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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사망원인 주치의 '살인' 결론

AP통신은 24일 "LAPD를 비롯한 사법당국이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에 대해 '살인'으로 결론짓고 곧 주치의 콘라드 머리를 기소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해오던 머리는 올해초 런던 공연을 확정지은 잭슨으로부터 '하루 50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그의 주치의가 됐으며 그의 환심을 사기위해 각성제.진통제.항우울제 등 독성이 강한 약물을 가명 처방전을 남용 마구잡이로 잭슨에게 주사해오며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다. LA카운티 검시관은 "잭슨의 시체에서 치사량 수준인 엄청난 분량의 마취제가 검출됐다"고 말했다. 경찰이 머리 소유의 건물에 대한 압수 수색영장에 따르면 잭슨의 불면증을 치료한다는 목적으로 6개월간 거의 매일 강력한 마취제 '프로포폴'을 50밀리그램씩 정맥주사로 주입했다는 것이다. 봉화식 기자

2009.08.24. 20:43

[윌셔 플레이스] 마이클 '모타운' 잭슨

1960년대는 비틀스를 앞세운 '영국의 침공'으로 미국의 팝 뮤직이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다. 이 무렵 미국의 자존심을 되살려 낸 건 '모타운'(Motown)의 흑인 음악. '모토'(자동차)와 '타운'의 합성어로 디트로이트의 별명이다. 당시 모타운이 배출해 낸 스타들은 다이애나 로스와 수프림스(3인조 여성보컬 그룹) 스티비 원더 등 아무리 팝송에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대중음악의 '전설'들이다. 이들은 비틀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런던에 상륙해 검은 돌풍을 일으키며 영국의 팝계를 점령하다시피 한 것. 비틀스의 공격에 역습으로 맞불을 놓았던 셈이다. 모타운의 성공신화. 알고 보면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산업과 무관치 않다. 창업자 베리 고디는 부품들이 생산라인에서 조립돼 새차가 나오는 것처럼 톱스타들을 만들어내는 게 꿈이었다. 고디는 디트로이트의 허름한 2층짜리 집을 사들여 '모타운 레코드'란 회사를 차렸다. 재능있는 청소년들이 이곳에서 '조립'돼 '캐딜락'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할까. 어찌 보면 모타운의 음악은 도시의 산업화가 이뤄낸 산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10년 동안 빌보드 차트(인기 순위) 톱 10에 오른 모타운의 히트송은 무려 110 여곡. 숫자로만 봐도 모타운의 위력이 어떠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70년대 들어서 모타운의 영광을 한껏 드높인 인물은 마이클 잭슨. 한마디로 모타운의 세계화를 이끈 미국의 아이콘이었다. 모타운의 성공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모타운이 흑인의 뿌리인 재즈와 블루스만 고집했다면 반짝하고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흑인의 음악을 백인의 팝에 접목시킨 게 성공의 계기가 된 것. 소울과 가스펠 송 R&B(리듬과 블루스)를 섞어 놓는가 하면 사이키델릭까지 영역을 넓혔다. 흑인의 목소리로 백인의 감성을 뒤흔들어 놓은 모타운. 흑ㆍ백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이른바 '모타운 사운드'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 낸 것이다.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대중의 귀와 입 눈을 즐겁게 해 준 모타운. 어느새 '우리는 하나'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흑인들의 민권투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타운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다. 그래서 모타운의 역사적 기여를 인종통합에서 찾는 사회학자들도 적지 않다. 모타운의 마케팅 전략은 '키스'(KISS). '바보야 단순하게 만들어'(Keep It Simple Stupid)를 모토로 내걸었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익숙한 멜로디와 리듬을 도입해 팬들과의 '입맞춤'에 성공한 것. 그러니 모타운은 히트곡의 산실이 될 수 밖에. 1980년대 초 모타운의 본고장 디트로이트는 일본차에 밀려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오일 쇼크로 인해 사람들은 소형차를 선호하는 데도 GM과 포드 크라이슬러는 중ㆍ대형차 생산만을 고집해 소비자들과의 '입맞춤'에 실패한 때문이다. 그래서 '빅 3'가 진작에 모타운의 'KISS' 전략을 본땄더라면 구제금융의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올해는 '모타운 레코드'가 설립된지 꼭 50주년을 맞는 해다. 영국의 '침공'을 막아내고 흑과 백의 인종화합에 기여한 모타운.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타계와 함께 모타운도 자동차 산업처럼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잭슨의 비극적인 죽음과 빅 3의 참담한 몰락…. 이제 역사의 한 챕터가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2009.06.29. 21:08

마이클 잭슨, 4년전에도 숨질뻔···형이 발견 응급처치

25일 LA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50)이 4년전에도 똑같은 증세로 콜드워터 캐년의 자택에서 숨질뻔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팍스 뉴스는 29일 "당시 집에 있던 형 랜디가 우연히 기절한 마이클을 발견 이웃 친구 의사에게 연락해 응급처치로 소생시켰으며 친구는 마이클의 방에 쌓여있던 엄청난 분량의 약 처방전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고 보도했다. 가족들 역시 2001년부터 잭슨의 급사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팍스 뉴스는 어머니 캐서린이 마이클에게 "엘비스 프레슬리가 42세에 어떻게 죽었은지 건강문제를 제발 염두에 둬달라"며 애걸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반면 마이클이 5살때부터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치며 춤 훈련을 시켰던 '비정의 아버지' 조 잭슨(사진)은 천재 아들이 유명을 달리한지 사흘밖에 되지않은 28일 LA의 흑인 연예방송(BET) 시상식장에 와 만면에 여유있는 미소를 띤채 사진촬영에 응해 대조를 보였다. 조는 "우리 아들은 샌타바버러 네버랜드에 묻히진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해 주변의 반발을 부르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LA카운티 검시소의 부검 결과 잭슨의 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 해골이나 다름없고 머리털도 거의 없이 가발을 쓴 대머리였다는 영국 타블로이드 '선'의 보도는 완전한 거짓이라고 미국의 연예매체 'TMZ닷컴'이 주장했다. 잭슨의 사망을 가장 먼저 특종 보도했던 TMZ닷컴은 "잭슨의 몸을 살폈던 LA카운티 검시소 관계자가 영국 언론의 해당 보도가 정확하지 않으며 일부 내용은 완전 오보라고 확인했다"고 전했다. '선'의 보도에 따르면 사망 직후 체중계에 달아본 잭슨의 몸무게는 웬만한 여성보다 훨씬 가벼운 115파운드(약50kg)에 불과했으며 텅빈 위장 안에서 정체불명의 수많은 알약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또 엉덩이와 허벅지 어깨에는 마약성 진통제 투약으로 보이는 수많은 주사 바늘 자국이 여기저기 나있었다고 보도했다. 한편 마이클의 모친 캐서린은 고인의 세자녀에 대한 양육권 청구소송을 제기 자신을 잭슨의 유일한 '재산 관리인'으로 지정해줄 것으로 LA법원에 요청했다. 캐서린의 변호인은 "간호사 출신인 첫 두아이의 생모 데비 로가 평소 아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 그녀가 양육권을 가지면 결과적으로 해로울 것"이라 주장했다. 봉화식 기자 [email protected]

2009.06.29. 20:43

진통제 쇼크였나? 유언장 있나 없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두고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사망 현장에 있었던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LA카운티 경찰이 27일 조사했다. 또한 잭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혹을 품고 있는 유족들은 공식 부검이 끝난 다음 날인 27일 개인 의사를 고용해 별도로 부검을 다시 실시했다. ▷주치의 머레이 조사=영국 일간지 더 선은 26일 잭슨이 모르핀 대용 진통제인 '데메롤(Demerol)'을 맞고 난 뒤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보도했다. 더 선은 잭슨의 측근을 인용해 "잭슨이 데메롤을 하루에 세 번씩 맞았고 25일 주치의 머레이가 데메롤을 투약한 직후 숨졌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된 의혹을 풀기 위해 LA 카운티 경찰이 27일 머레이를 비공개 장소에서 조사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LA 경찰은 "현재로서는 그에게 범죄 혐의를 두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가족 재부검 실시=26일 LA 카운티 검시소로부터 잭슨의 시신을 인도받은 가족들은 27일 개인 의사를 고용해 자체적으로 재부검을 했다고 LA 타임스가 보도했다. 잭슨 가족들은 잭슨의 사망에 대해 여러 의문을 제기해 왔고 최종 부검 결과가 나오기 전 사망 원인에 관한 정보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자체 부검을 한 것이라고 LA 타임스는 전했다. ▷유언장 있나=AP통신은 잭슨의 측근을 인용해 "잭슨이 몇년전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보도했다. 잭슨은 3~5억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언장에는 생전에 녹음한 100곡 이상의 미발표곡에 대한 소유권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명시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유족들은 유언장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AP통신은 전했다.

2009.06.28. 21:25

[마이클 잭슨 사망] '마이클 잭슨 자살 가능성 크지 않다'

'MJ MJ 돌아와요 제발!'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50)을 추모하는 팬들의 움직임이 한국을 비롯 전세계 곳곳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보일 하이츠에 위치한 LA카운티 검시소는 26일 잭슨의 정확한 사망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부검을 벌였다. 사망 직후 헬리콥터로 공수돼 온 잭슨의 시신을 살핀 에드 윈터 검시관은 "항간에 떠돌던 자살설.피살설은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첫날에는 어떤 구체적 결론도 도출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정밀조사가 더 필요하기 때문에 잭슨을 사망에 다다르게 한 종합적인 공식 부검결과 도출은 앞으로 몇달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을 아꼈다. 이에따라 앞으로 그의 사망을 둘러싼 궁금증은 상당 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한편 잭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부터 몰려들기 시작한 수천명의 관광객.행인들은 그의 시신이 안치된 웨스트우드 UCLA 병원.할리우드 명성의 거리 주변에서 사진을 찍거나 눈물을 보이며 자리를 지켰다. 전국에서 파견된 취재단 차량과 경찰이 점거한 잭슨의 벨에어 자택 인근 홈비 파크 주변 대로에도 하루종일 '스릴러''빗잇''빌리진''배드'를 비롯한 생전의 히트곡이 울려퍼졌다. 전국의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도 대부분 그의 노래로 진행됐으며 잭슨 덕분에 대성공을 거둔 M-TV는 뮤직비디오 하이라이트를 반복해 보여주며 애도를 표시했다.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도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LA 현지를 생방송으로 연결 잭슨의 부검 상황을 실시간으로 상세히 전달하며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이밖에 한국의 매스컴은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인 동시에 1999년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공연을 펼쳤던 의미깊은 10주년 기념일"이라며 상호간의 기막한 인연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다. 봉화식 기자

2009.06.26. 20:18

[OC] '잭슨은 맑고 순수한 사람'···'무주 투자 인연' 존 오 법무사

"어린 소녀같은 느낌이랄까 참 순진무구한 친구였어요." 가든그로브에서 법무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존 오(한국명 태환)씨는 25일 심장마비로 급사한 마이클 잭슨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오씨는 (주)쌍방울개발 전무이사 시절 2박3일 동안 무주리조트를 방문한 잭슨을 접대하며 리조트 투자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눈 인연이 있다. 잭슨은 1997년 11월18일 예고없이 무주리조트를 찾았다. 당시 무주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동계올림픽 유치전에 나서고 있었다. "무주 홍보 필름이 전세계에 뿌려졌지요. 그런데 마침 일본을 방문중이던 잭슨이 어디서 홍보물을 본 거예요. 나중에 들으니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느냐'며 '당장 가 보겠다'고 했다는 거죠. 참 즉흥적인 사람이죠?" 잭슨은 6명의 경호원과 리조트를 찾았다. 숙소는 호텔 '티롤'이었다. 수퍼스타였지만 잭슨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비빔밥을 좋아했어요. 한 번은 새벽에 일어나 비빔밥을 달라고 해 대기하던 요리사들이 만들어 준 기억이 납니다." 오씨는 잭슨이 '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동시에 어린 아이같았다고 전했다. "샤핑을 할 때도 마음에 드는 걸 보면 그냥 집어들고 가요. 계산은 경호원이 하고요." 케이블카를 타고 덕유산 향적봉 정상에 오른 잭슨은 넓은 평야를 내려 보며 기뻐 소리치고 춤을 췄다고 한다. "무주에 테마파크인 네버랜드를 짓겠다는 거예요. 1억달러를 투자한다는 양해각서도 교환했지요. 쌍방울과 잭슨이 각 100만달러씩 내서 사업타당성 검토도 했습니다." 네버랜드 건립은 한국의 외환위기로 결국 무산됐다. 회사 자금사정이 어려워지자 오 전무는 잭슨측에 100만달러의 비용을 돌려줄 것을 부탁했다. "원래 안 줘도 그만인 돈이예요. 그런데 화끈하게 돌려줍디다. 당시엔 참 귀중한 돈이었지요." 오씨는 "아마 그처럼 천진한 사람도 다시 없을 것"이라며 아쉬워 했다. 임상환 기자

2009.06.26. 18:09

[마이클 잭슨 사망] 베일속 잭슨 가족 병력···추측 뿐 알려진 바 없어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직접적 사망 원인이 심장마비인 것으로 알려지며 베일에 싸인 그의 병력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잭슨이 성형수술로 인한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며 피부암마저 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의 진료기록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소문과 추측이 덧씌워진 채 의혹만 키우는 양상이라고 '타임'이 26일 보도했다. 자꾸만 엷어져 가는 피부색에 대해 잭슨은 멜라닌 색소가 파괴되는 백반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며 성형수술과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2009.06.26. 17:48

[마이클 잭슨 사망] 마이클 잭슨 '10대 사건'

'타임'은 26일 마이클 잭슨의 생애에서 전환점이 됐던 사건 10가지를 선정 보도했다. ◇ '잭슨 파이브' 결성 = 아홉명의 형제 중 일곱째인 잭슨은 형 네명과 함께 '잭슨 파이브'를 결성 1968년 8월 베벌리 힐스의 한 클럽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 '스릴러'로 세계를 사로잡다 = 1982년 내놓은 '스릴러'로 단숨에 세계적 스타로 떠올랐다. 이 앨범은 당시에만 4500만 장이 팔려나가면서 역사상 최다 판매 기록을 남겼다. ◇ 트레이드 마크는 '흰장갑' = 1983년 TV 쇼에서 왼손에만 크리스털로 뒤덮인 흰 장갑을 끼고'빌리 진'을 부르면서 '잭슨 스타일'을 유행시켰다. ◇ '불꽃' 투혼 = 25살이던 1984년 펩시 광고를 촬영하던 잭슨은 무대에서 '빌리진'을 부르던 도중 특수 효과로 쓰였던 폭죽에서 불꽃이 튀어 머리카락으로 옮아붙으면서 2도 화상을 입었다. ◇ 잊을 수 없는 '문워크' = 딱 달라붙는 검은색 스키니 바지에 눈부신 흰양말을 신고 무대 위에서 미끄러지듯 뒷걸음치는 '문워크'는 1983년 TV쇼에서 처음 선보였다. ◇ '피터팬'을 꿈꾸다 = 1987년 캘리포니아 인근에 1133만㎡ 넓이의 대저택 '네버랜드'를 세우고 놀이기구와 동물원 등을 갖춘 '꿈동산'으로 꾸몄다. ◇ 깜짝 결혼 = 1994년 5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록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비밀 결혼식을 올려 팬들을 놀라게 했다. 잭슨 부부는 2년 만에 이혼했다. ◇ 왕의 몰락 = 2002년 독일 투어 당시 9개월 된 아들 프린스 마이클 2세를 호텔 발코니 밖으로 내놓고 흔드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면서 한순간에 '팝의 황제'에서 '아동 학대범'으로 몰락했다. ◇ 사생활 폭로 = 2003년 나이 어린 소년들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등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2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에서 잭슨은 나이 어린 소년들과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라스베이거스에서 가구를 사들이는 데 수백만 달러를 뿌려대는 것으로 묘사됐다. ◇ 아동 성추행 혐의 = 잭슨은 2003년 13세 소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네버랜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2005년 재판에서 무죄 평결을 받지만 '팝의 황제'의 이미지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09.06.26. 17:48

[마이클 잭슨 사망] '인종의 벽' 허물었다···주요 언론들 평가

주요 신문들은 26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소식을 일제히 톱 뉴스로 전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조명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잭슨이 1982년 그의 대표 앨범인 '스릴러'를 발표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고 평가했다. 1972년 영화 '벤'이 처음 상영되던 날. 흑인 관객들은 영화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남자 아이의 목소리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영화 주제곡을 부른 남자 아이는 바로 마이클 잭슨이었다. 잭슨의 당시 나이는 14살. 벤이 상영된 1972년만 해도 흑인이 영화 주제곡을 부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신문은 "영화 벤을 상영했던 극장의 상당수는 한때 흑인들이 들어갈 수도 없었던 곳이었다"며 1964년 민권법의 제정으로 인종차별이 제도적으로 금지된 지 불과 8년 만에 잭슨이 백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할리우드의 영화 주제곡을 불러 인종의 벽을 허물었다고 평가했다. 뉴욕 타임스는 "잭슨이 역설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고 분석했다. 신문은 형제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 '잭슨 파이브'의 리드 싱어로 활약하면서 일찌감치 스타가 된 잭슨이 "어린 시절에는 나이에 맞지 않게 조숙했던 반면 정작 성인이 되어서는 어린애 같았다"고 지적했다. USA 투데이도 어린 시절 스타덤에 오른 잭슨이 성공과 비운의 스타였다고 평가했다. 신문은 잭슨이 앨범 '스릴러'를 히트시키면서 "모든 인종과 문화에 어필하는 팝스타로서 각종 기록과 장벽을 깨뜨렸다"고 평가했다.

2009.06.26. 17:46

[마이클 잭슨 사망] '잭슨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 각계 유명인사 애도의 물결

잭슨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에 연예.정치계 유명인사들도 비탄에 빠졌다. 팝스타 마돈나는 눈물을 흘리며 "세계가 팝 음악의 거장을 잃었다"고 애도했다.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춤꾼 프레드 아스테어 기타리스트 척 베리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사람은 더이상 없을 것이다. 또 잭슨과 견줄 수 있는 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재능 호기심 신비는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설적 앨범 '스릴러'를 통해 잭슨을 최고 스타 반열에 올렸던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그의 죽음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고 전했다. 존스는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신은 우리의 영혼을 한데 뭉치게 했고 80년대 우리가 할 수 있은 일을 하게끔 했다"며 "오늘날 전세계 곳곳에서 그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이는 그가 재능과 품위 열정 모두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나는 오늘 동생을 잃었고 내 영혼의 일부도 그와 함께 떠났다"고 애통해했다.잭슨의 첫번째 부인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는 M-TV뉴스에 성명을 내고 "나는 매우 슬프고 혼란스럽다. 특히 그의 모든 것이었던 아이들과 가족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팝스타 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세계가 천재를 잃었다"며 "그는 팝 음악뿐 아니라 모든 음악의 진정한 사절이었다"고 추모했다. 배우 제인 폰다와 힙합계 대부 션 '디디' 콤스 사이클 황제 랜스 암스트롱은 트위터를 통해 비통한 심경을 전했다. 콤스는 "잭슨은 내게 진정한 비트를 보여줬다. 그는 음악을 살아나게 했고 마술을 믿게 했다. 나는 그가 그리울 것이다"라고 슬퍼했다. 잭슨의 오랜 친구인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어려운 상태라고 그녀의 대변인이 밝혔다.

2009.06.26. 17:46

[마이클 잭슨 사망] '흰 얼굴 흑인같지 않다' 일 각료 인종차별 발언

일본의 가와무라 다케오 관방장관(사진)이 사망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두고 "그의 얼굴빛이 흰색이라 흑인인줄 전혀 몰랐다"고 발언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26일 가와무라 장관은 잭슨의 사망에 대한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의 얼굴이 온통 흰색뿐이라 흑인일 것이라고 미처 생각치 못했다"고 해 파문을 일으켰다.

2009.06.26. 17:44

[마이클 잭슨 사망] '재산 둘러싼 드라마, 이제부터 시작될 것'

팝 역사에 길이 빛날 음악적 유산을 남기고 숨을 거둔 잭슨이 현실 속에 남긴 재산과 빚은 얼마나 될까. '월 스트리트 저널'(WSJ)은 26일 "잭슨의 빚은 4억달러가 넘으며 지천명 나이(50대)에 다다른 그가 다음달 13일부터 런던에서 50차례의 컴백 콘서트 시리즈를 추진한 이유는 부채탕감을 위한 것"이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재산을 둘러싼 새로운 드라마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라 전망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은 잭슨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1985년 4750만 달러에 사들인 'ATV 뮤직퍼블리싱'이다. 비틀즈의 노래 251곡의 저작권을 소유한 회사로 잭슨은 1995년 지분 50%를 1억5000만달러에 소니에 매각했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절반의 가치도 10억달러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최근 몇년간 경제적 어려움과 잇단 법적 다툼으로 그동안 쌓아온 돈을 잃었다. 희귀동물.골동품 수집광인 그는 2005년 소년 추행사건 재판과정에서 매년 수입보다 2000만~3000만달러를 초과하는 낭비벽이 들통나 비난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샌타바버러 대저택 네버랜드와 소니/ATV 지분을 담보로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로부터 2억달러를 빌리고 네버랜드 소유권도 시카모어 밸리 랜치로 넘겨줬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고정적인 앨범 판매(1200만 달러)와 소니/ATV 지분으로 매년 1900만 달러를 번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고질적인 사치 습관으로 부채가 천문학적인 규모로 드러남에 따라 유가족이 받을 재산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잭슨은 자신의 재산을 세 자녀.부인에게 나눠 증여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얽히고 설킨 복잡한 채무 관계 때문에 포기하기도 했다. 결국 그의 앨범을 제작해온 소니가 생전의 히트작을 모아 '특별 추모 앨범'을 발매한 이후에야 모든 빚이 청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봉화식 기자 [email protected]

2009.06.26. 17:44

[마이클 잭슨 사망] 약물 남용에 심장마비까지···엘비스와 '닮은 꼴'

'황제' 잭슨은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최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길 원했다. 그의 삶과 죽음에는 항상 '닮은 꼴' 엘비스가 존재했다. 음악 평론가 그레일 마커스는 "매우 기묘한 일이다. 잭슨은 심지어 엘비스의 딸과 결혼해 사위가 됐으며 '장인어른'의 일부 노래에 대한 판권까지 사들였다"고 평가했다. 엘비스는 1977년 42세의 젊은 나이에 욕실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숨졌다. 잭슨 역시 26일 50세의 나이에 베벌리힐스 인근 벨에어의 집에서 약물 후유증(추정)에 의한 심장박동 정지로 숨을 거두었다. 두사람 모두 흑인과 백인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렸으며 문화적 혁명가였다. 프레슬리가 테네시주 멤피스에 '그레이스랜드'를 소유했듯 잭슨도 피터 팬같은 환상을 채워줄 '네버랜드'를 샌타바버버에 조성했다.

2009.06.26. 17:43

[마이클 잭슨 사망] 최종 사인 발표, 6~8주 걸릴듯

마이클 잭슨의 사망원인이'급성 심장박동 정지'(SCA)로 밝혀지며 이를 일으킨 원인을 두고 추측이 이어지고 있다. 잭슨 가족의 변호사를 역임했던 브라이언 옥스먼은 CNN과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오래전부터 잭슨이 복용하는 약물에 대한 위험성을 제기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또 "마이클이 약물을 너무 많이 자주 들이키며 안나 니콜 스미스와 같은 비극이 덮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적도 있다"고 밝혔다. 수퍼모델 출신인 니콜 스미스는 2007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바 있다. 한편 26일 부검이 실시된 잭슨의 시신은 여러 추가조사를 거쳐야 하는 탓에 최종 공식 사인 발표까지 6~8주가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09.06.26. 17:42

[마이클 잭슨 사망] '진통제 과다 복용' 스태프 멤버 제보

영국 '데일리 메일'은 26일 "잭슨이 8년만의 컴백 준비로 인한 심리적 부담과 진통제 장기복용으로 건강상태가 몹시 좋지 않았다"고 논평했다. 스태프 멤버 출신인 익명의 제보자는 "잭슨이 등 통증으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며 "진통제 과다복용이 그를 죽게한 것이 분명하다"고 제보했다. 데일리 메일은 1984년 펩시콜라 광고를 찍을 때 머리에 화상을 입은 뒤 잭슨의 중독증세가 시작됐다고 전했다. 게다가 반복된 코 수술로 숨쉬는 것도 어려웠고 살찌는 것에 대한 공포심으로 점심을 먹지않아 극도로 깡마른 상태였다는 것이다. 또 막대한 빚에 허덕이면서도 스태프.경호원에 둘러싸인 채 살았으며 인건비로 매년 500만불 이상 지출했다.

2009.06.26. 17:41

[마이클 잭슨 사망] 두번의 이혼···아동 성추행 소송도

마이클 잭슨은 음악인으로는 성공했지만 사적인 인생사는 순탄치 않았다. 지난 1994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던 마이클 잭슨은 불과 2년만에 결별했다. 이 후 자신의 백반증을 치료하던 간호사 데비 로와 두번째 결혼을 했지만 3년만에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마이클 잭슨 주니어와 딸 패리스가 있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가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지난 2005년 법원으로부터 아동 성추행 무혐의 판결을 받았지만 실추된 그의 명성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마이클 잭슨은 희귀병과 잦은 성형 수술로 인한 부작용으로 외부 활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없는 비운의 팝스타이기도 했다. 백반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그는 햇빛에 피부가 노출되면 안돼 여름에도 항상 우산과 선글라스, 긴팔 옷을 입고 다녔다.

2009.06.25. 21:06

[마이클 잭슨 사망] 마이클 잭슨과 한국 '한반도 통일 콘서트 약속'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1999년 6월25일 서울 공연을 통해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잭슨은 일본 대만 필리핀 등 아시아 투어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면서 한국 공연을 여러차례 피력해 왔다. 그러나 80년대는 한국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90년대 초에는 김영삼 정부의 공연 반대로 좌절됐다. 특히 1993년 LA폭동이 일어나면서 당시 마이클잭슨 최고의 히트곡 'Black or White'가 'Black or Yellow'로 불려질 정도로 흑인과 한인사이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LA시장 및 교회목사 등이 한국을 방문해 잭슨의 공연을 추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마이클 잭슨은 무주리조트 투자관계로 1997년 말 한국에 비밀리에 방문했다가 유력한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씨를 만나게 된다. 마이클 잭슨은 김대중 후보에게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남북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꼭 공연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고대했던 마이클 잭슨의 공연은 1999년에야 비로소 열리게 된다. 당초 5월5일 어린이날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일에 맞춰 서울에서 열리게 됐다. 공연 중 잭슨은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면 그때를 기념해 반드시 공연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번 사망으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 한편 비빔밥을 세계에 대대적으로 소개한 주인공도 마이클 잭슨이다. 한국을 방문한 잭슨은 비빔밥을 먹고는 '최고의 웰빙 식사'라고 칭찬하고 숙소에서 비빔밥을 시켜먹어 국내외 매스컴을 달궜다. 특히 국내에선 각종 나물과 고추장 대신 참기름을 듬뿍 넣은 마이클 잭슨 비빔밥이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최상태 기자

2009.06.25. 21:02

[마이클 잭슨 사망] 미국이 울었다···할리우드 명성의 거리 눈물바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5일 LA컨트리클럽 인근 마이클 잭슨 자택 앞에는 취재진 등 200여명이 몰렸다. 사망이 확인된 지 3시간쯤 후인 오후 5시쯤 잭슨 저택 앞에는 NBC ABC CNN CBS AP 등 주류 언론사 취재진 50여명이 잭슨 사인에 대해 취재하기 위해 진을 쳤다. LAPD는 자택 앞 한블럭을 봉쇄 취재진 및 일반인들의 진입을 차단하는 등 엄중한 감시를 펼쳤다. ○…마이클 잭슨은 사망전날 밤 늦게까지 콘서트 준비에 매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잭슨은 24일 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콘서트 리허설에 참석했다. 이날 잭슨은 당초 약속된 7시보다 3시간 늦은 10시쯤 나타났다. 리허설 참석자들은 당시 잭슨은 다소 피곤해보이기는 했지만 백업 댄서들과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등 건강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고 전했다. ○…할리우드 연예인들은 잇따라 애도 성명서를 발표했다. 특히 잭슨의 대표작인 '스릴러' 앨범을 프로듀싱한 퀸시 존스는 "내 동생을 잃었다. 내 영혼의 일부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또 행사도중 사망 소식을 접한 가수 엘튼 존은 마이클 잭슨을 위해 자신의 대표곡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즉석에서 불러 추모의 뜻을 전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이 바닥에 새겨진 '명성의 거리'에서는 '성급한 팬'들이 동명이인의 별에 헌화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날 잭슨의 별은 공연 '브루노'가 열리는 관계로 덮혀있었으나 이를 몰랐던 팬들은 라디오 방송 연예인 마이클 잭슨의 별로 향했던 것. 정구현.문진호 기자

2009.06.25. 21:01

[마이클 잭슨 사망] 마이클 잭슨의 음악, 세대 넘은 수퍼스타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이클 잭슨은 다섯 명의 형제로 구성된 '잭슨 파이브'라는 그룹으로 팝음악 생활을 시작하였다. 1979년 'off the wall' 앨범을 발표하며 솔로로 데뷔하였고 1982년 'thriller' 앨범을 통해 팝의 황제로 성장하였다. 'thriller'앨범은 전세계 1억 4백만 장의 앨범이 판매되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기네스북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미국에서만 500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고 당시 한국내에서도 팝앨범으로는 이례적으로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thriller'앨범은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37주 동안 1위를 기록하며 무려 2년 여에 걸쳐 최다 판매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beat it'과 'billie jean' 'thriller'등 수록된 9곡 중 무려 7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탑텐에 진입하기도 하였다. 이 중 'billie jean'에서 선보인 뒤로 끌려가는 듯한 '문워크(Moon Walk) 댄스'는 세계적 돌풍을 일으켰으며 세대와 공간을 초월해 아직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1987년 'bad' 1991년 'dangerous' 1995년 'history' 등의 앨범으로 90년대까지 그 인기는 지속되었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새롭고 충격적인 사운드를 선보였고 팝의 유행을 선도하였다. 특히 특유의 혀를 입천장에서 차는 발성법은 그만의 특기이기도 했으며 그 누구도 시도한 바 없는 새로운 발성법이었다. '창조'에 대한 강박증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진 마이클 잭슨은 음반을 자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발표하는 음반마다 돌풍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의 각종 신기록, 가장 많이 팔린 앨범…연예인 최소 연소득 1억달러 ■최연소 리드보컬(5살) ■최연소 빌보드 넘버원(11살)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4곡이 연속으로 빌보드 1위에 오름 잭슨파이브의 첫 데뷔곡 I Want You Back 그리고 이어 발표한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이 모두 연속으로 넘버원 기록 ■최연소의 나이로, 흑인 최초로 롤링스톤지 표지에 등장(13살) ■공중파 방송 최초로 선보인 브레이크 댄스 74년 소울트레인에서 Dancing Machin을 부르면서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였다. 당시 만 16세 ■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Thriller 1984년 발매된 Thriller는 사상 최고로 많이 팔린 앨범으로 인정. 일주일 안에 100만장 팔렸고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약 1억400만장 기록 ■MTV 사상 최초로 방영된 흑인 뮤직비디오 당시 백인들의 Rock음악 중심으로 방영되던 MTV에서 처음으로 Billie Jean 방영 ■1984년 Grammy Awards 최다 부문 수상 E.T 사운드 트랙까지 총 8부문을 수상 ■사상 가장 많이 팔린 뮤직 비디오-100만장 가량이 팔림 ■CBS레코트 역사상 최다 예약 기록 Bad 앨범 예약 판매만 225만장 ■한 앨범에서 5개의 최다 1위곡 배출 마이클잭슨의 87년작 Bad에서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Man In The Mirror 등 5개의 1위곡이 나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과 두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을 동시에 가졌던 유일한 스타.- 스릴러와 배드 ■공연티켓 예매 최단 매진 기록 첫 공연 일본에서 9회분 공연티켓 25만장이 예매 한시간만에 매진 ■89년 최초로 연예인 소득 연 1억 달러 시대 연간 매상고가 1억달러를 넘은 최초의 엔터테이너, 89년에 1억2500만달러로 사상 최고 소득 ■MTV역사상 일주일간 가장 많이 방송을 탄 뮤직비디오 마이클잭슨의 Black or White ■사상 최고의 시청률 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의 마이클잭슨 출연분이 생중계 되었고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 ■토스터 기술을 사용한 최초의 아티스트 무대 아래에서 별안간 튀어나오는 것 (Dangerous 투어 오프닝 장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음악상 수상 기록 영어권국가에서만 350회/유럽,남미국가에서 210회/동양권국가에서 19회

2009.06.25. 20:59

[마이클 잭슨 사망] '전설' 지다···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LA서 심장마비 사망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50)이 2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LA타임스.AP통신을 비롯한 주요언론은 일제히 "잭슨이 낮 12시25분쯤 벨에어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가족들이 소방서에 긴급구조를 요청했으나 21분뒤 의료진이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멈춘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구조요원들은 "자택 도착 직후부터 인근 UCLA병원으로 옮기는 과정 내내 심폐 소생술을 실시했지만 잭슨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UCLA 병원으로 통하는 모든 게이트를 봉쇄한채 일반 병원 관계자의 출입도 제한하고 있다. 수천명에 달하는 잭슨의 팬들은 비보를 접하자마자 웨스트우드로 몰려들어 기나긴 인간띠를 이루며 세계적 스타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 할리우드 '명성의 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잭슨의 별자리에도 수많은 관광객.팬들이 모여 조화와 그의 사진을 쌓아두고 추모 의식을 이어가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최고의 솔로 가수로 군림한 잭슨은 인종차별로 악명 높던 인디애나주 개리 출신으로 9남매 가운데 7번째로 태어나 10세때 형제그룹 '잭슨 5'의 막내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이후 1982년 프로듀서 퀸시 존스와 함께 제작한 앨범 '스릴러'가 전세계에서 1억900만장이 팔리며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이후 무려 6곡의 빌보드 차트 넘버원을 기록한 앨범 '배드'로 최전성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막판까지 순탄치 않았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외동딸 리사 마리와 이혼하고 수십차례의 성형수술로 얼굴은 망가졌다. 또 탈색으로 하얗게 변한 피부변종으로 고통을 겪은 것은 물론 2003년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2300만달러를 물어준뒤 한때 레바논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한편 잭슨은 다음달 13일부터 런던에서 50차례의 재기공연을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던차에 급서해 팬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그는 80년대 한때 하루에 50만달러씩 벌기도 했으나 지나친 낭비벽으로 최근 은행에서 2억달러를 융자받는 등 정신적.육체적으로 몹시 쇠약한 상태로 은둔생활을 이어왔다. 봉화식 기자

2009.06.2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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