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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자 큐티] 감사의 사람, 성숙의 사람 (3)

어른이 되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유아기적인 사람입니다. 베풀 마음보다는 받을 마음만 가지고 있는 정신적 미숙아인 것입니다. 미국의 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정든 땅을 버리고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청교도들이 갖은 고생 끝에 얻은 첫 추수의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유래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숙한 사람들이었기에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고 포용력있게 더불어 감사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국은 그 때의 성숙함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잃고 그 불만의 화살을 소수민족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많은 축복의 조건들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감사의 마음을 잃을 때에 주어진 축복마저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2010.03.16. 16:02

[변화] '가이젠'과 '가라'

한국의 신한은행이 지난 9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열자 일본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60대가 장롱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뭉칫돈을 들고 매일 50~60명씩 몰려들고 있다한다. 일본 경제가 점점 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증거다.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일본이 침몰한다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리면서 '가이젠'이라는 말이 주목을 받고있다. '가이젠'은 생활의 모든 면을 계속 고쳐나간다는 일본인의 생활철학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경제 부흥을 상징했던 '가이젠'이 도요다 사태로 인해 요즘의 일본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가라'(원뜻:비었다) 일본임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성실과 근면으로만 살았던 일본은 참으로 교만했다. 1980년대 일본이 가장 잘 나갈 때 모든 나라들이 일본에 물건 팔기 힘들다고 아우성이었다. 미국이 '슈퍼 301조'라는 무역법으로 일본을 불공정 무역국가로 지정하고 강제로 시장의 문을 열려고 시도했을 정도다. 그동안 일본의 학자들은 외국 학위를 우습게 여기고 인정하지 않았다. 요즈음 일본 학회에는 외국 박사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한다. 요즘 하버드대의 일본 유학생은 10년 전에 151명이었지만 2009~2010년도에는 101명으로 감소했다. 하나님 없는 일본은 '가이젠'은 점점 없어지고 '가라'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엊그제 오스카상을 거머쥔 'The Cove'(슬픈 돌고래의 진실)는 매년 23000여마리의 돌고래를 몰래 죽여 팔고 있는 일본 정부의 '가라 진실'을 고발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임산부에게 치명적일 만큼의 '수은'을 내포하고 있는 돌고래를 몰래 팔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이 섬기는(?) '한류 4대 천황'은 '송승헌 원빈 이병헌 장동건'이라 한다. 한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시아에 복음의 문을 활짝 열고 계신다. 특히 일본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 한국의 온누리 교회가 개최한 '러브소나타'라는 전도집회가 일본인 2만5천명을 모으는 기적을 만들었다고 한다. CGN TV(Ch18.4)를 통해 일본인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이 전해지고 있다. 돈 때문에 마음마저 가난해진 일본인들에게 복음을 소개할 적기가 바로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2010.03.16. 16:01

[생활 속에서] 가난한 시대에 내리는 단비

LA 모 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여러분 은혜 받았다고 신학교 가지 마십시오. 요즘 이 업계(?)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국 경제가 워낙 좋지 않다보니 교회나 종교계도 그 영향을 심하게 받고 있음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소개하는 내용이다. 최근 미 육군 군목이 된 C목사님과 대화를 나눈 바 있다. C목사님은 "전에는 육군 현역 군목(Active Duty Chaplain)이 되는 게 자격조건(학력 경력 인터뷰 및 배경조사 결과)만 갖추면 비교적 쉬웠는데 요즘은 지원자가 많아 현역으로 선발되는 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예비역(Reserve) 군목을 거쳐야 현역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C목사님의 말이었다. 실제 C목사님도 예비역 군목으로서 1년 동안 사역한 후 현역 군목이 됐다. 간접적으로 알게 된 백인 목사님도 미국 주방위군 군목으로 3-4년 근무하다가 최근 현역 군목 지원을 했는데 탈락했다고 한다. 미 군목 지원자가 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많다는 소식이다. 유명한 교단의 어떤 백인 목사님은 수십 년 동안 목회만 했는데 최근 교단의 지원이 뚝 끊어지면서 일반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신학교에서 동급생이었던 R은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역할 곳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선교지로 나가고 싶은데 지원해주는 선교단체나 교단이 재정적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어 선교사로 선발되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주류 사회 교회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얼마 전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교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교회 재정 적자 상태를 호소한 바 있다.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대대적으로 돕고 있는 새들백 교회가 재정적으로 힘들다면 다른 교회는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신학교들도 재정문제를 해결하고자 학비를 매년 올리고 있고 장학금은 그만큼 많이 줄어들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한 과목을 듣는데 1200달러 이상을 내야 하는 상황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다. 모아둔 재산이 많지 않거나 음으로 양으로 학비 지원을 받지 않는 학생은 수만 달러의 빚을 지고 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졸업하고 나면 받아주는 곳이 없으니 황당할 노릇이다.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이 업계(?)에서 주목을 받는 목사님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은혜 받았다고 신학교 가지 말라"고 했던 말이 헛되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도 어렵고 교회도 어렵고 가정도 어렵다. 그런데도 다들 먹고 살 수 있고 보금자리가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얼마 전 '단비'라는 MBC-TV 프로그램을 보니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에는 수돗물과 우물물이 없어 구정물을 마시고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다.한국인의 도움으로 우물물을 마실 수 있게 된 현지인들은 기뻐하며 어찌할 줄 몰라했다. 마치 단비가 내릴 때처럼. 로널드 사이더의 표현처럼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자 그리스도인'에게 단비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단비를 오늘도 기다리고 있다.

2010.03.16. 16:00

[사목의 향기]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 시대'

세로토닌은 신경전달물질 중 하나. 우리 머릿속에는 50종류의 신경전달물질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세로토닌. "21세기는 세로토닌의 시대이다." 20세기는 산업사회 고급기술 하이테크놀로지 중심. 지성과 이성이 강조되고 많은 물건을 빨리 만들어서 싸게 파는 경쟁의 세기였다. 그러나 21세기는 다르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서 지성보다는 감성이 중시되는 때이다. 20세기가 경쟁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평화공존의 세기이다. 윈윈의 시대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그런 세대이다. 20세기는 격정의 세기라면 21세기는 참으로 편안한 쾌적한 시대이다. 20세기는 엔돌핀이 강조되고 놀아드레나린이라는 교감신경흥분물질 중심의 시대라면 21세기는 평화를 가져오는 세로토닌의 시대이다. 20세기가 경쟁과 스포츠의 시대라면 21세기는 빠름에서 느림으로 동에서 정으로 가는 시대이다. 패스트푸드가 사라지고 스로우푸드를 선호하는 시대이다. 세로토닌은 조절 호르몬이다. 엔돌핀도 너무 좋아하면 중독에 걸리는 호르몬이지만 세로토닌은 조절하는 호르몬이다. 두 번째로 세로토닌은 의욕과 활력을 주는 물질로서 부족하면 우울증에 걸린다. 우울증만 아니라 강박증 공황증 섭식장애 폭력성을 가져온다. 세로토닌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첫째로 씹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밀크 요구르트 약 등에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 씹지 않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지 않는다. 둘째는 걷고 달려야 한다. 셋째는 심호흡이다. 네 번째가 사랑이다. 서로 친교를 나누고 사랑을 나눌 때 세로토닌이 생성된다. 끝으로 군집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적 존재이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관계 안에서 세로토닌은 생성되며 건강한 삶이 된다.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될 때 기억력이 좋아지고 집중력이 향상되며 학업능력도 올라간다. 세로토닌을 강화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말은 어느 정신의학자의 말이었다. 한 마디로 세로토닌은 육체적 원인(음식 씹는 행위 걷는 행위 심호흡 등등)과 심리적인 원인(친교 사랑 소속감 군집욕구 등)과 직결된다는 말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의 영적 차원과 연결 지어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이 육체와 마음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차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세로토닌의 영적인 원인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기쁘고 행복하다면 분명 세로토닌이 많이 생성되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육체의 병의 70~80%가 마음의 병에서 온다는 통계가 있다.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육체도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한 단계 위로 유추하면 마음의 병의 70~80%가 영혼의 병에서 온다고 유추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마음이 건강하고 행복하다는 말이다. 영혼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마음이 운동과 양식을 필요로 하듯이 영혼도 영적운동과 영적양식이 필요하다. 영혼의 양식은 무엇일까? 바로 우주의 창조주에서 오는 초월적 기쁨이다. 영혼의 운동은 무엇일까? 창조주와의 합일에서 오는 초월적 기쁨을 얻게 해주는 신앙행위들이다.

2010.03.16. 15:58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어머니와 거리를 두어도 괜찮은지

Q: 저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둘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키우느라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드셨고 저는 참 많이 별나고 공부도 안 하는 아이였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많이 사랑하셨지만 그만큼 저에게 욕하고 매질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제가 당신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식이라며 아주 못마땅해하며 욕까지 하십니다. 이제 저는 어머니와 조금 거리를 두고 싶은데 어머니는 제게 배신이라고 화를 내십니다. 제가 어머니와 거리를 두어도 괜찮은지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저는 늘 외롭고 허한 마음이 많아서 힘들고 그 마음이 사람들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져서 자주 상처로 남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 자신을 잘 다스리고 편안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요? A: 어머니가 나를 두들겨 패서 키웠든 욕을 하면서 키웠든 아무튼 나를 키웠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부모의 은혜를 입고 컸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만 갖는 게 제일 좋습니다. 키우는 과정에서 옷을 덜 사줬다든지 학교를 덜 보내줬다든지 말 안 듣는다고 매를 때렸다든지 하는 건 부차적인 것입니다. 만일 길 가는 사람한테 나 좀 두드려 패도 좋으니 키워달라고 하면 키워줄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게 필요합니다. 자기가 어려서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안 했다고 하는데 만약에 엄마 아닌 딴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딴 사람이 누가 아이를 데려다가 뒷바라지하는데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어떻게 할까요? 당장 쫓아내 버리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머니는 둘도 없는 은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서는 따지면 안 됩니다. 어릴 때 사랑 안 해줬다 매질했다 뭐했다 이렇게 따지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가까이 사니까 감사가 잘 안 된다면 떨어져 사는 게 좋고 떨어져 사니까 감사가 잘 안 되면 가까이 사는 게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이 사느냐 떨어져 사느냐가 아니라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모를수록 내가 괴로워지고 부모를 미워할수록 내가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나에게 자긍심이 생깁니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혼자서 나를 키웠다. 그 힘든 과정 속에서 나를 키웠다' 하고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해야 자랑스러운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내 자신도 자랑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니까 자기가 외로운 거예요.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까지 미우니 내가 갈 데가 없어 마음이 늘 허전한 거예요. 그런 허전함을 채우려고 남자를 사귀거나 결혼을 해도 그 사람 또한 내 허전함을 채워줄 수가 없습니다. 결혼을 해도 생활이 재미가 없게 됩니다. 그런 재미없는 부부 사이에서 애들이 태어나면 애들도 또 가정이 재미가 없고 집안에 따뜻한 온기가 없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먹고 살아가고 사랑이 따뜻한 온기가 돼서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이 어릴 때 그런 따뜻한 온기를 모르고 컸으니 나는 가정을 이루면 아이들에게 온기를 느끼도록 해줘야겠다고 생각을 하지만 나 또한 따뜻한 가정을 못 만들고 맙니다. 이제부터라도 따뜻한 온기가 있는 가정을 만들고 싶다면 첫째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자긍심이 생기면 허전함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허전함을 채우려고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자긍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남편을 이해하고 감싸 안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가정에 온기가 생기고 아이들이 따뜻함 속에서 안정적으로 잘 자랄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나는 아무런 흠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고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기에게 자꾸 암시를 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에 남편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과제로 삼고 생활해 나가면 좋아질 수 있습니다.

2010.03.16. 15:56

[변화] 1달란트와 돈키호테

이번 동계올림픽은 특별히 눈물 많았던 올림픽으로 기억된다. 한눈팔지 않고 평생을 한 목표로 달려온 젊은 인생들의 애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의 눈물 '피겨 여제'로 등극한 김연아의 눈물과 '안되는 것에 도전하는게 너무 슬펐다'는 이규혁의 눈물이었다. 성공과 실패라는 두 상극의 단어를 연상케 하는 두 사람의 눈물이었다. 요즘 유행어처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올림픽이 끝나자 이규혁의 존재를 이미 잊은 듯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김연아에 맞추고 있다. 이미 한국 CF계는 김연아가 있는 CF와 김연아가 없는 CF로 반분되다 시피했다. 미완성의 트리플 엑셀을 완성시켜 4년뒤에 다시한번 올림픽에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 인기를 등에 업고 연예인이 될 것인가? 지난 1990년대 세계 탁구계를 주름잡았던 중국의 '덩야핑'이 유망한 정치인이된 것 처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인가로 연일 김연아의 이야기를 쏟아놓고 있다. 사람이 인정하는 실패와 성공의 기준은 메달의 색깔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는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열심히 일해 곱절을 남긴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과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의 성공의 기준은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과는 달리 절대적 기준이 아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만 남기면 성공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그 집안에 태어나거나 부모역시 자식을 선택해서 자식을 얻지 않았다.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 가운데 부모의 DNA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출발부터 하나님이 정해주신 한계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인간의 노력이 과연 얼마나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 크고 더 넓고 더 위대하게"라는 메시지는 21세기의 물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캐치 프레이즈이다. 받은 달란트를 무시하고 꿈과 비전을 찾아 몽환에 젖어 살아가는 '돈키호테'가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는다. 밟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단단히 딛고 인생의 '하프타임'에 대한 작전을 새롭게 세워가야 한다.

2010.03.09. 16:12

[생활 속에서] "희생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예수를 확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결정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물론 전에는 "결정하지 않고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의지의 영역이 새로워져 결정하는 내용과 대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약한 사람을 돕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약자를 보면 즐거운 마음으로 돕기로 결정하고 기쁨으로 실천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는 자신과 직접 관계된 사람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들이 어려울 때 그들을 돕고 수고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상대가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그가 약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누군가 신체적 사회적 영적인 약자를 사랑으로 도와주고 섬기는 일이 바로 선교 사역이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중요한 교훈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나누며 섬기는 것이 오히려 뭔가 중요한 것을 얻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뭔가 나누어주려고 선교지를 찾아갈 때 그들이 늘 경험하는 것은 거기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게 된다는 점이다. 하바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헨리 나우웬이라는 사람이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정신 지체 공동체로 들어갔을 때 그는 "이제 약자에게 뭔가 나누어 주고 잘 도울 수 있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가 발견했던 것은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은 별로 없었고 오히려 그들에게 배울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진실하게 나누는 일을 실천하면 오히려 많은 것들을 돌려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 백 억대 부자이지만 한 푼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부자가 있다. 사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적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선교는 풍족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나누는 사역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선교는 희생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정적인 실수이다. "기쁨을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도 늘 아쉬움과 모자람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것을 나누기 시작하라. 나에게 나눌 것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를 알게 된다. 또한 진정한 만족과 풍요를 체험하는 축복의 길로 나가게 된다. 리빙스톤이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일시 귀국했을 때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하며 "선교하는 일에 얼마나 수고와 희생이 많았느냐"고 물었다. 그 때 리빙스톤은 "수고라뇨 희생이라뇨 그것은 내게는 특권이었습니다. 희생은 오직 나의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교사역에 참여하면서 "나는 지금 뭔가를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철수하라. 선교는 희생하는 사역이 아니고 아름답고 풍성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2010.03.09. 16:12

[400자 큐티] 감사의 사람, 성숙의 사람 (2)

어린아이일수록 부모들의 섬세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어린아이는 부모로부터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습니다. 그만큼 감사할 조건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는 감사를 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과잉보호를 받은 아이일수록 더욱 버릇이 나빠집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미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미숙하던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성숙하게 되면 어버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성장한 뒤에는 오히려 어릴 때보다 부모의 배려나 보살핌이 적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부모가 늙고 병들어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베풀지 못하고 오히려 짐스러운 존재가 되고 난 뒤에도 마다하지 않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 부모를 섬기며 보살핍니다. 성숙하였기 때문입니다.

2010.03.09. 16:11

[사목의 향기] 마음의 미생물

인간은 미생물 덕분에 살고 있다. 안 보이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 수많은 미생물 특히 좋은 미생물(EM: Effective Microorganism)들 덕분에 인체가 유지되고 자연이 유지된다. 우리 몸 안에는 100조개의 미생물이 음식물을 발효시켜 영양분으로 흡수할 수 있도록 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해와 공기와 함께 좋은 미생물에 감사해야 한다. 자연이 오염되면서 좋은 미생물들이 감소하고 나쁜 미생물들이 많아지고 있다. 매년 새로운 나쁜 미생물들이 인간을 공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좋은 미생물이 감소하면서 나쁜 미생물이 반사적으로 더욱 많아진다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악성 미생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 인간의 악업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좋은 미생물을 퍼트려야 한다. 좋은 미생물은 나쁜 미생물을 퇴치시켜 준다. 그런데 더욱 강력한 항생제 소독제로 이로운 해로운 미생물을 모두 없애는 방식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좋은 미생물은 점점 없어지고 내성을 키운 나쁜 미생물이 더욱 확산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악순환이라 한다. 나쁜 미생물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고 나쁜 미생물을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좋은 미생물을 많이 퍼트리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미생물이 나쁜 미생물을 없애며 좋은 미생물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선순환이라고 말한다. 미생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 이로운 미생물 10%와 해로운 미생물 10% 그리고 이롭지도 않고 해롭지도 않은 중간 미생물 80%이다. 이것을 기회성미생물이라고 한다. 기회성미생물은 이로운 미생물이 득세하면 다 같이 이로운 작용을 하지만 해로운 미생물이 득세하면 다같이 해로운 미생물로 변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각자의 마음에서도 일어나며 인간들의 공동체 안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어떤 조직이나 대중집회나 신앙공동체 안에서 소수가 강하게 작용하면 대중은 그쪽으로 영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소수가 선하면 다행이지만 악할 때는 나머지 사람들은 다같이 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운 미생물과 해로운 미생물을 알아보는 방법은 새콤달콤한 냄새가 나면 이로운 것이며 썩은 냄새 악취가 나면 그것은 해로운 미생물이 범람한 것이다. 이로운 미생물이 많아진 것을 발효라고 부르며 해로운 미생물이 많아진 것을 부패라고 말한다. 우리 마음도 발효하기도 하고 부패하기도 한다. 마음이 향긋한 냄새가 날 때도 있고 썩은 냄새가 날 때도 있다. 마음의 좋은 미생물은 무엇이며 마음에 나쁜 미생물은 무엇일까? 좋은 미생물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이웃을 도우려는 마음이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려는 착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 마음에서는 좋은 향기가 나게 된다. 발효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남을 무시하고 이기심과 교만 사기 미움 등으로 가득하면 우리의 마음에서는 악취가 나게 된다. 부패가 일어난 것이다. 나쁜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마음이 많아지도록 협조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2010.03.09. 16:11

[지혜의 향기] 불교의 세가지 보물

안 그래도 돈에 눈 먼 도굴꾼들이 몰래 밤중에 연장을 써서 오래 된 탑을 마구 헤집거나 면도날로 절의 탱화를 감쪽같이 도려 가곤 하는 세상인데 불교에 세 가지 보물이 있다고 이리 함부로 내뱉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너무 거창한 보물이라서 훔쳐 가기도 쉽지 않고 설사 훔쳤더라도 장물로 잡아 주는 곳도 돈으로 바꿔 주는 곳도 없으니 다행이다. 도대체 무슨 보밴고 하니 부처님과 부처님이 밝히신 진리 그리고 부처님을 따르는 무리다. 세상에 아무리 큰 도적이 있더라도 이 셋 가운데 어느 하나를 감당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흔히들 불 법 승 삼보라고 하는데 붓다 다르마 상가라고도 한다. 불자란 이 삼보를 받들어 따르고 기리며 힘모아 이를 지켜 내는 이들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이 삼보를 빼면 남는 것이 없다. 사찰도 마찬가지다. 혹시 이 세 가지 보물 외의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면 다 군더더기요 일시적인 방편들이며 차마 내치지 못해 맞아들인 손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불이란 부처님인데 역사적 인물인 싯다르타 태자가 오랜 수행 끝에 성불하여 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그 후 이 분의 화신으로 중생을 때맞추어 건지기 위한 방편과 역할 분담으로 여러 부처님들이 생겨나 모셔졌다. 이론상으로는 우리 중생 모두가 부처의 씨앗을 품은 잠재적인 부처들이다. 그러니 탱화나 불단에 모셔진 부처님 상이 여기저기 많아 좀 어지럽더라도 위화감만 가지지 말고 연유를 알아보고 이해를 해 가는 것이 좋다. 중생이 많은 만큼 그 중생의 마음이 여러 갈래인 만큼 그 마음을 가라앉히고 달래 줄 부처님의 얼굴이 많을 수도 있지 않겠나. 결국은 한 부처님의 여러 모습일 뿐이며 하나가 여럿이요 여럿이 하나임을 알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불교에서 법이란 검사가 사람 잡아넣기 전에 한 번 씩 짚어 봐야 하는 그런 법조문이 아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의 참 모습과 그 변해 가는 이치로서 밝히신 불교의 핵심 진리를 말한다. 글로 써 놓으면 경전 속에 숨어 있는 다르마요 깊은 수행 끝에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만나면 확철대오 깨달음이다. 하기야 불교의 모든 것이 다 이 법을 깨닫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승인데 본래는 상가라고 하여 부처님을 따르는 남녀 출가 수행자 집단 즉 비구와 비구니들의 공동체를 가리켰다. 그러다 후대에 와서 특히 대승불교가 퍼져나감에 따라 일부에서는 재가 남녀 신도인 우바새 우바이까지를 포함한 사부대중 모두를 상가라고 일컫기도 했다. 어쨌든 이 세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어야 불교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 버렸거나 가짜배기를 갖다 놓고 있다면 문제다. 다행히 한국 불교는 오랜 핍박과 모멸 속에서 끊어질듯 지워질듯 숱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온갖 방편으로 이 보물들을 지켜 왔고 그 인적 물적 중심 되는 보금자리가 산중 유명 사찰들이다. 양산의 통도사는 그 옛날 바다를 건너온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모셔진 불보 사찰이다. 법보도 승보도 다 잘 보존 되었지만 특히 불보에 방점이 쳐진 대가람이다. 마찬가지로 합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모신 법보 사찰이다. 그리고 순천의 송광사는 승보 사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해진 이래 한 번도 끊임없이 승가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 가지 보물이 다 반도의 남쪽에 치우쳐 자리잡았는데 분단의 현실을 볼 때 참 다행이다 싶다.

2010.03.09. 16:09

[변화] 'Soul-머니'

최근 한국을 방문하면서 놀랐던 것은 한국 사회 전체가 '포인트 사회'가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는 모든 물건마다 포인트가 따라 붙었다. 소비자들은 같은 값이면 포인트가 많이 쌓이는 쪽을 택하게 되고 쌓인 '포인트'는 현금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서울시가 재미있는 시도를 시작한다. 이른바 'S(seoul)-머니'라는 것을 만든단다. 자신의 노동과 서비스를 다른 사람에게 무료로 베푼 뒤 받는 일종의 '포인트'다. 서울 시민을 위한 '레츠'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레츠'는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LETS)'의 줄임말이다. 우리 말로는 지역화폐 품앗이 등으로 불린다. '레츠'는 자신의 재화나 노동을 다른 사람의 것과 교환하는 것을 원리로 삼고 있다. '레츠' 운동은 이미 국가 간의 장벽마저 무너뜨린 거대한 세계 경제체제의 영향아래서 인간의 공동체성을 찾아보려는 몸부림에서부터 출발했다. '돈'의 많고 적음으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해버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소박한 저항운동인 것이다. 대부분의 부부 싸움을 비롯해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상당부분 '돈'과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교회싸움 또한 종국에는 '재산분쟁'으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서 '돈'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돈' 자체가 '악'은 아니다. 돈을 잘 사용하면 '약'이 되고 잘 못 사용하면 '악'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또 다른 주인을 돈이라고 말씀한다(눅16:3).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면 세상이 다 내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마치 버림받은 인생인 것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기도와 말씀 없이는 살아도 돈 없으면 하루도 살수 없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자는 부러움의 대상은 되어도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돈'이 '돌'처럼 보일 때 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를 '득도'한 것이다. 이땅의 'Seoul-머니'를 하늘의 'Soul-머니'로 부지런히 환전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디모데전서 6:10)"

2010.03.02. 15:57

[400자 큐티] 감사의 사람, 성숙의 사람 (1)

감사는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입니다. 미숙한 사람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감사의 근거는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타자에 의해서 주어진 삶이기에 그 삶에 대하여 감사하거나 혹은 원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감사를 모릅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그것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칭얼거립니다. 그러나 그 요구가 충족되면 잠시 조용하다가 곧 그 만족감을 망각하고 또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며 보챕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아직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숙한 어른일까요?

2010.03.02. 15:51

[생활 속에서] '영혼의 샤워'를 하자

몇 해 전에 M한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건강이 크게 좋아진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 한방병원에서는 체내의 독소를 빼어내는 한방치료를 했고 한두 달의 치료 끝에 내 몸은 독소가 말끔히 청소되어 건강을 상당 수준 회복했다. 우리의 몸이 아픈 이유는 몸에 독소가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 병원 원장님의 지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내에 독소가 없거나 적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다. 내가 받은 치료는 어떻게 보면 한방적인 긴급 수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우리는 평소에 생활습관이 잘 잡혀 있으면 체내 독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물을 잘 마신다든가 심장에 무리를 주지 않는 꾸준한 유산소 운동 등은 독소 제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복부 마시지를 통해 장운동을 해주면 몸에서 더 많은 양의 독소가 빠져나간다. 숙변은 곧 체내 독소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우리 안에는 영적인 독소도 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상처 분노 울분 미움 두려움 등이 있다. 이러한 영적인 독소는 우리 안에 잠재해 있다가 언젠가 시쳇말로 '빵 터지게' 만든다.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 우울증 성도착증 병적인 비판증 완벽주의 등으로 이어진다. 이런 영적인 독소가 많은 사람은 내가 한방병원에서 특별 독소 제거 치료를 받은 것처럼 특별한 계기를 마련해 깔끔히 청소를 해야 한다. 그것이 특별 기도회일 수 있고 부흥회일 수 있고 특별 집회일 수도 있다. 그 기간에 영적 독소를 제거하는 데 안간힘을 써야 한다. 나는 체내 독소를 제거하기 위해 한의사의 권고에 따라 부분 금식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특별 제조 한약을 먹었다. 영적인 독소도 그러한 작업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의 생활 습관으로도 영적 독소를 제거할 수 있다. 내적치유 전문가인 이건호 박사(풀러신대원 Ph.D.)는 "매주 영적 독소를 제거하는 영적 샤워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세미나에서 말했다. 영적 샤워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각자의 신앙 전통과 개인 경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역시 묵상과 기도가 개인적인 영적 샤워를 위해 쓰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독소가 있다. 이 독소는 누가 제거할 수 있는가. 특별 제거 방법이 있지만 이는 손실이 큰 작업이다. 아픔이 많이 따르는 작업이다. 기독교인이 섬기는 신은 소돔과 고모라의 영적인 독소를 특별 제거 방법으로 없애 버렸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역시 사회의 영적 독소 제거를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하지만 이후 인간 세상의 독소는 더욱 더 강력하게 퍼져나갔다. 독소 제거에 열을 올려야 할 정치 사회 문화 언론 종교의 리더들은 이에 대한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이 너무 심각하게 퍼져 있어 손을 쓰지 못할 지경에 온 것 같기도 하다. 독을 완전히 빼낼 수 없고 그 독으로 고통을 받고 살 것이다. 그러나 해독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독이 스며들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2010.03.02. 15:50

[사목의 향기] 인생의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우리가 자주 들은 내용이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각자의 목표가 있고 또 그 목표에 가는 길이 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이 힘이 들거나 불안할 때 우리는 다른 길에 대해서 동경을 한다. '내가 만약에 그 때 그 길을 갔더라면...' 그런데 사실 이러한 생각은 현재 내가 걸어가는 길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우리는 많은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그 갈림길 앞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한다. 그리고 한 길만을 선택하고 그 길을 걸어간다. 인생은 이렇게 많은 길을 만나게 되고 또 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먼 훗날에 걸어온 길을 보면서 잘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할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이라는 종착점을 뛰어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구원의 길이다. 우리는 이 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함께 걷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 말없는 어린양처럼 걸어가신 길. 외로이 걸으신 그 고통의 길 이젠 그 길을 내가 걸어가리라. 내가 가는 길 십자가의 길 그러나 그 길은 사랑의 길 부르심의 길. 그 은총의 길 당신을 따르는 길 생명으로 가는 길." '그 길'이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이다. 내용이 좋아서 자주 부르곤 하는 노래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은 부귀영화나 출세가 보장된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다. 우리는 바로 그 길을 걷고자 신앙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신앙공동체에 나오는 이들 중에서는 지금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모르는 이들이 많다. '저 사람은 왜 여기에 나오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신앙이 없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교회의 전례력으로 보면 우리는 사순시기를 살고 있다. 이 사순시기를 살면서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나는 예수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2010.03.02. 15:48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인연법' 알려주고 싶은데…

"딸이 지금 임신 6주이고 며느리도 아이를 가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인연법에 의한 것이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은 인연으로 좋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지 알고 싶고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습니다." 설령 자식이라 하더라도 남의 인생에 상관하지 말고 내 인생을 똑바로 살아나가면 됩니다. 자식들이 아이를 어떻게 낳든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것은 그들의 일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어머니의 태도입니다. 인연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딸이나 며느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일입니다. 정말 아이들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다면 처음 시집 왔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남편한테 참회기도를 하세요. "오늘의 내 모습은 내가 지은 인연의 과보라는데 시집와서 사는 동안 당신에게 섭섭한 마음이나 불만이 참 많았습니다. 내가 인연법을 몰라서 이런 나쁜 인연을 많이 지었으니 당신에게 참회합니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진실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면 내 아들과 딸에게 좋은 인연이 맺어집니다. 본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좋은 인연을 맺는 비법만 알아내서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은 어리석고 또다시 화를 자초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기도를 하더라도 자식을 위해 기도해야지 왜 남편에게 해야 하나요? 남편에게는 크게 잘한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별로 잘못한 것도 없고 남편 자신도 특별히 불만은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잘하고 있는 편이어서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제게는 단지 자식들이 좋은 자손을 보았으면 하는 바람만 있습니다." 좋은 자식을 낳는 일은 당사자인 부부들 그러니까 아이의 부모인 질문자의 아들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질문자는 그 일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질문자가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면 질문자의 아들딸이 좋은 자식들을 낳는 데 제3자로서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아들딸에게 어떤 도움의 말을 해 주겠다는 생각 자체가 잔소리가 되어 오히려 나쁜 인연을 짓는 행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라 하더라도 남의 부부 인생에 관여하지 마세요. 자식이 결혼을 했으면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바른 길입니다. 지금은 일생의 길을 바르게 가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손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에게 무슨 특별한 도움의 말을 해 준다고 해서 좋은 인연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인연을 볼 수 있는 진짜 방법은 본인이 처음 신혼부부가 되었을 때의 심정으로 돌아가서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그때 사랑하지 못했다면 새로이 사랑하는 마음을 내고 미워했다면 모든 일을 본인 잘못으로 돌려서 앞으로는 더 상냥하게 대해주세요. 지금 질문자는 남편이 별다른 불만이 없다고 말하지만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다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스스로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귀가 있어도 안 들리고 눈이 있어도 안 보입니다. '우리 아들딸이 좋은 자식을 둘 수 있는 방법을 물었는데 왜 스님은 내 말을 못 알아들을까? 나는 아무 불만이 없는데 왜 갑자기 남편을 문제 삼는 거야?'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좋은 손자를 보고 싶은 그 소원을 성취하려면 직접 내가 낳을 수는 없는 일이니 큰 영향은 없겠지만 간접적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남편에게 참회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부족하고 어리석었다고 참회기도를 하는 것이 좋은 인연의 씨앗을 맺게 해주는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2010.03.0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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