐나다 출신 배우 마리 드레슬러는 “아니, 개미들이 그렇게 바쁘다면 어떻게 모든 소풍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거야”라고 유쾌하게 말했다. 개미는 정말 쉬지 않고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여왕이 통치하는 개미 왕국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통치자도 감독도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어떤 개미도 다른 개미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스스로 할 일을 알고 움직인다. 지혜의 책인 잠언은 이렇게 말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개미의 자발성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지는 것이야 생물학자들의 몫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개미에게 가서 배워라.”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에 너무 익숙하다. 그래서 이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 번 신자는 영원한 신자’라는 말을 내세워, 어찌 되었든 한 번 믿기만 하면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에 일정 부분 진리가 담겨 있더라도, 많은 신자가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거나 게을러지는 단초가 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 신세 진 것 정도로 여긴다. 값없이 받았다고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진실은 그 반대다. 우리가 값을 치르지 않았을 뿐, 실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짜리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고백한 이들은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만 그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는다고 말했다. 루터의 말처럼 믿음은 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묻기도 전에 선한 일을 한다. ‘예수님짜리’이니 그 액면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게으른 자가 아니라, 감독이 없어도 스스로 일하는 자이다. 불한당이란 떼를 지어 다니며 재물을 빼앗는, 남을 괴롭히는 파렴치한 무리다. 그런데 한자로는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땀을 흘리지 않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을 불한당이라 부른 것이다. 우리가 어찌 선한 일에 불한당이 될 수 있는가. 믿음은 값없이 받으나, 그 믿음은 게으름과 함께하지 않는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불한당 개미 왕국 하나님 자신 몫이지만 성경
2025.07.14. 19:26
해변을 지나다 보면 절벽 위에 혼자 서 있는 집을 볼 때가 있다. 절경과 어우러진, 바위 위에 아슬하게 얹힌 집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말 든든한 돌 위에 지은 집이다. 영어로는 ‘on the rock’이다. 재미있게도 위기에 빠졌다는 말 역시 ‘돌’을 써서 표현한다. 이때는 ‘on the rocks’라고 한다. 배를 타고 가다가 만나는 암초를 뜻하기 때문이다. 같은 돌이지만, 단지 복수가 되자 든든한 돌에서 무덤 같은 돌이 된 것이다. 이리보면 흔하고 작은 돌이 좀 불리해 보인다. 예로부터 저잣거리에서 말도 안 되는 물건을 파는 이들은 ‘돌팔이’라 불렸다. 돌은 쓸모없고 아무 효과도 없는 엉터리로 여겨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돌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큰 바위에 누가 걸려 넘어지는가? 오히려 ‘큰 바위 얼굴’처럼 사람들이 경이롭게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큰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 하나에 넘어진다. 큰 바위는 오히려 피난처가 된다. 높은 바위는 요새가 되고, 넓은 바위는 그 아래에 숨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반석이라 표현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크지 않은 돌이라고 모두 걸림돌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귀한 돌, 즉 보석이 있다. 금강석뿐 아니라 감람석, 단백석, 남보석 등 모두 돌이다. 그중에서도 귀한 돌은 ‘옥’이라 하여 황옥, 녹옥, 자옥이라 불렀다. 어쩌면 우리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보석’일 수 있다. 우리 인생에도 암초를 만난 것 같은 때가 있다. 위기에 빠진 배처럼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힘든 상황이 있다. 그때 우리는 먼저 ‘rocks’가 아닌 ‘rock’을 생각해야 한다. 위기의 돌들이 아니라, 반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돌들을 보면, 그들이 사실은 빛나고 있는 보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단지 그 어려운 순간을 지나면 그것이 ‘보석 같은 시간’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나를 보석으로 빚어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직접 보석이라고 부르신다. 아름답고 빛나서만은 아니다. 그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신을 ‘돌’로 여긴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사람들도 그를 길가에 버렸다. 그러나 그분은 보배로운 산 돌이셨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을 보배로운 산 돌로 만든 집으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거처로 삼으신 살아 숨 쉬는 보석의 궁전, 그것이 우리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보석 반석이신 하나님 바위 얼굴 감람석 단백석
2025.06.23. 17:40
이른 아침, 어둠을 밀어내는 이슬을 밟는다. 담벼락을 따라 번져가는 햇살이 눈 부시다. 그 사이로 커피잔을 든 채 전화를 받으며 자동차로 향하는 사람이 보이고, 신문을 든 채 뛰어가는 이, 시동을 걸어 놓고 물건을 찾느라 소리치는 이도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시작된다. 분주한 하루가 저물고 어둠이 내릴 즈음, 나직이 되뇌어 본다.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으시지.” 나는 잊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지키시며 나와 동행해 주셨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내 일, 내 감정, 내 필요에만 얼마나 매달려 있었던가. 하나님은 그저 아플 때는 의사가 되어 주시고, 속상하면 위로자가 되어 주시며, 부족하면 채워 주는 분이라고만 믿었다. 어릴 적, 붐비는 장터에는 늘 어묵 가게가 있었다. 좁은 가게 틈에 어깨를 밀어 넣고는 10원어치 어묵을 참 맛있게도 먹었다. 찌그러진 양은 사발에 담겨 나온 어묵 두 개를 다 먹고 나면 대나무 꼬치만 남았고, 가게 바닥에는 어묵 없는 꼬치들이 한가득 널려 있었다. 문득 그 꼬치들 속에서 하나님이 겹쳐 보인다. 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대해 온 것이 아닐까. 정작 가장 어리석은 것은, 그런 대접을 받으시면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토록 내 곁에 있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어묵 없이 팽개쳐진 꼬치가 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배를 채우려는 그 마음을 외면했던 것이다. 나는 보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의 목숨을 나에게 주셨을 때조차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어찌 이리 어리석고 무딜 수 있는가.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걸으신다. 내가 좋아서, 나를 보고 싶으셔서 그러하신다. 나와 말하고 싶으셔서 내 안에 오신다. 함께 숨 쉬고, 함께 고통받고, 함께 눈물 흘리신다. 이 바쁜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신다.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오늘도 질문을 받는다. 너는 그 사랑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그 사랑에, 너의 심장은 어떻게 뛰고 있느냐고.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오뎅 사랑 어묵 가게 대나무 꼬치 어치 오뎅
2025.06.02. 17:47
요즘 ‘농단’이란 말이 다시 자주 등장한다. 원래 농단이란 끊어진 언덕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모든 것을 살피는 자리를 뜻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맹자의 ‘공손추’ 하편에서 욕심 많은 장사꾼을 빗대어, 탐욕스러운 권력의 대명사로 굳어졌다. 만일 성군이 농단에 올랐다면, 그 자리는 당연히 백성을 이롭게 하는 가장 좋은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높은 자리는 책임을 요구한다. 널리 내다보고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리를 만들고, 그 자리를 자리답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 자리에 늘 한 사람의 영웅을 세우고 싶어 한다. 우리는 독단을 그토록 경계하면서도, 독단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을 때 이를 거국적 결단, 신의 한 수라고 부른다. 더 무서운 것은 독선이다. 독선이란 혼자 선한 것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자신이, 아니 자신만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위 “진심인 것이다.” 과연 그것이 신의 한 수일까. 우리는 참된 ‘신의 한 수’를 하나님께 다시 배워야 한다. 삼위로 계셔서 독단과 독선이 아닌 연합과 동행, 그리고 사랑을 통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저 없이 농단의 자리에 서신다. “주께서는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며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굽어살피시는도다.” 아무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드러난다. 진정한 신의 한 수는 삼위 하나님의 한 수다. 그분은 그의 백성에게 사랑을 선언하시고, 그 사랑으로 행동하셨다. 자신과 생명을 내어 주셨으며, 백성과 함께하시려고 그들 안에 오셔서 사셨고, 사시며, 다함없이 사실 것이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의 유혹이 우리를 흔들 때 말씀을 심어 뿌리를 내리게 하시고, 홀로 남겨진 듯 외로우면 햇볕을 비추어 잎에 생기를 주신다. 모든 것이 답답할 때는 기도로 하늘이 열린 것을 보게 하시고, 나 자신 속으로만 숨어들려 할 때는 활활 타는 사랑을 보여주신다. 이것이 진심이다. 우리 마음이 의심과 불신으로 흔들릴 때면 우리의 느낌표가 되어 주시고, 스스로 잘났다고 달리면 쉼표가 되어 주신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을 때는 언약의 따옴표가 되시고, 독단과 독선에 빠지면 물음표로 걸음을 멈추고 말씀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인생의 거룩한 마침표가 되어 주신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농단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하나님 농단 삼위 하나님 독단과 독선 거국적 결단
2025.05.12. 19:00
봄이 되면 가지들은 연해지고, 싹이 돋고, 잎을 내기 시작한다. 성급하게 꽃을 먼저 피우는 나무들도 있다. 고국에서는 흔히 보는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꽃으로 그늘을 만드는 목련이 있다. 요즘 한창 멋을 내고 있는 벚꽃과, 벚꽃이 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꽃을 피우는 배나무가 그렇다. 하지만 더 급한 것들도 있다. 꽃은 일찍 피우고도 가을을 기다리는 배나 사과와는 달리, 겨울을 지낸 우리에게 찾아오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봄의 선물들이 있다. 연초록으로 물들어 가는 나무를 보거나, 화려하게 향기를 품어내는 꽃들을 마주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가장 실속 있는 것은 우리가 뜻밖에 만나는 열매들이다. 새콤달콤한 감귤, 침이 고이는 매실, 입안 가득 차는 딸기, 그리고 지나치기 쉬운 무화과도 어느새 익어 우리 손길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 열매들 중에는 참열매와 헛열매가 있다고 한다. 진짜와 가짜가 있다는 뜻이다. 처음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개살구”였다. 맛도 없고, 먹고 나면 배탈이 나는 그 개살구 말이다. 그런데 개살구는 참열매란다. 그럼 과연 헛열매는 무엇인가. 가짜나 거짓 열매란 무엇일까. 놀랍게도 바로 딸기와 무화과였다. 더 눈이 커진 것은 사과와 배도 가짜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이것은 식물학적인 분류다. 씨방이 아니라 꽃이나 꽃받침이 발달해서 열매가 되는 것을 헛열매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떤 기준에서는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눈에 익숙하고 맛있게 먹으니 당연히 참열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헛열매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는 여전히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쫓아다니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비록 학문적인 분류이긴 하지만, 헛열매라 불리우는 배나 사과나무는 무척 속상할 것이다. “가짜”라니! 결국, 출신과 혈통이 참열매와 헛열매를 가른다는 말이 아닌가. 아무리 맛있는 사과도, 그 출신이 꽃받침이라 헛열매가 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과를 위해 궐기대회라도 해야 할 판이다. 비록 ‘헛열매’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은 찐열매들이 아닌가. 호박부터 바나나까지, 사과부터 매실까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고 자라게 하신 열매들이니 말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의 인생에는 헛된 것이 없다. 헛열매도 우리 입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며, 자기만의 맛을 낸다. 혼자 자랐다고 잘난 척하는 그 열매야말로 사실 헛열매도 되지 못한, 진정 은혜를 받아야 할 열매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인생 헛열매도 우리 사실 헛열매 우리 인생
2025.04.14. 17:54
캐나다 가수인 레너드 코헨은 ‘Anthem’이란 곡에서 ‘세상 모든 것은 다 깨어져 금이 가 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빛은 들어온다’고 노래했다. 우리 모두가 깨어진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둠에 갇힌 우리들은 깨진 곳을 인정하기 싫고, 눈에 보이는 틈을 막아보려다 날카로운 상처에 계속 손을 베이기도 한다. 금 가고 깨어진 곳만을 돌아보고 또 보는 동안 그 틈은 더 날카로워지기 일쑤다. 돌아보고 만질수록 더 피가 흐른다. 어떤 이는 금이 가지 않았다며 눈을 감아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밝은 낮에도 앞을 보지 못하고 길을 잃는다. 어떤 이는 깨어져 금이 생겼다고 쓸모없게 여긴다. 이상하게도 무엇을 담고 있는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사랑을 잃어버려 깨어진 금이 있고, 사랑을 받지 못해 생긴 금도 있다. 날카로운 혀에 새겨진 금도 있고, 억울한 속 때문에 생긴 금도 있다. 그러나 금이 간 그곳이야말로 빛이 들어오는 틈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마음이 깨어졌던 한 시인은 아름다운 꽃이 시들어 떨어지는 자리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위로의 빛을 보았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의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 담담함이나 초월이라는 위로의 열매가 아니라, 가장 진실하고 소중한 눈물을 하나님의 위로라고 말한다. 금이 간 곳에서 들어오는 빛은 단지 빛이 아니다. 손에 들고 비추는 손전등 빛이 아니다. 그렇다고 저 멀리 하늘 위에서 그저 찬란하게 빛나기만 하는 태양빛도 아니다. 금이 간 고통을 알고, 고통 속에 들어오는 빛이다. 아픔을 알고, 아파하는 빛이다. 눈물을 아는, 눈물의 빛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생명을 주는 빛이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우시고, 우리를 위해 상처를 입으시고, 아픔을 심장과 몸에 담으시는 이 빛은 사람이요, 우리 모두의 눈물이 되시고 생명을 살리기에 이 빛은 하나님이시다. 이 빛은 당신 안에 담긴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알려주는 빛이다. 깨어진 금을 보며 아파하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지금도 당신의 금 간 그곳에는 변하지 않는 이 빛이 비추고 있다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자기의 금을 메우려고 애쓰고, 금이 메워져야 내가 좋은 그릇이라고 한없이 자신을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당신에게 비추는 이 빛을 보라. 그 무엇도 하기 전에, 이 빛을 보라.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레너드 코헨
2025.03.03. 18:41
슬레이트 지붕 아래 선풍기는 힘겹게 돌아가고, 벽 대신 드리운 천막 사이로 퍼렇고 뻘건 빛이 일렁인다. 흙바닥이 드러난 낡은 비닐 장판 위, 숨조차 죽이며 요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반짝이는 눈동자들. 흩어진 조각같은 이 기억이 후일 한 청년이 하나님의 마음을 엿보았던 순간이 되었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도,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적시게도, 부끄러움으로 몸을 떨게도 한다. 그러나 기억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말했듯, 기억은 진실의 조각을 다시 모아 하나의 몸을 이루는 일이다. 그러므로 기억의 반대말은 망각이 아니라 해체이다. 진실을 자르고 흩어버리는 것이다. 기억은 오늘의 눈과 손으로 진실을 맞추는 일이다. 오늘의 마음이 정직하지 않다면, 우리가 복원하는 과거 또한 정직할 수 없다. 거짓은 진실을 모두 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실의 조각을 은밀히 잘라낼 뿐이다. 나 자신을 아무리 멋지게 꾸미고 스스로를 괜찮다고 말해도, 여전히 자신이 만든 가면을 벗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한 과거가 없다면, 사랑하고 배우며 용서받는 오늘 또한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오늘을 잘 살라 하지만, 거짓도 욕망도, 양심의 찔림도 시간이 지나면 잘라내려 한다. 그러나 개인도 사회도 거짓과 욕심 앞에 정직할 때, 비로소 사랑과 용서가 싹튼다. 과거의 거짓과 욕망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오늘의 거짓과 욕망이 진실을 절단하는 일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 되게 하지만, 잘린 진실은 몸을 나누고 서로를 대적하게 만든다. “나 같은 죄인”을 외면한 채 “잘되는 나”를 꿈꾸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정하는 이에게 예수님은 의원이시다. 잘하려는 열정이 욕심으로 변할 때, 하나님을 위한다며 세상의 칭찬과 명성을 구하고 싶어질 때,, 내 인생을 원하는 자리에 올려놓고 싶어질 때, 천막 속 반짝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숨죽였던 눈동자들을 떠올린다. 기억을 조각내고 흩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지만, 다시 맞추어 본다. 그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 힘과 뜻대로만 살아버린 줄 알았던 시간 속에 주님의 마음이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오늘도 “나를 기억하라” 말씀하시며, 자신을 떡과 포도주로 내어놓으신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기억 욕망도 양심 슬레이트 지붕 비닐 장판
2025.02.10. 17:35
매일 나보다 앞서 출근하던 현관문은 간 곳이 없고 하루의 피곤을 아무 불평 없이 안아주던 소파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깔깔대며 아이들이 밟고 내리던 계단은 손잡이 끝만 남아 그을음을 토합니다. 기억이 많을수록 슬픔도 깊어집니다. 도시라는 삭막한 콘크리트 덩어리 속에서 쉼터가 되어주던 자리는 이제 주소지만 남은 아픔이 되었습니다. 놀란 가슴은 어찌해야 할지 불안해하며, 허탈한 마음은 분노에 신음합니다. 어둠이 우리를 덮고 절망이 노을빛조차 감추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늘이 어둠에 깊이 물들어 갈수록 별들도 하나 둘 나타납니다. 그리고 더 많이 더 깊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둠 속에 별이 반짝이며 버티는 것 같지만 실은 별들 속에서 어둠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별들이 새벽 햇살을 마중 나갑니다. 서쪽 하늘에는 도무지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어둠이 버티고 있었지만, 푸른 하늘과 함께 동은 트고야 맙니다. 절망은 우리를 삼킬 수 없고 소망 앞에 겨우 버틸 뿐입니다. 소망은 절망보다 강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쓰며, 쥐어짜기도 하고 심심하면 손목을 비틀었던 자연이 실은 얼마나 무서우며 그 앞에 우리가 참으로 연약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도 다시 생각합니다. 바람 속에 모든 것이 사그라질 때,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 것을 준비하고 살았는지도 묻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소망은 사랑을 먹고 자라며, 위로는 함께 흘리는 눈물과 기댈 곳을 주는 따뜻한 어깨와 말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재난에 온 힘을 다해 맞서주는 소방대원들의 수고와 용기가, 잠시라도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해 소파가 되어주려고 달려오는 이웃들의 사랑이, 힘든 이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우는 분들과 함께 우는 눈물이 되고, 버텨주는 위로가 됩니다. 그 속에 다시 일어서는 당신이 우리의 감사입니다. 다시 손을 모읍니다. 하나님이시여 그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에게 향하소서. 우리의 힘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곤고한 자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며 외면하지 않으시니 우리의 곤고와 눈물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통 속에, 그 고통과 함께하시는 주님.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의 구원이시여.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절망 서쪽 하늘 콘크리트 덩어리 자의 고통
2025.01.20. 18:00
온 힘을 다해 하루를 달리던 해가 뉘엿거리며 지평선 너머로 몸을 누일 때면, 하루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옹기종기 비친다. 어깨 위로 내려앉은 붉은 노을을 맞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의 모습에는 인생의 무게가 묵직하게 얹혀 있다. 생각해 보면, 이들 중 처음부터 그렇게 묵직한 걸음을 시작한 이가 어디 있으랴. 세상에 나와 첫걸음을 떼며, 발그레한 볼로 방 안을 씩씩거리고 누비던 그 아이가 바로 우리였다. 그러나 그 첫걸음이 어느새 수많은 발걸음이 되어버리고, 우리는 왜 걷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앞사람을 따라 부지런히 발만 놀리며 살아간다. 집으로 돌아와 온종일 돌아 다녔던 발을 내려다보면, 거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돌투성이 길을 걸으며 굳은살이 박이고, 살기 위해 애타게 뛰어다니던 발은 어느덧 마디마디 모양이 변해버렸다. 독한 주인을 만나 바쁘게 달리다 발톱마저 빠져버린 발은 이제는 너무 지쳐 쉴 곳만을 찾는다. 흙먼지와 오물은 그곳까지 따라다니고 발은 조롱에 분노하고 멸시에 한숨 쉰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다가 가고 싶지 않은 길을 억지로 걸었던 발, 남보다 앞서려고 한 걸음이라도 먼저 내밀려고 허둥대던 발. 서로를 밟고 짓누르며 뭉개던 발, 미움과 분노로 상처를 내던 발. 이 모든 발에는 깊은 흔적과 고통이 남아, 발을 꺼낼 때마다 우리는 아픔과 두려움을 마주 대하고 아픈 상처들은 외로움으로 더욱 깊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그 발을 두 손으로 잡아주는 분이 있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걸었고 무엇을 밟았든지 상관없이, 성큼 다가와 수건을 두르고 우리의 발을 씻겨주는 분이 있다. 더러움과 상처를 모르는 채로 잡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지나온 길을 자신의 손에 담아 물로 씻고 수건으로 닦아준다. 작은 생채기 하나조차 놓치지 않는다. 그 손에는 더 깊은 상처가 보인다. 고통과 눈물을 아는 손, 외로움을 견뎌낸 손이다. 그래서 상처를 덮고 아픔을 감싸며,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준다. 마침내 우리의 발은 쉼을 얻는다. 상처에는 새살이 돋고, 굳은살이 밴 발에는 따뜻한 손의 온기가 남는다. 이제 남은 흔적은 숨기고 싶기만 한 상처가 아니다. 놀라운 손이 빚은 아름다움이다. 그분이 고요히 말한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발은 이제 서두르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이 있는 발은 성실할 뿐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상처 더러움과 상처 어깨 위로 생채기 하나
2024.12.30. 18:45
고즈넉한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 사이로 움직이는 별이 보일 때가 있다. 유성처럼 빠르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이 별은 바로 비행기다. 비행기는 수백 톤의 강철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는 또 수십 톤의 사람까지 싣고 있지만 하늘을 난다. 그 육중한 몸이 뜰 때마다 놀랍다. 더 놀라운 일은 우리는 지금도 비행기가 어떻게 뜨는지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양력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전문가에 의하면 양력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 있는데, 날개 주변에 발생하는 난류와 유동이 너무 복잡하여 이 식으로도 완전하고 고유한 답을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깔끔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리라. 사람이 만들고도 사람이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도 비행기는 하늘을 난다. 생각할수록 경이롭다. 다 알지 못해도 우리는 이 커다란 금속 덩어리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감탄하며 즐길 수 있다. 함께 타고 날 수도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완전히 알아야 하늘로 날 수 있다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하늘뿐이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조차도 이를 설명하기 위해 똑같은 방정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공식을 몰라도 우리 얼굴에 부딪히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즐거워한다. 우리는 자주 세상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불안해한다. 그 이유를 알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도 묻는다. 마치 방정식의 답을 찾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모든 설명을 듣고 싶다. 알기만 하면 해결할 듯이 답을 찾지만, 사실은 알아도 해결할 힘이 없을 때가 거의 전부다. 정말 이유를 몰라서 불안한 것일까? 사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에 이해에 매달리고, 그래도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은 아닌가? 자기가 원하는 답을 만들려고 문제와 출제자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토록 배반하고, 떠나고 돌아서지만 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지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우리가 갚아야 할 눈물과 한숨까지도 짊어지시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우리를 감싸고, 그 사랑은 우리를 인내하며, 그 사랑은 우리를 일으킨다. 사랑은 우리의 무지를 넘고 우리의 계산을 부수며 우리의 가슴에 부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방정식 스토크스 방정식 금속 덩어리 우리 얼굴
2024.12.02. 17:55
어떤 운동선수가 제자리 점프를 가장 잘할까. 당연히 농구 선수가 떠오른다. 얼마나 잘하면 스카이 워커나 에어라는 애칭이 붙었겠는가. 그런데 답은 역도 선수라고 한다. 오히려 농구 선수들도 점프를 더 잘 뛰려고 역도 선수들의 훈련을 받는다는 말에 놀란 적이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의외로 우리를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아마존의 정글을 보면서 우리는 이곳이야말로 지구의 허파라고 당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지구에는 이미 충분한 산소가 있을 뿐 아니라 따로 허파가 필요 없다. 아마존이 만든 산소는 아마존의 생물들이 거의 다 소모해 버린다. 오히려 아마존의 진정한 가치는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붙잡는다는 데 있다. 지구 탄소 소비량의 2~5%(매년 10~20억 톤)를 흡수한다니 환경 보존을 위해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지구의 허파가 아니라 지구의 콩팥이나 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신앙생활에도 의외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매우 자연스럽다.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헌신한다.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헌신이라고 쓰는 단어가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헌신이란 몸과 마음을 드린다는 뜻이 아닌가. 내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것인데 누가 누구에게 드릴 수 있을까. 언어유희가 아니라면 우리의 헌신이란 우리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내 것으로 잘못 알고 맘대로 쓰지 않겠다는 확인이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긴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더해 드릴 것은 없다. 제물을 바쳐서 신에게 아부하는 일을 성경은 우상숭배라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품에 안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함께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바치셨다. 그 하나님이 오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시고, 울어주시고, 함께 속상해하시고, 웃으시고, 내 발을 씻으시며 당신을 섬기신다. 그렇게 섬김을 받았으니, 그와 같이 우리도 이웃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이웃 농구 선수들 역도 선수들 지구 탄소
2024.10.07. 18:21
어느 마을에 농부가 있었다. 마침,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다. 너무 기뻤던 농부는 아내에게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자"고 말했다. 몇 개월이 지나 송아지를 모두 장에 내다 팔려고 가는 길에 그만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져 죽고 말았다. 농부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 하필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조금은 치사한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우스개다. 그럼 "모든 것을 드린다"는 말은 어떤가. 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표현이 아닌가? 믿음의 대상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일과 이를 받은 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물을 가져가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신에게 비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신을 섬기는 방식인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제물이 필요할까? "내가 설령 배가 고프더라도 너희에게 달라고 말하겠느냐? 온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다 나의 것이다." (시편 50:10-12)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내보내서 제물 만들어 오라고 시키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왜 읽기도 어려운 제사 이야기를 성경에 적어놓았을까?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쪼개지고 태워지는 제물처럼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약속을 십자가에서 지키셨다. 우리는 갖다 바치면서 신을 섬기는 일에 익숙해 있다. 왜냐하면 두렵고 불안해서 우리가 만든 신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지닌 이들조차도 갖기 쉬운 오해는 우리에게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손으로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고 우리의 정성이라고 부른다. 아닌 것처럼 기도하면서도 봉사와 선교를 하나님 앞에 천국 가는 보험처럼 바친다. 격화소양이라는 말이 있다.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우리의 최고를 바치려는 모든 시도는 다름 아닌 격화소양이다. 시원할 리가 없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물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다. 주님께 나아오는 유일한 조건은 아픈 마음이요, 지친 어깨요, 자신의 연약을 보는 눈물이며 말조차 하기 힘든 탄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이유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 헌신도 함정 농부가 가슴 제사 이야기
2024.09.09. 18:07
주변에 '세일'이라는 말이 많이 들리거나 보이면, 평소에 사려던 물건을 구매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지만, 경기가 어려워지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속이 뜨끔하기도 한다. 요즘은 발로 품을 팔아 세일을 찾아다니지 않고 손가락이 고생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세일을 찾아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도 옛날 시장같이 좁은 골목길에 좌판처럼 물건들을 늘어놓고 북적거리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중에도 이것저것 없이 물건을 쌓아놓고 어깨를 비벼대며 걷던 요란했던 시장이 있었다. 바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구경처럼 따라다닌 그곳은 없는 것이 없었고, 쌓아놓은 물건들은 어린아이의 눈에 신기 그 자체였다. 제일 놀라웠던 순간은 그렇게 정신없이 쌓아놓은 물건들 속에서 기가 막히게 찾는 물건을 내어놓을 때였다. 한겨울에 노란 여름 티셔츠를 찾던 손님도 놀람이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쌓인 옷들 속에서 밑장을 빼던 아저씨의 무심한 손길도 아이에게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우리 마음도 도떼기일 때가 있다. 내 마음이 분명한데 아무렇게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도무지 풀기 어려운 때가 있다. 선비처럼 고고한 척하지만, 사실은 난장을 치는 중이다. 내 마음이지만 모르는 속이 더 많기 때문이다. 평안은 어디 던져 놓았는지 찾을 길이 없고, 못난 내 얼굴만 광고지처럼 마음에 가득 붙어있다. 쌓아놓은 물건들은 도통 알아볼 수조차 없는데 좌절이라는 상표에 실망이라는 가격표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끌벅적하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듯해도 속을 아는 이에게는 정돈된 서랍이다. 내게는 엉켜진 실타래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물건이라도 내 속을 정말 아는 이라면 그 속에서 사랑이라는 옷을 찾아내고 기쁨이라는 넥타이도 꺼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살펴보셨고 나를 아십니다. 내 내장을 지으시고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 생각을 밝히 아시고 내 모든 길도 아십니다. 보소서 내 혀의 말 중에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옷 가게가 분명했는데, 어머니는 뜬금없이 스팸을 찾으셨고, 눈을 슬쩍 맞춘 아저씨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한 통조림을 가게 뒤쪽에서 가져오셨다. 정말 없는 것이 없구나! 내 마음속에서 평화와 위로를 찾아내실 뿐 아니라, 내게는 도무지 없을 것 같은 용기와 승리까지 들고 오신다. 정말 없는 것이 없구나! 이 주님이 나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꺼내 주신 분이다. 나에게 어지럽기만 한 내 마음은 주님께는 정돈된 서랍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도떼기시장 우리 마음 가게 뒤쪽 옛날 시장
2024.08.05. 17:46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에 이상기후라는 말도 정상이 되어버리는 요즘이다. 올 봄은 왜 이리 춥냐고 집어넣은 겉옷을 꺼내던 날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에어컨이 없으면 여름이 도통 비켜주질 않는다. 사무실 주인은 여름이 아니라 에어컨이다. 그런데 문을 열고 가만히 숨을 고르며 늦은 오후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반소매로 드러난 팔을 금방 싸늘하게 만드는 것이 에어컨이지만, 머리카락 사이까지 새로운 숨을 넣으며 지나가는 바닷바람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한다. 도시 속 빌딩에서야 힘들지만, 소박한 평상에서 맛보는 '함께 사는 여름'이다. 문을 닫은 바람과 문을 연 바람은 이렇게 다르다. 에어컨은 문을 닫아야 켤 수 있다. 우리가 만드는 바람은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런데 에어컨이 세게 돌수록, 콧물도 나고 머리가 아프며 오한에 열까지 난다. 이럴 때 전문가들이 항상 말한다. "문을 열라". 교회는 열심이 필요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헌신을 드린다. 우리의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못하실 것처럼 그렇게 열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다 우리도 모르게 문을 닫는다. 은혜를 그렇게 바라면서 우리가 만든 바람만 찾는다. 감동과 눈물, 강한 믿음과 헌신, 봉사와 여러 행사를 구하고 좇다가 오한이 나고 숨이 가쁘고 메말라가고 머리가 아프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밖에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내 열매가 무엇인지 헛갈린다면, 의심해 보라. 문이 닫혀있지 않는지. 주님을 밖에 세워놓고 문을 닫은 채 부리는 열심은, 나 자신을 땔감으로 삼아 태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자라면 누가 예수님을 부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찾지 않겠는가. 그러나 막상 그 주님은 우리의 주가 아니다. 내 감동, 내 섬김, 내 열심, 내 평안이 내 주인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은혜조차도 받는 내가 주인이다. 그러나 회개 없는 은혜는 신발을 신은 채로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다. 주님이 없는 열심은 문을 닫아 놓고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의외로 문은 열지 않은 채 에어컨이 싫다고 꺼버리는 이들도 있다. 에어컨 바람에 열광하다가 냉방병으로 고생하는 이나 그건 아니라면서 목마름도 모르고 고생하는 이나 문을 닫고 살기는 마찬가지다. 은혜는 원하나 회개하지 않고, 겸손은 원하지만 낮아지지 않고, 사랑은 원하지만 자신의 손은 내밀지 않는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에어컨 바람 헌신 봉사 머리카락 사이
2024.07.08. 17:57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며 다녀야 했던 골목길이 갑자기 공터를 만나는 곳이 있었다. 집안에 벼슬을 하셨던 조상이 있었을 커다란 한옥 대문 앞이었다. 그 기와집 처마 밑을 지키셨던 뽑기 할머니,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던 에펠탑 빙수차, 겨울을 지켜주던 가게 앞 호빵 찜통들이 터줏대감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엿장수도 공터를 채워주던 단골이었다. 딸그락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달려가 숟갈 총 부러진 것, 대꼬라지 떨어진 담뱃대, 병이라면 박카스 병까지 몽땅 들고 나왔다. 멀쩡한 양은 냄비를 들고 나온 녀석까지 온통 손수레에 숨겨진 엿을 보려고 까치발을 세웠다. 고사리손들이 가져온 고물을 밀어 넣으면 엿이 되어 나왔다. 그렇게 받자마자 입에 넣고는 없어질세라 하루 종일 오물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가져다 바친(?) 고물들은 참 사연 많은 것들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견뎌냈던 숟가락, 심지어 일제를 지나온 양은 냄비도 있었으리라. 닿고 깨어지고 부러지고 구멍 나버린 쓸모없고 모자랐던 고물들. 다 가져가면 달콤한 엿이 되었다. 마치 수고하고 무거운 우리들 인생을 가져 가면 달콤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처럼 말이다. 꼬리를 물다 보니 불경하게도 예수님이 엿장수가 되셨다. 하지만, 목수셨는데 엿장수면 또 어떠하리. 우리를 향해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며 우리의 모든 험한 인생을 받아주시고, 달콤한 주님의 은혜를 주신 분이니 말이다. 가끔 고물로도 쳐줄 수 없는 것을 들고 올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 쓸데없는 천 쪼가리를 가져와 그저 엿과 엿장수 얼굴만 바라보는 쑥 들어간 간절한 눈을 엿장수는 외면하지 않았다. 대팻날을 세워 헐렁한 가위로 엿을 쳤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짧은 한가락이었는데 긴 두 가락짜리로 말이다. 철없던 우리는 왜 얘는 더 많이 주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 녀석들아, 엿장수 맘대로다" 요즘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을 엿장수 맘대로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만난 엿장수는 배를 곯던 퀭한 눈에 맘대로 엿을 주던 아저씨였다. 주님을 만난 이들은 고물조차 못 되는 인생을 엿으로 바꿔 먹은 사람들이다. 달콤하고 살살 녹는 주님의 사랑을 오늘 아니 평생 그리고 영원히 오물거리는 사람들이다. 뭐라도 사라지면 엿 바꿔 먹었느냐고 묻곤 한다. 우리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이 온다. 그날 말하리.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엿으로 몽땅 바꿔 먹었다고.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엿장수 엿장수 맘대로 엿과 엿장수 양은 냄비
2024.05.27. 18:58
대중목욕탕 사우나에 가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모래시계를 세워 놓곤 한다. 모래가 반쯤 차 있는 초반에는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래표면이 서서히 내려가지만 마지막 1cm 정도를 남기고는 모래가 순식간에 흘러내린다. 모래시계의 지름이 줄어들다 보니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고 지루함도 덜 수 있다. 등산이나 마라톤을 하다 보면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를 '사점(死點ㆍDead Point)'이라고 한다. 이 고비를 지혜롭게 넘기면 한동안은 편안하게 등산과 마라톤을 지속할 수 있다. 필자는 가끔 정원 관리를 한다. 오랜만에 전기톱과 예초기(소형 엔진을 이용해서 날을 회전시켜 풀을 베는 도구)를 둘러메고 일을 시작하면 10분도 안 되어 근육이 아파온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무리해서 하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 새 근육통은 사라지고 2~3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을 할 수 있다. 사점과 비슷한 원리라고 짐작해 본다. 돌아보면 영어나 자전거 서예와 그림을 배울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초반의 지루함과 어려움을 어느 정도 감내하고서야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배우는 속도도 빨라졌다. 만약 초반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우나를 나와 버렸거나 근육통을 참지 못하고 전기톱을 내려놓았거나 영어 자전거 서예 그림을 포기했다면 보람과 성취감은 덜했을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는 노스님께서 치매 예방을 위해 법문 암송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법문 한 페이지 분량을 외우는데 한나절이 걸렸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30분이면 완벽하게 외울 수 있다고 하신다. 경이로운 인간의 적응력이다. 수 년 전 원불교 신문에 매주 교리에 관해 연재를 한 적이 있다. 주변에서는 매주 한 편씩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며 걱정해 주셨지만 사실을 한 달에 한 번 쓰는 것보다 매주 쓰는 것이 수월한 측면도 있다. 프로 작가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책상에 앉는다고 바로 글이 써지지는 않는다. 초안을 구상하면서 뇌의 구조를 '글쓰기'에 적합한 모드로 바꿔야 하는데 이 과정이 실제 '작문'하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보통은 1~2시간이 걸리는 이 과정이 매주 글을 쓰는 경우에는 10분 정도로 짧아진다. 무슨 일이든 처음 하는 일은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데에는 몸도 마음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 과정을 넘지 못하고 포기를 하게 되고 이 과정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취와 보람의 열매를 향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포기 안한다고 무조건 성공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리하게 등산을 하거나 전기톱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큰 사고나 부상의 위험도 있을 수 있다. 단 모든 일에는 극복 가능한 사점과 사점 이후의 보람과 성취가 있음을 새겨 볼 일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등불 아래서 point dead dead point 자전거 서예 영어 자전거
2024.05.06. 1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