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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자 큐티] 자살은 인간의 특권인가? (2)

동물의 세계에는 약육강식이라는 철저한 자기중심적 법칙이 존재합니다. 동물은 자기중심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동물은 자기보다 약한 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것은 자신의 삶을 위하여 잡아먹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중심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남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숭고한 자유를 주시려는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것은 인간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동물의 세계를 흉내내려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것은 큰 슬픔입니다.

2010.04.13. 16:01

[생활 속에서] 행복한 소명찾기

스코트랜드의 목사이자 철학자였던 토머스 찰머스가 했던 말은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찰머스는 행복의 필수 요소를 1)할 일 2)사랑할 대상 3)소망으로 보았다. 인간이 할 일이 있고 그 일에 사랑할 대상이 있고 그 일에 소망이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게 찰머스의 설명이다. 인간이 일을 하는 것은 저주가 아니라 신이 창조를 위해 했던 일을 이어받은 축복이다. '일과 예배'라는 책을 썼던 벤 패터슨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연간 1만 달러 이하의 수입을 받으면서 어렵고 고된 일을 할지언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끊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일 자체에 거룩함과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일을 한다는 것은 창조주의 동역자가 되고 그의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은 위에 소개한 두 사람이 말하는 일과는 180도 다르다. 일이란 가치있는 일을 의미한다. 가치가 있는 일이면 수입을 묻지 않는다는 게 찰머스와 패터슨이 의견일치를 본 부분이다. 어떤 일이 가치가 있을 때 그 일에서 사랑할 대상이 생기고 또한 그 일을 통해 소망을 얻게 된다. 찰머스의 행복을 위한 필수 요건을 약간 수정한다면 1)할 일 2)거룩한 사랑할 대상 3)거룩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하면 직업(occupation)과 소명(vocation)을 구분할 수 있다.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해 갖는 것이다. 거룩한 사랑의 대상과 소망 없이 그저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명은 거룩한 사랑의 대상도 뚜렷하고 소망도 선명하다. 그래서 패터슨은 "직업은 많으나 소명은 하나다"라고 설명했다. 때로 우리는 직업과 소명을 따로 가질 수도 있다. 가장 행복한 이는 아마도 직업과 소명이 같은 사람일 것이다. 즉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소명인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소명에는 거룩한 사랑의 대상이 있고 거룩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보수는 많은데 거룩한 사랑의 대상이 없고 소망이 없다면 이는 가치가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린 때로는 가치 없는 일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사람에게 소명이 없다면 그 사람은 억만장자라고 해도 행복할 수가 없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을 가진 자가 왜 자살을 선택할까? 우리 부모 세대는 여전히 자녀가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택하길 원한다. 자녀가 그 직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인데도 말이다. 소명이 있는 자는 일이 즐겁다. 일 하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에 휴가를 따로 즐길 이유를 찾지 못한다. 물론 휴가나 쉼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요즘 같이 휴가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회 은퇴를 꿈꾸는 사회에서는 쉼이 부정적으로 교육될 수 있다. 소명이 없기에 일은 괴롭고 주말을 기다리고 빠른 은퇴를 원하는 것이다. 소명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가까운 가정을 보면 소명을 찾을 수 있다. 함께 할 일이 있고 사랑할 대상이 있고 소망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주부라는 직업 그것은 가장 위대한 이 땅의 소명이다.

2010.04.13. 16:00

[사목의 향기] 사제로서의 삶

지난 수년 동안 교황님께서는 가톨릭 교회가 1년간 중점을 두고자 하시는 여러 주제를 선택하고 선포하시어 모든 가톨릭 교회가 함께 이에 대해 묵상하고 실천하는 해로 만드셨습니다. 성모님의 해(1987-1988) 가족의 해(1993-1994) 성부 성자 성령의 해 (1997-2000) 묵주 기도의 해 (2002-2003) 사도 바오로의 해 (2008-2009)를 거쳐 2009년 예수 성심 대축일부터 올해 6월 19일까지는 영적 완덕을 향한 사제들의 노력을 북돋우고자 특별히 '사제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사제직에 봉헌된 1년간의 '사제의 해'를 지내면서 사제인 저는 과연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깊은 핵심까지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제는 각기 다른 일을 하지만 그리스도와 그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사랑 가톨릭 교회의 7성사 그 중에서도 성체 성사를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정성으로 집행하는 의무로는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은 주로 7성사를 주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혼배 성사와 세례 성사를 주고 많은 사람들의 고해 성사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미팅에 참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이러한 미팅에서의 논의들을 통해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못합니다. 또한 사제들은 영성 성경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에 대해 가르치고 강의를 하고 발표를 하고 교회에서의 많은 기도 모임을 이끌어갑니다. 또한 가정을 방문하고 축성해줍니다. 힘든 삶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서는 반드시 꼭 조언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몇 시간 동안 이 원고를 쓰는 것도 가톨릭 사제가 하는 많은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본당 내의 아이들 청소년 청년 예비 부부 노인 병자 성인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많은 사목 활동들을 활성화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사제들은 작은 비즈니스의 주인처럼 본당의 재정 건물과 시설관리 직원 관리 기본 운영과 교회 내의 리더쉽 구조 관리도 담당해야 합니다. 본당의 여러 그룹을 방문하고 사제로서 그들이 원하는 사항들을 들어주고자 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사제가 하는 이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한 희생 제사인 미사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체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사제는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의 가장 대단한 임무를 하느님께로부터 위임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는 희생 제사를 봉헌하신 본인이시며 다른 미사들은 이를 다시 재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에게 미사를 봉헌하는 의무는 우리가 하는 일일 뿐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정의해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들 역시 죄인이며 또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막중한 임무들을 수행하는 데 있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사제를 대신해서 확신하컨데 우리는 절대적으로 사제로서의 우리의 삶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며 그의 교회와 교회 안의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사제의 해를 소개하는 서한에서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는 모든 사제들이 전해야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호소력 있게 설명해주십니다. "교회로서 또한 사제로서 우리는 나자렛의 예수님께서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이시고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며 이 진리가 인간이 마음속 깊이 고대하던 열망과 부합한다는 확신으로 기뻐합니다. 그리스도 선포의 내용과 방식은 말씀의 강생 신비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사건의 신비 안에 있습니다. 선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참다운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성은 직무 사제직의 가치를 올바로 이해하게 해 줍니다. 직무 사제직이 없다면 성찬례도 선교도 심지어 교회 자체도 없을 것입니다."

2010.04.13. 15:57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원망하는 자식들이 서운한데…

Q: "자식들을 키울 때에는 먹고 살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집안일에 무관심한 사람이라 제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자식들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지 못하고 키웠습니다. 그래서 지금에 와 자식들이 저를 원망하는 말을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아이들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A: 자식들은 어릴 적에 부모가 어떤 음식을 해주었는지 얼마나 비싼 기저귀를 채웠는지 어떤 좋은 옷을 사 입혔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자식들의 기억에 남는 것은 부모가 가난과 고생 속에서도 자기를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거나 아플 때 부모가 자신을 들쳐 업고 병원까지 뛰어갔던 일 이런 것들이지요. 이런 기억들은 감동으로 남습니다. 아이를 잘 키우겠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자신이 고생하는 것을 아이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생 속에서도 아이에게만은 좋은 옷 사 입히고 좋은 것만 먹이고 좋은 학교 보내며 풍요롭게 키웁니다. 그런 물질적 방식의 사랑은 나중에 불효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논 팔아서 공부시키면 불효자 되고 머슴살이 시킨 아들은 효자 된다."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아이를 키우는 방식은 자식을 불효자로 만드는 길입니다. 아이가 불효자가 되는 것은 아이의 잘못이 아닙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부모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아이는 감동하고 아이는 효자가 됩니다. 아이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옛날에 전쟁터에서 엄마가 아이를 가슴에 품은 채 총을 맞아 죽었는데 그 엄마의 품 속에서 아기가 하나도 다치지 않고 살아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엄마입니다. 아이는 그런 사랑을 먹고 자라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랐으므로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 해도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선한 마음이 있습니다. 엄마의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이의 심성 가장 밑바닥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엄마는 먹고사는 물질적인 문제에 정신이 팔려 아이들에게는 마음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키웠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는 당연히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상처가 남게 됩니다. 성장하고 나이 들어 생각하면 어머니의 힘겨운 삶이 이해가 되고 "우리 어머니 고생 많이 하셨다" 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는 채워지지 않는 한 부분이 늘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 술을 한 잔 한다거나 옛날이야기가 깊어지면 그런 불평과 원망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자식들의 그런 말을 듣고 섭섭하게 여기실 것 없습니다. "다 너희들 키우느라 그랬지 나 혼자 잘살겠다고 그랬느냐" 하고 변명하거나 억울해 하실 것도 없습니다. "불법을 알았더라면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때는 내가 어리석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미안하다"라고 자식들에게 참회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질 겁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참회하시면 자식들이 어떤 말로 원망을 해도 반발심이 일지 않고 미안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따뜻하게 보살펴 키워주지 못했는데도 나쁜 마음을 품지 않고 지금과 같이 잘 자라준 것만도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기십시오. 좋은 쪽으로 마음과 생각의 길을 트셔야 합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고맙게 생각하면 그 자식은 저절로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식을 효자로 만드는 것은 나한테도 좋은 일이지요. 자식이 여섯인데 하나같이 불효자라고 생각하면 본인의 인생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내 자식을 내가 효자로 만들며 사시기 바랍니다.

2010.04.13. 15:5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진흙·연꽃은 둘 아닌 '하나'

# 풍경 1 : 법정 스님의 다비식 때였죠. 상좌인 덕현 스님이 “화중생연(火中生蓮)!”이라고 외쳤습니다. ‘화·중·생·연’. 불길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는 뜻이죠. 사람들은 ‘불길’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선 수시로 불길이 올라오니까요. 학교 성적, 아이들 교육, 취업에 대한 불안, 가족 문제 등 꺼지지 않은 불씨는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늘 겁이 납니다. 행여 그 불꽃이 훨훨 되살아날까 봐 말입니다. 그런 불꽃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는 건 참 엉뚱한 소리입니다. ‘불꽃’은 무조건 꺼야 할 대상인데 어떻게 거기서 ‘연꽃’이 나올까요? # 풍경 2 :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초기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이죠. 법정 스님도 생전에 이 게송을 무척 아꼈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연꽃’ 을 언급하네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숱한 수행자들이 이 구절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깁니다. 그런데 참 흥미롭네요. ‘진흙’과 ‘연꽃’을 바라보는 시각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진흙을 싫어합니다. 진흙은 가까이하면 곤란한 대상, 피해야 할 대상, 고통스러운 대상입니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골치 아프기 때문이죠. 대신 연꽃은 무척 좋아합니다. 정갈하고,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이죠. 게다가 불가(佛家)에서 연꽃은 ‘깨달음의 상징이잖아요. 결국 사람들은 이런 결론을 내리더군요. “진흙은 싫고 연꽃은 좋다.” 이걸 ‘화중생연’에 적용해도 마찬가지죠. “불길은 싫지만 연꽃은 좋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죠. “나는 불길이 싫어. 나는 연꽃만 원해”라고 외치는 이들에게선 결코 연꽃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찬찬히 살펴 보세요. 연의 꽃대가 어디에서 올라오나요? 그렇습니다. 화중생연, 불길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숫타니파타』에 기록된 붓다의 게송도 마찬가지죠.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진흙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그걸 아주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끊임없이 나를 힘들고, 지치고, 가슴 아프게 하는 내 삶의 고통이 과연 불길인가. 쉬지 않고 나를 볶아대는 일상의 스트레스가 과연 진흙인가. 불길이 진정 불길인가, 진흙이 정말 진흙인가. 그걸 꿰뚫어야 합니다. 그럼 알게 되죠. 진흙이 있어서 연꽃이 올라오고, 불꽃이 있어서 연꽃이 피는 걸 말입니다. 결국 둘이 아닌 거죠. 불꽃도 꽃이고, 연꽃도 꽃이니까요. 둘 다 내 마음의 꽃이죠. 실은 하나의 꽃인데 내가 엉뚱한 오해의 시선으로 보면 불꽃이 되고, 바른 이해의 시선으로 보면 연꽃이 되는 거죠. 그러니 “나는 진흙이 싫어, 연꽃만 좋아”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진흙과 연꽃을 둘로 나누는 나의 오해, 나의 착각을 걷어내면 그만이죠. 그걸 걷으면 답할 수 있습니다. 사자가 왜 소리에 놀라지 않는지 말이죠. 연꽃이 왜 진흙에 물들지 않는지 말이죠. 바람이 왜 그물에 걸리지 않는지 말이죠. 거기에 답할 때 우리의 생활도 고요하고, 맑고, 자유로워질 테니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놀라지 않고, 물들지 않고, 걸리지 않을 테니 말이죠. 그 답이 뭘까요? 연꽃이 물 위에 뜨기 때문도 아니고, 사자의 심장이 커서도 아니고, 바람의 살결이 부드러워서도 아닙니다. 그럼 뭘까요? 둘이 아니기 때문이죠. 소리와 사자, 진흙과 연꽃, 그물과 바람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죠. 모두가 내가 만든 ‘꽃’이니까요.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죠. 나와 상대를 하나로 보면 놀람도 없고, 물듦도 없고, 걸림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때는 진흙 속에서 연꽃을 보고, 연꽃 속에서 진흙을 보는 거죠. 진흙과 연꽃이 한몸이니까요. 그걸 두고 붓다는 “번뇌가 보리(깨달음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버거워하는 번뇌의 무게가 실은 지혜의 무게인 거죠. 절망하지 마세요

2010.04.13. 15:51

[변화] '마음의 감기'

지난주 배우 최진영이 자살을 했다. 자살한 누나가 남기고 간 조카들의 등록금을 벌겠다던 그가 자살을 해서 주위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경찰은 이전에도 자살을 기도한 사실 최근 출연하는 작품이 없어 괴로워했던점 등 우울증과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왔던 것이 극단적인 자살로 이어진 것 같다고 밝혔다. 스트레스란 외부로부터 힘이 가해졌을 때 생기는 물체의 일그러짐이라는 뜻이다. 본래 공학ㆍ물리학에서 사용하는 말이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주위 환경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시력과 청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이를 잘만 이용하면 많은 일을 더 효과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스트레스를 잘 조절하지 못할 때는 우리 몸과 정신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킨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우울증의 요인이 될 수 있다. 과거 인류가 육체의 질병과 싸웠다면 현대인들은 스트레스와 불면증 등 정신병과 싸우고있다. 특히 이민 사회는 '마음의 감기'라 불리는 우울증과의 전쟁중이다. 한국에서처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나 스트레스를 해소 할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마음의 감기'에 자주 걸린다. 우울증은 마음을 바꾸어 먹는다고 나아지는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심한 경우에 자살로 이끄는 무서운 정신적인 질병이다. 마음을 긍정적으로 가지고 무조건 기도만하라고 조언하는 것은 자칫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살로 이르게 할 수 있다. 자살 기사 끄트머리에 가끔 붙어있는 '~교회교인'이라는 수식어를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생긴다. 부흥의 물결이 한창이던 70년대 초창기 기도와 말씀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며 약이나 의술 사용을 거부하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심리학에 물든 기독교... 어쩌구' 하면서 이제는 정신적인 병에 정신적 의술인 상담과 정신병 약을 쓰지 못하게 해 안타까운 목숨들을 또 잃고 있다. 정신적인 문제는 대부분 우리 몸의 뇌신경 전달물질의 분비 작용의 이상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는 육신적인 질병을 위해 열심히 중보기도 하고 적절한 치료를 주선하는 것 처럼 정신적인 질병을 위해서도 기도와 말씀뿐만 아니라 더욱 적극적인 정신 의학적 대처를 권해야 한다.

2010.04.06. 15:08

[400자 큐티] 자살은 인간의 특권인가? (1)

얼마전 유명 연예인이 또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대통령까지 자살로 죽음을 택하는 오늘 한국 사회의 자살 현상은 무언가 심각한 문제성을 안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성직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올바른 인간론의 결여에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라 사료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에게만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자기의 의지대로 끊을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입니다. 자연계의 모든 생물들은 오직 자연의 법칙에 따르며 살고 죽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만 이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셔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 의지까지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2010.04.06. 15:08

[생활 속에서] "헌금보다 헌신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뭔가에 헌신하며 살아간다. 다만 헌신의 대상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 헌신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신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그의 삶 속에 세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고 하나님이 차지하는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이면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게 된다. 그러나 헌금을 드리는 것은 그에게 돈이 있다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에게만 헌금이 열려있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실천했던 헌금 생활에 대해 매우 칭찬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마게도냐 성도들은 많은 환란을 당하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넘치는 기쁨으로' 헌금을 드렸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헌금에 대해 "극한 가난 속에 드려진 풍성한 헌금"이라고 표현하였다. '극한 가난'과 '풍성한 헌금' 이 두 개념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들의 신앙 속에서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런 조화가 가능했을까? 그 비밀은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전 까지는 사실 한 푼의 헌금도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지 않고 드리는 헌금은 단지 형식적인 기부금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맡겨주셨는데 그가 드리는 헌신의 내용은 너무 초라할 때가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적극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주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어떻게 하면 뺐어갈까" 고민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으로 오히려 그 분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더 풍성한 축복을 주시고 누리게 할까"를 늘 생각하시며 실천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내가 드린 얼마 안 되는 물질에 의존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다. 진정한 헌금은 마치 하나님을 구제하듯이 내 던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헌금은 하나님께 몸을 드린 사람이 그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을 아름다운 일에 사용하기 위해 힘을 다해 돌려드리는 것을 뜻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힘을 다해 드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더 풍성한 것을 경험하도록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헌금은 단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 나의 시간일 수 있으며 나의 재능 일 수 있고 나의 몸 전체일 수 있다. 이렇게 헌신하며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맡겨주시고 보다 아름답고 선한 일들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게 될 것이다.

2010.04.06. 15:07

[사목의 향기] 나에게 부활이 주는 의미

알렐루야! 알렐루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그가 살아나셨다! 지난 40일간의 사순 기간 동안 우리는 '알렐루야'를 외치지 않고 내적인 훈련과 회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묵상을 하며 엄숙하게 보냈습니다. 이제 드디어 가톨릭 교회는 50일간의 기쁜 부활 시기를 맞이하고 축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의 승리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는 어떠한 의미입니까? 저에게 있어 부활은 다음의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옵니다. 긍정적인 태도. 삶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삶에서 생기는 대다수의 문제들은 우리의 부정적인 태도로 인해 더욱 어려워진다고 확신합니다. 병원에서 미소를 띠고 죽어가는 노인에게서 또 가장 가난한 이웃중에 만나는 가장 행복한 여인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부활은 긍정적인 사람들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재미. 볼링도 치고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스쿠버 다이빙도 배우고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파티도 하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농구 게임도 보러가고 비디오 게임도 하고 쇼핑도 가고 주위 사람들과 농담도 하고 웃기면서 지내십시오. 부활은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입니다.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현존은 전지 전능하시고 모두를 사랑하시는 우리의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가장 확실하고 풍부한 증거입니다.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오로지 신앙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50년이상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한 남편이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아내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아내의 뺨에 가벼운 키스를 하며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요세미티의 장엄한 광경을 볼때 느끼는 것과 같은 아름다움입니다. 부활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은 아름답습니다. 감사. 부활은 넘치는 기쁨과 축하의 날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환희 가운데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극적인 도전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부활의 선물의 위대함을 안다면 우리는 저절로 감사하게됩니다. 또한 이 감사는 이 모든 것들 가능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를 닮아감으로써 표현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없이는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사랑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천국. 예수님께서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라고 말씀하셨을때 예수님께서는 진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은 천국이 우리 안에 있다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신앙을 사용해야만합니다. 부활은 모두 신앙과 그 위대한 힘에 관한 것입니다.

2010.04.06. 15:06

[지혜의 향기] 불교의 네 군데 '거룩한 장소'

연전에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인도 성지 순례를 주선한 적이 있었는데 아는 친구가 악의 없이 되묻기를 인도에도 성지가 있느냐면서 더군다나 순례라니까 좀 낯설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자기 것에만 익숙하다 보면 이웃이나 남들에게도 자기들과 비슷한 게 있는 줄을 놓치기가 쉽다. 사실 세상의 웬만한 종교라면 창시자나 중요한 인물들의 발자취로 알려져 신도들에게 기림을 받는 거룩한 장소들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장소들은 어렵사리 찾아온 후세의 추종자들에게 특별한 종교적 영감을 주거나 적어도 순례의 이행이라는 필생의 짐 하나를 내려놓게 한다. 당연히 불교에도 세계 곳곳에 많은 성지가 있다. 오늘은 일단 부처님의 일생에 있어서 고비가 되었던 네 군데의 거룩한 장소들을 우선 찾아보자. 훗날 부처님이 되신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예수님보다 544년 전 쯤 지금은 네팔 땅인 옛 인도의 카필라 성 출신이다. 사실은 어머니 마야 부인이 그 때의 풍습대로 친정으로 아기를 낳으러 가다가 진통이 와서 한데서 몸을 풀었다. 불교의 첫 번째 거룩한 땅인 룸비니 동산이 그곳이다. 산후조리에 문제가 있었음인지 마야 부인은 이레 만에 세상을 떠나고 친동생인 마하 프라자파티가 계모가 되어 어린 싯다르타를 길렀다. 이복동생들도 태어났다. 이모가 새 어머니가 되어 정성을 다해 길렀겠지만 아무래도 친어미만큼은 했으랴 싶은 것이 한낱 속인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일평생 볕과 그늘에서 자리를 채우고 안살림을 꾸린 이 여인의 숨은 행적 마음고생은 또한 어땠으랴 하는 생각도 곁가지를 친다. 이 어머니도 뒷날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어쨌든 장가들고 아들까지 낳은 싯다르타 태자는 스물아홉에 출가를 단행한다. 이는 카필라 왕실의 변고를 넘어 결국 세계사를 크게 매듭지은 사건이다. 그야말로 버리고 떠나기의 원조요 혁혁한 성공사례요 인류사의 영원한 이정표가 된 사건이다. 이후 태자는 여러 스승을 찾아 헤매었고 사문들과 함께 고행했다. 그러다 죽음에 이르기 직전 중도의 이치를 깨달았다. 네란자라 강가 수자타 여인한테서 우유죽을 얻어 마시고 기운을 차린 다음 다시금 깊은 정진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출가한지 여섯 해 새벽하늘에 샛별이 반짝인 순간 위없는 큰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시니 이곳이 곧 두 번째의 거룩한 땅으로 마가다 나라의 붓다가야 보리수 아래다. 크나큰 기쁨에 휩싸여 앉아 계시던 부처님은 마침내 괴로움에 싸인 중생들을 건지기로 결심하셨다. 이리하여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이 바라나시다. 그 당시 내로라하는 수행자들이며 철학자들 종교가들이 모여 겨루는 정신계의 시장터요 결전장이었다. 부처님은 그곳 사슴동산에서 이전의 동료 사문들을 찾아내어 진리를 설하셨다. 그 가운데 카운디냐가 처음으로 말귀를 알아듣고는 귀의의 눈빛을 번쩍였다. 카운디냐는 깨달았다! 카운디냐는 깨달았다! 부처님은 두 팔을 들어 기뻐하시니 이곳이 불교를 처음으로 세상에 전한 거룩한 땅 초전법륜의 성지다. 부처님은 나날이 늘어나는 제자들을 이끌고 온 북인도를 맨발로 걸으셨다. 그렇게 법의 바퀴를 굴리신지 마흔다섯 해 이제 여든이 된 몸은 오래 된 수레처럼 허물어져 갔다. 마침내 대장장이 춘다가 준 음식으로 배탈이 나시니 힘겹게 쿠시나가라에 이르시도록 낫지를 않으셨다. 이윽고 두 그루 사라 나무 사이에 누우신 채 마지막 설법을 하시고 눈을 감으시니 이곳이 열반의 성지 네 번째 거룩한 땅이 되었다.

2010.04.06. 15:04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스티브 잡스와 불교

요즘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화두네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표지에서 아예 스티브 잡스를 '성경 대신 아이패드를 손에 든 예수'에 빗댔더군요.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잡스의 창의성(창조성)이죠. 젊었을 적 그는 선불교와 명상에 심취한 바 있습니다. 잡스의 창의성 그 뿌리가 뭘까요. 불교적 코드로 스티브 잡스를 풀었습니다. ◆ 번뇌가 보리(菩提.지혜)다= 현실은 변하죠. 끊임없이 변하죠. 워크맨이 MP3로 바뀌고 MP3가 스마트폰으로 바뀌죠. 스마트폰 역시 또 다른 무언가로 바뀔 겁니다. 미리 정해진 것은 없죠. 변화의 기로에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잡스는 '에너지의 치환'을 주목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고전적 자원이죠. 그런데 음악 파일의 등장과 무료 다운로드 등으로 음반시장은 나락으로 추락했습니다. 회복할 기미가 안 보였죠. 그걸 아이팟을 필두로 한 MP3 플레이어가 되살렸어요. 소멸의 에너지를 생명의 에너지로 치환한 겁니다. 그건 "번뇌가 보리다!"하는 불교의 이치와 맥이 통하죠. 에너지 자체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죠. 다만 그 쓰임에 따라 긍정의 에너지도 되고 부정의 에너지도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죠. 108 번뇌가 108 지혜로 바뀌는 겁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죠. 문제는 치환의 능력입니다. 잡스도 마찬가지죠. 그는 죽었나 살았나를 따지기 전에 음반시장의 거대한 에너지를 먼저 봤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숨결을 불어 넣을 방법을 찾은 거죠. 듣고(아이팟) 말하고(아이폰) 보고 읽는(아이패드) 인간의 근원적 습성에 대한 오랜 관찰과 깊은 이해 거기서 나온 간파력이 스티브 잡스표 창의성의 뿌리입니다. ◆ 불이(不二)의 에너지=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잡스는 축사를 했습니다. 돈이 없어 6개월 만에 대학을 중퇴했던 그가 대학 졸업식장에서 처음 연설을 한 거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주시하라. 머물지 말라." 이 말에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不二)의 시선'이 녹아 있죠. 사회에 첫 발을 딛는 젊은이들을 향해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잡스의 조언은 "내가 쏟아내는 창조성의 뿌리가 어디인가"에 대한 '강렬한 힌트'를 준 셈이죠. ◆ 창조와 파괴= 잡스는 애플의 창업주죠. 그런데도 30세 때 애플에서 해고되고 말았어요. 엄청난 배신감도 느꼈겠죠.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그 후 성공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났다.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들어서게 됐다." 창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파괴죠. 완전한 파괴의 순간이 완전한 창조의 터전이죠. 개인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죠. 성공한 뒤에는 성공했다는 마음을 놓고 실패한 뒤에는 실패했다는 마음을 놓아야죠. 그런 포맷 과정이 바로 창조를 위한 파괴의 과정이죠. 중국 육조 혜능 대사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했습니다. 잡스 식으로 풀면 "변화를 주시하라 머물지 마라"가 되는 거죠. 잡스의 창조성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갓난 아기 적의 입양과 대학중퇴 강한 외고집과 간이식 췌장암 수술 등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종교적 창조성은 온전한 치유를 동반하죠. 잡스의 창조성이 여전히 미완으로 비치는 까닭입니다.

2010.04.06. 15:01

[400자 큐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2)

때로 한국교회는 남의 나라 교회들보다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한국교회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순수하기를 원합니다. 친절하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조금 후퇴하며 양보할 줄도 알기를 원합니다. 예배당에 앉으면 사람들이 사랑스러워지는 마음이 들기를 원합니다. 내가 좀 못났어도 탓하지 않고 칭찬해 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좀 가난하더라도 교회에서만큼이라도 큰소리 좀 한번 쳐봤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은 누가누가 더 큰 예배당 짓나 누가누가 더 통장 반장 많이 하나 어깨에 힘주기 그만하고 이제 그만 목사의 본연의 자세를 찾아 욕심없는 빈 마음을 가지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눈감고 상상해 봅니다. 우리 한민족의 모든 교회들이 예쁜 교회들 되면 정말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될 것만 같아 가슴이 뿌듯해져 옵니다.

2010.03.30. 17:29

[변화] SKY, 스펙, 성경

SKY, 스펙, 벌집…. 오래전에 한국을 떠나온 우리 이민자들에게 익숙치 않은 낱말들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한국의 학부모들에게는 가장 민감한 단어들이다. 지난 3월 10일 고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양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는 대자보를 학교에 붙이고는 자퇴를 했다. 스펙이나 쌓는 취업 학원이 되어버린 대학에 대한 비판과 환멸이 담긴 옹골찬 선언문이다. 초등학교부터 꼬박 12년을 'SKY'(서울대 고대 연대)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와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진입했지만 4년 내내 스펙만 쌓다가 젊음을 다 도둑맞아 버린 현실 그리고 졸업 후에도 청년실업자나 신용불량자를 면하기 어려운 한국사회에 대한 거부가 아닌가 싶다. 얼마전 오바마 대통령이 공교육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교사들의 성과급제 확대와 낙오한 교사들의 퇴출 전국 단일의 학력평가제 도입 등을 시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2년간 1000억달러(약 147조원)를 교육개혁에 투입할 계획이라 한다. 오바마는 그러면서 "한국이 할 수 있다면 미국에서도 가능하다"고 강조하며 한국의 교육을 본받으라는 듯 두 차례나 언급했다. 미국 교육이 부러워 한국을 떠나온 이민자들에게는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읽기 쓰기 등 원래 미국교육은 성경을 기본으로 해왔었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면서 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미국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교육 금지 주기도문 금지령을 내리면서 1920년부터는 교실에서 성경이 사라졌다. 아인슈타인 C. S.루이스 에디슨 그래함 벨 슈바이처 나이팅게일 모차르트 처칠 링컨 파스칼 맥아더 톨스토이 카네기 찰스 디킨즈 펄 벅 안데르센 루스벨트 이들의 공통점은 공교육이 아닌 성경을 중심으로 공부한 홈 스쿨 출신들이다. 참된 교육은 성경을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인들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 성경이 교육의 현장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것이 향방을 잃어버린 공교육을 바로잡는 해결책이다.

2010.03.30. 17:28

[생활 속에서] '인생의 바닥'을 치고보니

'바닥을 쳤다'라는 말이 있다. 그 누구도 바닥을 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닥을 치는 게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에서 바닥을 친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왜 나는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 '왜 나는 몸이 아픈 것일까?' '왜 인간에게 고통이 항상 있는 것일까?' 등등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갈 때 '바닥을 친' 상황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인간적으로 볼 때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던질 여유와 이유가 없다. 오직 물 밑으로 가라앉는 자만이 계속 '왜…왜…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바닥을 친 사람들은 그동안 묻어두었던 인생의 질문을 다시 꺼내게 한다. '왜'라는 질문에 답을 찾아 나서 퍼즐을 맞추다 보면 놀랍게 우리는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닥을 친 상태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퍼즐 맞추기가 복잡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만큼 멋진 퍼즐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목회자인 김양재 목사는 최근 한 설교에서 "훈련의 시간이 많이 지날수록 우리는 수준 높은 사람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를 바꿔 말하면 '바닥을 친 상황이 길수록 우리는 수준 높은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다. 바닥을 친 자는 자기도 모르게 영성이 생긴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요셉이 바로 그런 자였다.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함으로 인해 형들의 질투로 종으로 팔렸고 나중에는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오히려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처참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 거의 벌레 취급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분명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이유를 알아낸 후 영성이 깊어졌고 결국 한 나라를 이끄는 유능한 지도자가 됐다. 바닥을 쳤을 때 우리는 하늘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깊이 있는 사람이 된다. 어려움이 생길 때 아무 생각 없이 음식 엔터테인먼트 스트레스 해소 등에만 집중하면 우리의 바닥 인생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계속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바닥을 치면 다 잃은 것 같은데 다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 가는 길에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어 다 잃었지만 그때 인생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온몸에 화상을 입어 의사들이 포기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던 이지선 씨는 사고를 당하기 전보다 더 깊이 있는 인생을 살고 있다. 결국 인간이 보기에는 바닥이지만 인생을 전체로 봤을 때 신의 관점으로 볼 때 바닥은 복의 바다인 것이다. 필자도 요즘 인생의 바닥을 긁고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감사한 사실은 바닥까지 오니 결혼 이후 아내와 최고의 친밀한 관계 아이들과 최고의 절친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반전이 있기에 어렵지만 살아볼 만한 게 인생인 듯싶다.

2010.03.30. 17:27

[사목의 향기] 돈! 돈! 돈!

사람들의 돈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꿈을 못 이룬 사람들에게는 '웬수'같은 돈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어주는 기특한 '효자'입니다. 돈 때문에 남을 죽이고 자살을 하고 사랑을 배신하고 혈육 간의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대체 돈이 뭐길래! 어찌 되었던 간에 그 돈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이토록 중요한 돈은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는 어떠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돈은 다다익선 많이 소유할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는 돈을 모으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지상 최대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돈의 기능은 잘 알고 있을지는 몰라도 돈의 의미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고 사는 듯 싶습니다. 저는 교회가 우리 신자들에게 돈에 대해서 더 가르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이 돈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성경 속에서는 돈은 무엇이라고 말하고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속에 사는 사람들은 삶의 큰 부분을 돈을 벌기 위하여 살고 있으므로 돈을 신앙 안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삶의 큰 부분이 복음화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정녕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외에 그 무엇도 우리 삶 가운데 첫째가 될 수 없습니다.(마태 633)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첫째가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한다"는 마태복음 22장 37절의 말씀을 지킬 수 없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라고 가르칩니다. 돈이 악의 뿌리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을 첫째로 사랑하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의 참 위치를 발견해야합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해도 부모보다 물이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없이는 살 수 없지만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은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 즉 구원을 위해 나아갈 때만 진정 의미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큰 틀 안에서 보면 이 돈 역시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의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맡기셨고 그것들을 당신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뜻에 맞게 활용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하느님이 맡겨주신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것들을 충실히 관리해야할 의무가 있는 관리자(steward)들인 것입니다. 나눔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간과 재물과 재능도 감사하며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바로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돈을 가지고도 나쁜 일을 할 수도 있고 이웃을 돕는 선행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돈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나눔에 있습니다. 같은 액수의 돈으로 술을 사서 마실 때와 굶주리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먹일 때 그 돈의 가치와 의미는 천지차이가 됩니다. 재물의 나눔은 마음의 나눔이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또한 그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맡기신 하느님의 것이기에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그 분의 뜻에 따라 사용하겠다고 하는 창조주에 대한 순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돈과 우리 마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늘 연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돈에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늘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와 나눔의 삶으로 봉헌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2010.03.30. 17:26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자꾸만 욕심이 생깁니다

Q: 재물, 이성친구 등에 대한 욕심이 자꾸 생깁니다. 애인이 있어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보이면 그쪽으로 눈이 갑니다. 이런 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A: 사람은 누구나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싶다거나 좋은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해서 다 욕심이 아니에요.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노력은 안 하고 그것이 공짜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죠. 그건 인과법칙에 어긋납니다. 노력하지 않으니 이루어질 수가 없고 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데 이룰 수가 없으니까 화가 나고 괴로워집니다. 이렇게 욕심은 화와 괴로움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라는 거예요. 내가 100m 높이의 산을 오르고 싶으면 슬리퍼를 신고 올라가도 돼요. 그러나 내가 1000m 높이의 산을 오르고 싶으면 슬리퍼를 벗고 운동화를 신어야 해요. 내가 4000m 높이의 산에 오르려면 전문 등산화를 신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슬리퍼를 신고 4000m 산에 오르면 힘들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반대로 뒷동산에 오르는데 등산화를 신으면 꼴불견일 겁니다. 이 말은 내가 무엇이 되고 싶으면 그에 맞는 준비와 노력을 하라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보다 돈도 많고 학벌도 좋고 인물도 잘나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은 상대를 사귀고 싶어 하지만 첫째는 그런 사람을 찾기가 어렵죠. 둘째는 그런 사람을 찾는다 하더라도 내가 그 사람의 마음에 들까요? 설령 그런 사람을 사귀어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 생활이 행복할까요? 늘 질투심을 느끼고 의심하고 전전긍긍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살게 될 겁니다. 욕심은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보다 저 사람이 더 좋으면 좋은 사람에게로 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때 먼저 인연 맺었던 사람은 친구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 자기 좋은 데로 찾아다니는 거예요. 이 점을 인정하게 되면 타인의 행동 때문에 배신감을 느낀다는 등의 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쪽 주식을 좀 사놓았는데 저쪽 주식이 좀 오르면 저게 더 좋아 보이고 직장도 저쪽에서 월급 더 준다고 하면 그게 더 좋아 보이는 것처럼 아직 총각이니까 이 여자를 사귀는데 저 여자가 더 좋아 보여 마음이 끌리는 건 보통 사람의 심리예요. 그러나 인생을 똑바로 살고자 한다면 직장을 한 번 정했으면 일단 3년은 꾸준히 다녀보고 그 직장에서 다른 직장으로 옮기더라도 내가 한 번 다닌 직장과는 원수 맺지 마세요. 그처럼 사람을 한 번 사귀었으면 한 3년은 사귀어보세요. 그리고 한 번 사귀었던 사람과는 원수 맺지 마세요. 그동안에 인연 맺었던 사람들을 재산으로 생각하고 잘 챙겨놓으세요.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났다고 휙 돌아서면 사람들은 상대가 배신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증오심이 일어나고 그게 다 나중에 나에게 재앙으로 돌아오게 돼요. 그러니까 지금 서른한 살인데 서른두 살까지 결혼해야 된다 이렇게 정하지 말고 조금 진중해지세요. 결혼을 잘못하면 안 하느니만 못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수행을 하시면 재앙이 가까이 오다가도 피해가고 좋은 일은 인연이 자꾸 닿게 됩니다. 남의 인생에 기웃거리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저 사람은 어떨까 자꾸 기웃거릴 필요 없어요. 자기 밥상에 밥이 차려지면 열심히 먹으면 되지 자꾸 남의 밥상을 쳐다보면서 밥그릇이 좀 더 커 보인다든지 콩이 좀 굵어 보인다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보다는 자기 인생을 잘살아야 합니다. 남이 무엇을 인생의 행복으로 생각하는지는 나에게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그건 사람마다 다르거든요. 지금 나에게 괴로움도 번뇌도 없으면 그게 행복이에요. 행복이라는 걸 자꾸 다른 곳에서 찾지 마세요.

2010.03.30. 17:23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거대한 산을 움직이는 '믿음'

풍경 1 : 교회에서 목회자가 묻습니다. "믿~습니까?" 교인들이 답합니다. "믿~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진실로 믿~습니까?" 교인들이 소리 높여 답합니다. "진실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는 말은 일종의 훈장이죠. 그만큼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 일에 열심이고 신실하다는 얘기니까요. 그래서 다들 '믿음'을 좇습니다. 믿음이란 대체 어디서 싹이 트고 어떻게 성장하는 걸까요? 풍경 2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했죠. "하나님(하느님)을 믿어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가 말한 대로 되리라고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가복음 11장22절) 황당하다고요? 무협지 한 장면 같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믿음의 힘'을 설명한 겁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빠트리는 그 거대한 힘이 다름 아닌 믿음에서 나온다고 설한 거죠. 그럼 어찌해야 나의 믿음도 강해질까요? 많은 사람이 '믿음=고집 혹은 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소신과 나의 고집이 믿음과 직결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용을 씁니다. "나는 이래선 안 돼 나는 저래야 돼. 그래야 나의 믿음 나의 신앙이 지켜지니까"라며 힘을 주죠. 그런데 믿음은 고집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진정한 믿음은 용을 쓸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눈 내리는 풍경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있다고 쳐요. 그에게 하늘에서 솜 뭉치처럼 내리는 하얀 눈은 신념이고 고집일 수 있죠. 그때는 용을 쓰며 믿습니다. 그런데 원주민이 외국에 나가 눈 내리는 풍경을 직접 본다면 어찌 될까요? 달라지죠. 그때는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는 사실이 자연스런 믿음이 되는 겁니다. 왜냐고요? 몸소 체험을 했기 때문이죠. 그러니 더 이상 용을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예수의 말씀 붓다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죠. 그건 고집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입니다. 그러니 성경과 불경에 담긴 눈 내리는 풍경을 직접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용을 쓸 필요가 없는 믿음의 순간을 만나기 때문이죠. 예수께선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갈 수 있다." (마태복음 7장21절) 무슨 뜻일까요? "주여! 주여!"하는 고집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란 체험을 통해 눈 내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에는 'A-B-C'가 있기 때문이죠. 먼저 진리(하나님 혹은 하느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담은 예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이죠. 그런 다음에는 성경을 믿는 내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내'가 있는 겁니다. 그 행함을 통해 우리는 말씀의 풍경을 체험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눈 내리는 풍경을 몸소 보는 거죠. 그게 바로 체화(體化)의 순간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체화할 때 우리는 진리를 체화하게 되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는 예수의 메시지는 말씀에 대한 체화를 통해 나와 하나가 되라는 얘기겠죠. 그런 체화의 순간을 거치며 우리는 깨닫게 되죠. "믿습니다!"의 진정한 뜻을 말입니다. 예수께선 "마음에 의심을 품지 않고"란 단서를 달았죠. 체화의 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음에서 의심이 사라지죠. 결국 산을 들어서 바다에 빠트리는 거대한 힘이 나오는 겁니다. 그때는 대답이 절로 나오죠. "믿~습니까?" "믿~~습니다!"

2010.03.30. 17:22

[변화] '융복합 리더십'

'제7의 감각'의 저자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의 윌리엄 더건 교수(William Duggan)는 "역사를 쓴 획기적 아이디어에 새로운 사실들은 없다. 다만 새로운 조합이 있었을 뿐이다"며 최고의 아이디어는 창조가 아니고 조합이라 주장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크리스텐센(Christensen) 교수는 "앞으로는 현존하는 기술의 연장선이 아닌 비연속적 성격의 '융복합기술'이 IT 시대 이후를 책임질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스티브 잡스처럼 새 창조물 보다는 기존의 것을 융복합시켜 조합해내는 기술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을 컴퓨터에 접목시켜 '애플 모니터'로 세계인의 눈을 음악과 MP3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아이포드'를 탄생시켜 세계 젊은이들의 귀를 사로잡았으며 '아이폰'으로 세계인의 입을 그리고 '아이패드'를 통해 드디어 IT계의 신(?)으로 등극했다. 지난 1월 '이코노미스트'지는 아예 스티브 잡스를 '성경 대신 아이패드를 손에 든 예수'로 표지를 꾸몄다. 세계는 그의 융복합 기술에 열광하고 있다. 요즘 이민교회는 담임 목사가 세미나만 갔다 오면 교인들이 긴장한다. 의욕적으로 사역하고픈 마음이야 십분 이해 하지만 뭐든 배웠다하면 판을 새로 뒤집는 탓에 많은 교인들이 술렁거릴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매번 새로운 것으로 도전했는데도 뭔가 잡히는 것이 없을 때는 새것보다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순서이지 싶다. 여태껏 해왔던 것을 잘 융복합하면 탈출구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요즘 이민교회는 해마다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철새 신앙이 유행이다. 말씀 좋다는 곳이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몰려다니는 교인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부흥하는 교회 하루아침에 망하는 교회가 시이소 게임을 한다. 방송만 틀면 인터넷만 켜면 수많은 영혼의 양식들이 떠다니고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 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융복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더 배운다 한들 융복합을 할줄 모르면 또 배가 고플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것들을 '융복합'해내는 리더십 그리고 이를 갖춘 '팔로우십'(followership)이 필요한 시대이다.

2010.03.23. 14:57

[생활 속에서] 기능주의의 위험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랑과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랑은 겉보기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진지하게 상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 가보면 사랑의 유일한 이유는 자신의 필요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진실한 사랑은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랑은 언뜻 보기에 사랑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앞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깊이 살펴보면 그 속에는 상대를 향한 절실한 사랑이 숨어있습니다. 그가 상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비극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 목적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어떤 필요를 채우기 위해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저변에는 기능주의가 깔려있습니다.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기능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혼이 급속도로 느는 이유도 그 배경에는 기능주의적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갑자기 명성이나 부를 얻은 성공한 남편들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롭게 장가드는 이유는 자신의 부인이 그가 기대하는 아내로서의 기능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년 여성들이 황혼 이혼을 시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년에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이유도 있지만 또 다른 이면에는 남편의 사회적 경제적 기능이 끝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무서운 생각이 숨어있을 때도 있습니다. 기능주의 사고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사랑의 정신과 정면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실 때 그가 가진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킨 것도 그들을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을 쏟아주고 싶어서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선교하면 교회가 성장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 속에는 선교를 단지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기능주의적 사고가 숨어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가 선교하는 것은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교회로 남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선교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원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선교를 단지 교회의 세력을 키우는 수단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기능주의는 죄악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수단화하려는 기능주의에 대항하여 철저히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선교의 원형'은 사람을 단지 기능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2010.03.23. 14:56

[400자 큐티]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1)

세상에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대개 우리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하게 애정을 쏟고 있는 것들이나 사람일수록 더욱 그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남의 자식이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지만 내 자식이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남의 애인이나 남편이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지만 내 애인이나 남편은 나를 슬프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남의 나라의 일로 슬픈 일보다는 내 나라의 일로 슬플 때가 더 많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역전 될 때에는 기쁨으로 변할 수 있기에 슬픔은 소망의 시작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슬플 때에 우리는 오히려 소망을 가지는 현명함을 몸에 익혀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2010.03.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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