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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자 큐티] 우주보다 큰 사람 (2)

인식의 주체인 내가 없는 우주나 자연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 안에 우주는 존재하게 됩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나의 내적 공간 속을 들여다 보면 그곳에 그 광활한 우주가 들어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라질 때 그 우주도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엄청난 넓이를 가진 우주보다도 우리 인간은 더 넓은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깊은 사색 속에 과학적 물리적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영적 진리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조물주의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 때에 우리는 전인간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깨닫게 됩니다.

2010.01.12. 16:24

[이민목회] 새 출발

2010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에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 새 출발하기를 소원한다. 새로운 마음이란 2010년을 진행하는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말하고 새로운 정신이란 2010년을 살아갈 때 정신이 올바르게 되는 것을 말하며 새로운 자세란 2010년을 준비하는 뚜렷한 태도를 의미한다. 이렇게 마음 정신 자세가 새로운 각오로 준비될 때 올해의 출발은 힘 찰 수밖에 없다. 올해 우리들의 계획속에 이러한 것이 있을까? 예를 들면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기도모임 미국을 중보 기도하는 모임 지구촌을 중보하는 모임 지구환경을 염려하는 기도모임등이다. 이민생활하는 성도로써 자신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기도모임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임이 될 것이다. 가족들이 친지들이 모여 우리의 대한민국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 교회의 식구들이 모여 대한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연상하며 중보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을 것이다. 다음에는 미국을 중보하는 모임으로 이민자들이 가장 피부로 와 닿는 곳이 미국사회인데 미국사회와 미국의 정치 경제 교육을 위해 기도하는 태도는 멋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챤으로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미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자세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의 영적인 조화를 일구어 내는 일이다. 그리고 지구촌을 중보하는 모임은 전세계에 흩어진 한민족 750만명을 위해 기도하는 일로 '지구촌 한민족 네트워크'을 연대하는데 큰 몫을 한다. 마지막으로 지구환경을 염려하는 기도모임은 지구촌에 엄습하는 각종 오염과 공해 온난화등의 문제들을 놓고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중보기도 하는 것이다. 2010년에는 우리들의 중보기도렌즈가 더 넓어지기를 소원한다. Happy New Year!

2010.01.05. 15:15

[400자 큐티] 우주보다 큰 사람 (1)

빛은 일 초 동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는 속도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그 빛의 속도로 몇 만년 또는 몇 억년을 가야하는 거리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상상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존재하고 있는 우주는 그 이상으로 넓은 그 끝을 측정할 수 없는 그리고 생각과 상상으로도 어떻게 정리가 되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볼 때 한 평생을 살아보아야 백 년 미만이고 또 그 동안에 움직이는 행동반경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 우리 인간이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우주를 인식하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기에 인간이 없이는 그 우주도 그저 '공(空)'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2010.01.05. 15:15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짝사랑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은 짝사랑의 경험이 있다. 나 역시도 결혼하기 오래 전에 한국에 사는 어떤 여학생을 짝사랑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지내면서 좋아하기 시작해 이후 무려 6년 동안이나 얼굴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좋아했고 미국으로 이민 온 후 2년째 되는 해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모습도 가물가물한 사람을 짝사랑하고 기다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안다. 8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전화통화도 해보지 못한 여자를 짝사랑함은 쉬운 일은 아니다. 요즘 와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제대로 대면해보지도 못했고 성경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하나님을 사랑함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분을 사랑한다. 나를 만나주지 않는 것 같은데 그와 대화를 해본 것도 아니고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닌데 그를 사랑한다. 왜 그를 사랑할까. 그냥 좋은 것이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냥 좋은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다 보면 때로는 심장으로 대화할 기회도 있다. 오디오나 비디오로 확인할 수 없지만 가슴에 대고 속삭이시는 그분의 기운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녀의 졸업 사진 한 장으로 그리움을 달랬던 것처럼 그의 발자취가 남겨진 성경 속의 이야기를 통해 그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빨리 보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날을 숨죽이며 기다려야 한다. 그를 만나는 시간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그분은 자신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인간을 대신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게 그분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쉽지 않다. 그리워하는 분 대신에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분이 원하시니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삶에 찌들어 그에 대한 그리움도 식을 때가 있고 그분의 존재마저도 의심할 때가 있다. 과연 나를 정말 기다리는지 정말 계시긴 한지 그에 대한 족적이 믿을만한 것인지 등에 대해 잠시나마 의심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에겐 그를 그리워하는 DNA가 심겨진 것 같다. 어릴 적 짝사랑녀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창조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해지는 것 같다. 8년 동안 기다렸던 그녀를 만난 순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 말을 했더니 아내는 "심장이 터지기 전에 나에게 얻어터지고 싶냐"고 말해 우리는 5분 동안 깔깔대며 웃었다. 우리는 이 말을 나누며 한바탕 천국에서 경험할 폭소로 쏟아지는 엔돌핀에 즐거워했다. 나의 짝사랑은 8년 동안의 기다림이었으니 얼마나 긴 여정이었던가. 이보다 더 긴 기다림 끝에 하늘에서 만날 그분을 보게 될 순간의 느낌은 그것에 100배 1000배 10000배 더 환희에 휩싸일 것이다. 내가 짝사랑했던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내가 하늘에서 만날 그 분은 나보다 앞서 나를 짝사랑했던 분이다. 그리워하며 가까운 또는 먼 미래에 만나게 될 그를 그리며 2010년에는 더욱 그가 주실 일에 매진하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2010.01.05. 15:14

[사목의 향기] 신앙인의 희망

"조국을 떠나면 누구나 다 애국자가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났고 자랐던 한국을 떠나온 우리 자신은 이 곳 미국에 살면서도 많은 부분의 삶이 아직도 한국과의 깊은 관계 관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 정치선거철이나 국제 운동경기 등 한국과 관련된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우리는 간접적이나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직도 우리자신이 한국땅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우리 조국 한국은 우리에게 있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주며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중추 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겠다는 신념으로 시작한 이민 생활은 이민 생활의 어려움과 현실 속에서 때때로 성공과 성취보다는 실패와 좌절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새로운 신념을 갖게 합니다. 신약 성경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예수님의 기적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기적들로써 육체적인 장애뿐만 아니라 삶의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재기할 수 있다는 확신과 새로운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용기와 희망을 가집니다.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과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신앙이 주는 믿음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 가능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단 한번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공동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우리에게 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으며 이 희망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 안에서 현실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경인년 2010년 새해를 시작하며 무수한 희망과 꿈을 갖고 불경기로 어려웠던 2009년을 보내며 새롭게 시작하려는 우리의 마음을 다져봅시다. 항상 있는 일이지만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지난해에 이루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후회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합니다. 하지만 희망에 가득 찬 2010년 다시금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후회보다는 다시 잘하려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 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카 9장 62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보다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밝은 미래를 바라보며 주님을 향한 희망 속에 열심히 후회 없이 사는 경인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맹수 중의 맹수인 호랑이의 용감성을 본받아 우리 자신이 신앙적으로 좀더 성장하는 해가 되고 나 자신 보다는 나의 가족 이웃을 배려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주신 그분의 삶을 지향하며 사는 2010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다 어렵지만 나의 작은 희생을 통해 나 스스로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올 해는 다난다사하고 불경기로 어려웠던 작년보다는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더 나은 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로서 부름을 받은 우리의 본 모습이라 생각합니다. 올 한 해에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가 남을 위한 삶을 살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같이 하시기에 우리가 하려고 하면 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2010.01.05. 15:11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집에 오면 대접 못받아

Q: 밖에서는 능력 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지만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은 저를 비난하기만 합니다. 그러다보니 밖에서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가 살아온 삶의 방법에 대해서도 회의가 생깁니다. A: 바깥에서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적절히 자기 성질을 죽이고 연극을 할 수가 있고 그럼으로써 좋은 평가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화가 나도 웃을 수 있고 없는 돈을 보시할 수도 있고 잘 차려 입고 나가 예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밖의 사람들은 내게 특별한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약간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면 대부분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가족과 함께 사는 일은 화장 지운 맨 얼굴을 보여주는 것과 같고 옷을 벗은 알몸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원래 성격과 습관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더구나 가족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은 밖의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크고 다양합니다. 바라는 것이 많으니 비난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애써 번 돈을 밖의 어떤 사람에게 주었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고맙다고 여러 번 인사를 할 테지만 집의 부인이나 남편에게 주었을 때에는 몇 번 되풀이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100만 원에 고마워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왜 200만 원 주지 않나 생각하고 300만 원 주기를 바라게 됩니다. 늘 부족감을 느낍니다. 가족으로 바라보는 것은 밖에서 남이 보는 시선과는 그 기준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니 해결책은 첫째 그러한 비판을 달게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인간사이고 세상 이치이니 섭섭해 하거나 불만을 갖지 마십시오.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다 주고 아무리 밖에서 성공한 지위에 오르더라도 집에서의 비판은 달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째 이 비판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게 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요구가 무엇인지 헤아려야 합니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대하듯이 집에서도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대한다면 이와 같은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가족의 요구는 바깥사람의 요구와는 다릅니다. 제가 상담했던 한 분은 남편에게 늘 불만이 많아서 헤어지고 싶어했습니다. 돈도 잘 벌고 착한 남편을 두고 왜 그러느냐 천벌 받는다고 친정 식구들까지 한결같이 반대했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마치면 어김없이 바로 집으로 오는 사람이었는데 부인에게는 이것까지도 불만이었습니다. 비오는 날이면 남편과 찻집에 가서 함께 커피 한 잔 마시며 대화하고 싶다는 것이 부인의 바람이었는데 남편은 집에서 마시면 되지 왜 그런 데 가느냐 비까지 오는데 무엇 하러 거기까지 가느냐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부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욕할 수도 있지만 인생이란 각자의 것이 모두 다른 법이고 옆의 사람이 남의 인생의 방식에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만약 질문자가 두 번째 해결책에 동의하지 않고 그런 것까지 신경쓰며 살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한다면 대신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비난을 받을 때 가족의 요구를 살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과 과보를 달게 받겠다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오히려 문제가 없습니다.

2010.01.05. 15:10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나의 소는 지금 어디에 있나

중국의 백장(百丈.720~814)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말로 유명하죠. 하루는 그에게 젊은 스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스님 부처는 어디에 있습니까?"(젊은 스님) "이놈아 너는 소를 타고서 소를 찾고 있느냐."(백장 선사) "만약 소를 찾으면 그 다음에는 어찌할까요?"(젊은 스님) "소를 탔으면 갈 길을 가야지. 왜 머뭇거리느냐."(백장 선사) "그럼 그 소를 어떻게 간직할까요?"(젊은 스님)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라. 그게 목동이 할 일이다."(백장 선사) 이 말을 들은 젊은 스님은 벌떡 일어났죠. 그러더니 백장 선사에게 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 치며 법당을 나갔죠.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 불교에선 '깨달음'이나 '부처'를 '소'에 비유하죠. 사찰 법당의 벽에도 '십우도(十牛圖)'를 그려 놓잖아요. 중국에선 '소' 대신 '말(馬)'이 티벳에선 '코끼리'가 등장하기도 하죠. '십우도(혹은 심우도)'는 보고 또 보고 다시 봐도 참 흥미롭습니다. 젊은 스님이 구하는 답도 '십우도'에 몽땅 담겨 있거든요. 어디 볼까요. '십우도'의 첫 그림 기억나세요? 소는 없고 끊어진 고삐만 손에 든 동자의 모습이죠. 왜 '끊어진 고삐'일까요. 그렇습니다. 본래는 '나의 소'였다는 얘기죠. 결국 부처가 부처를 찾는 격이죠. 그게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란 젊은 스님의 첫 물음에 대한 답이겠죠. 다음 그림을 볼까요. 이리저리 헤매던 동자는 결국 '소'를 발견하죠. 그리고 고삐를 걸어 씨름을 합니다. 끌고 가기가 쉽지 않죠. 왜냐고요? 그 소가 바로 '나'거든요. 세상에 '나'보다 힘겨운 상대가 있을까요. 힘찬 앞발은 '나의 집착'이고 거센 두 뿔은 '나의 욕망'이죠. 씨름을 거듭하던 동자는 결국 고삐를 놓아 버리죠. 그 순간 뒷걸음질만 치던 '소'가 동자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소'를 놓아야 '진짜 소'를 찾겠네요. '나'를 놓아야 '진아(眞我)'를 찾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소'를 찾으면 어찌할까요. 백장 선사는 "갈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게 어떤 길일까요. 바로 '소'가 흐르는 길이겠죠. 그런데 젊은 스님이 또 묻습니다. "그 소(부처)를 어떻게 간직할까요?" 그는 아는 거죠. '소'를 한번 봤다고 '소'를 한번 탔다고 '소의 길=나의 길'이 되는 게 아님을 말이죠.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하는 불교계의 논쟁도 이 연장선 상에 있는 거겠죠. 백장 선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소가 남의 밭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 그럼 '남의 밭'이 어디인가요. 앞집 아저씨 뒷집 아줌마의 밭이 '남의 밭'인가요. 아닙니다. '남의 밭'은 바로 '소'를 찾기 전의 '나의 밭'이죠. 온갖 집착과 욕망을 안고 뛰어다니던 바로 그밭이죠. 그말을 듣고 젊은 스님은 크게 깨칩니다. 그래서 소리치죠.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고 말이죠. 이제 젊은 스님은 명확히 안 거죠. '나 없는 밭'이 '나의 밭'이고 '나 있는 밭'은 '남의 밭'임을 말이죠. 백장 선사의 밭도 '나 없는 밭'이겠죠. 그래서 '나의 밭'이 '백장 밭'이 되고 '백장 밭'이 '나의 밭'이 되는 거죠. 결국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는 말은 "내 소가 내 밭에 들어간다"는 말이겠죠. 그럼 이제 물어야죠. 자신을 향해 던져야죠. '내 소는 지금 어디에 있나.' 그걸 묻고 그걸 찾아야죠.

2010.01.05. 15:07

[400자 큐티] 사람의 눈

불교에서는 사람의 눈을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것은 육안(肉眼) 심안(心眼) 혜안(慧眼) 그리고 법안(法眼)입니다. 육안은 육체의 눈으로서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눈에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누구나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관찰력의 차이는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심안은 자신의 마음이나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의미합니다. 혜안은 지혜의 눈을 의미합니다. 지혜를 가진 자만이 볼 수 있는 차원의 눈입니다. 법안은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깨달은 자만이 볼 수 있는 눈 그것은 부처님의 눈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자의 눈 즉 영안이 열린 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9.12.29. 15:03

[생활 속에서] 냉전시대와 세계화시대

국제 문제 평론가이며 컬럼니스트로서 두 차례나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토머스 L. 프리드만 (Thomas L. Friedman)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라는 책을 쓴 적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냉전 시대'와 현재 '세계화 시대'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사람들이 "당신은 누구 편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화 시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어떻게 네트웍을 할 것인가?"를 묻는다. '냉전 시대'는 서로 편을 가르는 시대였다면 오늘날은 서로 연결하고 협력하는 '네트웍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저 사람은 누구 편인가"를 묻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냉전 시대'의 사고를 갖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드만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쓸 당시에 중동 지역에서는 분쟁이 매우 격렬한 때 였다. 어느 날 그는 '렉서스' 자동차 생산 라인을 방문하면서 단지 66명의 직원이 310대의 로봇과 함께 매일 300대의 '렉서스'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아 묻게 되었다. 적은 인원의 직원이 네트워크 되어 서로 협력하며 일하고 있을 때 "왜 같은 시간에 중동 지역에서는 '올리브나무(영토)'를 놓고 저렇게 서로 싸우고 있을까?" 그는 여기서 서로 편을 가르고 싸우는 패러다임을 '올리브 나무'에 비유하였고 서로 네트웍이 되어 살아가는 패러다임을 '렉서스'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저 사람은 누구편일까?"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한국 신문에서 자주 보는 기사 중의 하나가 "저 사람은 누구의 측근이라"고 말하는 '편 가르기에 관한 기사'이다. '편 가르기'는 이조 500년 동안 유교를 근간으로 한 통치철학이 가져온 부정적인 결과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민족은 사람을 만나면 "내 편인가 네 편인가"를 물으며 망국적인 지역감정 '편 가르기'를 하면서 살고 있다.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더 이상 '올리브'를 놓고 '편 가르기'를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서로 다른 차이점을 인정하며 네트웍 시켜 보다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것을 끌어내려는 시도를 해야 할 때이다. 가끔 LA 한인 사회를 들여다보면 시대는 변하여 전 세계는 글로벌 시대에 들어와 있는데 아직도 '냉전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살 때가 많을 것을 보게 된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 링컨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본 어떤 보좌관이 물었다. "대통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북군 편이 되어달라고 기도하셨습니까?" 링컨은 "아닐세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네!"라고 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편 가르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편이 되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링컨 대통령의 시대 정신이 교민 사회가 하나로 뭉치는 교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09.12.29. 15:03

[이민목회] 새로운 각오

2009년의 마지막 달력이 걸려있다. 2009년 시작에는 달력이 묵직하고 새롭게 보였는데 이제 달수가 차다보니 마치 마지막 잎새인양 달랑거린다.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출발한 2009년이 정말 다하는 모양이다. 이맘 때면 지나간 1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첫 출발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보이고 비전으로 내딛은 푸르런 가슴이 보인다. 확실한 출발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의 각오뒤에 드러난 결실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꼼꼼히 짚어보아야 한다. 인간이 품은 마음의 각오처럼 모든 것이 결실로 나타나면 좋겠지만 열매보다도 오히려 반성과 후회가 많은 것이 약한 인간이라고 인정하기에는 서글픈 감정이 교차한다. 그래도 2010년에는 다시 새로운 각오를 해보자. 먼저 이민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이민자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조국을 떠나 미지의 대륙으로 떠난 삶은 참으로 허전하기도 하다. 큰 각오로 미주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다가오는 현실의 벽앞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진 경우가 많다. 언어적인 부분에서 그렇고 사회환경적인 면에서도 속시원하게 적응하는 경우가 적다. 그래도 자신의 비전과 자녀들의 비전을 품고 사는 삶이 이민자의 삶이다. 그래서 이민자의 삶은 아픔과 비전의 삶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아프다고 하는 것은 미국생활에서 겪는 숱한 힘듬 슬픔 외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비전이라고 하는 의미는 이렇게 아픈 이민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연적 사명을 위해 전력질주한다는 것이다. 2010년에는 이러한 사명과 비전으로 준비되기 바란다. 이민교회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져보자. 지금까지 한인들만 양육했던 교회의 모습이었다면 주위의 소수민족을 품어보자. 그들을 초청하여 공동예배를 드리고 서로의 음식을 나누며 북미주라는 거대한 용광로속에 같은 이민자들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하여 함께 녹일 수 있는 소규모 프로젴을 모색해보자. 언어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때문에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새로운 각오만 있다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2010년에는 이러한 새로운 각오가 필요한 해일 것이다. 새로운 각오. 2010년 우리들의 새로운 각오는 무엇인가?

2009.12.29. 15:02

[사목의 향기] 감사하는 마음속에 한 해를 보내며

한 해를 마감하면서 가슴속에 일어나는 감사의 마음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를 통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이는 교회가 하느님을 찬양하는 가장 중요한 전례입니다. 미사는 성찬례라는 말로써 라틴어로 'Missa' 영어로 '홀리 미사'(Holy Mass)라고 하는데 '보냄 파견'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missa'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원래 Missa라는 단어는 성찬례의 마침 예식에 사제가 "가십시오 나는 그대를 보냅니다." (Ite missa est) 라는 말에서 missa가 미사 전례 자체를 일컫는 말로 변화되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60문항에 교회는 미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찬례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와 창조와 구속과 성화로 이루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로 교회가 그리는 찬미이다. 성찬례는 무엇보다도 '감사'를 의미한다." 어떻게 미사가 '감사'를 의미하는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이유를 더욱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영어로 미사를 Holy Mass라고 하지만 Eucharist라는 말로도 사용합니다. Eucharist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좋은'이라는 eu와 '은총 은혜 총애'라는 charis의 합성어로서 그리스어로 된 신약 성경에서는 '감사하다' (eucharisteo)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무엇이 감사한지는 charis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 호의 친절한 행위 총애 부탁'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charis라는 말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grati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영어로는 grace로 쓰이면서 '우아 세련미 은혜 관용'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또한 우리가 영어로 '감사'라는 말을 쓸 때 'thankfulness'외에 'gratitud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서반어로도 감사라는 말을 'gracias'라는 단어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우리가 받는 호의나 선물에 대하여 감사의 뜻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짜로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상으로 즉 아무런 노동 없이 받는 것에 대하여 모두 좋아하면서 공짜로 받는 것에 대하여 더 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았을 때 준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자녀들에게도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해를 보내며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감정이며 그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바른 인간적인 행위일 것입니다. 우리 말에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면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이 미덕 이전에 인간으로서 보여야 할 당연한 모습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난다사 했던 2009년을 보내며 우리는 누구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고 무엇을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감사할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감사란 우리가 보기에 나쁜 것 원하지 않는 불행 고통 어려움에도 우리가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 때 시작되고 이러한 감사함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신앙적인 감사입니다. 2009년을 보내며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며 감사하는 마음속에 한 해를 보내도록 합시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에페소 5:20)

2009.12.29. 15:01

[지혜의 향기] 길 위의 성자

옛사람들에게 무슨 자가용이 있었겠냐마는 그 가운데서도 부처님은 걷기의 명수였다. 태어나신 것만 해도 그렇다. 마야 부인이 당시 풍속대로 친정에 애 낳으러 길을 가다 낳았으니 바로 룸비니 동산이다. 부처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마 편안한 궁정에서 왕자 대접을 받으며 말도 타고 가마도 탔을 것이다. 하지만 굳은 결심으로 출가를 단행한 이후에는 타고 온 애마도 돌려보내고는 두 발로 걸어 걸어 그 당시의 유명한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마음에 차는 가르침이 더 이상 없음을 알고는 별수 없이 스스로 닦기로 하고 다섯 도반들과 함께 여섯 해 동안 말 할 수 없이 심한 고행을 하였다. 하지만 극심한 고행이 도를 깨치는 바른 길이 아님을 알고는 네란자라 강가로 나가 우유죽을 얻어 드시고 기력을 차리셨다. 이를 보고 실망한 도반들이 떠나 버리자 핍팔라 나무 아래에 홀로 자리를 잡아 생사 결단의 깊은 명상에 드셨다. 이러기를 이레 동쪽 하늘에 샛별이 빛나는 순간 위없는 두루 바른 깨침을 얻고 부처가 되셨다. 부처님은 맨 먼저 떠나간 다섯 도반을 찾아 길을 나섰다. 마침내 사르나트의 사슴 동산에서 이들을 찾아내고는 처음으로 진리를 전하시니 이후 나이 여든이 되실 때까지 마흔다섯 해 동안을 걷고 또 걸으신 중생 교화의 첫걸음이셨다. 그러다 생의 마지막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 위에서 열반에 드시는데 두 그루의 사라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제자들도 그가 깨친 진리를 전하려고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중국에도 닿고 한국에도 이르렀다. 이렇게 부처님은 길 위에서 나서 길을 걸어 진리를 찾아다녔고 진리를 깨치신 후에는 몸소 걸어서 사람들에게 이를 전했으며 마침내 길 위에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길 위에서 전한 그 첫머리 진리가 무엇인가? 그건 당신이 신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진리를 깨친 사람 곧 부처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중생들은 어떤 신이나 신격화 된 존재에 기대지 말고 먼저 부처님이 깨치시고 알려 주신 이 진리를 믿고 의지할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믿고 기대라는 말씀이시다. 곧 법을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 삼는 것이니 이것이 법등명 자등명이다. 만약 부처님이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그 대행자라면 이렇게 고생하며 먼 길을 걸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와라 뚝딱 하고 점보제트기를 만들어 내거나 하다못해 축지법이라도 쓸 수 있어야 마땅하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모든 중생들이 저절로 즉각 도를 깨쳐 부처가 되도록 앉아서 손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 세상에서 괴로움이란 것을 아예 원천적으로 없애 버리면 더 간단하다. 그러면 수행이고 성불이고 필요가 없고 불교라는 것도 처음부터 생겨날 건덕지가 없어진다. 그런 것도 못하면 전지전능하다고 하기가 좀 그렇다. 왜냐면 그 말은 모든 것을 싸그리 알고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고 있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어쩌나. 아무튼 이렇게 길을 걸으며 진리를 전한 신 아닌 성자께서는 온 세상 중생들을 가르치시고 이들을 괴로움에서 건져내시는 크나큰 스승이요 위대한 영웅이 되셨다. 절의 대웅전은 바로 이 큰 영웅 곧 대웅을 모신 집이다. 이제 우리는 그 앞에서 복만 빌 것이 아니라 그 거룩한 가르침을 몸소 나누어 짊어지고 길을 나서서 방방곡곡 널리 나누어 줄 차례다.

2009.12.29. 14:57

[이민목회] 소리없는 사랑

성탄절을 알리는 노래와 소나무에 높이 달려 있는 반짝이는 별이 눈에 들어온다. 예년에 비해 그 웅장함이나 사운드는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는 것은 아마 이번 성탄절과 다가오는 2010년에는 이민자들의 가슴을 울려주는 좋은 소식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라는 크리스마스 기대하는 크리스마스 기쁜 크리스마스의 계절에 가족들이 모여 웃고 놀며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모습이며 힘들고 지치는 이민생활에 새로운 활력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자. 성탄절의 참 의미는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믿는 성도라면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분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에는 약간의 의미있는 행동을 해보자. 사실 우리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면 소외된 이민자들이 제법 있다. 사랑을 기다리고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민교회의 성탄절 프로그램도 이러한 이민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기쁨을 나누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들을 초청하면 교회안에 냄새도 나고 많이 귀찮으며 준비도 많이 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라고 알려주신 그분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일이 믿는 사람들의 양심이 아닐까?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이렇게 비유하였다. 이 사건은 마치 인간이 개미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연약한 인간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대단한 사랑을 받은 것이다. 이민자들이 처음에 미국에 도착하여 적응하는 가운데 주변 이민자들의 도움을 받았을 그때를 기억해보면 얼마나 힘이 되었던가? 그렇다면 주위를 돌아보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이민성도들이 소리없는 사랑을 조금만 실천한다면 이민사회가 더욱 아름다워 질 것이다. 밖은 소리가 시끄럽고 크지만 우리들의 소리없는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2009.12.22. 14:52

[400자 큐티] 더 심각한 가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입니다. 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더욱 많이 소유할지라도 그 사람은 결코 부유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보지않고 오직 더 가져야 할 것들만 보고 그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감사란 있을 수 없고 언제나 탐심만이 그를 지배할 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유한 사람이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정신적 영적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상당한 정신적 영적 수준에 이르러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욱 심각한 가난입니다.

2009.12.22. 14:51

[생활 속에서] 싸움은 왜 벌어질까?

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일까? 왜 다툼이 시작하는가? 왜 전쟁이 일고 있는가? 저는 이러한 내용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내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오만에서 싸움이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진리를 소유한다는 것은 내가 어른임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의 사고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종교 전쟁은 여러 상황과 이유가 있지만 결국 '진리 전쟁'입니다. '내가 진리를 소유한 자이고 너는 그것을 무너뜨리는 자이다'라는 사고가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이념 전쟁은 왜 발생했습니까. 내가 갖고 있는 이념이 진리이거나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간의 분쟁은 왜 일어납니까. 내가 생각한 내용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참진짜 참기름'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진짜 진리'를 소유한 자는 사실 싸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진리가 그들을 자유케 할 것인데 어떻게 싸움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싸움 중에 있다면 나는 지금 진리에서 멀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다양한 모습이 존재하고 각종 교단이 있고 여러 교리가 있습니다. 모두 자신들이 진리에 가깝다고 믿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고 자유주의 신앙의 소유자가 있습니다. 요즘 뜨는 복음주의 신앙인도 있습니다. 어떤 모양이고 어떤 위치에 있든 진리를 향해 가는 구도자들입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예수를 믿음으로써 진리를 향해 달음질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진리를 붙잡은 자들은 아닙니다. 그 길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내의 상황을 깊이 접하면 접할수록 자신이 진리를 '이미' 소유했다고 착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그 생각이 자리하기 시작하면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어린아이와 같은 일입니까. 자신이 영적인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어린아이를 품어야 하는데 그 아이를 무시합니다. '무늬만 어른'은 어린아이를 판단하고 '그 사람은 이렇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이 진리를 이미 붙잡은 사람이라고 착각을 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는 자이고 예수를 믿고 진리를 향해 걸어가는 자여야 하는데 마치 본인이 예수가 된 양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 역사 속의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테러리스트들인 이슬람의 강경파들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고 사람들의 신심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배를 채우는 이단들은 비난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보통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게 어른이 하는 일입니다. 현대 신학의 거장인 판넨베르크는 '오직 죽는 그 순간에 진리가 완성된다'고 했는데 이는 죽는 순간에 모든 것이 증명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전까지 우리는 모두 구도자입니다. 저는 예수에 의지하는 구도자입니다.

2009.12.22. 14:50

[사목의 향기] 성탄의 추억

아주 어릴 적 성탄절 전날 밤에 부모님을 따라서 자정미사에 간 기억이 난다. 성탄예식은 보통 주일미사보다도 길었던 것 같았고 성당 안에 있는 모든 전등이 꺼지고 각자가 가지고 온 촛불에 불을 켜서 성당 안이 은은한 분위기로 시작이 되었던가? 꽤나 길었던 미사가 끝나고 추운 겨울날 찬바람이 불어오던 어둔 새벽 거리를 부모님과 함께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좀 더 자라서는 성탄이 되기 전에 같은 학년의 친구들끼리 '마니또(manito)'라는 것을 했다. 마니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니또는 어느 날 어린 소녀와 눈먼 노인이 마차 앞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시간을 멈추어버렸다고 한다. 어린 소녀와 눈먼 노인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마니또는 그러한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마니또는 인간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시간을 멈추어서 구해주었지만 인간세상에서는 많은 혼란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제우스는 마니또에게 시간을 관장하는 일을 빼앗아 버리고 대신 인간들을 도와주는 수호천사의 일을 맡겼다고 한다. 후에 이탈리아에서 마니또라는 말은 주변에 있는 어려운 친구들을 모르게 도와주는 수호천사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탄절 한 달 전에 같은 반 친구들이 모여서 서로의 마니또를 뽑는다. 자신의 이름을 적은 쪽지를 내고 서로가 다른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뽑는다. 물론 자신만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자신이 뽑은 친구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성탄 날 아침에 모여서 자신이 뽑은 친구들의 이름을 말하고 그동안 어떤 기도를 했는지 말하면서 그 친구를 위해서 준비한 선물을 건네주는 것이다. 대림시기 동안 나의 수호천사인 마니또는 누구인지 궁금해 하면서 또 자신이 수호천사가 되어서 기도해야 하는 친구를 보면서 흐뭇해 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해마다 성탄이 되면 떠오른다. 신부가 된 지금은 어린 시절의 마음이 설레던 성탄의 느낌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해마다 다가오는 성탄이 치러야 하는 행사로 생각하는 탓일 것이다. 미국의 성탄은 한국의 성탄 보다 더 빨리 시작이 되는 것 같다. 한국도 성탄이 되기 한 달 전부터 거리에서는 성탄 캐럴이 울려퍼지면서 성탄과 연말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이 바로 집집마다 정원에 성탄장식을 하는 것이다. 교회나 성당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화려하게 성탄 장식을 꾸미면서 성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탄을 기다린다는 기다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성탄은 한 달 전부터 온 것이다. 이미 와 있는 성탄에는 기다림이 없다. 그리고 성탄의 의미도 상실한 지 오래다. 성탄의 의미와 성탄의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성탄은 연말을 알리는 하나의 축제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없는 성탄 비어있는 구유 구세주가 없는 성탄을 지내는 것이다. 마니또를 뽑아서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탄의 설렘이 사라져가고 있다. 성탄은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아기의 모습으로 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에게 오셨지만 그 옛날 2천 년 전에 오셨을 때와 같이 누워계실 자리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면서 우리 각자가 아기 예수님을 모실 구유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회개의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셔야 하는 것이다. 회개의 삶이 우리가 준비해야하는 구유이다. 우리 안에 각자가 준비한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진정한 성탄의 기쁨일 것이다.

2009.12.22. 14:50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

Q: 두려움이 너무 많고 눈치를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싫은 소리도 소화해 내지 못합니다. 남편에게 먼저 싫은 소리를 해 보았는데 '이기적인 사람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A: 질문하신 분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꾸로 자기는 남을 배려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언제나 손해 보는 인간이라고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해결책이 안 나는 겁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은 본인이 상대를 배려해서 그런 게 아니고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상대에게 어떤 얘기를 하면 상대가 내 말을 꼭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한 거예요. 그래서 눈치를 보면서 안 들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말을 안 하는 거예요. 이건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는 거예요. 그런데 원하는 대로 안 되면 입을 딱 다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이 적고 굉장히 착해 보이지요. '착한 여자 무섭다'라는 말이 있어요. 착한 여자는 황소고집인데 그 이유는 자기가 고집이 센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찬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해요. 착한 여자는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따리 싸서 나간다든지 하는 일을 저지릅니다. 착한 여자가 진짜 착한 게 아니에요. 자아가 엄청나게 강하기 때문에 그래요. 남편한테 대들고 싸움을 못 하는 이유가 '너 같은 인간 하고 싸우는 내 자신'이 용납이 안 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겉으로는 그냥 입 다물고 있지만 속으로는 '너는 인간도 아니다'라며 멸시하고 있지요. 내가 어떤 얘기를 할 때 상대가 동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금부터 버리세요. 내가 상대에게 어떻게 해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요구입니다. 그걸 상대가 들어줘야 할 어떤 이유도 없어요.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내 요구에 대한 결벽성과 완벽성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남편이 뭐라고 하든 하고 싶은 말을 그냥 해버리세요. 그러면 상대방이 싫다고 할 거예요. 그때 상대가 싫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편이 "너는 너밖에 몰라"하면 "그래 당신 말이 맞네 듣고 보니 나는 나밖에 모르네"하고 받아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내일 또 얘기해 버려요. 그러면 "넌 너밖에 모른다고 내가 얘기해줬는데도 계속 그렇게 할래?" 하면 "그래 맞아 그렇네"하며 받아들여요. 이렇게 상대를 통해서 내 모습을 찾아가야 해요. 이런 지적을 계속 받으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연습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계속 내뱉으면 상대로부터 비판이 들어오겠죠? 그것을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게 교감을 해나가면 상대와 진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본인도 자기 말을 마음껏 할 수 있고 상대의 의견도 다 들어줄 수가 있는 열린 자세가 되는 거예요. 지금 마음이 꽉 닫혀 있어서 자꾸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게 진실이에요. '나는 남을 위하는 사람이다.' 이건 거짓이에요.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임을 인정할 때 상대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그를 이해하게 되지요. 이렇게 진실을 알아가는 거예요.

2009.12.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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