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회무침 전문화 시켜 SNS 입소문 타고 '대박' "부모님 고된 식당일 보며 효율적 운영시스템 개발" 내달까지 6곳 더 문 열어 미 전국체인 확장이 목표 이 두 젊은 장사꾼들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한창 청춘들이 뭐 그리 사연 있을까 싶겠지만 성공스토리 뒤편 이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르고 난 이들만의 아우라랄까 포스가 느껴졌다. 최근 가주 패스트푸드 업계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포키 바'(Poke Bar) 주윤호(40)·제이슨 박(38) 대표다. 2015년 창업 1년 만에 LA를 비롯 롱비치, 샌호세, 샌프란시스코 등 총 9곳의 체인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들은 주류사회 밀레니얼들을 가게로 끌어 모으며 그들만의 멋진 신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새 지점 오픈 때마다 문밖까지 줄서는 풍경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만큼 제대로 대박 난 이들을 포키바 1호점인 웨스트할리우드 매장에서 만나봤다. #주윤호, 그 남자 이야기 13세 때 가족이민 온 윤호씨는 이민과 동시에 노스리지에 일식당을 연 부모님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레 어깨너머로 식당일을 배울 수 있었다. 캘스테이트 노스리지에서 파이낸스를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유명 금융회사에 취직했지만 증시 불경기 여파로 퇴사 한 뒤 2004년 LA 웨스트우드에 카페를 오픈했다. 카페는 오픈과 동시에 문전성시를 이뤘고 식당경영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2006년 엔시노에 6000스퀘어피트 규모의 대형 델리를 50만달러에 인수했다. 그러나 전주인의 장부조작에 속아 산 가게는 경기불황까지 덮쳐 2010년 80만달러라는 막대한 손해를 보고 결국 문을 닫아야만 했다고. "첫 카페가 너무 잘되니까 그때는 세상이 다 만만해 보였죠.(웃음) 그렇게 자신만만하다 쫄딱 망하고 나니 극심한 탈모와 우울증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때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일을 시작한 곳이 바로 부모님 식당이었죠." 그는 부모님 식당에서 보조셰프로 일하며 일식 요리에 입문했다.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는 셰프들 틈바구니에서 눈칫밥 먹으며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요리로 호평 받을 만큼 실력을 쌓았다. 그러다 2014년 여름, 그는 자신만의 레시피로 새 비즈니스를 구상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포키 샐러드'다. 포키 샐러드는 간장·참기름으로 버무린 하와이식 생선회무침인데 이 메뉴만을 전문화 시켜보겠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처음엔 이를 적극 지원하겠다는 투자자가 나섰지만 우여곡절 끝 투자가 불발되면서 그의 사업계획은 세상 빛 못보고 사장될 뻔한 위기에 처했다. #제이슨 박, 이 남자가 사는 법 한국에서 고교시절 50명중 40등 안에 들어본 적 없다는 제이슨씨는 방황하던 청소년기를 보내고 21세 때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LA로 건너왔다. 택시기사부터 소주방 웨이터까지 안 해본 일이 없는 그는 한 지인의 도움으로 2003년 융자회사에 취직했다. 말이 좋아 취직이지 처음엔 이렇다 할 월급도 없이 책상 하나 달랑 놓고 일 배우는 조건으로 들어간 회사였다. 그러나 타고난 친화력과 추진력 덕분에 그는 입사 1년 만에 월 2만달러 수입을 올리는 꽤 잘나가는 융자 전문가가 됐다. 그러다 지인의 권유로 2006년 마리나델레이에 있는 한 피자가게를 인수하며 식당 사업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그 후 피자가게를 3곳까지 운영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잘나가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2011년 간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2005년 결혼, 당시 두 살·네 살 두 딸의 아빠이던 그는 간이식 수술 경과가 좋지 않아 한 달 동안 무려 4차례 개복수술을 하며 생사를 오가는 고비 끝 석 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 년 만에 돌아간 사업체는 문 닫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제가 워낙 울트라 초긍정 스타일이에요.(웃음) 간암 진단 때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고 식당이 힘들 때도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상황과 상관없이 매일매일 감사하고 행복하게 사니 또 감사할 많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긍정적인 성격 탓이었는지 2014년엔 피자가게가 7곳으로 늘 만큼 그의 사업은 다시 번창했다. #청년 장사꾼들의 유쾌한 도전 10년 전부터 형제처럼 지내 온 이 둘이 의기투합하게 된 것은 지난해 봄 윤호씨의 사업계획을 들은 제이슨씨가 동업을 제안하면서부터. 그 후 윤호씨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제이슨씨의 추진력이 결합되면서 포키바 창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가게 자리 물색에서 계약, 내부 공사까지 넉 달이 채 걸리지 않아 선셋 1호점을 열었다. 창업자금으로 들어 간 돈은 8만여 달러. 포키바는 고객이 포키 샐러드에 들어가는 생선종류와 양념, 야채, 사이드디시까지 직접 선택해 자신만의 맞춤 메뉴를 만드는 트렌디한 패스트푸드점을 표방하고 있다. "건강과 편리함, 개인주의를 중시하는 밀레니얼들의 취향과 포키바 콘셉트가 맞아 떨어지면서 SNS 입소문을 타고 첫 달부터 5만달러 매출을 올릴 만큼 인기를 얻었죠." (제이슨 박) 이런 인기에 힘입어 이들은 지난해 9월 롱비치 2호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매달 지점오픈에 박차를 가해 현재 LA카운티와 OC, 북가주 등에 총 9곳의 지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내달 말까지 오픈을 앞두고 있는 지점도 6곳에 이른다. 이들이 이처럼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체인망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3無 가게' 콘셉트 때문. 여기서 3無란 ▶주인의 장시간 노동 ▶셰프 ▶거액의 창업자금이 필요 없는 가게를 말한다. "30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이 늘 주방장 텃세에 고생하고 주 6일 하루 12시간씩 힘들게 일하시는 걸 보면서 결심한 게 있어요. 제대로 된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 누가 하더라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가게를 만들자고요. 사업도 결국은 행복하자고 하는 거니까요."(주윤호) 이처럼 소규모·소자본 창업이라고 매출액까지 아담할거라 생각한다면 오산. 현재 포키바 9곳중 매출액 1위인 북가주 마운틴뷰점은 220스퀘어피트의 소규모 매장임에도 불구 오픈 6개월 만에 월 매출 15만달러를 기록할 만큼 알짜배기 지점으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포키바를 업계 1위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싶어요. 빠른 시간 내 미 전국체인은 물론 한국진출 등 다양한 계획을 세워놓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타고난 이도 노력하는 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진심 즐기며 일하는 이 두 젊은 장사꾼들의 내일 여정 역시 어제의 여정처럼 행복하고 유쾌할 것이다. 그들의 열정적 오늘이 이를 확신케 해주니까. ▶문의: ilovepokebar.com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6.07.24. 16:59
재외동포 비례대표 거론 불구 2012·2016년 국회 입성 실패 "해외동포 실질적 권익 위해 누구든 한국 국회 입성해야" 궁금했다. 그만큼 벌었고 그만큼 유명해졌으면 됐지 한국 정치판에 뭐 그리 미련 남아 서성이는지. 게다가 14년 전 간경화 말기 판정에, 4년 전 다시 간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 돌아온 그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고도 여전히 경영일선 최전방에 서 있고 각종 한인사회 행사에 한국 정치권까지 그의 분주한 발걸음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보통사람이라면 암 재발할까 전전긍긍 번잡한 세상사에서 한 발짝 물러나 유유자적할 법도 한데 말이다. 그러니 그 속내가 자못 궁금할 수밖에. 뉴스타부동산그룹 남문기(62) 회장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 LA한인타운 뉴스타부동산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봤다. #300달러로 이룬 아메리칸 드림 남 회장은 미주 한인사회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적 표본이다. 건대 법대 73학번인 그는 잘나가던 주택은행 행원생활을 접고 1982년 300달러 들고 도미해 청소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8년 부동산을 창업한 뒤 승승장구 지금에 이르렀다. 뉴스타는 현재 미국과 캐나다 주요도시 30곳에 지사를 설립하고 1000여의 직원을 거느린 연매출 15억달러에 이르는 미주 한인사회 대표 부동산업체다. 그리고 그는 이 성공을 발판으로 LA한인회장(2006~2008), 미주한인상공인총연합회 회장(2008~2009), 미주한인회총연합회 회장(2009~2011), 세계한인회장대회 공동의장(2011~2012)을 거쳐 현재 해외한민족대표자협의회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등 미주 한인사회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처럼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그의 인생에도 시련이 닥쳤다. 2002년 간경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3개월 시한부 선고였다. 당시 그의 나이 49세. 우여곡절 끝 기적적으로 고비를 넘겼지만 10년 뒤인 2012년 12월 다시 간암 판정을 받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주저앉았을 법도 한데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예정된 빡빡한 연말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후보의 지원유세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간의 일부를 절제하는 7시간 대수술을 받았다. 그 후 적잖은 시간의 요양생활을 거치고 나서야 그는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덤으로 사는 인생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대개 삶이 180도 달라진다는데 그의 일상엔 특별한 변화란 없었다. 여전히 일선에서 신규 에이전트 교육을 직접하고, 세계를 돌며 강연을 하고, 지난 봄엔 한국 총선을 맞아 서울에 두 달여 간 체류하기도 했다. 이미 2011년 한나라당 재외국민위원장에 임명됐다 시민권을 포기하고도 자진사퇴하는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또 골치 아픈 한국 정치판이라니. 게다가 불과 4년 전 간암으로 대수술까지 받은 그가 아니던가. "맞아요. 남들 보면 미쳤다 하겠죠. 그런데 죽을 고비 넘기고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하니 몸보신보다는 오히려 죽는 날까지 사명감 가지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 것 같아요. 제가 좀 별나긴 하죠.(웃음)" 이쯤 되면 뭐 에둘러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가 그토록 한국정치에 '목매는' 이유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높아졌다. "제가 돈이 없어요? 명예가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더 바랄 것도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한인사회에서 일하다 보니 720만 해외동포들의 권익을 위해서는 누군가는 한국정치에 진출해 동포들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을 입법화해야 한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라 확신했다. "아직은 해외한인들에게 배타적인 한국사회와 한국국회에 가서 실질적인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소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는 파이터가 필요해요. 제가 바로 그 역할에 적임자죠. 만약 제가 국회에 간다면 분명 최다 입법 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울 겁니다." 결코 돌려 말하는 법 없는 그의 이 투박한 직설화법은 보기에 따라선 좀 불편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이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배짱이 그동안 적잖은 성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LA한인회장 시절 당시 이명박 대선후보에 건의해 현지인 LA총영사(김재수) 취임과 2009년 2월 국회를 통과한 재외동포 참정권 실시에 힘을 보탰다. 또 같은 해 미주한인회총연합회장에 취임하자마자 한승수 당시 국무총리와 면담을 통해 재외동포들의 공항 입국 시 내국인 대우를 일사천리로 성사시키기도 했다. #경상도 사나이의 뚝심 혹은 고집 이처럼 한국정치권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며 활발한 활동을 한 덕분에 그는 최근 한국 총선 때마다 재외동포 비례대표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두 번의 총선에서 그의 국회입성 꿈은 번번이 불발됐다. 그의 불도저 기질이라면 어떻게든 성사시키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였을 것 같다했더니 웬걸.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올해 총선 때 서울에 간 건 비례대표 공천신청 후 선거 관계자와 언제든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렇다고 소문처럼 적극적으로 로비를 한 건 아니고요. 두 달 동안 체류하면서 여권실세나 국회의원을 만나 밥 한번 먹은 적이 없어요. 그냥 무작정 불러주기만을 기다린 것뿐이죠. 제가 그런 쪽으론 지나치게 샤이합니다.(웃음)" 게다가 지금껏 정치권 실세에 정치헌금이나 그럴듯한 접대 한번 한 적 없다는 것이 그의 부연설명이다. "그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요. 구걸하면서까지 국회 입성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제가 하려는 게 해외동포 권익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결국 대한민국 미래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인데 비굴해질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가 한국 정계진출의 꿈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다. "다음 총선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되면 좋겠지만 여건이 안 되면 적임자만 있다면 누구든 물심양면 지원하고 싶습니다." 좀 상투적이다 싶지만 그렇다고 속에 없는 소리를 할 이도 못되지 싶다. 목표를 정하면 돌진하는 타고난 장사꾼인건 분명하지만 그 이면엔 '해병대 정신'과 의리를 유달리 강조하는 그 세대 경상도 사나이 특유의 뚝심이랄까 고집도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껏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골라 스스로 길을 만들어온 그이기에 이 특별한 도전도 어떤 여정이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6.07.17. 16:28
9월 귀국해 책 출간·강연 계획 장애인들 복지에 도움 주고파 "지독한 상황 속 웃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 깨달아 행복해" 어쩜 이럴 수 있을까 싶다. 꽃다운 나이, 아니 정말 목련 꽃처럼 예뻤던 스물셋 여대생이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에 55% 3도 중화상을 입고 7개월간 30번이 넘는 수술을 견디며, 양손 8마디의 손가락을 잘라내고도, 동물원 원숭이 보듯 쑤군대는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 속에서도 어쩌면 이처럼 밝고 쾌활하고 유머러스할 수 있을까. 삶을 비관하고, 신을 원망하고, 비탄에 빠져 허우적댄다 해도 하나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녀, 이미 신이 수 천 년간 이 땅 위에 인간들에게 알려주려 고군분투한 삶의 비밀들을 꿰뚫어 버렸다. 사랑과 감사, 용기와 희망, 용서와 위로. 그리하여 그녀는 지극히 평화로웠고 아름다웠다. 감히. 지난달 UCLA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12년이란 긴 유학생활을 마친 이지선(38)씨를 LA한인타운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난 속 진짜 행복을 깨닫다 그녀의 끝을 모르는 긍정과 감사는 가족내력인 듯싶다. 노동부 공무원이었던 건실한 부친과 연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듬직한 오빠, 이대 유아교육학과 졸업반인 미모의 그녀까지. 2000년 7월 사고 이전까지 이들 가정은 남부러울 것 없이 완벽했다. 그러니 드라마라면, 아니 보통사람들이라면 이 느닷없이 닥친 불행에 울고불고 참담한 시간 속을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친은 의연했고, 엄마는 살아있는 게 더 고통인 그녀에게 하루 한 가지씩 감사할 거리를 찾아보자고 했단다. 이처럼 의연하고 든든한 가족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2003년 출간된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도, 같은 해 방송된 KBS 인간극장 '지선아 사랑해' 편도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방송과 책이 출간되고 그녀는 일약 '전국 스타'로 등극했다. 그건 그녀의 눈길 끄는 외모가 아닌 20대 중반의 어린 그녀가 던진 묵직한 희망과 용기, 긍정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시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말한다. 그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인생에서 지독한 운명과 화해하는 법과 행복의 비밀을 알게 됐다고. "좋은 일이 있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어요. 그 자유는 가지지 못한 것에 조바심내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해주었죠." #새로운 시작 그녀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은 2004년 온누리교회 고 하용조 목사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다. 그녀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것을 들은 하 목사가 교회 장학위원회를 통해 그녀에게 시애틀 어학연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1년간의 어학연수 기간 동안 본격적인 유학을 준비해 2005년 보스턴 유니버시티 대학원에 진학, 재활상담 석사과정에 돌입했다. "미국에서 장애인들의 재활은 주로 직업을 찾아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제가 생각했던 재활상담과는 거리가 좀 있었어요. 대신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것을 보면서 미국의 사회복지를 공부해 이를 한국에 적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전공을 바꿨죠." 그래서 2008년 BU에서 석사학위 취득 후 다시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을 밞게 된다. 그리고 2010년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LA 오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한인들도 많고, 한식당도 많고. 다들 반겨주시고 격려해줘서 즐겁게 유학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식당에서 식사 후 계산하려 하면 벌써 어떤 분이 계산했다는 일이 비일비재했죠. 한국보다 LA에서 절 더 많이 알아보시더라고요.(웃음)" 학업만으로도 바빴지만 방학마다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피부이식술을 받아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전에 이식한 피부가 수축하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다시 이식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고 후 지난해 11월까지 그녀는 4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이처럼 학업과 수술을 병행하며 박사과정을 끝내는 데 6년이 걸렸다. 12년간의 유학생활이었다. 당연히 학비도 만만치 않았을 터. "최근 박사학위 취득 기사가 나간 뒤 저희 집이 엄청 부자인가보다 라는 댓글을 본 적이 있어요. 그건 절대 아니고요.(웃음) 석사과정까지는 온누리교회에서, 박사과정은 학교 장학금으로 상당부분을 충당했고 나머지는 책 인세가 큰 역할을 했죠.(웃음)" #내 삶이 알려준 비밀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지적발달 장애인들을 접하고 난 뒤 일반인들의 인식변화'. 한 장애인 선교단체 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석한 14~30세 사이의 청장년들이 캠프에서 장애인들과 생활한 후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이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연구 조사한 논문이다.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들에 대한 선입견이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감정인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장애인들과 어울려 생활하다 보면 이런 불편함이 없어지는 걸 이번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었죠. 그래서 한국도 학교나 복지관, 지역정부 등에서 비장애인들 특히 청소년들과 장애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주면 좋겠어요." 박사논문이 말해주고 있듯 그녀의 오랜 소망은 결국 장애인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행복과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네 이러고도 삽니다.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 몸이라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사랑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하며.(중략) 네 저는 이러고도 삽니다. 이러고도 날마다 새로운 꿈을 꾸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선아 사랑해' 中에서) 그녀는 9월쯤 한국에 돌아갈 예정이다. 돌아가면 새 에세이집과 '지선아 사랑해' 동화책 출간에 매진할 예정이다. 또 기회가 닿으면 지금껏처럼 청소년들을 위한 강연도 계속 하고 싶다고. "남들은 박사학위 받고 귀국 전에 취직자리도 다 정해 놓던데 저는 현재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웃음) 그래서 불안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한 발자국씩 걸어가다 보면 분명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 닿을 거라 믿습니다." 그녀는 말한다. 희망이란 그저 막연한 기대라고. 오늘의 고통이 전부가 아닐 거라는 기대, 바닥을 치고 나면 결국은 다시 올라 갈 것이라는 기대. 그리하여 고난은 동굴이 아닌 터널이어서 하루하루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다 보면 어둠이 끝나는 그곳에 반드시 밝은 빛이 기다리고 있다고.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6.07.10. 17:08
4.29폭동 때 한인사회 대변 SAT2 한국어 채택 일등공신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이끌며 미주 이민사 정립 위해 노력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그의 저서 '미완의 시대'에서 말했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직은 포기해선 안 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맞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포기를 모르는 이들의 일보 전진을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역사였으니까.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 장태한(59) 교수는 청년시절부터 세상의 그 일보전진을 위해 포기를 모르고 쉼 없이 달려온 이다. 우리에겐 미주 한인이민사 관련 뉴스로 친숙한 인물이지만 지난 30년간 한국과 한인사회의 굵직굵직한 이슈마다 앞장서 온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상아탑에 갇힌 책상물림이 아닌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여전히 변화를 모색하는 열혈청년인 장태한 교수를 만나봤다. #젊은 날의 초상 그는 18세 때인 1974년 가족이민으로 LA에 왔다. 오자마자 시민권 취득과 대학 학자금 혜택이 있는 미 육군에 입대, 독일로 파병돼 3년간 위생병으로 근무하다 제대했다. 제대 후 LA로 돌아와 부모님이 원했던 의사가 되려 LACC에 등록해 생물학을 수강했지만 영 적성에 맞질 않았다고. 그러던 그가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게 바로 사회학. 이처럼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당시 그가 속해있던 '모임극회' 연극단 활동과 무관하지 않은 듯 했다. 특히 이철수 사건을 다룬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라는 작품에서 주인공 이철수 역을 맡는 등 2년여 동안 동료들과 사회성 짙은 소재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며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다. 1980년 5월엔 고국에서 들려온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에 그는 한인 대학생들과 함께 LA적집자사를 점거, 헌혈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사회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생기면서 그는 1980년 UC버클리에 편입, 본격적으로 사회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버클리에선 잠자는 시간 빼곤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죠. 보통 학생들이 한 학기에 12~16학점(unit)을 듣는데 저는 20~21학점씩 들었으니까요. 덕분에 5쿼터 만에 졸업할 수 있었죠." 특히 버클리 재학시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 당시만 해도 신생학문이나 다름없던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에 푹 빠진 그는 1982년 대학 졸업 후 캘리포니아에서 유일하게 아시안아메리칸 스터디 석사과정이 있는 UCLA 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 뒤 '광주 민중항쟁이 LA사인사회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뒤 그는 모교인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한다. 당시 버클리는 미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수인종학 박사과정을 개설해 1990년 소수인종학 박사 1호 7명을 배출했는데 그중 유일한 한인이 장 교수다. #역사의 현장, 그 한가운데서 그는 1989년 캘폴리 포모나 강단에 서기 시작해 1992년 UC리버사이드 소수인종학과로 자리를 옮겨 이곳에서 25년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평생을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학자이지만 지금껏 그의 삶이 보여주듯 그는 그저 평범한 책상물림만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조국을 떠나 동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만 군사독재정권 시절 대학을 다녔던 당시 청년들의 어쩔 수 없는 시대와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그에게도 남이 있는 탓이 아닐까 짐작해 볼뿐이다.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조국의 뼈아픈 현대사를 목도한 20대 한인 대학생의 고뇌와 번민은 미국이라는 복잡다단한 사회에 살면서 인종갈등,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구조적 모순에 가 자연스레 가 꽂혔으리라.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그 해묵은 갈등이 폭발한 역사적 현장 한가운데 서게 된다. 바로 4·29 LA폭동이다. 20년도 훨씬 전 그날의 사건을 그는 어제 일처럼, 시간 단위로, 다큐 필름을 돌려보듯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폭동이 단순히 두 커뮤니티간의 갈등으로 폭발한 것이 아닌 오랫동안 미국사회에 만연했던 인종 차별과 흑인사회의 가난이라는 사회구조적 불평등 문제에서 기인했음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그는 폭동당시 하루 10시간씩 미 주류 언론은 물론 각국 언론을 만나 사건의 원인과 본질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라는 한국어 책을 출판해 한인사회에 흑인사회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차세대위한 올바른 역사관 정립이 꿈 그의 한인사회를 위한 행보는 단지 4·29 LA폭동에서 그치지 않았다. 1993년 칼리지보드에서 SAT2 한국어 채택을 약속했다 1995년 돌연 불발되자 그는 칼리지보드 회장을 만나 한인사회가 예산 50만 달러를 충당하는 조건으로 한국어 채택을 담판 짓기도 했다. 이처럼 SAT2 한국어시험 채택의 공을 인정받아 그해 김영삼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또 1999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2002년까지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정부의 강압적 또는 사기에 의해 끌려간 것이라는 증거자료를 찾아내 당시 법적소송의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현재 그는 2010년부터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을 맡아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최근 연구소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지난 3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파차파 캠프가 한인촌의 효시임을 밝혀낸 것인데 현재 리버사이드 시정부가 이를 사적지로 추진할 만큼 주류사회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 여름방학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주 한인 인구통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미주 한인인구 디지털 지도' 제작과 미주 한인 구술사 정리 작업 등 연구와 집필활동에도 여념이 없다. "미주한인 역사를 제대로 정립해 차세대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줘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한인사회를 위해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제 오랜 바램입니다." 그의 이런 의지는 분명 자녀교육에도 소리 없는 힘으로 작용했으리라. 캘스테이트 샌버나디노 사회복지학과 자넷 장(58) 교수와의 사이에 외동딸인 앤지 장(29)변호사도 LA법률보조재단에서 근무하며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고 있다하니 역시 부전여전이다. 나이 듦이 고집이나 아집의 동의어가 아닌 지혜가 넓어지는 것임을, 초심이 더 깊어지는 것임을 그를 통해 배운다. 맞다. 도전을 통해 변화하는 것이 어디 세상뿐이겠는가. 인생 역시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6.06.19. 16:14
위탁양육 프로그램 관심 높아 한인사회 홍보활동 적극 참여 "유명해진 건 좋은 일 하라는 뜻 소명 알고 걸어가는 이 길 행복" 오만과 편견 사이, 그 어디쯤 그녀가 서 있으리라 짐작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라는 행간엔 복잡다단한 편견이 개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편견의 대부분은 오만에 관한 것이었다. 뭐 그래도 괜찮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한 톱스타인데 그 정도쯤이야 당연하다 싶었으니까. 그러나 이 섣부른 편견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여전히 20대 피비 케이츠의 얼굴을 한 그녀는 배우이기 이전에 지천명을 코앞에 둔 커리어 우먼으로서, 삼남매 엄마로서, 이제 막 미국생활에 적응한 유학생으로서 일상의 행복과 고민을 솔직하게 들려줬다. 포장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솔직함에 특유의 이국적인 웃음을 덤으로 얹어 들려준 그녀의 이야기는 그리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간간히 마음 찡했고 귀를 쫑긋하게 했고 그리하여 반짝거렸다. 2년 전 유학 와 터스틴에 거주하고 있는 배우 신애라(47)씨를 자택 인근 카페에서 만나봤다. #스타, 나눔의 아이콘으로 그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90년대를 풍미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다. '사랑이 뭐길래' '사랑을 그대 품안에' 등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드라마에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역할을 맡아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고 1995년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연애 끝, 차인표(48)씨와 결혼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타커플이 됐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배우로서 꾸준히 입지를 다져갔지만 연기 보다 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삶을 통해 보여준 공개 입양과 봉사 등 나눔의 실천이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정민(17), 예은(10), 예진(8) 삼남매를 두고 있다. 이들 중 예은·예진 자매는 2005년과 2008년 이들 부부가 공개 입양한 '가슴으로 낳은 딸들'이다. 또 부부는 2005년부터 세계 빈곤아동과 1:1 결연을 맺도록 도와주는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인 한국컴패션 홍보대사로 활동 중이다. "컴패션 활동 직전 마음이 공허했던 것 같아요. 분명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도 안정적이고 행복했지만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죠. 그래서 고심 끝 컴패션에서 주최하는 비전트립으로 필리핀에 갔죠. 바로 거기서 만난 아이들이 제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그렇게 컴패션을 통해 한명 두 명 늘어난 결연 아동들이 어느새 50여명에 이른다. 이제 그 아이들은 이들 부부의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이 됐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현재 그녀는 코로나 소재 히즈 유니버시티에서 기독교 교육학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이 똑순이 여사, 당연하게도 아주 오래전부터 작정한 유학길이지 싶었는데 웬걸 손사래부터 친다. "어휴 그런 건 아니에요. 이 나이에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웃음) 우연히 미국방문 때 현 대학 총장님을 만나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어요. 당시 총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기회가 있을 때 공부를 하라고.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데 그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아니겠냐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반년 만에 유학수속을 밟아 2014년 여름 이곳에 왔죠." 소명 하나 붙잡고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오른 유학길이었지만 워낙 똑 부러지는 성격과 추진력 탓 2년도 채 안 돼 교육학·기독교상담학·심리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돌입했다. 이처럼 공부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녀가 최근 위탁가정·위탁양육 홍보에도 팔 걷어 부치고 나섰다. "한국에서 홍보를 열심히 해도 입양 가정 수를 늘리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요. 그런데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을 일정기간 동안 돌보는 위탁가정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이는 좀 더 쉽게 실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래서 그녀는 한인사회에도 이 위탁가정 홍보를 위해 지난해 가을 한인가정상담소에서 개최한 위탁가정 홍보행사에 직접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해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지난 4월엔 어바인 온누리교회에서 주최한 학부모 세미나의 강사로 나서는 등 지난 2년간 한인사회 교회와 각종단체를 통해 나눔과 교육관련 강연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물론 2년간의 유학생활이 녹록치만은 않았다. 공부하랴, 살림하랴, 삼남매 뒷바라지하랴 초창기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꽤 힘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미국생활에 완벽 적응 중이다. 여기엔 남편의 공도 컸다. 남편은 시간이 날 때마다 미국으로 건너 와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줬다. #소명 받은 길을 가다 이야기 내내 줄곧 그녀의 초점은 양육법과 위탁가정에 가 꽂혀 있었다. 배우로서의 생활은 더 이상 관심이 없나 싶을 정도다. "제 평생 직업은 당연히 배우죠. 언젠가 다시 드라마나 영화에서 엄마 역할을 멋지게 할 날도 오겠죠. 주인공요? 어휴 이만큼 한 것도 감사하죠. 이젠 제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젊은 날 제가 주인공일 때 여러 선배 연기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인생의 절반을 스타로 살아온 여배우의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 한 한마디에 허를 찔린 이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화려해 보이는 이 여배우의 반전은 계속된다. 이날 그녀가 들고 온 백팩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셀폰 케이스도, 무심코 꺼내든 장지갑도 모두 명품과는 거리가 먼 평범하다 못해 낡아 해진 것도 있었다. "저도 한때는 적잖은 금액을 주고 명품 백을 구입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그 핸드백을 들고 간 어느 행사장에서 제가 재킷으로 그 핸드백을 슬쩍 덮어버리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그 명품 백을 부끄러워 한다는 걸요. 그 돈이면 빈곤 아동 몇 명을 더 도울 수 있을 텐데 하는 미안함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뒤론 남의 시선이 아닌 제가 행복한 데로 입고, 들고 해요." 지천명이란 통과의례 없이도 그녀 이미 하늘의 뜻을 다 알아차린 게 분명하다. "돌이켜보니 제가 유명해진 데는 그 유명세를 통해 좋은 일을 하라는 뜻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 소명 받은 길을 걷고 있으니 행복할 따름이죠." 코코 샤넬은 말했다. '무언가(something)가 아니라 누군가(someone)가 되기로 결정하면 얼마나 많은 걱정을 덜게 되는가'라고. 맞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삶을 통해 더 이상의 설명과 수식이 필요 없는 그 누군가가 돼버렸다. 그녀는 신애라다. 이주현 객원기자 [email protected]
2016.06.12. 21:36
지난해 3월, DC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교육국장(State Superintendent of Education)직에 올라 화제를 모았던 한인 2세 강한슬 국장(사진)을 만났다. DC 교육의 개혁을 주도할 적임자로 평가돼 국장에 오른 강한슬씨에게 그만의 교육철학, 추진중인 교육정책, 차세대 한인들에게 전하는 조언을 들어봤다. 생후 7개월 때 미국으로 건너온 강 국장은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도미한 부모는 여느 이민 부모와 같이 어린 강 국장과 여동생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줬다. 어머니는 강 국장의 손을 잡고 자주 도서관 책 세일에 데려갔으며, 아버지는 직접 수학을 가르쳐 줬다. 자매는 주말만 되면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한국학교를 다니며 한글을 배웠다. 무엇보다 자매가 최고의 미래를 가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고 믿어준 것이 큰 힘이 됐다. 강 국장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이 보여주신 교육에 대한 열정, 믿음이 교육자의 길을 걷게 했다”고 회상했다. 조지타운대에서 국제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은 강 국장이 졸업 후 자연스럽게 선택한 첫 일은 뉴멕시코의 나바호 인디언 보호구역 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정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훗날 프로그램 매니징 디렉터로 활동하기도 한 비영리단체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를 통해서였다. 강 국장은 “오랜 교육자 생활을 통해, 또 인생 선배로서 어린 한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는 기회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라며 “도전에는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고,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열정을 보여준다면 길은 열릴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후 법학박사 학위를 위해 진학한 하버드 로스쿨에서 교육자로서의 철학을 재정비하게 됐다. 교수가 던진 질문이 가슴에 와 닿았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와 같은 결과도 중요하지만 ‘누가 그 일을 결정하는지’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주, 연방 단위의 교육정책이 로컬 학교와 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게 된 계기였다. 현재 자리에 오르기 직전 테네시 교육국 수석국장으로 3년 6개월을 보낸 강 국장은 조직 내 구조와 정책을 재정립하는데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강 국장은 DC 교육국장으로서 DC의 공립 초·중·고교 뿐만 아니라 교육부와도 밀접하게 연계해 활동하고, 표준 시험이나 학자금 지원 등의 연방 교육 프로그램에 관한 정책 수립과 감독도 맡고 있다. 파격적인 교육개혁안으로 DC의 공교육의 질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미셸 리 전 교육감과는 또 다른 주정부 수준의 중대한 권한을 쥐고 있는 것. 이제 강 국장은 가장 빠르게 변모하는 DC 교육환경에 안정적인 교육개혁을 불러올 적임자로 주목받고 있다. 강 국장은 “2014-15년도 학기 기준 DC 내 대학 진학을 준비중인 학생은 약 25%”라며 “DC는 전국에서 교육환경이 가장 빠르게 개선되고 있는 지역 중 한 곳으로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학생들에게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지속적이고 진정성있는 프로그램 및 정책 개발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유현지 기자 [email protected]
2016.03.08. 8:04
“한국을 떠나 미국서 오래 살다 보면 한국문화가 조금씩 낯설어지는데, 60년 넘게 분리된 남한과 북한은 정서적으로 얼마나 멀어져 있을까요? 통일을 준비한다면 미술문화교류를 통해 정서적 거리를 좁혀나가야 합니다” 1988년부터 100번 가까이 북한 평양을 오가며 북한미술 작품을 수집한 신동훈 미국조선미술협회 회장(사진)은 우리가 북한미술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신 회장은 한국과 북한이 체제는 다르지만, 미술은 공유할 수 있다며 북한미술이 지닌 매력에 관해 말했다. 그는 “북한미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거칠고 힘있다”며 “북쪽지역의 산이 거칠고, 추운 날씨 등 험한 자연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또 “그림 안에는 우리민족이 수많은 외침에서 한반도를 지켜온 강렬한 정신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이런 독특한 매력은 미국이나 유럽, 중국, 일본 미술에서 찾기 어렵다.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추구하는 유럽의 수집가나 중국부호들은 북한작품을 사들이고 있다고 신 회장은 설명했다. 그는 “북한의 좋은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중에 화폐로 바꾸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유태인들도 북한미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신 회장은 “메릴랜드 락빌에서 화랑을 할 때 유태인들이 관심이 많았다”며 “유태인들은 흥정을 잘하는 데, 예를들어 1만 달러짜리 그림을 3000달러에 달라고 제안한 뒤 결국 6000달러 정도에 사갔다”고 말했다. 2011년 신 회장을 인터뷰한 ‘르몽드’지의 일본 특파원 필립 퐁스 기자는 ‘북녘의 미술가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북한미술품은 암시장을 형성할 만큼 미술 애호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며 “북한미술은 한민족 특유의 미감을 지니고 있는 전통적 수묵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시킨 특징이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렇게 유럽의 수집가나 중국부호, 유태인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북한미술 작가 중에서도 선우영, 정창모 화백은 최고의 거장으로 불린다. 선우영의 작품에서는 강렬한 채색과 거칠고 힘있는 색채가 두드러진다. 정창모의 작품은 온화한 채색, 활달한 붓의 기운이 특징이다. 신 회장은 “조선화의 거장인 선우영과 정창모 선생님은 남북분단이라는 시대적 운명과 싸우며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살랐던 인물”이라며 “한국 화가로 치면 박수근이나 이중섭 정도 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선우영의 ‘백두산 천지’와 정창모의 ‘남강의 겨울’은 2005년 제8회 베이징 국제미술제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서울과 베이징, 워싱턴, 뉴욕 등지에서 열린 북화전을 통해서도 여러 차례 소개됐다. 2012년 여름에는 경기도 고양시가 ‘고양 600년 기념 풍경남북 전’을 기획해 두 화가의 작품세계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숨은 보화를 찾듯 북한미술품을 수집해 미국과 한국, 전세계에 알리고 있는 신동훈 회장은 경기도 일산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찍 군에 입대, 육군수송학교에서 정비기술을 익혔다. 군복무 중 월남전에 참전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죽음의 위험은 미국 이민 후에도 계속됐다. 신 회장은 “군에서 익힌 정비기술 덕에 1977년 미국 워싱턴으로 취업이민을 했다”며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받은 월급을 모아 델리숍을 운영했는데 세 번이나 무장 강도가 들어 저와 아내가 목숨을 잃을 뻔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식구들의 안위가 보장되는 일을 찾다가 1988년 화랑을 열었다. 신 회장은 “한국화 전문 갤러리를 운영하다 북화에 관심을 갖게 됐고, 북화가 남북을 하나로 이어줄 매듭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초기에 만주와 선양 등 중국에서 작품을 구했다. 하지만 1년 넘게 수집한 작품이 전부 위작이라는 것을 알고 불살라 버렸다. 이후 신 회장은 제대로 된 작품을 구하기 위해 북한에 직접 들어가기로 했다. 선우영 화백과 정창모 화백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비자를 받아 북한 만수대창작사에 들어갔다. 신 회장은 “낯설고 두려웠지만 용기를 냈다”며 “1990년 봄 평양시 만수대창작사에서 조선화의 거장인 선우영 선생님과 정창모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신 회장은 두 화가의 그림을 한국과 미국, 유럽에 소개했다. 그는 “서울과 뉴욕에서 북화전을 가진 후 신문과 방송 자료를 만수대창작사에 보여줬더니 민족애가 있는 동포라며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신 회장은 남과 북의 화가들이 전시로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왔다. 2007년 6월 7일부터 9월 7일까지 서울 순화동 갤러리 ‘북’에서 열렸던 ‘남북 대표 작가 2인전-선우영·이숙자’전이 한 예다. 세밀하면서도 농익은 보리밭을 그리는 남쪽 여성화가 이숙자씨와 세세한 붓질로 장엄한 사실화의 세계를 펼쳐내는 북쪽 화가 선우영의 만남은 그림에서 분단도 갈라놓지 못하는 민족성을 확인하는 아름다운 자리였다. 이 전시회 도록에 ‘섬세함, 공필의 바탕에서 만나다’를 쓴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역사와 전통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썼다. 남과 북의 화가들을 만나게 하는 행사가 안타깝게 불발된 경우도 있다. 독도 사랑에 빠진 한국 화단의 원로 화가 일랑 이종상씨와 선우영 화백의 독도를 주제로 한 2인전은 결국 선우 화백의 때이른 죽음으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2009년 세상을 떠난 선우영 화백에 이어 친형제처럼 다정했던 정창모 화백도 2010년 숨을 거뒀다. 신동훈 회장은 “2010년 정창모 화백이 작품 5점에 낙관을 찍어주며 우리 그림을 널리 알려 달라고 부탁한 게 유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나도 언제 하늘나라로 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기간 북한미술을 워싱턴 동포들에게 알리기 위해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신동훈 회장이 소장한 북한 미술들은 앞으로 중앙일보 위크엔드 섹션에 ‘지상갤러리’ 형식으로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된다. ▷문의: 신동훈 미국조선미술협회 회장(240-460-1966) 심재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6.03.04. 12:54
그냥 돕고 싶다는 생각에 시작 상가 건물에서 20여 명 공동생활 주택국서 안전 문제로 퇴거 조치 현재의 3베드룸 아파트로 옮겨 지인, 교인들 십시일반 큰 도움 20대~70까지 60여 명 거쳐가 렌트비 등 월 3000달러 부담 "마음껏 쉴 수 있는 집 있었으면" 산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배달하려면 초속 6200km로 날아 초당 6424가구를 방문해야 한다고 한다. 산타가 수퍼맨라면 모를까 우리가 아는 그 배불뚝이 할아버지라면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산타를 믿어왔고, 믿고 있고, 믿을 것이다. 크리스마스니까, 이런 기적 하나쯤은 간절히 이뤄진다 믿고 싶으니까. 적어도 이 무렵만은 작은 기적이 꽁꽁 언 세상을 잠시나마 따뜻하게 덮어주길 바라니까. 그리고 이 판타지를 현실로 만드는 이들 때문에 우리는 잠시나마 성냥팔이 소녀가 그러했을 그 따뜻한 온기를 느낀다. 김요한(60) 신부. 차가운 세상 속 바로 그 기적 같은 온기를 전하는 이다. LA한인타운 세인트제임스 성공회 성당에서 한국어 예배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한인 노숙자들의 대부'라 불린다. 김 신부는 6년째 노숙자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보살펴왔다.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이 작은 기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김요한 신부를 세인트 제임스 성당에서 만나봤다. #기적의 씨앗을 뿌리다 한국에서 성공회대학 졸업 후 1989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전주, 청주, 백석포 등 작은 시골마을 성당에서 근무하다 1991년 샌호세에 한인성당 개척 차 미국에 왔다. 그 뒤 1995년 LA교구로 발령받아 노워크 성당과 한인선교센터를 거쳐 2002년 세인트제임스 성당에 부임했다. 그가 한인 노숙자들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2009년 늦가을, 세인트제임스 성당이 매주 금요일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수프키친' 행사에서다. "우연찮게 그날 줄 끝에 한인이 한 명 서 있는 걸 봤죠. 물어봤더니 사업 실패 후 노숙자가 됐다고 하더군요.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인 노숙자들이 더 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 모아서 데려 오라 했죠." 다음날 그렇게 모인 노숙자가 한 20여명쯤 됐다. 그들에게 뭐가 제일 필요한지 물어봤더니 밤새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아침에 버스를 타고 싶은데 그러려면 버스 토큰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그 뒤 그는 매일 타운 맥도널드에서 한인 노숙자들과 만나 사비를 털어 그들에게 버스 토큰과 맥도널드 바우처, 사우나 이용권 등을 나눠줬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는 임시방편인 버스 토큰보다 따뜻한 잠자리가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타운에 방을 얻었다. 처음엔 타운 곳곳에 작은 방 몇 개를 얻다 1년 뒤엔 방 8칸짜리 상가 건물로 이사해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한동안은 김 신부 역시 이들과 함께 먹고 자며 그들의 재활을 도왔다. "처음엔 무조건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사비를 털어 시작했고 나중엔 지인들과 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렌트비를 충당할 수 있었죠. 아마 그분들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나눔은 가장 큰 축복 그렇게 생활한 지 3년쯤 지났을 무렵, LA시 주택국이 안전상의 문제로 퇴거 명령을 내려 그곳을 나온 뒤 지금은 타운의 한 3베드룸 아파트에서 생활 중이다. 한동안 김 신부는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함께 중고물품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고 침대며 생활 도구들은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등 이들이 최대한 스스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이 60여명쯤 될 겁니다. 20~70대까지 연령층도 다양한데 대부분 사업실패나 도박 빚 등 경제적 이유로 노숙자가 되기도 하고 일부는 정신병을 앓는 이들도 있었죠. 그래도 그간 20여명은 번듯한 직장을 얻어 나가 잘살고 있어요. 그런 이들을 볼 때 가장 보람 있고 뿌듯하죠." 또 이들은 성당에서 매주 두 차례씩 실시하는 노숙자들을 위한 음식 나눠주기 행사에 나와 자원봉사를 하는 등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며 자립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김 신부가 돕는 것은 비단 한인 노숙자들뿐 아니다. 그는 15년째 아침마다 LA한인타운 서울국제공원 근처에서 일감을 구하는 히스패닉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컵라면을 제공하고 있다. "LA한인타운 히스패닉 일용직 노동자들 치고 제 컵라면 안 먹은 이들 없을 겁니다.(웃음) 덕분에 길가다 마주치거나 마켓에서 일하다 만나도 꼭 반갑게 인사를 해줘요. 그럴 때 너무 행복하죠."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성직자라고 하나 성직자들의 비리와 추문이 잦은 요즘 같은 세상에 노숙자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려 생활하고 이들을 위해 사비까지 털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내와 외동딸을 책임지는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그가 이렇게까지 아낌없이 돈과 시간까지 바쳐 희생과 봉사를 자청하는 이유는. 계속되는 질문에도 한사코 그는 "어찌어찌 하다 보니 코를 뀄다"며 농담으로 얼버무린다.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고 민망한가 보다. 그러다 툭 던진 한마디, 거기에 진심이 있는 듯도 했다. "성경에서 예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죠.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번듯하게 성장한 한인사회에서 그리 많지도 않은 동족을 추운 거리에서 떨게 할 순 없잖아요. 게다가 이젠 그들과 정이 너무 많이 들어 손을 뗄레야 뗄 수도 없어요.(웃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꿈꾸며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대략 10~20여명이 머무는 아파트의 한 달 렌트비만도 2000달러가 넘는 데다 생활비까지 합치면 3000달러가 족히 든다. 정기적으로 돈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보니 월말만 되면 그는 렌트비 걱정에 신경이 곤두서고 피가 마른단다. "그래도 감사할 따름이죠. 제 힘만으론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하나님 은혜로 지인들과 교인들이 물심양면 도와줘서 한 달 넘기고 1년 넘기고 했으니까요. 그분들께 가장 감사하죠." 그래서 그의 가장 큰 바람은 이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하우스 한 채 마련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지내왔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아파트가 아닌 이들을 위한 안정적인 주택 마련이 가장 시급하죠.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 돌봐주셨으니 분명 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도 곧 마련되리라 믿습니다." 어쩌면 땅위의 기적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 태초에 신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허락한 측은지심의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그 기적의 씨앗일지도 모른다. 분명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그리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후원 문의: (323)244-8810 이주현 객원기자
2015.12.20. 17:52
전업주부로 생활하다 미국 이민 3년 넘게 밑바닥부터 식당일 배워 자신있게 개업했지만 곧 실망감 메뉴 줄이고 돼지고기 전문 변신 숯불갈비 인기로 1 년 만에 대박 "남 하는 것 해가지곤 성공 못하죠"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함지박 김화신(78) 사장, LA한인타운 맛집 좀 아는 이들이라면 모를 리 없는 이다. 함지박 간판 내걸고 장사한지 어느새 20년. 그 사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지만 그곳은 여전히 여전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자욱한 연기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고 어느새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하는 경쾌한 고기 굽는 소리까지. 결코 낯설지 않은 이 풍경 안에 들어서면 누군가는 대학시절 학교 앞 오래된 고기 집을, 또 누군가는 월급쟁이 시절 회사 인근 골목길 대폿집을 환기시켰을 터. 이 아련한 향수 안주 삼아 소주 한잔 들이키면 그곳이 타향이든 고향이든 무슨 상관이랴. 너나할 것 없이 타향살이의 고단함과 밥벌이에 지친 넋두리, 실없는 농담들을 쏟아 냈으니까. 그렇게 왁자지껄한 식당 창밖으로 하루가 저물어 갔고 신기하게도 누군가 건넨 적도 없는 위로를 양손 가득 챙겨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늘 더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이가 있었다. 바로 그이, 20년째 변함없이 화통하고 에너지 넘치고 유쾌한 김화신 사장을 함지박 2호점에서 만나봤다. #평범한 주부, 식당주인 되다 함지박의 20년 내공으로 보나, 화통한 성격으로 보나 김화신 사장은 분명 한국에서부터 식당 사업으로 잔뼈 굵은 이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한국에서 결혼 전까지 그는 그 시절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4급 공무원으로, 결혼 후엔 줄곧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냈다고 한다. 충남 아산이 고향인 그는 서울여상을 졸업하고 한국전쟁 직후 UN한국재건단과 유네스코가 공동 설립한 교육기관인 신생활교육원 졸업 후 농촌진흥청에 취직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이제 막 재건운동이 시작된 1960년대 초반 그는 수원, 청주, 진천 등 시골 마을에 부임해 과학적인 영농법부터 농촌계몽운동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렇게 11년쯤 근무하다 퇴직한 후엔 20년이 넘도록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는 평범한 전업주부로 지내다 1989년 미국으로 가족 이민 왔다. LA에 떨어지고 보니 앞길이 막막했다. 특별한 기술도, 밑천도 없는 그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식당일이었다. "공무원 시절 위생적이고 맛있는 된장 담그는 법을 십 수 년 가르치다보니 된장 담그는 것 하나만은 자신 있었거든요. 그래서 식당 사업을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경험이 있어야지. 그래서 일단은 무조건 배운다는 자세로 반찬 잘하는 집, 뷔페 집, 고기 집 등을 다니며 일했죠. 그땐 그저 이 악물고 자식들 데리고 살기위해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3년 반 넘게 LA한인타운의 크고 작은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식당일이 뭔지 알겠더란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밑천 삼아 수중의 6만달러를 털어 1993년 피코 길에 지금의 함지박을 오픈했다. #대박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식당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대박이 터진 것은 아니었다. 개업 후 반년 넘게 하루 평균 매상이 150달러도 안됐고 월 950달러 렌트비 내기도 빠듯했다. "이렇게 장사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고심 끝에 메뉴 수도 줄이고 전문화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돼지고기 전문집으로 승부하면서 숯불 돼지갈비가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죠." 이쯤 되면 함지박 대표메뉴인 돼지갈비 양념 비법을 안 물어볼 수가 없다. 혹시 며느리도 모르는 시크릿 레시피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뭐 다른 비법이 있나. 그저 열심히 연구하고 연습했을 뿐이죠. 좀 특별하다면 주문 받고 그 자리에서 양념해 바로 숯불에 굽는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랄까. 좋은 고기를 쓰고 그 신선한 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메뉴를 줄이고 전문화하니 주방 운영도 한결 쉬워졌고 고객들 반응도 좋았다. 덕분에 오픈 1년을 넘어서면서부터 함지박은 입소문을 타고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루 200달러도 안되던 매상은 5배 넘게 껑충 뛰어올랐고 평일 저녁시간에도 문 밖으로 길게 줄을 늘어설 만큼 북새통을 이뤘다. 그리고 2003년엔 타운 6가 길에 큰 딸과 사위가 2호점을 오픈해 성공을 거두면서 함지박은 LA한인타운 대표 식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엄마 같은 인심, 마음을 사로잡다 이런 함지박 성공의 이면엔 맛깔난 솜씨 외에도 김 사장의 넘치게 퍼 주는 배포와 친정엄마 같은 인심이 있었음은 이 식당 단골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 많이 알려졌듯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에겐 근무 시간이 아니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고 와서 밥을 먹을 수 있게 했고 유학생들을 보면 밑반찬이라도 하나 싸서 들려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흐르다보니 엄마 손 붙잡고 식당을 찾았던 꼬마숙녀가 결혼해 3대가 함께 이곳을 찾거나 그가 생일 때 챙겨준 미역국이며 바리바리 싼 준 김치를 잊지 못한 그 시절 유학생들이 LA에 올 때면 어김없이 그를 찾아 안부 인사를 전하는 것은 이젠 함지박에선 흔한 풍경이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의 그를 있게 한 것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에 있다.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사람을 통해서 가장 많이 배우죠. 지금의 정육 거래 업체도 20년이 넘었는데 늘 그곳에서 새로운 걸 배우니까요. 새로운 고기에 대한 정보부터 업계 동향까지 많은 정보를 얻은 덕분에 꾸준히 새로운 시도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3년 전 교통사고 이후 뇌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뒤부턴 예전처럼 식당에서 자주 볼 순 없게 됐지만 그는 여전히 한식세계화 강의며 타운 봉사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가 강연을 통해 식당 창업을 준비하려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남들 다 하는 업종이나 유행을 좇지 말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메뉴를 개발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다른 이들이 넘볼 수 없는 대체불가의 메뉴를 가진 식당을 해야 요즘 같은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요?" 곧 여든을 앞둔 이라 하기엔 너무 시크하면서도 에지 있는 조언이 아닌가. 남들 가는 비슷비슷한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라는 그의 충고는 분명 사업가들만을 위한 것은 아닐 터. 삶의 지혜를 묻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이며 동시에 여전히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자신에게 되뇌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11.27. 21:22
소아마비로 학교 못 가 영어 독학 19세 때 미국 고교졸업 자격증 취득 미국 오자마자 부동산 업체 취직 안정된 직업 위해 공무원 다시 도전 입사 15년 만에 매니저로 고속 승진 은퇴 무렵 부하 직원 300명 거느려 1981년 본지 첫 기고한지 벌써 34년 글 쓸 때 가장 즐거운 '60세 문학청년' 익숙하고도 친숙한 얼굴이다. 왜 아니겠는가. 30년 넘게 본지 오피니언란에 얼굴사진 걸고 수시로 칼럼을 써온 이인데. 보는 순간 단박에 그가 바로 그임을 알 수 있었다. 고동운(60)씨다. 30년간 가주 공무원으로 살아온 그는 지난해 봄 은퇴, 상업용 차량 보험사 경영인으로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그가, 학교 문턱도 밟지 않은 그가 80년대 초반 미국에 오자마자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만도 예사롭지 않은데 은퇴 후 환갑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의 칼럼만큼이나 진중하면서도 활기찬 청년 그 자체인 고동운씨를 LA다운타운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문학청년, 미국에 오다 그는 따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두 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했던 탓 그저 집에서 혼자 책 읽는 것이 당시 그의 세계의 전부였다. 외부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한 청소년 시절,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문학이었다. 러브스토리에서부터 펄벅의 대지까지 다양한 영문학 서적을 즐겨 읽었던 그는 그 책들을 원서로 읽고 싶다는 열망에 열세 살 무렵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그의 영어교사는 누나의 중.고등학교 영어 교과서와 카세트테이프. 하루 종일 영어 교과서와 테이프를 붙잡고 씨름했지만 워낙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즐겨한 덕분에 지루하고 힘든지도 모르는 시간들이었다. 당시 그의 부친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벽제갈비'를 운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탓 생인손이나 다름없었을 장남의 독학을 물심양면 지원했다. 그러다 독학에 한계를 느낀 그는 19세 무렵 당시 한국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에 장학금 문의를 한 것이 인연이 돼 용산 미8군 교육센터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석 달 뒤엔 미국 고교졸업 자격증(GED)까지 취득했다. 이런 끈질긴 영어공부 덕분에 그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영어실력을 갖출 수 있게 됐고 스무 살 무렵부터는 영어 번역출판 일을 하게 됐다. 그리고 1981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오게 된다.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니 미국에 오자마자 그는 구인공고가 난 것도 아닌데 관공서와 대기업 등 50여 곳에 무작정 이력서를 돌렸다. 덕분에 가주 재활국과 연이 닿아 필기시험을 보고 그곳에서 연결해준 미국 부동산 업체에 사무직원으로 취직하게 됐다. "당시 재활국에선 제 이력서를 보고 사무직으로 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기술 교육을 받아보라고 추천했죠. 그러나 제가 사무직 기회를 달라고 우겼고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사무직 취업용 필기시험을 보게 해줬죠." 그렇게 부동산에서 2년쯤 일하면서 그는 보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공무원 취업을 준비했다. 말이 취업준비지 특별한 공부 없이 일단 시험부터 치고 발령을 기다리는 평범한 준비과정이었다. 일은 순조롭게 풀려 공무원 시험을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1983년 가주 종업원상해보험국 말단직인 사무보조로 입사하게 된다. 말이 쉬워 공무원이지 결코 쉽지 않았을 그의 도전정신과 집념이 놀라울 따름이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죠.(웃음) 저는 성격상 불가능한 일에는 절대 매달리지는 않아요. 대신 될 것 같은 일엔 끈기를 갖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는 편이죠. 당시엔 공무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일도 잘 수행할 것이라고 제 자신을 믿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말단직으로 입사한 뒤 그는 꾸준히 승진시험에 도전해 2년 만에 오피스 테크니션으로, 7년 뒤엔 수퍼바이저로 승진했고 그 후 15년 뒤엔 매니저 자리에 올랐다. 공무원직라고는 하나 말단 사무보조로 출발해 짧은 시간엔 수퍼바이저가 되고 매니저가 되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목표를 정하면 어떻게든 승부를 봐 끝까지 목표에 이르고 마는 그의 끈기와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은퇴 전까지 그는 300여명이 근무하는 LA사무소에서 수퍼바이저 30명과 매니저 4명을 통솔하는 수석 매니저로 근무했다. 은퇴 직전 부사장급인 지역 사무소장 승진이 코앞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난해 봄 은퇴를 결심했다. 그리고 은퇴 다음날부터 지금의 회사로 출근했고 1년도 채 안 돼 관련 보험 라이선스 4개를 취득할 만큼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공무원으로 30년 근무했으면 적당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마침 사업을 하던 남동생이 좋은 제안을 했었고 더 늦기 전에 인생 2막을 시작해야 한다고 판단했죠. 이전에 했던 일이랑 관련은 있지만 또 다른 면도 많아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으로 일할 수 있어 즐겁습니다." #나누며, 소통하며 사는 삶 오래전 그의 은퇴계획은 은퇴 후 한국에 돌아가 장애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가 좋아하는 여행도 하고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그 계획을 조금 미뤘다. 지난해 처남이 갑작스레 사망한 뒤 남겨진 초등학생 어린 조카남매를 한국에서 데려와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처남의 사망은 저도 그렇지만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죠. 게다가 조카들이 너무 어려서 걱정이 많았던 아내에게 제가 아이들을 키우자고 제안했어요. 여력이 있어 도와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덕분에 요즘은 일과 후에도 아이들 숙제도 봐주고 놀아주느라 더 바빠졌죠.(웃음)" 덕분에 그는 3남1녀를 출가시키고 어느새 6명의 손주를 둔 어엿한(?) 할아버지지만 최근엔 어린 조카들을 돌보는 '영 대디' 로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바쁜 시간 속에도 그가 잊지 않고 틈나는 대로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바로 글쓰기, 즉 본지 오피니언란에 기고할 칼럼들이다. 1981년 본지에 첫 기고를 시작한 이후로 꾸준히 글을 써온 그는 1990년대엔 '이 아침에'에 고정칼럼을 연재하기도 했고 지금은 한 달에 한 편정도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글 쓸 때가 가장 즐겁다는 그는 지금으로서는 언제가 될지 모를 '진짜 은퇴' 후엔 아내와 여행하면서 사진도 찍고 블로그도 운영하며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단다. 이민 1세로서, 불편한 장애를 가진 이로서 그간의 세월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터이지만 그는 진심 행복해보였다. 환경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의 어깨 위엔 파랑새 한 마리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10.04. 20:07
2012년 프드트럭 경연 우승 유명세 웨스트LA서 개업과 동시 대박 행진 잦은 트럭 고장·헬스 인스펙션 등 시간 지나자 각종 문제로 마음 고생 동업자끼리 의견 충돌도 좋은 경험 문제 해결에 대한 자신감 키워나가 이번에 개발한 양꼬치·떡볶이 메뉴 홍대·강남 길거리 음식이 모티브 어르신들이 말하듯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햇볕 드는 날 있으면 바람 불고 비 오는 날도 있는 걸까. 과연 이 명제는 성공스토리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내건 이들에게도 해당사항 있는 걸까. 신데렐라와 왕자의 결혼 이후가 못내 궁금했듯 성공신화 거머쥔 이들의 햇볕 쨍한 날 이후를 궁금해 하는 걸 부디 사적인 관음증이라 타박하지는 말길. 3년 전 우리 앞에 혜성처럼 나타난 서울소시지 청년들의 인터뷰도 그렇게 시작됐다. 2012년 케이블TV 푸드 네트워크에서 제작한 푸드트럭 경연대회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한 뒤 미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얻은 그들이 최근 LA다운타운에 2호점을 오픈한 것을 보고 문득 그들의 성공스토리 이후의 시간이 궁금해졌다. 병이 도진 것이다. 그 동안 얼마나 더 번 것일까. '오픈 발' 이후 이들의 가게는 여전히 핫할까. 이 지극히 속물적인 질문에 그들은 또 무어라 답할 것인가. 바쁜 시간 쪼개 만난 이들에게서 이 우문은 밝고 경쾌한 현답이 돼 돌아왔다. 이 에너지 넘치는 청년들은 그 사이 경영 노하우만 는 것이 아니었다. 인생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깊어지고, 이전보다 더 낙천적이고 유쾌해졌다. 세월은 사업만 키워놓은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 아름다운 문제적 청년들을 최근 오픈한 LA다운타운 리틀도쿄점에서 만나봤다. #저 무지개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잘 나가는 광고회사에서 인정받던 직장인 테드(34.한국명 태웅).영(32.한국명 영웅김 형제와 크리스 오(36)셰프의 의기투합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샌프란시스코 출신인 이들은 애플본사가 있는 쿠퍼티노 시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죽마고우들이다. 그런 그들이 LA에서 뭉치게 된 계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잘나가던 부동산 운영을 접고 어려서부터의 꿈인 셰프가 되기 위해 LA로 와 유명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오셰프가 2010년 여름 김씨 형제에게 푸드 페스티벌에 함께 참가해보자는 제안을 하면서부터다. 당시 이들이 개발한 메뉴가 바로 소시지. 당시엔 돼지불고기와 소불고기 소시지 딱 2종류만 판매했다. "국가와 인종을 막론하고 소시지는 누구나 좋아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한국식 양념을 한 고기를 이용해 소시지를 만들기로 한 거죠. 첫 페스티벌에서 만들어간 소시지가 2시간 만에 동이 날 만큼 대박이 나서 저희도 신기했어요.(웃음)"(크리스) 그렇게 이들의 사업은 계약서도 없이, 그럴듯한 창업식도 없이 은근 슬쩍 시작됐다. 주중엔 직장에 다니고 주말엔 아파트에 모여 케이터링 주문을 받거나 푸드 페스티벌에 참석하면서 서울 소시지의 이름을 알려갔다. 덕분에 식당도 없던 2011년 '베스트 오브 옐프(Yelp)'에 이름을 올렸고 그 여세를 몰아 2012년엔 직장도 때려치우고 웨스트LA에 점포를 얻어 본격적인 창업 준비에 돌입했다. 그렇게 창업 준비가 한창이던 2012년 여름, 우연히 알게 된 푸드트럭 경연대회(Great Food Truck Race)를 보고 오픈까지는 시간이 있겠다 싶어 별 생각 없이 참가 신청을 했는데 웬걸, LA에서 뉴욕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파죽지세로 본선까지 진출, 7주 뒤 1등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당시 상금 5만 달러와 함께 부상으로 푸드트럭까지 받아 그해 10월 서울소시지 공식 오픈과 동시에 푸드트럭까지 운영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TV 출연 유명세 덕에 서울 소시지는 오픈과 동시에 문전성시를 이뤘다. #문제를 벗 삼아 성장하다 그러나 인생도 사업도 항상 호시절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시간이 흐르면서 그동안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던 매출은 제자리걸음을 하기도 했고 때론 하락세를 보이기도 했다. 서울소시지 유명세의 1등 공신이었던 푸드트럭 역시 운영이 쉽지 않았다. 잦은 고장으로 적잖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 프리웨이에서 서기도 일쑤. 프리웨이에서 푸드트럭이 서는 바람에 갓길에 임시정차 해놓고 그곳에서 요리를 한 뒤 다른 차로 픽업해 케이터링 한 적도 부지기수라고. "매일 매일이 문제와의 싸움이었고 현재도 그렇죠. 음료수 기계가 고장 나는가하면 어떤 날은 헬스 인스펙션 시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어제까지 멀쩡하던 냉장고가 망가지도하고 푸드트럭 엔진이 고장 나 예상치 않은 목돈이 들어가기도 하고… 그래서 식당에서 전화가 오는 날이면 덜컥 겁부터 나요.(웃음)"(영) 그러나 이처럼 매일 발생하는 문제야말로 가장 큰 스승이었다고 그들은 입을 모은다. "사업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죠. 그보다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이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교훈을 얻고, 또 그러면서 문제해결에 대한 자신감을 성장시켜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테드) 그렇다고 이들이 항상 호흡이 척척 맞는 것만은 아니다. "왜 안 싸우겠어요. 한 고집하는 한국 사람들인데요.(웃음) 그러나 싸우면서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 때문에 의견충돌을 피하진 않아요. 오히려 함께 모여 사업하는데 의견충돌이 없다면 그건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닐까요?"(영) #한식에 개성을 입히다 최근 2호점을 오픈하면서 개발한 메뉴들을 보면 한눈에도 한국식 길거리 음식 문화가 아기자기하게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올 봄 한국 케이블TV가 기획한 프로그램 촬영차 3주 정도 한국에 머문 이들은 홍대, 이태원, 강남 등 서울의 핫 플레이스에서 맛본 다양한 길거리 음식을 이번 2호점 신 메뉴에 접목 시킨 것이다. 양푼 냄비에 나오는 떡볶이가 그러하고 최근 한국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양꼬치에서 창안한 양고기 소시지가 그러하다. 여기에 한국 소주와 맥주까지 구비, 제대로 한국식 흥을 더했다. 이외에도 미국, 멕시코, 베트남 등 다양한 나라들의 음식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특색 있는 메뉴들을 2호점에 가면 만나 볼 수 있다. 둥근 달 휘영청 떠오른 가을 밤, 이 열혈 청년들이 내오는 유쾌.상쾌한 접시와 마주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하루의 고단함은 잊은 채 소주 한잔 은근 절실해진다. 그렇게 한잔 두잔 기울이다 보면 강릉 경포대에만 뜬다는 다섯 개의 달 중 한 개는 어느새 당신의 잔속에서, 또 한 개는 내님의 눈동자에서 아련히 흔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빛바랜 노스탤지어 물안개처럼 번지는 어느 늦은 밤, 이 곳에서라면 어쩐지 그런 동화 같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09.26. 21:47
#현모양처, 정계 진출하다 서울에서 출생한 그녀는 중학생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일본여자대학 영문학과 1학년 재학 중인 1975년 미국으로 건너 와 페퍼다인 대학에서 비즈니즈를 전공했다. 그 후 2010년 USC에서 MBA를 취득했다. 당시 경영학과 졸업생답게 당연하게도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을 꿈꿨을 것이라 추측했지만 웬걸. 스무 살 시절 그녀의 꿈은 현모양처였단다. "수줍음도 많았고 남들 앞에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죠. 그저 살림 잘하고 애들 잘 키우는 현모양처를 꿈꿨죠. 지금도 여전히 남 앞에 나서 연설하고 언론과 인터뷰하는 일이 그리 적성에 잘 맞는 건 아닌 것 같아요.(웃음)" 그녀의 바람은 별 탈 없이 이뤄졌다. 테니스 친구로 만난 숀 스틸(67) 변호사와 81년 결혼, 두 자매를 낳고 말 그대로 현모양처로서의 일상을 보냈다. 그렇다고 전업주부로만 산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한인가정상담소, KAC, 평통 등을 통해 한인사회에서 왕성하게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다 1992년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은 4.29 LA폭동과 맞닥뜨리게 된다. "당시 한인사회가 주류 미디어를 통해 왜곡된 모습으로 보도되는 걸 보고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그때 정치입문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런 그녀의 결심에 힘을 실어준 이는 바로 부군 숀 스틸 변호사. 현재 전국 공화당 가주 대표 위원인 스틸 변호사는 지금까지 전폭적인 그녀의 후원자로서 인생 동반자를 넘어 가장 든든한 정치 동반자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표심을 잡다 그녀의 정치 인생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다. 1993년 LA시 소방국을 시작으로 LA시 공항국, LA카운티 아동가족위원회 등에서 커미셔너를 역임했고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대통령 아태계 자문위원까지 숨 가쁘게 정치 이력을 쌓아왔다. 이때 그녀는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현장에서 주민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드디어 2006년 11월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60.5%라는 높은 지지율로 당시 미국 내 한인으로는 최고위 선출직인 가주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당선됐다. 2010년엔 재선에 성공해 올해 1월까지 조세형평국 부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당시 그의 업무는 관할지역인 LA카운티 일부와 오렌지.샌디에이고.리버사이드 카운티 850만 납세자들을 대변하고 1년 조세 540억 달러의 세금행정을 총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OC 수퍼바이저에 당선돼 현재 오렌지카운티 제2지구 수퍼바이저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수퍼바이저란 시단위로 치면 시장과 같은 위치로 현재 OC는 총 5명의 수퍼바이저가 카운티 살림을 공동으로 맡아 하고 있다.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고고씽~ 이처럼 그녀가 적잖은 시간 동안 꾸준히 성공적인 정치 이력을 다져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각고의 노력덕분이었다. 완벽주의자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실함과 부지런함,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야말로 현재의 그녀를 있게 했다. 조세형평국에서 활약할 때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수퍼바이저로서 그녀에게 하루 24시간은 여전히 모자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8시 출근을 시작으로 정기적으로 잡혀있는 회의만도 하루 평균 2~3개가 넘고 각종 업무 처리와 행사까지 참석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 도대체 그 업무라는 것이 뭐 그리 많은 걸까 하는 회의적이고 미심쩍은 눈초리에 그녀가 최근 현안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최근 OC 내 가장 큰 이슈중 하나는 405 프리웨이 확장 사업과 관련된 유료화 문제인데 이를 두고 가주 교통국과 협의로 분주하죠. 또 공원에 홈리스가 늘면서 이들을 위한 셸터 건립문제도 지금 현안 중 하나고요. 어디 그뿐인가요. 최근 코요테 수가 갑자기 늘어 나 포획 여부도 결정해야 하고 얼마 전 헌팅턴비치 인근 다리가 무너질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는 부리나케 달려가 전문가들과 직접 다리 현황을 살펴보기도 했죠."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안들을 다 듣고 있다가는 날이 샐 지경이었다. 듣는 사람이 더 숨 가쁜 이 많은 의제들이 다 최근 며칠 사이에 일어난 것들이란다. 게다가 이런 다양한 건의들이 한주 평균 30~40개씩 쏟아져 들어온다고 하니 정말이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듯싶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상상하듯 수퍼바이저라 해서 폼 나는 수트 빼 입고 다닐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늘 진과 스니커즈를 신고 현장을 누비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렇게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온 그녀의 정치인생 마지막 목표는 무엇일까. "앞으로 많은 2세, 3세들이 미 정계에 진출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죠. 그러려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한인사회를 보다 더 심도 있게 알고 다양한 교류를 가져야 하는데 제가 바로 그런 역량 있는 2세들과 한인사회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돕고 싶은 소박한 바람으로 정치를 시작했다는 이 원더우먼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했다. 그 여정, 좀 시간이 걸린다 해도 괜찮지 싶다. 앞으로 그녀가 만들어갈 그 길이 또 얼마나 어메이징 할지 벌써부터 기대 만발이니까. 이주현 객원기자
2015.09.13. 20:02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 지금도 사용 남다른 예지력으로 사업 수완 발휘 일찍부터 외국으로 눈돌려 직거래 서부 2위 수산업체 고속성장 일궈 요즘 관심은 반조리·즉석식품 '미래의 먹거리' 로 선택 집중 투자 성공한 사업가의 카리스마 얼핏 스치기도 하나 그의 첫인상은 대학 강단 혹은 병원 연구실에서나 마주칠 법한 학자풍이다.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정작 사업 얘기보다 최근 읽고 있다는 진화인류학 얘기에 더 눈을 반짝이는 이 남자 어쩐지 직업을 잘못 찾아 들어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연 매출액 2억5000만 달러 서부지역 2위 규모의 수산물 유통업체를 이끌고 있는 퍼시픽 아메리칸 피시 컴퍼니(PAFCO.이하 팹코) 피터 허(55. 한국명 허윤)대표. 이쯤 되면 그를 두고 타고난 사업가나 천부적 사업수완이라는 수식어가 나올 법도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는 타고났다기보다는 성실한 노력으로 천부적 수완이라기보다는 빈틈없는 과학적 사고로 지금의 팹코를 성장시켜 왔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반전 매력이 터지는 피터 허 대표를 한낮의 태양이 작열하는 오후 버논(Vernon)시에 위치한 팹코 본사에서 만나 봤다. #수재소년 생선가게 주인이 되다 삼형제 중 장남인 그는 열 살 때 부친과 함께 LA로 왔다. 1970년 당시 부친은 한인타운 칼스 마켓 생선부에서 일하다 1975년 다운타운에 수산물 도매상을 개업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운전면허를 따자 마자 그는 부친을 도와 가게 일을 시작했다. 방과 후면 가게로 나와 배달은 물론 회계 업무까지 도맡아 했다. 밤 11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피곤한 일상이었다. 이러다 보니 학교 공부는 뒷전이 될 수 밖에. 계속 LA에 남아있다간 대학에 못갈 것 같아 겁이 나더란다. 그래서 성당 신부님의 도움을 얻어 북가주에 있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덕분에 2년간은 장사 걱정 없이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고 결국 수석졸업을 거머쥐고 명문 앰허스트 칼리지 화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의대 진학이 목표였다. 그렇게 의학도의 꿈을 안고 대학생활을 시작했지만 장남으로서 LA에 있는 부친 걱정은 어쩔 수 없는 노릇. 결국 그는 1년 대학생활 1년 휴학을 반복하며 학업과 사업을 병행했다. 덕분에 7년 만에 대학을 마치긴 했지만 대학을 졸업하던 1985년 팹코는 연매출 2000만 달러의 번듯한 수산물 도매업체로 성장하게 됐다. 부친이 LA다운타운에 작은 점포를 낸 지 딱 10년만의 일이다. #사업은 과학이다 대학 졸업 후 LA에 오자마자 그는 물류관리부터 회계업무까지 가능한 경영관리 프로그램 개발에 직접 나섰다. 컴퓨터도 희귀하던 그 시절 일반인이 프로그램을 구축하다니 좀 당황스럽긴 하다. "대학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공부도 했던 터라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면 꼭 필요한 시스템이라 생각했기에 구축한 것뿐이죠." 이 관리 프로그램은 지금까지도 팹코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수 십 년 앞을 내다본 신의 한수였다. 또 그는 경영기초를 쌓기 위해 LACC 야간대학에 등록해 회계학도 공부했다. 무엇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그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 한눈에 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탄탄한 기초를 바탕으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팹코는 남미 일본 인도 유럽 등과 직거래를 시작하고 미국 내 중국 베트남 일본 커뮤니티를 비롯 주류 시장까지 거래처를 늘려가며 고속 성장을 일궈냈다. 그리고 2005년 버논 시에 부지를 매입 허 대표가 직접 설계에 참여한 총 2000만 달러가 투입된 건평 10만6000스퀘어피트에 이르는 최첨단 사옥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사옥 건립 후 10년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팹코는 현재 생물 냉동 완제품 등 총 3000여 제품을 판매하는 연매출 2억5000만 달러 종업원 270명의 명실상부 서부지역 2위의 수산물 유통업체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팹코는 지난 달 LA 비즈니스 저널이 매년 선정하는 '아시안 비즈니스 어워드' 개인기업 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미래를 경영하다 지금껏 그가 팹코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선견지명 때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네기나 록펠러 같은 위대한 사업가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관심이 많죠. 그 흐름을 읽지 못하면 사업도 언젠가는 끝이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허 대표는 지금 당장 수익을 내진 않더라도 미래를 위한 투자와 연구를 아끼지 않는다. 현재 그가 관심 갖고 집중 투자하는 것은 간편식. 즉 오븐에 데워 먹을 수 있는 반조리(ready to cook)제품에서부터 즉석식품(ready to eat) 등이 그것이다. 이 제품들은 현재 주문자생산방식(OEM) 방식으로 겔슨이나 홀푸드 등 마켓에 납품되기도 하고 자체 브랜드로 판매되기도 한다. 아직까지 이 제품들의 판매량은 총매출의 10% 수준이지만 미래를 내다보면 유망주가 될 것이라 판단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또 지난해부터는 아마존을 통해 온라인 판매도 시작하는 등 미래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독서광이 꿈꾸는 세상 그는 독서광이다. 한국역사에서부터 자연과학 인문학 사회학 건축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분야를 넘나드는 오랜 독서 내공은 열혈 청년 과학도이자 인문학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정치 사회문제에도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4.29 LA폭동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죠. 우리 스스로 정치력을 강화해야 미국 사회에서도 힘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이방인이 아닌 진정한 이 나라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을 돕는 데도 노력을 해야 하고요." 특히 그는 일본의 역사왜곡 바로잡기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위해 혼다 의원 등 관련 정치인들과 연계해 직접 봉사활동에 나설 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지금도 관련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오랫동안 유니셰프 KPCC 칠드런스 호스피털 등 비영리단체들의 후원을 통해 사회정의와 소수계 인권 사회적 약자를 돕는 데도 묵묵히 앞장서 왔다. 사업에 있어 그는 세상의 변화를 읽기 위해 노력한다지만 삶의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느리지만 단호하고 보이지 않는 듯싶지만 강렬하게. 이주현 객원기자
2015.08.23. 16:42
LA서 어머니 도와 일군 봉제사업 NAFTA 위기 때 과감히 공장 이전 매년 수익 3% 꾸준한 재투자 효과 20년도 안돼 16개 기업군으로 키워 "혼자만 배 부른 장사는 오래 못가 종업원과 이익 나눠야 진정한 사업" 이런 문제적 남자를 봤나. 늘 남들이 확신하는 길이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려가는 이 남자,엘살바도르의 한인 거상 카이사(CAISA)그룹 하경서(미국명 데이비드 하.52) 대표다. 그의 첫인상은 대표라는 직함이 어색하리만치 개구쟁이 소년 같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금세 그 첫인상은 뇌리에서 사라진다. 천진난만한 소년 같다고 느껴지는 찰나, 안경 너머 빛나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간의 이력에 대해, 그의 집념에 대해 꽤 많은 이야기를 건네 오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미국 사업체를 접고 남들 말리는 엘살바도르 행을 선택한지 어느새 12년 세월. 그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현지에서도 알아주는 기업체를 일군 하 대표는 지난 8일 미주동포후원재단(이사장 김재권)이 선정한 '제 10회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상했다. 수상 일주일 전 업무 차 LA를 방문한 하경서 대표를 한인타운에서 만나봤다. #가난했지만 치열했던 청춘 3형제 중 장남인 그는 1973년 열 살 때 모친과 함께 LA에 왔다. 특별한 기술도, 밑천도 없었던 모친은 무작정 봉제공장에 취직해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고 일요일에도 일감을 집에 가져오는 어머니를 도와 그렇게 그는 봉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주말도 없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그의 모친은 5년 만에 봉제공장 하나를 차릴 수 있게 됐다. 말이 봉제공장이지 방 하나에 중고기계 몇 대 들여놓고 직원도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고단한 노동이었다. 당시 하 대표는 어머니를 도와 일감도 받아오고 배달도 하면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주경야독 끝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중소 규모의 봉제 공장 세 곳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치열한 청춘이었다. 그가 엘살바도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로 미국 봉제업이 위기를 맞게 되자 1994년 저렴한 인건비와 면세 혜택이 있는 엘살바도르에 공장을 인수하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뒤 10여 년은 LA와 엘살바도르를 오가며 사업을 하다 2003년엔 아예 LA쪽 사업을 접고 가족들을 데리고 엘살바도르로 향했다. #엘살바도르의 한인 거상 현재 카이사그룹 내 사업체는 총 16개로 엘살바도르 뿐 아니라 LA, 과테말라, 니카라과 등까지 진출해 있으며 연 매출 3억3000만 달러에 종업원 수만도 6000여명에 달한다. 주 종목은 봉제업이지만 그 외에도 커피농장, 패키징 제조업, 건설업, 부동산, 리조트 등 다양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이 많은 사업 중 지금의 그를 있게 한 효자 업체는 단연 텍스옵스(TexOps). 텍스옵스는 세계 상위 2% 수준의 기계 설비와 제작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스포츠웨어 전문 제작 업체다. 현재 이 곳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핫한 스포츠 브랜드인 룰루레몬(Lululemon)을 비롯 리복, 이탈리아 대표 바이크 전문 브랜드 카스텔리(Castelli) 등 세계 굴지의 스포츠웨어를 제작하고 있다. 최근 그는 지금껏 쌓아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체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있을 만큼 스포츠웨어 제작에 있어서만큼은 세계 최고라 자부한다. 이처럼 엘살바도르 진출 20년이 채 안 돼 한인 거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로 그는 주저 없이 꾸준한 재투자를 꼽았다. "매년 총수익의 3% 이상은 꼭 기계 설비와 종업원 교육에 재투자합니다. 덕분에 봉제공장의 경우 최첨단 설비와 테크놀로지를 어느 업체보다 빠르게 도입해 세계 최고의 시설을 보유하고 있죠. 또 직원들 교육을 위해서도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당장은 돈이 들어가는 것 같아도 결국 그 투자는 배반하지 않고 다시 돌아오니까요." 그렇다고 그의 사업이 늘 평탄대로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귀가 얇아서인지(웃음) 사기도 잘 당하고 덜컥 사업체를 인수했다 문제가 생겨 크게 고생한 적도 있었죠. 결국 사업가란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렇게 적잖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결국 사업이란 사람 장사죠. 사기 당했다고 사람을 믿지 못하면 사업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문제를 두려워해 판을 벌이지 못하고 주춤하기보다는 일단은 저지르고 보는 거죠. 그렇게 실수를 통해 교훈을 배우는 것이고 그 경험이야 말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최고의 자산인 셈이죠."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엘살바도르에서 그가 얻은 것은 단순히 사업가로서의 성공만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작정하고 벌이는 종업원 복지 확대와 사회 환원 사업으로 인해 그는 엘살바도르 현지인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텍스옵스에는 현지에서도 보기 드문 직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이 운영되고 있고 영어, 컴퓨터, 요가 클래스 등도 직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또 엘살바도르 사이클링 국가대표 선수들 중 일부를 선발, 훈련 지원과 월급까지 제공하며 후원하고 있는 중이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사업체와 별도로 10대 미혼모들을 위한 셸터를 건립하고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직업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그의 사업체는 블루칼라든 화이트칼라든 구직자들에게 인기 사업장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일까. 서바이벌만도 힘든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현지인들에게 끊임없이 손을 내미는 이 이방인의 속내는. 이 속물적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했다. "혼자만 잘 살면 뭐 하겠어요? 돈 많다고 세끼 먹을 거 네 끼 먹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옷 더 걸쳐 입을 것도 아니고. 결국 직원들과 함께 성장해야만 기업이 건강하고 장수 할 수 있죠. 어차피 직원들과 오래도록 기업을 하고 싶다는 게 제 꿈인 이상 직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혜택을 주기위한 궁리는 계속 될 것입니다." 이 행복한 궁리 덕분에 언젠가부터 그에게 사업은 골치 아픈 밥벌이가 아닌 즐거운 놀이며 취미가 됐단다. 배부른 허세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단언컨대 그의 놀이는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험난한 '맨땅에 헤딩'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남들이 말리는 그 길을 찾아 오늘도 지도 밖으로 행군 중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08.09. 20:20
타고난 추진력으로 자바 생활 30년 어려울 때마다 새로운 돌파구 모색 한국산 원단 몰려와 힘들자 중국행 2년간 혹독한 수업료 내고 자리잡아 4년만에 대박 내고 자바 금의환향 매년 20%씩 매출 늘리며 고공 성장 2013년부터 자바에 한파 불어닥쳐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의욕 불태워 타고난 비즈니스맨이지 싶다. 승부근성으로 똘똘 뭉친 데다 한번 결정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는 추진력까지. 그 타고난 근성으로 그는 지금의 성공신화를 일궈냈다. 그렇다고 그가 걸어 온 길이 항상 넓고 포장된 길이었을 리 만무할 터. 길을 잘못 들어 고생하기도 하고 때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생채기가 나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는 지도에도 없는 길을 내가며 여기까지 왔다. 어느새 30년 세월이다. LA 자바에서 잔뼈 굵은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견딘 이 정도 성공담이라면 적절한 양념 얹어 목소리를 높일 법도 하다. 그러나 웬걸, 그의 어조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담담했고 이야기는 밋밋하다 싶을 만큼 담백했다. 어찌 무림의 고수들만이 공력을 쌓을까. 일희일비의 무상함을 이미 깨달은 자의 범접할 수 없는 내공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오후, '보졸로 어패럴' 강일한(59) 대표를 만나 그의 30년 사업 인생을 들어봤다. #아메리칸 드림을 넘어 고교시절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 온 그는 미 육군에서 3년 복무 후 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다 1982년 LA에 왔다. 처음 LA에 와 시작한 비즈니스는 가발 가게. 그러다 본격적으로 자바 비즈니스를 구상하며 바닥부터 배우겠다는 각오로 1986년 원단 회사에 입사해 3년간 의류 사업 전반을 익혔다. 그 뒤 1989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 10년간 의류도매와 원단 수입업체를 운영했다. 원단 수입업체를 운영하면서는 호경기를 맞아 적잖은 돈을 벌기도 했지만 1997년부터 한국산 수입 원단이 들어오면서 고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힘든 시기의 돌파구를 중국에서 찾았다. 중국의 저렴한 원단과 인건비가 의류사업의 물꼬를 터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LA 사업기반을 정리하고 2001년 중국 광저우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미지의 땅에서 맨손으로 의류 제작 사업에 도전하게 된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중국에서의 첫 걸음은 쉽지 않았다. 아니 피를 말리는 전쟁이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중국내 에이전트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중국 물정 모르고 언어도 익숙지 않아 현지 공장과의 마찰도 부지기수였다. 그 결과 2년여 동안 중국 사업은 그의 표현대로 '박살'이 났다. 그렇다고 그대로 사업을 접을 수도 없는 노릇. 그럴수록 그는 더 열심히 사업에 매달렸다. 주말도 없이 오전 6시부터 공장과 사무실에 살다시피 했고 퇴근 후 저녁시간엔 중국어 공부에 매달렸다. 덕분에 2003년부터는 그의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성공신화를 쓰다 "비즈니스도 결국은 사람 장사인 셈이죠. 2년 넘게 그 나라 사람들과 부대끼고 일하다보니 신뢰가 생기고 그러면서 믿고 거래하는 공장도 생겼습니다. 직접 부딪치며 배운 사업 노하우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사업도 자리 잡아 가기 시작했죠." 그의 표현대로라면 중국 정착 1~2년 동안은 '중국에서 이렇게 사업하면 망한다'를 배웠고 그 후 1~2년은 '중국에서 이렇게 사업하면 성공한다'를 배웠다고. "이렇게 맨땅에 헤딩하며 얻은 교훈은 무엇보다 현지 언어 습득이 최우선이고 그 다음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에게 서두르지 않고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LA 지인들이 저를 보고 외모도 중국사람 같다고 놀릴 만큼 현지화에 성공했죠.(웃음)" 결국 그는 해냈다. 2년간의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후 2003년부터는 저렴한 원가를 앞세워 미국으로 의류 수출을 시작했고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그동안 까먹었던 원금 회수는 물론이고 돈도 벌만큼 벌었다. 2005년 그는 LA로 금의환향 해 보졸로 전신인 선라이즈 어패럴을 오픈했다. 중국에서 만든 옷을 직접 팔 계획이었다. 원단에서 판매까지 자바에서 잔뼈가 굵은 터라 더 이상의 연습게임은 필요 없었다. 무엇보다 중국산 의류가 당시 시가보다 50%나 싼 터라 가격만 놓고 봐도 경쟁력은 충분했다. 덕분에 선라이즈 어패럴은 매년 20%씩 매출을 늘리며 승승장구했다. 처음 직원 10여명으로 출발한 회사는 창립 4년 만에 90여명으로 늘었고 2009년엔 지금의 자체 사옥을 매입해 이전 할 만큼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위기를 기회 삼아 나의 길을 간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인생도 사업도 어디 늘 호시절만 있을 수 있겠는가. 미국 경기 침체와 자바 불황에서 그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법. 2013년부터 승승장구하던 비즈니스가 조금씩 주춤하더니 지난해 주 거래처인 대형 의류업체 몇 곳이 문을 닫으면서 그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선라이즈 어패럴의 주 종목인 베이식 아이템뿐 아니라 영 캐주얼로도 품목 다양화를 꾀하고 회사 살림살이 허리띠도 졸라매고 폭풍우를 피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내년 말까지 자바의 빙하기는 계속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래왔듯 힘들다고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종업종끼리 서로 뭉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부터 LA한인회 이사장을 비롯해 한인의류협회와 LA한인상공회의소 이사라는 감투를 쓰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경기가 힘들수록 안으로 움츠러들기보다는 밖으로 눈을 돌려 업계 동향도 파악하고 힘들 때 서로 버팀목도 돼주면서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30년 세월 산전수전 다 겪었다곤 하지만 적잖은 회사 식구들을 이끌고 가야할 수장으로서 그의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어제와 다름없이 길을 나선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오늘도 묵묵히 그에게 주어진 길을 걷는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07.13. 11:13
노량진 시장서 파는 컵밥 벤치마킹 중고 트럭부터 구입해 배수진 창업 2년만에 푸드트럭 매출만 20만 달러 경기장 부스 9개·투고 식당도 2개나 팔로우 한 명 선정해 깜짝 무료 파티 SNS 입소문, 언론 기사화로 유명세 2만여 SNS 팔로우에 동호회도 생겨 유타 주에선 새로운 문화현상으로 이런 허세작렬, 솔직발랄한 젊은이들을 봤는가. '컵밥을 먹어라. 그리하면 황금 변을 보게 될지니'(Eat Cupbop,Poop Gold)라는 우스꽝스런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보란 듯 거리를 활보하질 않나, 푸드트럭이 무슨 비보잉 무대인양 음악에 맞춰 고성을 지르고 춤까지 춰가며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가 하면, 푸드트럭을 몰고 고객 집 앞까지 찾아가 그 가족들과 친구들을 불러 동네잔치를 하는 참 별나디 별난 청년들. 바로 유타 주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는 푸드트럭 '컵밥' 주인장들인 송정훈(37). 김종근(42).박지형(31) 공동대표다. 바로 그들이 LA에 떴다. 최근 한국 공중파 방송에서 그들의 성공스토리가 방영된 뒤 한국 젊은 세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이들을 LA한인타운에서 만나봤다. #유타의 마음을 사로잡다 지금 '컵밥'은 조용하던 유타 주에 새로운 문화 현상이 됐다. 피부색도 눈동자 색도 서로 다른 이들의 마음과 입맛을 컵밥 한 그릇이 사로잡은 것이다.'컵밥'이 탄생한지는 이제 겨우 2년. 그러나 그 인기만큼은 장수 아이돌 저리가라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SNS로 이들을 팔로우하는 이들만도 2만5000명을 훌쩍 넘어섰고 SNS에서는 컵밥 마니아들끼리 동호회를 만들어 맛 비교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 고객 불만이 SNS에 올라오면 열혈 마니아들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팔 걷어 붙이고 해결사(?)노릇을 자청할 만큼 '컵밥'은 이제 새로운 팬덤을 만들어 가고 있다. 2013년 5월 중고 트럭 한 대로 시작한 '컵밥'은 창업 2년 만에 유타주 전역을 누비는 푸드트럭 네 대를 비롯해 축구장, 농구장, 미식축구장 등 운동 경기장에 자체 부스 아홉 곳, 투고전문 레스토랑 두 곳 등 짧은 시간에 눈부신 성장을 일궜다. 당연히 매출도 껑충 뛰어 현재 푸드트럭 네 대에서만 월 2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릴 만큼 성공을 이뤄냈다. 듣고 있노라면 '헐~ 대박' 소리, 절로 나올 밖에. 그 누가 이들의 성공을 놓고 젊음이 한 밑천이라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물설고 낯 설은 남의 나라 땅에서 그 성공이 쉬웠을 리 만무하다. 당연히 그들의 땀과 눈물이 이 성공 스토리의 주연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명랑청년 3인방의 파란만장 성공기 10여 년 전 유타에 유학생 신분으로 온 이들이 그 10년을 1년처럼 살아온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힙합 댄서로 활동했던 정훈씨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종근씨, 성악 전공자인 지형씨, 삼국지의 유비.관우.장비만큼이나 개성 제각각인 이들이 2년 전 삼국지의 그들처럼 도원결의를 맺는다. 시간이 가면 현실에 부딪쳐 이 도원결의도 사라질까 싶어 이들은 그동안 모았던 돈 털어 중고 푸드트럭 한 대부터 떡 하니 사 들여놓고 봤단다. 그 누구도 뒤로 물러설 수 없도록 배수진부터 친 것이다. 트럭 메뉴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한식으로 정했다. 정훈씨가 수년 전 식당 서빙 일을 할 당시 언젠가는 내 식당을 차리지 않을까 싶어 적잖은 돈을 투자해 사모아 둔 한국 유명식당 레시피 위에 종근씨가 유타에서 수년간 일식 셰프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밤잠 설쳐가며 연구한 소스를 얹는 것이 기본이 됐다. "컵밥이라는 콘셉트는 한국의 노량진 컵밥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바쁜 시장 상인들을 위해 한 컵에 밥과 반찬이 모두 들어간다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죠.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딱 이지 싶었습니다. "(김종근) 한국의 컵밥을 조금 변형한 이들의 컵밥은 밥 위에 고기(불고기, 돼지불고기, 갈비 등)를 얹고 입맛에 맞는 소스를 선택해 얹으면 끝이다. 빠르고 간편한 데다 세계적인 한식열풍까지 맞물려 컵밥은 오래지 않아 말 그대로 대박을 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이들이 지금처럼 유명세를 얻게 된 가장 큰 계기는 한 달에 한 번씩 SNS 팔로우 중 한명을 선정해 푸드트럭을 집으로 몰고 가 그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무료로 컵밥을 제공하면서 부터다. 당첨된 이들은 '컵밥이 우리 집에 왔다'며 야단법석 SNS에 이를 올렸고 이에 대해 사람들은 댓글로 부러움과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단박에 컵밥은 인기 스타로 부상했다. "뭐 특별한 마케팅 전략이라기보다는 그냥 컵밥을 좋아해주는 이들과 함께 즐겁게 놀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행사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반응이 좋았을 뿐이죠."(송정훈) 이 덕분에 컵밥은 지난해 유타 주 최대 로컬TV 출연은 물론 지역신문과 잡지에도 대서특필 되면서 컵밥의 열풍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기세라면 조금은 쉬어갈 법도 한데 이들은 한 달 전 네 번째 푸드트럭인 한국식 타코 '코타코'를 론칭했다. 그리고 코타코는 한 달에 한 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집을 찾아가 그 앞에서 장사를 하고 그날 수익 전부를 그들에게 기부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이 얻고 싶은 것은 돈이 아닌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한 개라도 더 팔아 한 푼이라도 더 남겨야겠다는 얄팍한 마케팅 전략이 아닌 내 집에 초대한 손님이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음식을 즐겨주길 바라는 잔치 집 아낙 같은 마음 씀씀이 말이다. 그러다보니 그 어느 누가 이들에게, 이들의 밥상에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처음엔 이들이 한국어를 하는 타인종 고객들에게 덤으로 공짜 음식을 퍼주고, 고객들과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미국식 마케팅이라 믿었는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저 그것은 아주 단순한 한국식 정이었다. 끊임없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이 남자들, 아마도 그들이 그 한 컵 밥에 담고 싶은 것은 함께 나누면 더 커지는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07.05. 20:17
햄버거 가게 종업원들 비위생적 흡연 걱정하던 큰 딸 때문에 연구 시작 2009년 디자인 저작권 등록해 알려져 현재 미국·한국 등 32국 특허 출원 연방보건국. WTO 등에 필요성 알리기 지금도 밤샘 자료 수집. 이메일 보내 젊기 때문에 도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터. 나이불문, 도전하는 모든 이들은 젊다. 바로 이 명제를 증명하는 이가 정계순(76)씨다. '위생 담배 케이스'라는 조금은 생소한 제품을 개발한 그는 1989년 처음으로 이 제품을 창안한 이래 수십 번의 디자인 수정을 거치고, 상용화를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25년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왜 아니겠는가. 이민 1세대 가장으로 먹고 사는 것도 쉽지 않은 세월 속, 전업 발명가도 아닌 중년의 아마추어 발명가가 새로운 제품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아직도 이 제품은 시중에서 찾아 볼 수 없지만 여전히 그는 지치지 않고 흡연자들이 보다 더 위생적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동분서주하고 있다. 생업 전선에선 은퇴했지만 그는 다시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스무 살 청년 정신을 가지고 있는 고희의 발명가를 그의 자택에서 만나봤다. #일터에서 발견한 아이디어 1980년, 아내 정홍자(71)씨와 4남매를 데리고 LA로 이민 온 정씨는 LA다운타운에서 햄버거 가게를 운영했다. 당시 어린 자녀들을 맡길 데가 마땅치 않아 4남매를 모두 가게에 데리고 출퇴근을 했다. 열두 살이던 맏딸 수은씨는 가게 종업원들이 지저분한 손으로 담배 필터를 꺼낸 뒤 이를 다시 입에 무는 것을 보고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고. "어느 날 수은이가 사람들이 지저분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고 그것을 입에 무는데 괜찮은 거냐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질문을 했죠. 전 비흡연자였지만 어른들에게는 너무 익숙해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 어린 아이에게는 충격일 수 있겠다 싶어 저 역시 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정씨의 위생담배 케이스의 출발은 수은 양의 걱정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담배를 달고 살았던 젊은 종업원이 폐암으로 사망하자 수은 양의 충격은 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은 양은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인 위생담배 케이스 발명에 들어갔다. 물론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발명이라는 것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고, 전문 디자이너도 아닌 이들 부녀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그러나 1년 뒤인 1989년 부녀는 케이스 윗부분이 아닌 옆면이 통째로 열리는 획기적인 위생 담배 케이스를 디자인하는 데 성공한다. 이 디자인은 담배케이스를 열면 담배가 통째로 나와 입이 닿는 필터가 아닌 담배 몸통을 집을 수 있도록 디자인 돼 위생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아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 특허를 받기에 이른다. "당시엔 이 제품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수은이에게도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언젠가는 좋은 일에 쓰이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정도였죠." #아이디어를 현실로 불러들이다 그래서 그는 모국에서도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 좋은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특허가 나자마자 당시 한국담배공사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편지는 흡연자들을 위한 위생을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결해 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요지였고 담배공사 측에서도 감사의 표시를 담은 회신을 받기도 했다. 특허에 대한 반향은 생각보다 컸다. 가게에 담배를 대주던 미국인 도매상이 이 특허 소식을 듣고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 굴지의 제지회사 관계자에게 이를 알린 것이다. 얼마지 않아 그 제지회사 관계자는 멤피스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왔고 정씨의 담배케이스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계약은 불발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담배 케이스는 자연스레 이들의 뇌리 속에서도 사라지는 듯했다. 먹고 사느라 바쁜 10년 세월이 흐른 2000년대 들어서면서 정씨의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특허를 받은 뒤 시간만 보내면서 아이디어를 창고 안에 썩혀 둘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마침 장성한 자녀들도 본격적으로 위생 담배 케이스에 큰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당시 버클리대 대학원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는 큰 아들이 비위생적 흡연으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리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도움으로 미 공공기관에 편지를 보내 비위행적 흡연의 폐해를 알리기도 했죠. 성심성의껏 도와준 아이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겁니다." #가족들이 함께 일군 쾌거 그러다 본격적으로 위생 담배 케이스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은 2009년 미국 저작권청에 디자인 저작권 등록을 마치면서부터다. 이를 위해 그는 1년여를 다시 담배 케이스와 씨름을 해야 했다. 직접 담배 케이스를 사서 이를 해체, 재구성하기를 수 백 번 끝에 그는 케이스의 가운데 부분이 열리는 지금의 위생 담배 케이스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디자인 도면은 셋째 며느리가 맡았고 담배 케이스의 중요성에 대한 이론적 토대는 장남 원식(41)씨가 큰 도움을 줬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009년 9월 미국 저작권청에 등록을 마쳤다. 그 뒤 그는 2010년 미국 특허출원을 필두로 2011년엔 한국 특허청을 비롯해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총 32개국에 특허 출원을 했다. 현재 그는 위생 담배 케이스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연방 보건국, 질병통제예방센터, WHO산하 흡연관련 국제기구인 FCTC등에 다각도로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2012년엔 연방 보건국에 '세계 12억 흡연자들을 위한 위생흡연문화 프로젝트' 제안서를 보내 보건국으로부터 사업을 검토해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기도 했다. "이제 보다 본격적인 상용화를 위해 노력중 입니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생활에 반영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제품 상용화로 창출될 수익금을 흡연피해 절감과 예방을 위한 공익사업에 쓰고 싶은 것이 제 마지막 꿈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밤을 새며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 당국에 이메일을 보내고 있다. 이제 지칠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자신의 발명품이 세계 흡연자들을 위해 유익하게 쓰이길 고대하고 있다. 이민 1세대 가장으로 그간의 세월이 녹록치 않았을 터인데도 그의 위생 담배 케이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06.18. 22:27
입사때 당시 신파조 톤과 안맞아 제대로 된 배역 한번 못맡아 1970년대 청년문화와 목소리 궁합 외화 더빙 열풍에 주인공 싹쓸이 제임스 딘 .맥가이버. 가제트… 지금까지 맡은 배역 2만명 넘어 지금은 스타 강사로 특유의 입담 대학. 기업서 러브콜 끊이지 않아 천의 목소리. 식상하다 못해 진부한 표현이지만 어쩌겠는가.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가 없는 것을. 바로 국민성우 배한성(69)씨다.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그는 영원한 알 파치노이며 더스틴 호프만이며 로버트 레드포드다. 외화 미니시리즈 '가시나무' 속 랄프 신부의 얼굴은 흐릿하지만 고뇌에 찬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억 속에 각인돼 있고 무미건조한 리처드 딘 앤더슨의 얼굴에 그의 목소리가 입혀지면서 맥가이버는 우리에게 진짜 첩보원 맥가이버로 부활했다. 로버트 레드포드 역시 그의 비음 섞인 달콤함과 어우러졌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레드포드를 100% 만나게 되었으니까. 동경의 대상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줬던 그의 목소리는 화려했던, 그리하여 눈부셨던 청춘의 기억 한 조각일 수밖에. 분명 세월 앞 장사 없지만 목소리만은 그 시절 그 노스탤지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성우 배한성씨를 LA 한인타운에서 만났다. 이번 LA 방문의 '공식적' 목적은 후배 방송인 런칭한 화장품 홍보 때문이었지만 미국 여행 한번 가보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다는 지나가는 말로 하는 고백이 아마도 '실질적' 목적인 듯싶다. 늦은 오후, 그와의 대화는 맥가이버와 함께 한 듯 유쾌했고 로버트 레드포드와 동행한 듯 달콤, 진지했다. #뻔하지 않게, 남들과 다르게 워낙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니 성우 세계에 발 딛자마자 유명세를 탔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1965년 스물한 살 나이에 KBS 8기 공채 성우로 입사한 그는 특유의 비음과 당시 만연했던 신파조의 성우 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배역을 맡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제게는 그 성우 톤이 촌스럽게 느껴져서 다른 변화를 시도하고 싶었죠.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목소리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Think Different를 제가 훨씬 더 앞서 생각했던 거죠(웃음)." 그의 선견지명은 오래지 않아 빛을 발하게 된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확산되면서 한국 방송계에도 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작가와 연출자들도 신선한 목소리와 연기를 찾았고 그의 목소리는 그들이 원하는 변화의 바람에 딱 들어맞았다. 그의 약점이라고 여겨졌던 특유의 비음은 당시 라디오 드라마 단골 캐릭터인 고뇌하는 청춘을 연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고 그런 그의 목소리는 대한민국 여심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대한민국 원조 '심쿵'(심장을 쿵쿵 뛰게하는)오빠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천의 목소리, 대한민국을 사로잡다 1970년대 들어서면 부터 외화 더빙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한창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에게는 황금의 기회가 찾아 온 것. 영화 '보난자'의 막내 역할을 시작으로 제임스 딘 영화, '도망자'의 데이비드 젠슨 등 70년대 할리우드 은막을 빛냈던 청춘 배우의 역할은 모조리 도맡아 연기했다. 그 수많은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연기는 70년대 말 미국 드라마 야망의 계절에서 연기한 남자 주인공 루디 조다쉬 역. 당시 그의 목소리에 반해 조다쉬와 결혼하고 싶다는 여성들이 줄을 섰고 한 평론가는 그의 연기를 두고 배한성의 비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분야든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들과 다른 1%, 그것이 성공의 열쇠인데 그러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중요하죠. 한 번의 더빙을 위해 전 영화를 3번 이상은 봅니다. 대본이 나오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봐서 동료들이 더럽다고 제건 집어가지도 않았죠(웃음)." 어디 이뿐인가. 그가 단순히 미남 배우의 '잘생긴 목소리'만 연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연기력을 다시 한 번 인정받게 한 맥가이버와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는 당시로서는 코믹과 정극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연기여서 그야말로 그의 목소리 안에 천의 얼굴이 있음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그가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은 약 2만여 명선. 당시 그의 인기는 더 이상 비교불가, 대체 불가가 됐다. #롱런(Long run)하려면 롱런(Long learn)하라 그는 늘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성우로 출발했지만 80년대 인기 라디오 DJ로도 활약했으며 교통방송의 간판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는 자그마치 17년간 진행을 맡았다. 이뿐 아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TV방송까지 영역을 확장해 '풍물기행' '퀴즈 올림픽' 등 각종 교양프로그램 MC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그는 방송가에 소문난 자동차 마니아이기도 하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자동차 전문잡지에서 인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고 1992년엔 경차 타코와 다마스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무모한' 도전에 성공해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그의 이 무시무시한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느 책에서 롱런하려면 롱런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제 인생의 모토가 된 것 같아요.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성공은 따라오게 되죠." 그렇듯 그의 열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스타 강사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의 남다른 인생철학에 천의 목소리를 입혀 청중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강의는 이미 입소문을 타고 기업과 대학 등에서 섭외가 끊이지 않는다. 이번 LA 방문에서도 그는 지난 4일 동국대에서 토크 콘서트를 열어 한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화 사이사이 그의 목소리는 로버트 레드포드를 지나 알 파치노에서 다시 로빈 윌리엄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어디 할리우드 스타들 만이었겠는가. 그 길지 않은 시간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운 가제트 형사가 살짝 다녀갔는가 하면 눈 큰 고양이 가필드도 잠시 머물다 갔다. 그의 목소리 끝,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초상이 오버랩 되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마도 그의 목소리는 바다 건너 먼 곳에서 날아온 수줍은 '내 청춘'의 연애편지이며 시인 유치환이 우체국 창문으로 내다봤을 에메랄드 빛 하늘이다. 그리하여 삭막한 일상에 기어이 안부를 묻고야 마는 청량한 설레임이다. 단언컨대 성우 배한성은 여전히 우리들의 로망이며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2015.06.12. 10:27
결혼하고도 일 때문에 아이는 뒷전 3년만에 첫째 얻은 후 인생 달라져 네 명 챙기려면 하루종일 아둥바둥 남편의 적극적 도움 있었기에 가능 오랜 유학생활의 외로움도 한 원인 "형제 많아 의지하고 살면 좋겠지요" 이처럼 어메이징한 부부라니. 외동도 힘들어 '무자식 상팔자'를 외치는 딩크족(Doble Income, No Kids)들이 늘어만 가는 요즘 같은 시대에 4남매를 낳아 키우는 이들 부부는 분명 조금 희귀해 보이긴 한다. 열심히 산다는 것의 정석을 보여주는 이 남자와 그 여자, 마크(46).제니퍼(45) 김 부부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아이 넷 낳고 살아 온 세월이 어느새 14년. 어디 그 세월이 늘 평탄하고 꽃방석이기만 했겠는가. 때론 폭풍치고 바람에 흩날리는 고단한 시간도 있었을 터이고 그 사이사이 날아갈 듯 기쁜 순간들도 보석처럼 박혀있었으리라. 아마도 그 보석 같은 시간엔 반드시 '하나도 둘도 아닌~ 셋씩이나'도 아닌 4남매의 기억들이 알알이 얽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못내 궁금해진다. 이들 다자녀 부모의 일상은 어떠할까. 정신없이 분주한 일상 속, 이들 가족의 행복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 보기 드문 다자녀 가족의 살아가는 풍경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발 동동 구르며 시간을 길게길게 늘려 쓰는 이들 부부와 4남매를 이른 주말 아침 LA 행콕파크 자택에서 만나봤다. #또 다른 세상과 만나다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지만 다자녀 김씨네는 그럴 수 없을 만큼 왁자지껄 분주했다. 아이 넷이 한꺼번에 아침 식사를 하고 주말 과외활동을 가려고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집안은 북적대고 부산스러웠다. 그래도 그 분주함 속엔 익숙한 질서가, 유쾌한 무질서가 공존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 다자녀 가족에 대한 로망이 있어 결혼과 동시에 '할 수만 있다면 힘닿는 데까지 많이 낳자'고 손가락 걸고 맹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라고 할 수 있다. UCLA 졸업과 동시에 재정 관리사로 일해 온 제니퍼씨는 자타공인 '일중독자'다. 커리어에서의 성공이 곧 삶의 성공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 열혈 아가씨는 2001년 LA카운티 검사인 유머감각 넘치는 청년과 2년 열애 끝 결혼했다. 당시 부부가 다 한창 바쁠 때여서 처음엔 아이를 가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결혼 후 3년 만에 첫째 스털링을 낳았고 이 부부의 세상은 바뀌었다. "낳기 전엔 자녀라는 존재는 막연한 부담 그 자체였죠. 그런데 낳아보니 와~ 전혀 다른 세상이 절 기다리고 있더라구요(웃음). 예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행복이 그곳에 있었죠."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모든 맞벌이 부부가 그러하듯 갓난아이 하나만으로 일상은 전쟁이었다. 그래도 아이가 주는 그 큰 행복이 너무 좋아 그 뒤로 2년 터울로 아이 셋을 내리 낳아 어느새 스털링(한국명 성현.11), 피오나(소연.9), 설리반(기현.7), 레밍턴(재현.4) 4남매의 엄마가 됐다. #웬만해선 그녀를 막을 수 없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키우다 보니 아이도 욕심이 생기더란다.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일밖에 모르고 살던 '철의 여인'을 다자녀 엄마로 변신시킨 이유는. "중학생 때 혼자 미국에 와 유학생활을 해서 외로웠던 것 같아요. 결혼 전이야 워낙 바쁘게 살아서 외롭다는 것도 몰랐지만 스털링을 낳고 가족이 늘어나면서 그 행복을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내 아이들도 형제가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녀가 다자녀 엄마가 됐다고 일을 줄이거나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출산 후 일주일 만에 '좀이 쑤셔' 직장에 복귀했다고 하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엄마 노릇에 소홀 하느냐.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전업 주부도 쫓아가기 힘든 그녀의 에너지와 열정은 듣고 있노라면 입이 딱 벌어질 지경이다. 아이들의 10여 개가 넘는 방과 후 스케줄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남편에게 문자로 보내 라이드 계획을 세운다. 어디 이뿐인가. 아이들 학교 행사도 빠지지 않고 참가해 이미 학교에서도 열혈 엄마로 소문이 파다하다. 걸스카우트에 관심 있어 하는 피오나를 위해 학교 걸스카우트를 직접 조직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정말이지 그녀의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 아닐지 못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어려서 아이들에게 그냥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어요. 돈요? 당연히 많이 들죠. 많은 집이 그렇듯 저 역시 다른 데 씀씀이를 줄이고 허리가 휘어도 아이들에게 올인하고 있죠(웃음)." #육아의 8할은 수퍼맨 아빠 덕분 그러나 무엇보다 다자녀 남매를 지금껏 잘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남편 마크씨 덕분이다. 밤늦게까지 고객을 만나고 상담해야 하는 일이 많은 제니퍼씨의 퇴근 시간은 밤 9시를 훌쩍 넘기기 일쑤. 결국 저녁시간 육아의 대부분은 퇴근 시간이 일정한 남편 마크씨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덕분에 마크씨에게 퇴근은 또 다른 출근을 의미한다. "일 할 때가 훨씬 더 편하죠(웃음). 퇴근과 동시에 집으로 출근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퇴근 후 아이 넷 저녁식사 챙겨주고, 학원 보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을 해야 하는 집이 결코 쉬운 직장은 아니죠. 덕분에 초창기엔 육아 우울증이 생길 지경이었다니까요(웃음)." 그러나 이젠 한국 TV프로 '수퍼맨이 돌아왔다'의 삼둥이 아빠로 유명한 탤런트 송일국은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 아침 식사를 챙기고, 퇴근과 동시에 파스타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인 후 방과 후 활동을 데려다 주고, 숙제까지 봐주는 진정한 수퍼맨 아빠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아이들 이들 부부 가 이렇게 4남매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옛 어르신 말씀처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이 서로서로를 챙기며 돌봐주기 때문이란다. 4남매 중 가장 어른스럽다는 피오나는 막내 동생 식사부터 공부도 봐주고 심지어 오빠 스털링의 숙제도 감시(?)한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위로 형제가 있다 보니 셋째, 넷째는 특별히 뭘 가르치지 않아도 형과 누나가 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공부가 된다고 한다. 거기다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크다보니 사회성과 협동심은 덤으로 얻어진다고. 아마도 외동자녀를 둔 부모들의 마음 속 묻어둔 미안함은 나 죽고 나면 세상 한 켠 어디에도 의지가지없을 것이라는 애잔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들 부부, 아이들에게 살아가며 서로 의지될 형제라는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자식농사에 있어 절반의 성공을 이룬 셈이 아닐까. 그것도 꽤 특별한 성공을. 이주현 객원기자
2015.06.04. 20:15
언어 피해 이민자들 도움주고 싶어 2010년 가주법원의 차별 실태 신고 주 사법위 언어지원 위원 위촉 계기 이민국 등 모든 관공서로 확대 계획 LA KYCC 인턴때 '돕는 재미' 즐겨 "아이들에 항상 미안" 워캉맘 고충도 이 여자 참 한결같지 않은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긴 생머리하며, 웃을 때 살짝 들어가는 양 볼의 보조개가 그러하고 무엇보다 결코 목소리 높이는 법 없이 한결같은 톤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가는 본새가 그렇다. 한인사회 법률관련 행사에 가면 이처럼 늘 한결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여자. LA 법률보조재단(LAFLA) 디렉터 조앤 이(41) 변호사다. 일반 로펌도 아닌 크고 작은 민원과 정치적, 사회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이 산적한 비영리재단에서 잔뼈 굵은지 어느새 15년 세월이 훌쩍 넘었으니 보통 내공은 아니지 싶다. 그런 그녀가 최근 가주 사법위원회 산하 언어지원대책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다. 5년 전부터 그녀가 추진해온 영어 미숙자들을 위한 법원 내 다중언어 통역 서비스 확장을 위한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조앤 이 변호사를 그녀의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LA 한인사회에서 길을 찾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고향은 메릴랜드 주.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한 그녀가 한인사회에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4년 LA KYCC에 석 달간 인턴십을 하게 되면서부터. "당시 주로 영어가 힘든 한인들을 위해 융자 서류 작성 등을 도와줬는데 제 그런 작은 역할이 한인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아 뿌듯했죠. 그때 아마 결심했던 것 같아요. 변호사가 돼서 LA 한인사회에 다시 돌아와 더 큰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조지 워싱턴 법대에 진학했고 1998년 가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변호사 합격 후 그녀는 워싱턴 DC 소재 아태계 비영리센터 본부에서 1년간 근무했다. 주로 아태계 커뮤니티를 위한 법안을 상정하고 이를 위한 리서치를 하는 것이 그녀의 주업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을 1년 만에 정리하고 2000년 1월 LA 법률보조재단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현장에 있고 싶었어요. 법안을 마련하는 것도 좋지만 제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직접 얼굴 맞대고 도와주고 싶었어요. 책상 위에서 고민만 하는 것이 아닌, 직접 현장에서 부딪치며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고 싶었죠."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여자 LA법률보조재단에서 그녀는 주업무는 이민법과 가정법.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에게 법률적인 자문과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또 추방 위기에 내몰린 불법체류자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싸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밤늦은 퇴근이 다반사였고 일거리를 집까지 싸들고 가기도 일쑤. 어디 이뿐인가. 가정 폭력 피해 여성을 도와주다 보면 상대 배우자가 사무실까지 쳐들어와 소리를 지르고 억지를 쓰는 경우도 다반사. 그래도 피곤한 줄 모르고 달려온 길이었다.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는 혹은 일반 로펌으로 이직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어려서부터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었고 이렇게 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오히려 제가 더 행복하죠." 현재 그녀는 부동산 투자전문가인 남편 댄 이(40)씨와 사이에 태린(5).태규(3) 남매를 두고 있는 워킹맘이다. 일밖에 모르고 십 수년을 달려왔지만 그녀의 육아 고민 역시 여느 워킹맘들과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엄마 손길을 더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일은 일대로 양육은 양육대로 소홀해지는 것 같아 지난 5년은 직장과 가족 모두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던 것 같아요. 결국 워킹맘으로서 제대로 된 균형을 찾는 게 제일 중요하지 싶어요(웃음)." ▶나는 걷는다. 나의 길을 최근 그녀는 5년 전부터 추진해온 일의 결실을 맺었다. 바로 민사소송에서도 영어미숙자들에게 무료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10년 넘게 일을 하면서 한인들을 비롯해 많은 이민자가 언어의 한계로 법정에서 제대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래서 2010년 연방법무부에 한인 의뢰인 2명을 대리해 가주 법무부의 언어차별 실태를 신고하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때부터 그녀의 길고 외로운 싸움은 시작됐다. 신고 후 근 1년이 지나서야 연방사법부에서 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그리고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된 2013년 연방법무부가 가주 사법부에 합의안을 제시해 특별조사팀이 조직됐다. 그리고 다시 2년이 흐른 올해 초 가주 사법부가 공식적인 가주 법원의 언어접근 전략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지난달 이를 진행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꾸려졌고 이 변호사가 한인으론 유일하게 특별위원으로 위촉됐다. "단순히 법정통역만의 문제가 아니죠. 영어가 부족한 한인들의 경우 법원에 들어서면서부터 언어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요. 서류 하나를 보려고 해도, 웹사이트를 보려 해도 언어문제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죠. 그래서 이번 특별위원회를 통해 법정 통역뿐 아니라 법원 내 어디서라도 실질적인 무료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 이뿐 아니다. 이 변호사는 단순히 법원뿐 아니라 이민국, 경찰국 등 관공서를 이용하는 데 있어 이중 언어 서비스를 확대하고 싶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든 순간, 눈에 들어온 그녀의 사무실은 정글 같았다. 책상을 중심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이며, 빼곡한 자료들이 그간 그녀가 보낸 세월이 얼마나 정신없고 치열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히 바빴다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녀의 청춘이 그 작은 사무실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앞으로의 여정 역시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터. 그래도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처럼 우회 없는 직진을 외칠 그녀를. 이주현 객원기자
2015.05.21.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